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산유국 베네수엘라에 기름이 없는 이유

입력 2019.05.21 (1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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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 석유 매장량을 보유한 베네수엘라에서 주유소마다 기름을 넣으려는 긴 줄이 늘어서는 이해하기 힘든 광경이 벌어지고 있다. 일부 운전자들은 경찰에 한 달 최저 임금의 30% 가까운 3달러를 주고 새치기를 하기도 한다고 외신은 보도했다. 산유국 베네수엘라에 기름이 부족한 건 새삼스럽지 않다. 4년 전쯤부터 이런 현상이 종종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기름 부족 사태는 현 마두로 대통령에게는 임시대통령을 선언한 과이도 국회의장에 맞서 정권을 유지하는데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과이도 의장을 지지하는 미국의 경제 제재의 여파가 가시화되고 있다는 분석 때문이다.


【2㎞ 가까운 주유 줄...카라카스에도 영향】
베네수엘라에서 원유가 처음으로 발견된 지역이자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마라카이보의 주유소에는 긴 차량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 우주기술업체는 16일 마라카이보 상공을 지나는 위성이 주유소 앞에 1.6㎞ 줄지어 선 자동차 사진을 촬영했다고 밝혔다. 일부 운전자들은 24시간을 기다렸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고, 트럭이나 승용차 위에서 잠을 자면서 자신들의 주유 순서를 기다려야만 했다. 주유 난은 수도 카라카스에서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주유를 위해 1, 2시간 기다려야만 한다는 게 현지 교민의 말이다.

【"미국 제재 영향 강타 시작"】
베네수엘라 원유는 타르와 같은 중질유여서 희석재를 수입해 섞어야 한다. 하지만, 미국의 경제 제재로 돈줄이 막히면서 희석재를 제대로 수입하지 못해 석유 생산량이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미국은 마두로 정권의 돈줄인 PDVSA, 국영석유기업의 자산을 동결하고 미국인과의 거래를 금지하는 등 제재에 착수한 상태다. 또, PDVSA의 미국 내 정유 자회사인 시트고가 수익금을 마두로 정권에 송금하는 것도 금지했다.

더욱이 석유 생산시설에 대한 유지 보수를 제대로 못 하면서 생산시설의 10에서 15%만을 가동하고 있다는 게 미국 증권사의 분석이다. 이 증권사는 미국의 강력한 제재가 베네수엘라를 강타하기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실제, OPEC 석유수출기구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하루 석유생산량은 10년 전 350만 배럴이었던 것이 지금은 100만 배럴이 채 안 돼 3분의 1 수준으로 감소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지난 3월 베네수엘라의 원유 생산량은 하루 74만 배럴로 베네수엘라 원유 매장량의 1%도 안 되는 콜롬비아의 88만 배럴보다도 적었다고 보도했다. 베네수엘라 재정 수입 대부분을 차지하는 석유 수출이 큰 타격을 받는 것이다.


【휘발유 세계에서 가장 싼 나라...기름값 올릴 수도 없다】
휘발유 1ℓ에 한화로 1원도 안 하는 나라가 베네수엘라다. 1달러로 5천여 리터를 넣을 수 있으니 일주일에 한 차례씩 1년간 승용차에 가득 넣고도 돈이 남는다. 이는 베네수엘라 정부 보조금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베네수엘라에 있는 주유소는 천7백여 개로 추정된다. 주유소들은 기름값이 고정돼 있어서 상승하는 주유소 운영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정부로부터 리터당 보조금을 받고 있다. 기름값이 세계에서 가장 싸지만, 이면에는 정부 곳간이 축나고 있는 현실이 있다. 석유생산시설을 정비하고 희석재를 수입해오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다. 정부의 재정난에 기름값을 올리는 수단을 쓸 수도 있지만,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1989년의 악몽 때문이다. 저유가로 인한 경제위기에 기름값을 인상했다가 폭동이 일어나면서 수백 명이 숨지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2주간 금 14톤 팔았다"】
두 달여 정전과 단수 사태에도 휘발유만큼은 걱정 없이 쓸 수 있었던 베네수엘라 국민에게는 휘발유 공급마저 차질을 빚는다면 참기 어려운 상황이 될 것이다. 이런 민심 동요의 위기감으로 마두로 정권은 외환 확보를 위해 보유 금괴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마두로 정권은 미국의 금융 제재를 피해 최근 2주 동안 보유한 금 14톤, 5억 7천만 달러 어치를 아랍에미리트와 터키 등에 판매했다고 외신은 보도했다. 그동안 판매한 중앙은행 금은 23톤 정도로 현재 보유한 금은 79억 달러어치라고 분석했다. 29년 만에 최저치다. 지난해 말 러시아에 원유와 금광 채굴권을 60억 달러에 넘겨준 마두로 정권이 보유한 국가자산을 팔아 정권 유지에 안간힘을 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선 승리 1주년, 춤추는 마두로】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베네수엘라를 오가는 모든 상업용 항공기의 운항을 무기 중단했다. 미 교통부는 베네수엘라 공항 일대의 정정불안과 폭력사태 탓에 승객과 승무원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면서 이런 조처를 내렸다. 여객기뿐만 아니라 화물기도 대상이다. 지난해 100만%가 넘는 물가상승률을 기록한 베네수엘라에서는 생필품 가격이 또 오르고 있다. 현재 한 달 최저임금은 6만 5천 볼리바르다. 이 최저임금으로 쌀 6㎏, 달걀 2판, 쇠고기 2㎏ 정도를 살 수 있다.

미국을 오가는 화물기 운항 중단의 여파는 생필품 가격 상승을 더욱 부채질할 것으로 보인다. 현지시간 20일 경제위기를 피해 인근 섬나라 트리니다드 토바고로 향하던 소형 선박이 침몰해 20여 명의 베네수엘라인이 실종됐다. 4월에도 25명을 태운 선박이 침몰해 20여 명이 실종되기도 했다.

1년 전, 마두로 대통령은 야당이 불참을 선언한 가운데 치러진 대선에서 승리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20일 수도 카라카스에서 대선 1년 승리를 기념하는 자축 행사를 열었다. 연단에 선 마두로는 하늘로 손가락을 찌르는 특유의 춤을 추며 1주년을 기념했다. 대규모 정전과 단수, 생필품난에 이어 주유 난까지 겹친 베네수엘라에서 언제쯤 국민도 마음 놓고 춤을 출 수 있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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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산유국 베네수엘라에 기름이 없는 이유
    • 입력 2019-05-21 13:02:26
    특파원 리포트
세계 최대 석유 매장량을 보유한 베네수엘라에서 주유소마다 기름을 넣으려는 긴 줄이 늘어서는 이해하기 힘든 광경이 벌어지고 있다. 일부 운전자들은 경찰에 한 달 최저 임금의 30% 가까운 3달러를 주고 새치기를 하기도 한다고 외신은 보도했다. 산유국 베네수엘라에 기름이 부족한 건 새삼스럽지 않다. 4년 전쯤부터 이런 현상이 종종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기름 부족 사태는 현 마두로 대통령에게는 임시대통령을 선언한 과이도 국회의장에 맞서 정권을 유지하는데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과이도 의장을 지지하는 미국의 경제 제재의 여파가 가시화되고 있다는 분석 때문이다.


【2㎞ 가까운 주유 줄...카라카스에도 영향】
베네수엘라에서 원유가 처음으로 발견된 지역이자 두 번째로 큰 도시인 마라카이보의 주유소에는 긴 차량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미국 우주기술업체는 16일 마라카이보 상공을 지나는 위성이 주유소 앞에 1.6㎞ 줄지어 선 자동차 사진을 촬영했다고 밝혔다. 일부 운전자들은 24시간을 기다렸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고, 트럭이나 승용차 위에서 잠을 자면서 자신들의 주유 순서를 기다려야만 했다. 주유 난은 수도 카라카스에서도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주유를 위해 1, 2시간 기다려야만 한다는 게 현지 교민의 말이다.

【"미국 제재 영향 강타 시작"】
베네수엘라 원유는 타르와 같은 중질유여서 희석재를 수입해 섞어야 한다. 하지만, 미국의 경제 제재로 돈줄이 막히면서 희석재를 제대로 수입하지 못해 석유 생산량이 줄어들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미국은 마두로 정권의 돈줄인 PDVSA, 국영석유기업의 자산을 동결하고 미국인과의 거래를 금지하는 등 제재에 착수한 상태다. 또, PDVSA의 미국 내 정유 자회사인 시트고가 수익금을 마두로 정권에 송금하는 것도 금지했다.

더욱이 석유 생산시설에 대한 유지 보수를 제대로 못 하면서 생산시설의 10에서 15%만을 가동하고 있다는 게 미국 증권사의 분석이다. 이 증권사는 미국의 강력한 제재가 베네수엘라를 강타하기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실제, OPEC 석유수출기구에 따르면 베네수엘라의 하루 석유생산량은 10년 전 350만 배럴이었던 것이 지금은 100만 배럴이 채 안 돼 3분의 1 수준으로 감소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지난 3월 베네수엘라의 원유 생산량은 하루 74만 배럴로 베네수엘라 원유 매장량의 1%도 안 되는 콜롬비아의 88만 배럴보다도 적었다고 보도했다. 베네수엘라 재정 수입 대부분을 차지하는 석유 수출이 큰 타격을 받는 것이다.


【휘발유 세계에서 가장 싼 나라...기름값 올릴 수도 없다】
휘발유 1ℓ에 한화로 1원도 안 하는 나라가 베네수엘라다. 1달러로 5천여 리터를 넣을 수 있으니 일주일에 한 차례씩 1년간 승용차에 가득 넣고도 돈이 남는다. 이는 베네수엘라 정부 보조금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베네수엘라에 있는 주유소는 천7백여 개로 추정된다. 주유소들은 기름값이 고정돼 있어서 상승하는 주유소 운영비를 감당하지 못하고 정부로부터 리터당 보조금을 받고 있다. 기름값이 세계에서 가장 싸지만, 이면에는 정부 곳간이 축나고 있는 현실이 있다. 석유생산시설을 정비하고 희석재를 수입해오기 위해서는 자금이 필요하다. 정부의 재정난에 기름값을 올리는 수단을 쓸 수도 있지만,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1989년의 악몽 때문이다. 저유가로 인한 경제위기에 기름값을 인상했다가 폭동이 일어나면서 수백 명이 숨지는 사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2주간 금 14톤 팔았다"】
두 달여 정전과 단수 사태에도 휘발유만큼은 걱정 없이 쓸 수 있었던 베네수엘라 국민에게는 휘발유 공급마저 차질을 빚는다면 참기 어려운 상황이 될 것이다. 이런 민심 동요의 위기감으로 마두로 정권은 외환 확보를 위해 보유 금괴에 손을 댈 수밖에 없었다. 마두로 정권은 미국의 금융 제재를 피해 최근 2주 동안 보유한 금 14톤, 5억 7천만 달러 어치를 아랍에미리트와 터키 등에 판매했다고 외신은 보도했다. 그동안 판매한 중앙은행 금은 23톤 정도로 현재 보유한 금은 79억 달러어치라고 분석했다. 29년 만에 최저치다. 지난해 말 러시아에 원유와 금광 채굴권을 60억 달러에 넘겨준 마두로 정권이 보유한 국가자산을 팔아 정권 유지에 안간힘을 쏟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선 승리 1주년, 춤추는 마두로】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최근 베네수엘라를 오가는 모든 상업용 항공기의 운항을 무기 중단했다. 미 교통부는 베네수엘라 공항 일대의 정정불안과 폭력사태 탓에 승객과 승무원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면서 이런 조처를 내렸다. 여객기뿐만 아니라 화물기도 대상이다. 지난해 100만%가 넘는 물가상승률을 기록한 베네수엘라에서는 생필품 가격이 또 오르고 있다. 현재 한 달 최저임금은 6만 5천 볼리바르다. 이 최저임금으로 쌀 6㎏, 달걀 2판, 쇠고기 2㎏ 정도를 살 수 있다.

미국을 오가는 화물기 운항 중단의 여파는 생필품 가격 상승을 더욱 부채질할 것으로 보인다. 현지시간 20일 경제위기를 피해 인근 섬나라 트리니다드 토바고로 향하던 소형 선박이 침몰해 20여 명의 베네수엘라인이 실종됐다. 4월에도 25명을 태운 선박이 침몰해 20여 명이 실종되기도 했다.

1년 전, 마두로 대통령은 야당이 불참을 선언한 가운데 치러진 대선에서 승리했다. 마두로 대통령은 20일 수도 카라카스에서 대선 1년 승리를 기념하는 자축 행사를 열었다. 연단에 선 마두로는 하늘로 손가락을 찌르는 특유의 춤을 추며 1주년을 기념했다. 대규모 정전과 단수, 생필품난에 이어 주유 난까지 겹친 베네수엘라에서 언제쯤 국민도 마음 놓고 춤을 출 수 있을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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