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민주주의의 길’ 행사 막아선 부모들의 하소연

입력 2019.05.22 (12:00) 수정 2019.05.22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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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21일) 아침 서울 여의도의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 '민주주의의 길 순례단' 출정식 행사에 참석한 이해찬 당 대표에게 한 여성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습니다.

"이해찬 대표님!! 우리 아이들을 좀!!"

이해찬 대표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달려든 이 여성은 전국 장애인부모연대의 강복순 이사입니다. 이 대표가 자리를 피하자 강 이사는 손 피켓을 든 시각장애인 십여 명과 함께 고성을 지르며 당사 진입을 시도했습니다. 이들을 막으려던 경찰과 당직자들이 부딪히면서 당사 앞에서는 큰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가짜 장애등급제 폐지를 중단하라!"

이들은 무엇 때문에 갑작스러운 소란을 벌인 걸까요? 바로 '장애등급제 폐지'가 그 이유였습니다.

장애등급제는 장애를 의학적 기준에 따라 1~6급으로 구분 짓고 차등적으로 복지혜택을 지급하는 제도입니다. 장애인 단체들은 이 제도가 장애인의 가족관계나 경제력 등 사회적인 상황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꾸준히 폐지를 주장해 왔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장애인 관련 1호 공약이기도 합니다. 이에 따라 보건복지부는 올해 7월부터 단계적으로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기로 했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게는 달랐습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9월 발표한 새로운 '종합조사표'의 일부입니다. '음식물 넘기기', '누운 상태에서 자세 바꾸기', '배변·배뇨'등의 항목이 눈에 띕니다. 우리동작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강윤택 소장은 KBS와의 통화에서 "시각장애인들의 장애 특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문항들"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시각장애인들 배변, 배뇨 혼자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밖에 나갔을 때 혼자 공중화장실을 찾진 못합니다. '옷 갈아입기'도 마찬가지예요. 시각장애인들의 문제는 옷은 혼자 갈아입을 수 있지만, 색상이나 계절에 맞춰서 옷을 입을 수는 없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런 건 전혀 물어보지 않는 종합조사표가 나온 거에요"


실제로 보건복지부가 종합조사표를 모의적용 해본 결과 현재 활동지원 서비스를 받고 있는 장애인의 13%가 서비스에서 탈락하는데, 대부분이 시각장애인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서비스 이용 가능시간도 시각장애인의 경우는 한 달에 9시간이나 줄게 됐습니다. 당연히 시각장애인들의 항의가 빗발쳤습니다. 복지부도 시각장애인들의 특성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다시 논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지난달 15일 최종적으로 발표된 종합조사표 문항은 작년에 발표된 그대로였습니다. 복지부 측은 "평가지표를 어떻게 질문할 것인지에 대한 세부 매뉴얼에 장애 유형별 특성을 반영하기로 했다"고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에 대해 강 소장은 "문항은 그대로 두고 세부 매뉴얼로 몇 점 더 줘서 서비스를 유지하겠다는 건 '동정복지'"라며 "시각 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걸 못한다고 얘기하면서, 굴욕적인 조사를 받아야 하나요? 시각장애인들이 못하는 것, 필요한 걸 물어봐야죠"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복지부의 '최종안' 발표 후, 시각장애인들은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장애등급제 폐지를 추진하는 여당에 면담을 요청한 것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들을 포함해서 민주당 의원 전원에게 문제를 알리고 면담을 요청하는 팩스를 보냈습니다. 잘 받았는지 의원실마다 확인 전화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의원실서 돌아온 건 애매한 답변들뿐이었다고 이들은 전했습니다.

"요구한 문제들은 알겠는데…. 당장 7월부터 시행이라 시간이 없어서 의원님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복지부에 알아보니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에서 이미 동의를 했다더라.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긴 하지만 내용은 일리가 있으니 염두에 두겠다."

홍순봉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회장은 KBS와의 통화에서 "복지부 방안에 동의를 한 적은 없다"며 "아직 세부 매뉴얼이 완성되지 않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결국 대다수 시각장애인들은 완성되지 못한 세부 매뉴얼을 기다리며, 동의한 적 없는 복지부 최종안에 동의한 것이 된 채 장애등급제 폐지를 맞닥뜨리게 된 셈입니다.


그래서, 남은 방법은 "기습 시위"뿐이었다고 이들은 말했습니다.

고성과 몸싸움이 오가던 십여 분의 충돌이 끝난 뒤, 이들은 드디어 '답변'을 받아냈습니다. 당대표 비서실장을 맡고 있는 김성환 의원이 "일주일 내로 당 정책위 등 정식 회의를 열고 장애인 단체와 복지부 등의 이야기를 듣겠다"고 했습니다.

1년 가까이 요청했지만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가 10여 분의 격한 시위로 해결된 겁니다. 이쯤 되면 온몸으로 부딪히는 '시위'도 꽤 쓸모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시위 전까지는 아무 문제도 해결해 주지 않는 우리 사회는 괜찮은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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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민주주의의 길’ 행사 막아선 부모들의 하소연
    • 입력 2019-05-22 12:00:30
    • 수정2019-05-22 13:12:18
    취재후·사건후
어제(21일) 아침 서울 여의도의 더불어민주당 당사 앞, '민주주의의 길 순례단' 출정식 행사에 참석한 이해찬 당 대표에게 한 여성이 소리를 지르며 달려들었습니다.

"이해찬 대표님!! 우리 아이들을 좀!!"

이해찬 대표와의 면담을 요구하며 달려든 이 여성은 전국 장애인부모연대의 강복순 이사입니다. 이 대표가 자리를 피하자 강 이사는 손 피켓을 든 시각장애인 십여 명과 함께 고성을 지르며 당사 진입을 시도했습니다. 이들을 막으려던 경찰과 당직자들이 부딪히면서 당사 앞에서는 큰 소란이 벌어졌습니다.

"가짜 장애등급제 폐지를 중단하라!"

이들은 무엇 때문에 갑작스러운 소란을 벌인 걸까요? 바로 '장애등급제 폐지'가 그 이유였습니다.

장애등급제는 장애를 의학적 기준에 따라 1~6급으로 구분 짓고 차등적으로 복지혜택을 지급하는 제도입니다. 장애인 단체들은 이 제도가 장애인의 가족관계나 경제력 등 사회적인 상황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꾸준히 폐지를 주장해 왔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장애인 관련 1호 공약이기도 합니다. 이에 따라 보건복지부는 올해 7월부터 단계적으로 장애등급제를 폐지하기로 했습니다. 여기까지 보면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시각장애인들에게는 달랐습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9월 발표한 새로운 '종합조사표'의 일부입니다. '음식물 넘기기', '누운 상태에서 자세 바꾸기', '배변·배뇨'등의 항목이 눈에 띕니다. 우리동작장애인자립생활센터의 강윤택 소장은 KBS와의 통화에서 "시각장애인들의 장애 특성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문항들"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시각장애인들 배변, 배뇨 혼자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밖에 나갔을 때 혼자 공중화장실을 찾진 못합니다. '옷 갈아입기'도 마찬가지예요. 시각장애인들의 문제는 옷은 혼자 갈아입을 수 있지만, 색상이나 계절에 맞춰서 옷을 입을 수는 없다는 거거든요. 그런데 이런 건 전혀 물어보지 않는 종합조사표가 나온 거에요"


실제로 보건복지부가 종합조사표를 모의적용 해본 결과 현재 활동지원 서비스를 받고 있는 장애인의 13%가 서비스에서 탈락하는데, 대부분이 시각장애인인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서비스 이용 가능시간도 시각장애인의 경우는 한 달에 9시간이나 줄게 됐습니다. 당연히 시각장애인들의 항의가 빗발쳤습니다. 복지부도 시각장애인들의 특성을 고려하는 방향으로 다시 논의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지난달 15일 최종적으로 발표된 종합조사표 문항은 작년에 발표된 그대로였습니다. 복지부 측은 "평가지표를 어떻게 질문할 것인지에 대한 세부 매뉴얼에 장애 유형별 특성을 반영하기로 했다"고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이에 대해 강 소장은 "문항은 그대로 두고 세부 매뉴얼로 몇 점 더 줘서 서비스를 유지하겠다는 건 '동정복지'"라며 "시각 장애인들이 할 수 있는 걸 못한다고 얘기하면서, 굴욕적인 조사를 받아야 하나요? 시각장애인들이 못하는 것, 필요한 걸 물어봐야죠"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복지부의 '최종안' 발표 후, 시각장애인들은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습니다. 장애등급제 폐지를 추진하는 여당에 면담을 요청한 것도 그중 하나였습니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위원들을 포함해서 민주당 의원 전원에게 문제를 알리고 면담을 요청하는 팩스를 보냈습니다. 잘 받았는지 의원실마다 확인 전화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의원실서 돌아온 건 애매한 답변들뿐이었다고 이들은 전했습니다.

"요구한 문제들은 알겠는데…. 당장 7월부터 시행이라 시간이 없어서 의원님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복지부에 알아보니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에서 이미 동의를 했다더라.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긴 하지만 내용은 일리가 있으니 염두에 두겠다."

홍순봉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회장은 KBS와의 통화에서 "복지부 방안에 동의를 한 적은 없다"며 "아직 세부 매뉴얼이 완성되지 않아 기다리고 있는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결국 대다수 시각장애인들은 완성되지 못한 세부 매뉴얼을 기다리며, 동의한 적 없는 복지부 최종안에 동의한 것이 된 채 장애등급제 폐지를 맞닥뜨리게 된 셈입니다.


그래서, 남은 방법은 "기습 시위"뿐이었다고 이들은 말했습니다.

고성과 몸싸움이 오가던 십여 분의 충돌이 끝난 뒤, 이들은 드디어 '답변'을 받아냈습니다. 당대표 비서실장을 맡고 있는 김성환 의원이 "일주일 내로 당 정책위 등 정식 회의를 열고 장애인 단체와 복지부 등의 이야기를 듣겠다"고 했습니다.

1년 가까이 요청했지만 해결되지 않았던 문제가 10여 분의 격한 시위로 해결된 겁니다. 이쯤 되면 온몸으로 부딪히는 '시위'도 꽤 쓸모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런 시위 전까지는 아무 문제도 해결해 주지 않는 우리 사회는 괜찮은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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