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로의 시간은 다르게 쌓인다

입력 2019.05.19 (14:45) 수정 2019.05.24 (0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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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서울 최대 제조업 집적지 을지로
유통, 가공, 제조업체가 긴밀하게 협업하는 자생적 산업생태계
세운상가 재생하면서 을지로 재개발하는 세운재정비촉진계획
청계천변 공장, 노포에 쌓인 산업적 가치, 일자리, 서민의 삶 '철거 중'

메이커시티① 도시의 지층

지표를 걷어낸 서울 청계천 관수교 남쪽 지역.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 집자리 흔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근 건물 옥상에서 발굴 현장을 내려다본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은 주춧돌이 있던 기초 잡석들, 반지하 건물의 흔적인 붉은 벽돌, 우물, 지정말목 등을 손으로 가리켰다. 지정말목은 펄층에서 기초공사를 할 때 나무를 넣은 조선 시대 공법이라고 설명했다. 대략 200년 만에 햇빛에 노출된 지층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그 위에 켜켜이 쌓였던 시간은 존재한 적도 없던 것처럼.

"근대 산업 시절의 흔적들은 지금은 못 보죠. 다 걷어내 버렸죠. 사실 그것도 굉장히 중요하게 남겼어야 해요. 근대 산업 사회로 들어가면서 가내공업이지만 여기서 만든 많은 것들이 공업의 밑받침이 됐잖아요." 황 소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서울에는 여러 가지 층위들이 있잖아요. 그러면 그 시대마다 남겨놓은 층위가 뭐가 있나요? 서울이 정말 600년이라는 역사의 이름에 걸맞은, 그 시기에 걸맞은 흔적들과 모습들이 남아있나요?"

올해 초 철거돼 문화재 발굴이 진행 중인 세운 3-1, 4, 5구역.올해 초 철거돼 문화재 발굴이 진행 중인 세운 3-1, 4, 5구역.

600년 역사 도심 서울의 흔적

지금은 보이지 않는 이 도시의 골목은 꽤 소란스러웠다고 한다. 30년간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 작가의 전담 기술자였던 이정성 세운상가 장인회장은 "공교롭게도 굉장히 노련한 사람들이 있던 데가 쫓겨났다"고 안타까워했다. "거기 있던 가공업체들은 슬리퍼 끌고 나가서 대충 스케치만 해줘도 제대로 해주는 사람들이에요. 서로 눈짓만 봐도 알 수 있는 그런 유대 관계를 다 헐어버렸잖아요."

역시 세운상가에서 3D 프린터를 만드는 이동엽 대표는 이 골목에서 8천만 원대 의료용 3D 프린터를 만들었다. 세계 최초로 개인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 미디어 아티스트 송호준 작가는 외국에서 6개월간 찾던 특수 스프링을 이곳에서 10분 만에 만들어 끼웠다. 청계천 일대에서 유일한 여성 장인이 운영하던 칠 공장도 30년간 영업을 재개발로 끝냈다.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화가 시작된 이후 2018년까지 을지로에는 작은 공장들이 밀집해 독특한 도시환경을 형성했다. "이 일대 공장은 5인 이하의 소규모 사업체들이 거의 90% 이상입니다. 그런데 집합적으로는 아주 거대 규모를 이루고 있거든요. 서울의 고유성이라면 그 소규모 제조업체들이 서로 협력망을 가지고 있어서 거대한 공장처럼 무수히 많은 생산품들이 다양하게 나올 수 있다는 거죠." 심한별 서울대 아시아도시사회센터 연구원은 "대규모 제조업이 산업 동맥이라면 소규모 제조업 집단은 모세혈관 같다"고 설명했다.

이 시간을 걷어버린 지층 위에는 최고 27층, 천 세대 규모의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청계천 을지로 일대 밀집한 소규모 공장의 모습. 을지로동은 서울에서 제조업 사업체가 가장 많은 행정동이다.청계천 을지로 일대 밀집한 소규모 공장의 모습. 을지로동은 서울에서 제조업 사업체가 가장 많은 행정동이다.

자생적으로 생긴 '을지로'라는 공장

포크레인이 이 곳에 있던 공장 건물을 허물어뜨릴 때 황민석 사장의 45년도 함께 쓸려갔다. 금속을 가공해 메달, 배지, 상패를 제작하는 업체를 운영하는 그는 올해 초 자신의 공장이 철거되는 모습을 하릴없이 지켜봤다. 이제 그는 포크레인만 지나가도 일단 가슴이 벌렁벌렁거린다. 세운재정비촉진지구 3-1구역. 서울시와 부동산 개발업체는 황 사장의 공장이 있던 입정동을 이렇게 불렀다.

"이렇게 빨리 무너지리라고는 상상도 안 했고. 왜냐하면 (재개발을) 할 수도 없다고 생각을 했었어요."

지난해 4월 건물주는 황 사장에게 '본인들도 땅을 뺏겼으니 일단 이사 갈 준비를 해달라'고 통보했다. 을지로를 포함한 세운상가 일대는 1979년 처음 재개발지구로 지정됐다. 그리고 40년간 계획은 세워지고 보류되기를 거듭했다. 을지로의 소상공인들은 이번에도 재개발은 시행되지 않고 계획에 그칠 거라고 여겼다. "가든파이브가 그랬듯이."

황민석 사장은 을지로 3가에서 입정동으로, 다시 입정동으로 공장을 옮기며 45년간 을지로 일대에서 “먹고 살려고 발버둥을 쳤다”. 누군가의 성취와 추억을 남기는 메달과 배지, 상패 등을 그는 평생 제작했다.황민석 사장은 을지로 3가에서 입정동으로, 다시 입정동으로 공장을 옮기며 45년간 을지로 일대에서 “먹고 살려고 발버둥을 쳤다”. 누군가의 성취와 추억을 남기는 메달과 배지, 상패 등을 그는 평생 제작했다.

황 사장이 옮긴 새 공장은 3-2구역. 3-1구역과 맞닿은 건물이다. 두 구역은 모두 입정동이고, 역시 재개발 예정지다. 그가 이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허락된 시간은 어쩌면 1년 남짓이다. 황 사장은 이곳 1층을 개조해 또다시 세를 들었다. 7톤의 압력으로 철판에 무늬를 찍어내는 프레스기, 일명 후렉숀에 견디도록 땅밑 4m까지 바닥 작업을 하고 각종 장비를 옮기는 데 6개월이 걸렸다. 3-1구역을 나가며 받은 이주비에 자비를 보태 8천만 원이 들었다.

왜 또 을지로인가. 황 사장은 "배지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20군데를 거쳐야지만 나올 수 있다"고 대답했다. "제작 시스템이 여러 업체들이 어울려서 해야 되는데, (을지로) 밖으로 나가가지고는 일을 할 수가 없어요. 다른 곳은 아직 구조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구조를 갖추려면 상당한 시일이 또 걸려요. 그 시스템을 다시 구성해서 무너지느니 여기서 좀 더 하다가 무너지는 게 낫지 않을까…." 아들까지 데려다 놓은 황 사장은 불면증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서민에게 사랑받은 노포, 예정된 폐업

세운재정비촉진지구 3-2구역에 위치한 대표적인 노포인 을지면옥. 재개발에 동의하지 않은 지주다.세운재정비촉진지구 3-2구역에 위치한 대표적인 노포인 을지면옥. 재개발에 동의하지 않은 지주다.

재개발을 일단 멈춰 세운 건 오래된 가게, 이른바 노포 때문이다. 서울시는 지난 1월 연말까지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재개발을 전면 재검토하겠다며 인허가 절차 중단을 발표했다. 그러나 재개발에 반대하는 노포 주인은 "이미 끝났다"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박원순 시장의 인허가 보류 지시에도 부동산 개발업체, 즉 시행사는 재개발 예정지에서 다음 절차를 착착 준비하고 있다. 재개발에 동의하지 않은 지주들에게는 보상에 협의하라는 문서가 거듭 날아든다. 협의라지만 결론과 승자는 정해져 있다.

지주 75%의 동의를 받은 시행사는 재개발에 동의하지 않은 지주의 땅을 강제수용할 수 있다. 지주가 끝내 보상을 거부하면 시행사는 법원에 보상가액을 공탁하고 명도절차를 밟아 철거에 착수한다. 재개발사업은 '공익사업'으로 간주돼 시행사가 행정청의 권한을 갖기 때문이다. 재개발에 동의하지 않은 지주들은 3-1구역에서 이 과정이 진행되는 걸 지켜봤다.

"이건 보상이 아니라 강제수용이에요!"

익명을 요구한 한 노포 지주는 목소리를 높였다. 조합 방식이 아니라 토지 등 소유자 방식으로 진행된 이 지역에서, 개발에 동의하지 않은 지주에게는 분양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개발이 완료된 인근 지역 상가는 가격이 이미 오를 대로 올라 보상금만으로는 이전하기 힘든 데다 매물도 없다고 했다. 서울시의 재검토 결정에 대해 노포 지주는 "길게 잡아 내년 12월까지는 그래도 장사를 할 수 있겠구나 생각할 뿐 이제 폐업"이라고 고개를 떨궜다.

세계유산 종묘(왼쪽 상단)와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종묘에서 170m 거리인 세운4구역은 9년에 걸친 문화재위 심의 끝에 건물 높이가 122m에서 52.6m로 낮아졌다. 그러나 청계천 이남 구역은 2017년부터 문화재위 심의를 거치지 않고 있다.세계유산 종묘(왼쪽 상단)와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종묘에서 170m 거리인 세운4구역은 9년에 걸친 문화재위 심의 끝에 건물 높이가 122m에서 52.6m로 낮아졌다. 그러나 청계천 이남 구역은 2017년부터 문화재위 심의를 거치지 않고 있다.

을지로의 주인은 누구일까

이 땅을 결정하는 건 누구일까. 을지로 일대는 한때 국회의사당, 대규모 아파트 단지 부지로 검토됐다. 이런 대규모 계획이 무산된 건 종묘의 존재감 때문이다. 종묘는 전통적인 제례의식이 유지되고 있는, 살아있는 유교적 왕실 사당이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역사문화경관 보존의 당위성은 당대 한국인의 욕구를 넘어섰다.

종묘의 영향력 아래, 노후한 저층 건물이 밀집한 을지로에서 소상공인들은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맛있는 음식으로 일상의 행복을 누린 서민들, 골목을 드나들며 시제품을 만들던 미래의 창업가, 졸업 작품을 준비하던 공대생, 창의적인 기술기반 예술가들, 수십년 간 거래해 온 연관산업 관계자들의 발길이 씨줄과 날줄처럼 을지로의 풍경을 엮어낸다.

여기에 세련된 옷차림에 핸드폰을 손에 쥔 젊은이들이 골목에 나타났다. 시간의 지층이 어긋난 단면처럼 을지로 골목에는 서로 다른 시공간이 공존하고 젊은이들은 타임머신을 탄 듯 이 골목길을 즐긴다. 다른 곳에선 찾아볼 수 없는 서울 도심만의 독특한 매력이다. 젊은이들은 을지로를 사진에 담고 #뉴트로 #힙지로라는 해시태그를 달아 SNS에 올린다. 을지로의 새로운 이용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을지로의 미래를 결정할 권한이 없다. 종묘도, 장인도, 노포도, 예술가도, 창업가도, 거래처 기업들도, 을지로를 사랑하는 시민들도. 세운재정비촉진구역의 계획 수립은 서울시, 이를 실현에 옮기는 것은 지주와 시행사다. 시장의 임기는 정해져 있고, 지주와 시행사는 시간이 갈수록 금융비용이 늘어난다. 을지로의 지층에 무엇이 남도록 허락할지는 시간에 쫓기는 정치인과 자본이 결정한다.

서울시는 2014년 세운상가군 일대에 대한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을 변경해 수립하면서 을지로 일대의 필지를 분할해 재개발을 촉진하고, 세운상가는 존치구역으로 분류해 재생사업으로 발표했다. 계획의 추진전략으로 도심산업과 역사 도심 관리, 점진적 정비를 통한 공동체 보전을 내세웠다. 하지만 제조업 밀집 지역에 주거비율이 90%까지 상향되고 종묘의 역사 경관에 미칠 영향을 판단해온 문화재위 심의를 벗어나면서 빠른 속도로 주상복합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

서울의 오랜 시간이 쌓인 곳, 을지로. 그리고 도시재생이라면서 도시의 시간을 지우고 있는 아이러니. 도시재생 선도사업인 세운상가를 통해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도시가 무엇인지 묻는다.

KBS 1TV 시사기획 창 <세운상가, 도시재생을 묻다>, 21일 밤 10시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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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을지로의 시간은 다르게 쌓인다
    • 입력 2019-05-19 14:45:58
    • 수정2019-05-24 09:34:12
    취재K
서울 최대 제조업 집적지 을지로 <br />유통, 가공, 제조업체가 긴밀하게 협업하는 자생적 산업생태계 <br />세운상가 재생하면서 을지로 재개발하는 세운재정비촉진계획<br />청계천변 공장, 노포에 쌓인 산업적 가치, 일자리, 서민의 삶 '철거 중'
메이커시티① 도시의 지층

지표를 걷어낸 서울 청계천 관수교 남쪽 지역. 조선 후기와 일제강점기 집자리 흔적이 모습을 드러냈다. 인근 건물 옥상에서 발굴 현장을 내려다본 황평우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소장은 주춧돌이 있던 기초 잡석들, 반지하 건물의 흔적인 붉은 벽돌, 우물, 지정말목 등을 손으로 가리켰다. 지정말목은 펄층에서 기초공사를 할 때 나무를 넣은 조선 시대 공법이라고 설명했다. 대략 200년 만에 햇빛에 노출된 지층은 고요하고 평온했다. 그 위에 켜켜이 쌓였던 시간은 존재한 적도 없던 것처럼.

"근대 산업 시절의 흔적들은 지금은 못 보죠. 다 걷어내 버렸죠. 사실 그것도 굉장히 중요하게 남겼어야 해요. 근대 산업 사회로 들어가면서 가내공업이지만 여기서 만든 많은 것들이 공업의 밑받침이 됐잖아요." 황 소장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서울에는 여러 가지 층위들이 있잖아요. 그러면 그 시대마다 남겨놓은 층위가 뭐가 있나요? 서울이 정말 600년이라는 역사의 이름에 걸맞은, 그 시기에 걸맞은 흔적들과 모습들이 남아있나요?"

올해 초 철거돼 문화재 발굴이 진행 중인 세운 3-1, 4, 5구역.
600년 역사 도심 서울의 흔적

지금은 보이지 않는 이 도시의 골목은 꽤 소란스러웠다고 한다. 30년간 미디어 아티스트 백남준 작가의 전담 기술자였던 이정성 세운상가 장인회장은 "공교롭게도 굉장히 노련한 사람들이 있던 데가 쫓겨났다"고 안타까워했다. "거기 있던 가공업체들은 슬리퍼 끌고 나가서 대충 스케치만 해줘도 제대로 해주는 사람들이에요. 서로 눈짓만 봐도 알 수 있는 그런 유대 관계를 다 헐어버렸잖아요."

역시 세운상가에서 3D 프린터를 만드는 이동엽 대표는 이 골목에서 8천만 원대 의료용 3D 프린터를 만들었다. 세계 최초로 개인 인공위성을 쏘아 올린 미디어 아티스트 송호준 작가는 외국에서 6개월간 찾던 특수 스프링을 이곳에서 10분 만에 만들어 끼웠다. 청계천 일대에서 유일한 여성 장인이 운영하던 칠 공장도 30년간 영업을 재개발로 끝냈다.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화가 시작된 이후 2018년까지 을지로에는 작은 공장들이 밀집해 독특한 도시환경을 형성했다. "이 일대 공장은 5인 이하의 소규모 사업체들이 거의 90% 이상입니다. 그런데 집합적으로는 아주 거대 규모를 이루고 있거든요. 서울의 고유성이라면 그 소규모 제조업체들이 서로 협력망을 가지고 있어서 거대한 공장처럼 무수히 많은 생산품들이 다양하게 나올 수 있다는 거죠." 심한별 서울대 아시아도시사회센터 연구원은 "대규모 제조업이 산업 동맥이라면 소규모 제조업 집단은 모세혈관 같다"고 설명했다.

이 시간을 걷어버린 지층 위에는 최고 27층, 천 세대 규모의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다.

청계천 을지로 일대 밀집한 소규모 공장의 모습. 을지로동은 서울에서 제조업 사업체가 가장 많은 행정동이다.
자생적으로 생긴 '을지로'라는 공장

포크레인이 이 곳에 있던 공장 건물을 허물어뜨릴 때 황민석 사장의 45년도 함께 쓸려갔다. 금속을 가공해 메달, 배지, 상패를 제작하는 업체를 운영하는 그는 올해 초 자신의 공장이 철거되는 모습을 하릴없이 지켜봤다. 이제 그는 포크레인만 지나가도 일단 가슴이 벌렁벌렁거린다. 세운재정비촉진지구 3-1구역. 서울시와 부동산 개발업체는 황 사장의 공장이 있던 입정동을 이렇게 불렀다.

"이렇게 빨리 무너지리라고는 상상도 안 했고. 왜냐하면 (재개발을) 할 수도 없다고 생각을 했었어요."

지난해 4월 건물주는 황 사장에게 '본인들도 땅을 뺏겼으니 일단 이사 갈 준비를 해달라'고 통보했다. 을지로를 포함한 세운상가 일대는 1979년 처음 재개발지구로 지정됐다. 그리고 40년간 계획은 세워지고 보류되기를 거듭했다. 을지로의 소상공인들은 이번에도 재개발은 시행되지 않고 계획에 그칠 거라고 여겼다. "가든파이브가 그랬듯이."

황민석 사장은 을지로 3가에서 입정동으로, 다시 입정동으로 공장을 옮기며 45년간 을지로 일대에서 “먹고 살려고 발버둥을 쳤다”. 누군가의 성취와 추억을 남기는 메달과 배지, 상패 등을 그는 평생 제작했다.
황 사장이 옮긴 새 공장은 3-2구역. 3-1구역과 맞닿은 건물이다. 두 구역은 모두 입정동이고, 역시 재개발 예정지다. 그가 이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허락된 시간은 어쩌면 1년 남짓이다. 황 사장은 이곳 1층을 개조해 또다시 세를 들었다. 7톤의 압력으로 철판에 무늬를 찍어내는 프레스기, 일명 후렉숀에 견디도록 땅밑 4m까지 바닥 작업을 하고 각종 장비를 옮기는 데 6개월이 걸렸다. 3-1구역을 나가며 받은 이주비에 자비를 보태 8천만 원이 들었다.

왜 또 을지로인가. 황 사장은 "배지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20군데를 거쳐야지만 나올 수 있다"고 대답했다. "제작 시스템이 여러 업체들이 어울려서 해야 되는데, (을지로) 밖으로 나가가지고는 일을 할 수가 없어요. 다른 곳은 아직 구조를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구조를 갖추려면 상당한 시일이 또 걸려요. 그 시스템을 다시 구성해서 무너지느니 여기서 좀 더 하다가 무너지는 게 낫지 않을까…." 아들까지 데려다 놓은 황 사장은 불면증에 시달린다고 말했다.

서민에게 사랑받은 노포, 예정된 폐업

세운재정비촉진지구 3-2구역에 위치한 대표적인 노포인 을지면옥. 재개발에 동의하지 않은 지주다.
재개발을 일단 멈춰 세운 건 오래된 가게, 이른바 노포 때문이다. 서울시는 지난 1월 연말까지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재개발을 전면 재검토하겠다며 인허가 절차 중단을 발표했다. 그러나 재개발에 반대하는 노포 주인은 "이미 끝났다"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박원순 시장의 인허가 보류 지시에도 부동산 개발업체, 즉 시행사는 재개발 예정지에서 다음 절차를 착착 준비하고 있다. 재개발에 동의하지 않은 지주들에게는 보상에 협의하라는 문서가 거듭 날아든다. 협의라지만 결론과 승자는 정해져 있다.

지주 75%의 동의를 받은 시행사는 재개발에 동의하지 않은 지주의 땅을 강제수용할 수 있다. 지주가 끝내 보상을 거부하면 시행사는 법원에 보상가액을 공탁하고 명도절차를 밟아 철거에 착수한다. 재개발사업은 '공익사업'으로 간주돼 시행사가 행정청의 권한을 갖기 때문이다. 재개발에 동의하지 않은 지주들은 3-1구역에서 이 과정이 진행되는 걸 지켜봤다.

"이건 보상이 아니라 강제수용이에요!"

익명을 요구한 한 노포 지주는 목소리를 높였다. 조합 방식이 아니라 토지 등 소유자 방식으로 진행된 이 지역에서, 개발에 동의하지 않은 지주에게는 분양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개발이 완료된 인근 지역 상가는 가격이 이미 오를 대로 올라 보상금만으로는 이전하기 힘든 데다 매물도 없다고 했다. 서울시의 재검토 결정에 대해 노포 지주는 "길게 잡아 내년 12월까지는 그래도 장사를 할 수 있겠구나 생각할 뿐 이제 폐업"이라고 고개를 떨궜다.

세계유산 종묘(왼쪽 상단)와 세운재정비촉진지구. 종묘에서 170m 거리인 세운4구역은 9년에 걸친 문화재위 심의 끝에 건물 높이가 122m에서 52.6m로 낮아졌다. 그러나 청계천 이남 구역은 2017년부터 문화재위 심의를 거치지 않고 있다.
을지로의 주인은 누구일까

이 땅을 결정하는 건 누구일까. 을지로 일대는 한때 국회의사당, 대규모 아파트 단지 부지로 검토됐다. 이런 대규모 계획이 무산된 건 종묘의 존재감 때문이다. 종묘는 전통적인 제례의식이 유지되고 있는, 살아있는 유교적 왕실 사당이다. 1995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역사문화경관 보존의 당위성은 당대 한국인의 욕구를 넘어섰다.

종묘의 영향력 아래, 노후한 저층 건물이 밀집한 을지로에서 소상공인들은 긴밀한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맛있는 음식으로 일상의 행복을 누린 서민들, 골목을 드나들며 시제품을 만들던 미래의 창업가, 졸업 작품을 준비하던 공대생, 창의적인 기술기반 예술가들, 수십년 간 거래해 온 연관산업 관계자들의 발길이 씨줄과 날줄처럼 을지로의 풍경을 엮어낸다.

여기에 세련된 옷차림에 핸드폰을 손에 쥔 젊은이들이 골목에 나타났다. 시간의 지층이 어긋난 단면처럼 을지로 골목에는 서로 다른 시공간이 공존하고 젊은이들은 타임머신을 탄 듯 이 골목길을 즐긴다. 다른 곳에선 찾아볼 수 없는 서울 도심만의 독특한 매력이다. 젊은이들은 을지로를 사진에 담고 #뉴트로 #힙지로라는 해시태그를 달아 SNS에 올린다. 을지로의 새로운 이용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을지로의 미래를 결정할 권한이 없다. 종묘도, 장인도, 노포도, 예술가도, 창업가도, 거래처 기업들도, 을지로를 사랑하는 시민들도. 세운재정비촉진구역의 계획 수립은 서울시, 이를 실현에 옮기는 것은 지주와 시행사다. 시장의 임기는 정해져 있고, 지주와 시행사는 시간이 갈수록 금융비용이 늘어난다. 을지로의 지층에 무엇이 남도록 허락할지는 시간에 쫓기는 정치인과 자본이 결정한다.

서울시는 2014년 세운상가군 일대에 대한 세운재정비촉진계획을 변경해 수립하면서 을지로 일대의 필지를 분할해 재개발을 촉진하고, 세운상가는 존치구역으로 분류해 재생사업으로 발표했다. 계획의 추진전략으로 도심산업과 역사 도심 관리, 점진적 정비를 통한 공동체 보전을 내세웠다. 하지만 제조업 밀집 지역에 주거비율이 90%까지 상향되고 종묘의 역사 경관에 미칠 영향을 판단해온 문화재위 심의를 벗어나면서 빠른 속도로 주상복합 건설이 추진되고 있다.

서울의 오랜 시간이 쌓인 곳, 을지로. 그리고 도시재생이라면서 도시의 시간을 지우고 있는 아이러니. 도시재생 선도사업인 세운상가를 통해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도시가 무엇인지 묻는다.

KBS 1TV 시사기획 창 <세운상가, 도시재생을 묻다>, 21일 밤 10시 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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