[글로벌 돋보기] 어느 외교관의 ‘사후 뇌기증’ 서약…‘극초단파 공격’ 때문?

입력 2019.05.18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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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이 만 마흔넷의 미국인 마크 렌지(Mark Lenzi). 평생의 꿈이었던 '외교관'으로 한창 활약하던 그는 얼마 전 '사후 뇌기증' 서약을 했다. 대개 장기기증이라고 할 때 뇌기증은 별도의 요청사항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처럼 뇌기증이란 렌지에게도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런 렌지가 '뇌기증'이라는 흔치 않은 결단을 내리게 된 것은 몇 년 전부터 그와 그의 가족들을 괴롭혀온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 때문이다. 렌지는 지난 10일 자신의 뇌를 사후 연구용으로, 보스턴대학 외상성 뇌질환(CTE) 센터에 기증하겠다고 서약했다. 이로써 렌지는 사후에 정상 또는 비정상 뇌를 기증하겠다고 서약한 5,000여 서약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지난 2017년 봄 중국에 있을 때부터 극심한 두통과 기억력 저하 등의 증상에 시달려온 그는 수많은 검사와 치료, 약물 복용 등을 거쳐 현재까지도 매주 다섯 시간에서 열 시간 가까이를 온전히 치료받는 데에 쓰고 있다. 그래도 몇 달 전부터는 다시 미국 국무부에서 파트타임으로나마 일을 시작했다.

소위 '뇌진탕(concussion) 유사 증세'에 시달린 건 그와 그의 아내뿐만 아니었다. 어린 두 아이까지도 당시 두통과 수면장애에 시달렸으며, 갑작스러운 기억력 저하로 인한 건망증이 자주 나타났고 아침에 일어나면 코피를 쏟기 일쑤였다고.

이 모든 일은 렌지가 지난 2016년 중국에 있는 미국 공관으로 발령난 후 비롯되었다. 광저우 주재 미국영사관에서 국무부 소속의 보안 엔지니어(security engineering officer)로 스파이 기술(technical espionage) 방지 업무를 맡고 있던 그에게 발령 이듬해인 2017년 봄부터 간헐적으로 정체불명의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금속 구슬이 유리 위에 떨어져 깔때기를 통해 소용돌이치는 듯한 소리였다"는데, 2017년과 2018년에 걸쳐 여러 차례 자택의 특정 위치-아들이 쓰던 유아용 침대 위-에서 들려왔다.

중국 광저우 캔턴 플레이스의 아파트. 마크 렌지를 비롯한 미국 외교관들이 정체불명의 소음을 들었다는 곳이다.중국 광저우 캔턴 플레이스의 아파트. 마크 렌지를 비롯한 미국 외교관들이 정체불명의 소음을 들었다는 곳이다.

소음이 들린 후에는 두통과 수면장애, 메스꺼움 등의 뇌진탕 유사 증세가 나타났고 렌지는 처음엔 심한 스모그 때문인 줄 알고 아스피린을 복용하며 견뎌봤지만, 급격한 기억력 저하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옆집에 살던 동료도 같은 증세로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한 증세가 앞서 쿠바에서 미국 대사관 직원들이 겪었던 증세와 유사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결국 렌지와 그의 가족들도 함께 일하던 다른 외교관들과 함께 치료를 위해 귀국 결정이 내려졌고, 이들은 쿠바에서 비슷한 피해를 입고 돌아온 외교관들과 함께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뇌손상 치료 센터 등지에서 '외상성 뇌손상(Traumatic Brain Injury·TBI)' 증세로 치료를 받게 되었다. 한 번도 머리를 다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쿠바 수도 아바나의 미국 대사관쿠바 수도 아바나의 미국 대사관

원인불명의 소음으로 인한 미국 외교관들의 뇌손상 문제가 맨 처음 불거진 곳은 중미 쿠바였다. 지난 2016년 말부터 아바나의 미국대사관 직원과 가족 20여 명이 집단으로 구역질과 청력 손실, 두통과 균형 감각 상실, 이명 등의 증세를 호소했고 의료진은 이를 뇌손상과 연관된 것으로 파악했다.

미국 정부는 쿠바 정부를 의심하면서 음파 공격(sonic attack)에 의한 것이라 추정하고 아바나의 미국 대사관 직원을 60%가량 줄이고 쿠바로의 여행주의보를 발령하는 한편 쿠바가 외교관들을 보호해야 하는 제네바협약을 이행하는 데 실패했다며 미국 내 쿠바 외교관들을 추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쿠바 정부는 강하게 부인했고 미국 정부와 협조해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고 있다며 반발해 원인에 대한 조사는 아직까지도 진행 중이다.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쿠바의 국가수반인 디아스카넬 의장은 미국 대사관 직원들에 대한 음파 공격 의혹을 부인했다.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쿠바의 국가수반인 디아스카넬 의장은 미국 대사관 직원들에 대한 음파 공격 의혹을 부인했다.

한편 아바나에 주재하는 캐나다의 외교관과 가족들도 지난해 원인을 알 수 없는 뇌 활동 이상 증세를 보여 귀국 조처됐다. 캐나다 외교부는 현지 조사 결과, 외부의 전파 공격이나 심리적 원인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을 일단 배제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성명에서 이들의 증세는 새로 드러난 뇌 손상 때문으로 추정된다며 '인위적 이유'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쿠바 아바나의 캐나다 대사관. 미국 대사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쿠바 아바나의 캐나다 대사관. 미국 대사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피해자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원인과 공격(?)의 주체, 즉 배후는 알 수 없는 이 상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와 관련해 뉴욕타임스NYT는 괴질환의 이유가 뇌 손상을 일으킬 수 있는 극초단파(microwave) 무기의 공격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쿠바에 있던 외교관들을 조사한 의료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이같이 보도하고 '이전에는 큰 소리가 울리거나 고음으로 벌레가 우는 것 같이 느끼는 증상이 음파 무기의 공격 때문이라는 추정이 있었지만, 전문가들은 이제 극초단파 공격이 대사관 직원들이 호소하는 고통스러운 소리와 트라우마 등의 원인을 더 그럴듯하게 설명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사람의 뇌가 일부 극초단파를 소리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과, 러시아 또는 러시아와 연계된 쿠바인들이 쿠바와 미국의 관계가 좋아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이 같은 공격을 했을 수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탐사매체 프로퍼블리카가 미국 대사관 직원 가족의 말을 인용해 '불편한 소리를 들은 후 집 밖을 봤더니 밴 차량이 급히 떠나는 것을 목격했다'고 보도한 것도 극초단파 빔과 같은 비전통적 무기가 사용됐을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한편 "(고의적) 공격이라기보다는 감청에 따른 증상"이라는 가설도 있다. 또 다른 전문가들은 "초음파 무선통신으로 진행된 도청 과정에서 초음파 발신기가 가끔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신호를 내면서 의도치 않게 외교관들에게 해를 끼쳤다"며 "고의적인 전파 공격이라기보다는 잘못된 설계가 우연치않게 무기의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로서 사후 연구용으로 뇌기증까지 서약한 마크 렌지는 이 중에서 극초단파 공격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측을 탓하지는 않았지만, 외부 주체에 의해 고의적 공격이 가해졌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렌지는 그러면서 미국 정부가 쿠바 사건에 대해서는 '공격'이라고 규정하면서도 중국 사건에 대해서는 아직 규정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는 데 대해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한 정치적 고려"라고 주장했다.

렌지는 "또 다시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고 진실 규명을 촉구하면서 "인지 기능과 기억력이 회복되는 대로 평생의 꿈이었던 외교관으로 다시 일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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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5-18 14:2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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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나이 만 마흔넷의 미국인 마크 렌지(Mark Lenzi). 평생의 꿈이었던 '외교관'으로 한창 활약하던 그는 얼마 전 '사후 뇌기증' 서약을 했다. 대개 장기기증이라고 할 때 뇌기증은 별도의 요청사항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처럼 뇌기증이란 렌지에게도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런 렌지가 '뇌기증'이라는 흔치 않은 결단을 내리게 된 것은 몇 년 전부터 그와 그의 가족들을 괴롭혀온 원인을 알 수 없는 두통 때문이다. 렌지는 지난 10일 자신의 뇌를 사후 연구용으로, 보스턴대학 외상성 뇌질환(CTE) 센터에 기증하겠다고 서약했다. 이로써 렌지는 사후에 정상 또는 비정상 뇌를 기증하겠다고 서약한 5,000여 서약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지난 2017년 봄 중국에 있을 때부터 극심한 두통과 기억력 저하 등의 증상에 시달려온 그는 수많은 검사와 치료, 약물 복용 등을 거쳐 현재까지도 매주 다섯 시간에서 열 시간 가까이를 온전히 치료받는 데에 쓰고 있다. 그래도 몇 달 전부터는 다시 미국 국무부에서 파트타임으로나마 일을 시작했다.

소위 '뇌진탕(concussion) 유사 증세'에 시달린 건 그와 그의 아내뿐만 아니었다. 어린 두 아이까지도 당시 두통과 수면장애에 시달렸으며, 갑작스러운 기억력 저하로 인한 건망증이 자주 나타났고 아침에 일어나면 코피를 쏟기 일쑤였다고.

이 모든 일은 렌지가 지난 2016년 중국에 있는 미국 공관으로 발령난 후 비롯되었다. 광저우 주재 미국영사관에서 국무부 소속의 보안 엔지니어(security engineering officer)로 스파이 기술(technical espionage) 방지 업무를 맡고 있던 그에게 발령 이듬해인 2017년 봄부터 간헐적으로 정체불명의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금속 구슬이 유리 위에 떨어져 깔때기를 통해 소용돌이치는 듯한 소리였다"는데, 2017년과 2018년에 걸쳐 여러 차례 자택의 특정 위치-아들이 쓰던 유아용 침대 위-에서 들려왔다.

중국 광저우 캔턴 플레이스의 아파트. 마크 렌지를 비롯한 미국 외교관들이 정체불명의 소음을 들었다는 곳이다.
소음이 들린 후에는 두통과 수면장애, 메스꺼움 등의 뇌진탕 유사 증세가 나타났고 렌지는 처음엔 심한 스모그 때문인 줄 알고 아스피린을 복용하며 견뎌봤지만, 급격한 기억력 저하는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옆집에 살던 동료도 같은 증세로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한 증세가 앞서 쿠바에서 미국 대사관 직원들이 겪었던 증세와 유사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결국 렌지와 그의 가족들도 함께 일하던 다른 외교관들과 함께 치료를 위해 귀국 결정이 내려졌고, 이들은 쿠바에서 비슷한 피해를 입고 돌아온 외교관들과 함께 펜실베이니아 대학의 뇌손상 치료 센터 등지에서 '외상성 뇌손상(Traumatic Brain Injury·TBI)' 증세로 치료를 받게 되었다. 한 번도 머리를 다친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쿠바 수도 아바나의 미국 대사관
원인불명의 소음으로 인한 미국 외교관들의 뇌손상 문제가 맨 처음 불거진 곳은 중미 쿠바였다. 지난 2016년 말부터 아바나의 미국대사관 직원과 가족 20여 명이 집단으로 구역질과 청력 손실, 두통과 균형 감각 상실, 이명 등의 증세를 호소했고 의료진은 이를 뇌손상과 연관된 것으로 파악했다.

미국 정부는 쿠바 정부를 의심하면서 음파 공격(sonic attack)에 의한 것이라 추정하고 아바나의 미국 대사관 직원을 60%가량 줄이고 쿠바로의 여행주의보를 발령하는 한편 쿠바가 외교관들을 보호해야 하는 제네바협약을 이행하는 데 실패했다며 미국 내 쿠바 외교관들을 추방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쿠바 정부는 강하게 부인했고 미국 정부와 협조해 사건의 원인을 규명하고 있다며 반발해 원인에 대한 조사는 아직까지도 진행 중이다.

미겔 디아스카넬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쿠바의 국가수반인 디아스카넬 의장은 미국 대사관 직원들에 대한 음파 공격 의혹을 부인했다.
한편 아바나에 주재하는 캐나다의 외교관과 가족들도 지난해 원인을 알 수 없는 뇌 활동 이상 증세를 보여 귀국 조처됐다. 캐나다 외교부는 현지 조사 결과, 외부의 전파 공격이나 심리적 원인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을 일단 배제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성명에서 이들의 증세는 새로 드러난 뇌 손상 때문으로 추정된다며 '인위적 이유'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쿠바 아바나의 캐나다 대사관. 미국 대사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피해자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원인과 공격(?)의 주체, 즉 배후는 알 수 없는 이 상황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와 관련해 뉴욕타임스NYT는 괴질환의 이유가 뇌 손상을 일으킬 수 있는 극초단파(microwave) 무기의 공격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보도했다. 뉴욕타임스는 쿠바에 있던 외교관들을 조사한 의료팀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이같이 보도하고 '이전에는 큰 소리가 울리거나 고음으로 벌레가 우는 것 같이 느끼는 증상이 음파 무기의 공격 때문이라는 추정이 있었지만, 전문가들은 이제 극초단파 공격이 대사관 직원들이 호소하는 고통스러운 소리와 트라우마 등의 원인을 더 그럴듯하게 설명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사람의 뇌가 일부 극초단파를 소리로 인식할 수 있다는 것과, 러시아 또는 러시아와 연계된 쿠바인들이 쿠바와 미국의 관계가 좋아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해 이 같은 공격을 했을 수 있다는 점도 지적했다. 탐사매체 프로퍼블리카가 미국 대사관 직원 가족의 말을 인용해 '불편한 소리를 들은 후 집 밖을 봤더니 밴 차량이 급히 떠나는 것을 목격했다'고 보도한 것도 극초단파 빔과 같은 비전통적 무기가 사용됐을 가능성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한편 "(고의적) 공격이라기보다는 감청에 따른 증상"이라는 가설도 있다. 또 다른 전문가들은 "초음파 무선통신으로 진행된 도청 과정에서 초음파 발신기가 가끔 사람이 들을 수 있는 신호를 내면서 의도치 않게 외교관들에게 해를 끼쳤다"며 "고의적인 전파 공격이라기보다는 잘못된 설계가 우연치않게 무기의 역할을 했다"고 분석했다.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로서 사후 연구용으로 뇌기증까지 서약한 마크 렌지는 이 중에서 극초단파 공격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 측을 탓하지는 않았지만, 외부 주체에 의해 고의적 공격이 가해졌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렌지는 그러면서 미국 정부가 쿠바 사건에 대해서는 '공격'이라고 규정하면서도 중국 사건에 대해서는 아직 규정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는 데 대해 "중국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한 정치적 고려"라고 주장했다.

렌지는 "또 다시 자신과 같은 피해자가 나와서는 안 된다"고 진실 규명을 촉구하면서 "인지 기능과 기억력이 회복되는 대로 평생의 꿈이었던 외교관으로 다시 일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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