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조사 끝에…“반도체 근로자, 혈액암 위험 높다”

입력 2019.05.22 (14:00) 수정 2019.05.22 (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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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故 황유미 씨. 황 씨의 죽음 이후 우리 사회는 '반도체 공장 작업환경이 혈액암의 원인인가'라는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반도체 작업과 질병이 연관 있다는 관련 조사가 몇 차례 나오긴 했습니다. 하지만 조사방법에 한계가 있고 통계적 유의성이 떨어진다는 반박도 거셌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발표된 조사는 좀 다릅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반도체 제조업 근로자의 혈액암 발생과 사망 위험비가 높다'입니다.

[연관기사]
[뉴스9] “반도체 근로자 혈액암 사망위험 최고 3.7배”…10년만에 공식 인정
[뉴스9] “이제 겨우 한 발자국”…“희귀암, 하청근로자도 조사해야”

10년간 실시된 전수 추적조사, 질병 연관성은 얼마나?

황씨가 숨진 이후 2008년 실시된 사업장 역학조사에는 여러 가지 한계점이 노출됐습니다. 그래서 안전보건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2009년부터 2019년까지 10년간 추적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반도체 제조업 사업장 6개사의 전·현직 근로자 20만 명을 대상으로 암 발생과 사망 위험비를 분석했습니다. 6개 회사는 당시 반도체협회에 등록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앰코테크놀로지코리아, 페어차일드코리아반도체, 케이이씨, DB하이텍입니다.

조사결과 질병 연관성은 꽤나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반도체 여성 근로자의 경우 백혈병 발생위험이 전체 근로자보다 1.55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백혈병 사망 위험은 전체 근로자 대비 2.3배입니다.

반도체 여성 근로자의 비호지킨림프종(혈액암의 일종) 발생위험은 전체 근로자 대비 1.92배, 사망 위험은 3.68배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여성 근로자 A씨가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면 의류공장이나 식품공장에서 일할 때보다 백혈병 사망위험이 2.3배, 비호지킨림프종 사망 위험이 3.68배 높다는 뜻입니다.

삼성전자 반도체 라인에 근무하다 급성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 씨. 아버지 황상기 씨는 인권단체 ‘반올림’을 만들고 긴 투쟁을 시작합니다.삼성전자 반도체 라인에 근무하다 급성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 씨. 아버지 황상기 씨는 인권단체 ‘반올림’을 만들고 긴 투쟁을 시작합니다.

혈액암 외에 위암·유방암 등도 발생↑

혈액암 외에 다른 질병도 연관 있습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위암, 유방암, 신장암과 일부 희귀암(피부흑색종, 뼈관절암 등)도 발생 위험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습니다.

위암과 신장암, 유방암 등의 증가는 건강검진이 늘어서 많이 밝혀졌을 가능성도 있다는 게 산업안전연구원의 설명입니다.

다만 여성 오퍼레이터, 남성 장비엔지니어 등의 직무에서 상대적으로 발생·사망 위험비가 높았고 비교적 젊은 연령에서 발생 위험비가 높게 나타나 추적관찰 조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습니다.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보입니다.

- 20~24살 여성 오퍼레이터에서 혈액암의 발생 위험비가 높다.
- 클린룸 작업자인 오퍼레이터·엔지니어 등에서 혈액암 발생 또는 위험비가 높다.
- 현재보다 유해물질 높은 수준이 높았던 2010년 이전 여성 입사자에서
혈액암 발생 위험비가 높다.


새하얀 방진복과 마스크...'클린룸'의 역설

뉴스에서 자주 보신 화면이 있을 겁니다. 머리까지 방진복을 덮어쓰고 마스크까지 착용한 반도체 근로자입니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클린룸'에서 각종 자동화 기계를 운영하고 생산품을 검사하는 '오퍼레이터'입니다.

클린룸에서 일하다 보니 막연히 건강한 환경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곳을 '반도체 공장 같다'라고 말하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반도체를 제조하는 과정에는 무수히 많은 화학물질과 약품이 사용됩니다. 그러다 보니 오퍼레이터들은 늘 독성물질에 노출될 위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복잡한 제조공정을 숙지하고 있어야 하고 고도의 섬세함과 꼼꼼함이 요구되다 보니 대부분 20~40대 여성이 이 일을 맡고 있습니다.

클린룸 안의 설비를 관리하는 건 통상 남성 노동자(남성 장비 엔지니어)들이 맡고 있습니다. 이들 역시 오퍼레이터와 같은 위험에 노출돼있습니다.

클린룸에서 일하고 있는 오퍼레이터들. 독성 화학물질에 노출될 위험이 늘 따라다닙니다.클린룸에서 일하고 있는 오퍼레이터들. 독성 화학물질에 노출될 위험이 늘 따라다닙니다.

"가장 공신력 있는 조사"...작업환경이 발병에 영향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혈액암 발생에 기여한 특정한 원인을 확인하지는 못했다고 밝혔습니다. 과거 자료가 부족해서 노출된 물질이 무엇인지, 얼마나 오래 노출됐는지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연구원은 다만 조사 결과를 종합할 때, 반도체 공장의 작업환경이 발병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습니다. 그동안 나온 관련 조사 중에서 이번이 가장 공신력 있는 조사라고 보면 된다는 게 연구원 측의 설명입니다.

이번 조사 결과는 향후 산재처리 등에서 참고자료로 활용됩니다. 안전보건공단은 건강영향에 대한 추가 연구를 실시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와 함께 전자산업 안전·보건센터를 만들어 위험 관리 체계를 운영할 계획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예방적·근본적 대책 시급...사후약방문 안되려면?

반도체 근로자 인권단체 반올림은 이번 조사 결과에 대해 일단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반도체 작업 환경과 질병 사이에 연관이 있다는 그동안의 외침이 이제야 확인되고 받아들여 졌다는 뜻이니까요.

반올림측은 앞으로 정부나 기업이 보상뿐만 아니라 예방 차원의 대책을 내놔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기업은 영업비밀 뒤에 숨지 말고, 작업환경정보를 제공해 더 이상의 피해를 막아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이번 조사는 그 자체로 의미가 크지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반도체 업체의 많은 사업장은 협력업체를 두고 있는데, 협력업체 근로자들은 조사 대상에서 빠진 겁니다. 예방정비 분야 등에서 일하는 사내 협력업체 근로자들 역시 고위험군이라 할 수 있지만, 정확한 상관관계를 알아보지 못한 건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반도체 사업장마저 '위험의 외주화'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인지, 정부가 더욱더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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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0년 조사 끝에…“반도체 근로자, 혈액암 위험 높다”
    • 입력 2019-05-22 14:00:38
    • 수정2019-05-22 21:27:47
    취재K
2007년 삼성전자 기흥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가 백혈병을 얻어 세상을 떠난 故 황유미 씨. 황 씨의 죽음 이후 우리 사회는 '반도체 공장 작업환경이 혈액암의 원인인가'라는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반도체 작업과 질병이 연관 있다는 관련 조사가 몇 차례 나오긴 했습니다. 하지만 조사방법에 한계가 있고 통계적 유의성이 떨어진다는 반박도 거셌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발표된 조사는 좀 다릅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반도체 제조업 근로자의 혈액암 발생과 사망 위험비가 높다'입니다.

[연관기사]
[뉴스9] “반도체 근로자 혈액암 사망위험 최고 3.7배”…10년만에 공식 인정
[뉴스9] “이제 겨우 한 발자국”…“희귀암, 하청근로자도 조사해야”

10년간 실시된 전수 추적조사, 질병 연관성은 얼마나?

황씨가 숨진 이후 2008년 실시된 사업장 역학조사에는 여러 가지 한계점이 노출됐습니다. 그래서 안전보건공단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2009년부터 2019년까지 10년간 추적 조사를 실시했습니다.

반도체 제조업 사업장 6개사의 전·현직 근로자 20만 명을 대상으로 암 발생과 사망 위험비를 분석했습니다. 6개 회사는 당시 반도체협회에 등록된 삼성전자, SK하이닉스, 앰코테크놀로지코리아, 페어차일드코리아반도체, 케이이씨, DB하이텍입니다.

조사결과 질병 연관성은 꽤나 뚜렷하게 드러났습니다.

반도체 여성 근로자의 경우 백혈병 발생위험이 전체 근로자보다 1.55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백혈병 사망 위험은 전체 근로자 대비 2.3배입니다.

반도체 여성 근로자의 비호지킨림프종(혈액암의 일종) 발생위험은 전체 근로자 대비 1.92배, 사망 위험은 3.68배나 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여성 근로자 A씨가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면 의류공장이나 식품공장에서 일할 때보다 백혈병 사망위험이 2.3배, 비호지킨림프종 사망 위험이 3.68배 높다는 뜻입니다.

삼성전자 반도체 라인에 근무하다 급성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 씨. 아버지 황상기 씨는 인권단체 ‘반올림’을 만들고 긴 투쟁을 시작합니다.
혈액암 외에 위암·유방암 등도 발생↑

혈액암 외에 다른 질병도 연관 있습니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위암, 유방암, 신장암과 일부 희귀암(피부흑색종, 뼈관절암 등)도 발생 위험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했습니다.

위암과 신장암, 유방암 등의 증가는 건강검진이 늘어서 많이 밝혀졌을 가능성도 있다는 게 산업안전연구원의 설명입니다.

다만 여성 오퍼레이터, 남성 장비엔지니어 등의 직무에서 상대적으로 발생·사망 위험비가 높았고 비교적 젊은 연령에서 발생 위험비가 높게 나타나 추적관찰 조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습니다.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은 특징이 보입니다.

- 20~24살 여성 오퍼레이터에서 혈액암의 발생 위험비가 높다.
- 클린룸 작업자인 오퍼레이터·엔지니어 등에서 혈액암 발생 또는 위험비가 높다.
- 현재보다 유해물질 높은 수준이 높았던 2010년 이전 여성 입사자에서
혈액암 발생 위험비가 높다.


새하얀 방진복과 마스크...'클린룸'의 역설

뉴스에서 자주 보신 화면이 있을 겁니다. 머리까지 방진복을 덮어쓰고 마스크까지 착용한 반도체 근로자입니다. 외부와 완전히 차단된 '클린룸'에서 각종 자동화 기계를 운영하고 생산품을 검사하는 '오퍼레이터'입니다.

클린룸에서 일하다 보니 막연히 건강한 환경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한 곳을 '반도체 공장 같다'라고 말하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반도체를 제조하는 과정에는 무수히 많은 화학물질과 약품이 사용됩니다. 그러다 보니 오퍼레이터들은 늘 독성물질에 노출될 위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복잡한 제조공정을 숙지하고 있어야 하고 고도의 섬세함과 꼼꼼함이 요구되다 보니 대부분 20~40대 여성이 이 일을 맡고 있습니다.

클린룸 안의 설비를 관리하는 건 통상 남성 노동자(남성 장비 엔지니어)들이 맡고 있습니다. 이들 역시 오퍼레이터와 같은 위험에 노출돼있습니다.

클린룸에서 일하고 있는 오퍼레이터들. 독성 화학물질에 노출될 위험이 늘 따라다닙니다.
"가장 공신력 있는 조사"...작업환경이 발병에 영향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은 혈액암 발생에 기여한 특정한 원인을 확인하지는 못했다고 밝혔습니다. 과거 자료가 부족해서 노출된 물질이 무엇인지, 얼마나 오래 노출됐는지 정확히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연구원은 다만 조사 결과를 종합할 때, 반도체 공장의 작업환경이 발병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습니다. 그동안 나온 관련 조사 중에서 이번이 가장 공신력 있는 조사라고 보면 된다는 게 연구원 측의 설명입니다.

이번 조사 결과는 향후 산재처리 등에서 참고자료로 활용됩니다. 안전보건공단은 건강영향에 대한 추가 연구를 실시하자고 제안했습니다. 이와 함께 전자산업 안전·보건센터를 만들어 위험 관리 체계를 운영할 계획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예방적·근본적 대책 시급...사후약방문 안되려면?

반도체 근로자 인권단체 반올림은 이번 조사 결과에 대해 일단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반도체 작업 환경과 질병 사이에 연관이 있다는 그동안의 외침이 이제야 확인되고 받아들여 졌다는 뜻이니까요.

반올림측은 앞으로 정부나 기업이 보상뿐만 아니라 예방 차원의 대책을 내놔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특히 기업은 영업비밀 뒤에 숨지 말고, 작업환경정보를 제공해 더 이상의 피해를 막아야 한다고 촉구했습니다.

이번 조사는 그 자체로 의미가 크지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반도체 업체의 많은 사업장은 협력업체를 두고 있는데, 협력업체 근로자들은 조사 대상에서 빠진 겁니다. 예방정비 분야 등에서 일하는 사내 협력업체 근로자들 역시 고위험군이라 할 수 있지만, 정확한 상관관계를 알아보지 못한 건 앞으로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반도체 사업장마저 '위험의 외주화'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인지, 정부가 더욱더 세심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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