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레오보다 빨랐다…천년 역사서 속 ‘흑자(黑子)’

입력 2019.05.21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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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들이 남긴 역사서 속에 담긴 관측 기록이 최근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실린 지진 피해 기록을 통해 한반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대 지진의 규모를 예측하는가 하면, '흙비(土雨)'라고 기록된 황사 현상이 미세먼지의 역사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 역사서 속에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과학적 발견이 이뤄졌습니다. 바로 선조들이 관찰한 '흑자(黑子)', 즉 태양의 흑점입니다.

서양보다 460년 앞선 고려 시대 태양 흑점 관측

고려사(1151년 3월) 흑점 기록 부분. 흑점을 ‘흑자(黑子)’로 표시했으며, “해에 흑점이 있는데 크기는 달걀만 했다”고 적혀 있다.고려사(1151년 3월) 흑점 기록 부분. 흑점을 ‘흑자(黑子)’로 표시했으며, “해에 흑점이 있는데 크기는 달걀만 했다”고 적혀 있다.

'고려 예종 10년(1151년), 해에 흑점이 있는데 크기는 달걀만 했다'
우리 역사서에 처음 등장한 태양 흑점 기록으로 '고려사(918~1392년)'에 실린 문구입니다. 서양에서는 1611년에 갈릴레오가 처음 흑점을 관측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보다 460년이나 빠른 기록입니다. 이후 조선왕조실록까지 '흑자'의 기록이 이어집니다.

망원경도 없던 시절 선조들의 관측 기록은 정확할까, 또 당시의 관측 기록이 현대 과학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한국천문연구원의 양흥진 박사 연구팀이 이런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연구진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흑점 관련 기록 55개를 바탕으로 태양 활동의 주기를 분석했습니다.

역사서에 남은 태양 흑점 기록, 믿을 수 있을까?

흑점은 태양의 표면 일부분이 주변보다 온도가 낮아 검게 보이는 현상을 말합니다. 태양의 흑점이 늘어나면 그만큼 태양이 방출하는 열에너지가 줄어들어 지구의 기온이 낮아지고, 반대로 흑점이 줄어들면 지구의 기온이 높아지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현대 과학은 이 같은 현상이 약 11년의 주기로 반복되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태양의 흑점은 주변보다 기온이 낮아 검게 나타난다.태양의 흑점은 주변보다 기온이 낮아 검게 나타난다.

놀랍게도 우리 역사서에 등장한 흑점의 기록도 이 같은 11년 주기와 일치합니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은 흑점의 크기를 '검은 점, 자두, 달걀, 복숭아, 배'의 다섯 크기로 등급을 나눠 표현했습니다. 이들 크기는 실제 흑점 활동의 강도를 나타낸 것인데 크기가 클수록 흑점 활동이 강했음을 의미합니다. 연구진이 이를 바탕으로 태양 활동을 분석한 결과 11년 주기가 확인된 것입니다. 그만큼 당시 관측의 신뢰도가 높다는 것이 연구진의 설명입니다.

천 년의 역사 기록으로 밝혀낸 '태양 활동 240년 주기'

현대 천문학은 태양 활동이 60년 주기로도 변화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해 드린 것처럼 갈릴레오가 처음 흑점을 관측한 지 40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수백년 주기의 변화는 확인할 방법이 아직 마땅치 않습니다. 반면 천 년의 역사서 속에서는 더 긴 주기의 태양 활동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연구진이 한국과 중국의 역사서에서 흑점 기록을 분석한 결과 공통으로 240년마다 증감이 반복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난 천 년간 흑점과 서리 기록 분포. 아래쪽 빨간 점선 막대 그래프는 한국의 흑점 기록 수, 파란색 막대 그래프는 중국의 역대 흑점 기록 수, 막대 그래프에 겹쳐진 곡선 그래프는 240년 태양의 주기 활동을 나타낸다. 위쪽의 작은 원은 서리 기록으로 검은색과 흰색 원은 봄과 가을의 서리 관측 날짜를 나타내며, 두 원 사이의 간격이 좁을수록 기온이 낮음을 의미한다지난 천 년간 흑점과 서리 기록 분포. 아래쪽 빨간 점선 막대 그래프는 한국의 흑점 기록 수, 파란색 막대 그래프는 중국의 역대 흑점 기록 수, 막대 그래프에 겹쳐진 곡선 그래프는 240년 태양의 주기 활동을 나타낸다. 위쪽의 작은 원은 서리 기록으로 검은색과 흰색 원은 봄과 가을의 서리 관측 날짜를 나타내며, 두 원 사이의 간격이 좁을수록 기온이 낮음을 의미한다

연구진은 역사서에 나타난 서리 기록에도 주목했습니다. 서리가 내린 기간은 기온 변화와 관련이 깊습니다. 평균 기온이 낮은 해에는 겨울철뿐만 아니라 늦은 봄이나 이른 가을까지 서리가 내려 일 년 중 서리가 내리지 않는 기간(무상기간)이 짧아지기 때문입니다. 연구진이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된 약 700번의 서리 기록을 토대로 실제 무상기간을 확인했더니 여기에서도 240년 주기가 발견됐습니다. 240년 주기로 태양의 흑점이 많아진 시기에 우리나라 기온도 급격히 낮아진 것입니다. 연구진은 기후변화가 태양 활동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재조명받는 동양의 역사 천문 기록

근대 과학을 이끈 서양의 전통 과학과 달리 동양의 전통 과학은 후대 과학자들에게 무시되기 일쑤였습니다. 천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적 사실을 기록하기보다 때로는 왕조의 정통성을 입증하고, 때로는 왕조의 권위를 깨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조작된 경우가 많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태양의 흑점 기록에서 보듯 우리의 역사 천문 기록은 신뢰도가 매우 높다는 것이 고(古)천문학자들의 분석입니다. 양 박사는 이번 연구에 대해 "우리나라의 풍부한 역사 기록이 현대과학적 측면에서 매우 신빙성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고천문 자료를 바탕으로 태양 장주기 활동을 추가로 증명해나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연구 논문은 '기상과 태양·지구 물리 저널'(Journal of Atmospheric and Solar-Terrestrial Physics) 5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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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갈릴레오보다 빨랐다…천년 역사서 속 ‘흑자(黑子)’
    • 입력 2019-05-21 08:01:29
    취재K
선조들이 남긴 역사서 속에 담긴 관측 기록이 최근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실린 지진 피해 기록을 통해 한반도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대 지진의 규모를 예측하는가 하면, '흙비(土雨)'라고 기록된 황사 현상이 미세먼지의 역사를 알려주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 역사서 속에서 또 하나의 흥미로운 과학적 발견이 이뤄졌습니다. 바로 선조들이 관찰한 '흑자(黑子)', 즉 태양의 흑점입니다.

서양보다 460년 앞선 고려 시대 태양 흑점 관측

고려사(1151년 3월) 흑점 기록 부분. 흑점을 ‘흑자(黑子)’로 표시했으며, “해에 흑점이 있는데 크기는 달걀만 했다”고 적혀 있다.
'고려 예종 10년(1151년), 해에 흑점이 있는데 크기는 달걀만 했다'
우리 역사서에 처음 등장한 태양 흑점 기록으로 '고려사(918~1392년)'에 실린 문구입니다. 서양에서는 1611년에 갈릴레오가 처음 흑점을 관측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보다 460년이나 빠른 기록입니다. 이후 조선왕조실록까지 '흑자'의 기록이 이어집니다.

망원경도 없던 시절 선조들의 관측 기록은 정확할까, 또 당시의 관측 기록이 현대 과학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한국천문연구원의 양흥진 박사 연구팀이 이런 궁금증을 풀 수 있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연구진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흑점 관련 기록 55개를 바탕으로 태양 활동의 주기를 분석했습니다.

역사서에 남은 태양 흑점 기록, 믿을 수 있을까?

흑점은 태양의 표면 일부분이 주변보다 온도가 낮아 검게 보이는 현상을 말합니다. 태양의 흑점이 늘어나면 그만큼 태양이 방출하는 열에너지가 줄어들어 지구의 기온이 낮아지고, 반대로 흑점이 줄어들면 지구의 기온이 높아지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현대 과학은 이 같은 현상이 약 11년의 주기로 반복되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태양의 흑점은 주변보다 기온이 낮아 검게 나타난다.
놀랍게도 우리 역사서에 등장한 흑점의 기록도 이 같은 11년 주기와 일치합니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은 흑점의 크기를 '검은 점, 자두, 달걀, 복숭아, 배'의 다섯 크기로 등급을 나눠 표현했습니다. 이들 크기는 실제 흑점 활동의 강도를 나타낸 것인데 크기가 클수록 흑점 활동이 강했음을 의미합니다. 연구진이 이를 바탕으로 태양 활동을 분석한 결과 11년 주기가 확인된 것입니다. 그만큼 당시 관측의 신뢰도가 높다는 것이 연구진의 설명입니다.

천 년의 역사 기록으로 밝혀낸 '태양 활동 240년 주기'

현대 천문학은 태양 활동이 60년 주기로도 변화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나 앞서 설명해 드린 것처럼 갈릴레오가 처음 흑점을 관측한 지 400여 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수백년 주기의 변화는 확인할 방법이 아직 마땅치 않습니다. 반면 천 년의 역사서 속에서는 더 긴 주기의 태양 활동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연구진이 한국과 중국의 역사서에서 흑점 기록을 분석한 결과 공통으로 240년마다 증감이 반복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지난 천 년간 흑점과 서리 기록 분포. 아래쪽 빨간 점선 막대 그래프는 한국의 흑점 기록 수, 파란색 막대 그래프는 중국의 역대 흑점 기록 수, 막대 그래프에 겹쳐진 곡선 그래프는 240년 태양의 주기 활동을 나타낸다. 위쪽의 작은 원은 서리 기록으로 검은색과 흰색 원은 봄과 가을의 서리 관측 날짜를 나타내며, 두 원 사이의 간격이 좁을수록 기온이 낮음을 의미한다
연구진은 역사서에 나타난 서리 기록에도 주목했습니다. 서리가 내린 기간은 기온 변화와 관련이 깊습니다. 평균 기온이 낮은 해에는 겨울철뿐만 아니라 늦은 봄이나 이른 가을까지 서리가 내려 일 년 중 서리가 내리지 않는 기간(무상기간)이 짧아지기 때문입니다. 연구진이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된 약 700번의 서리 기록을 토대로 실제 무상기간을 확인했더니 여기에서도 240년 주기가 발견됐습니다. 240년 주기로 태양의 흑점이 많아진 시기에 우리나라 기온도 급격히 낮아진 것입니다. 연구진은 기후변화가 태양 활동에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재조명받는 동양의 역사 천문 기록

근대 과학을 이끈 서양의 전통 과학과 달리 동양의 전통 과학은 후대 과학자들에게 무시되기 일쑤였습니다. 천문학도 마찬가지입니다. 과학적 사실을 기록하기보다 때로는 왕조의 정통성을 입증하고, 때로는 왕조의 권위를 깨기 위한 정치적 목적으로 조작된 경우가 많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나 태양의 흑점 기록에서 보듯 우리의 역사 천문 기록은 신뢰도가 매우 높다는 것이 고(古)천문학자들의 분석입니다. 양 박사는 이번 연구에 대해 "우리나라의 풍부한 역사 기록이 현대과학적 측면에서 매우 신빙성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며 "앞으로도 다양한 고천문 자료를 바탕으로 태양 장주기 활동을 추가로 증명해나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연구 논문은 '기상과 태양·지구 물리 저널'(Journal of Atmospheric and Solar-Terrestrial Physics) 5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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