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행 그 후 10년…피해자는 정신과 치료, 가해자들은 국가대표

입력 2019.05.24 (19:42)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10년 전 그 일

KBS는 10년 전 국가대표 아이스하키 성폭행 사건에 대해 최근 연속 보도했습니다. 국가대표 아이스하키 선수 김 모 씨와 이 모 씨가 여성 유 모 씨를 차례로 성폭행한 사건입니다. 해당 사건은 검찰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습니다. 검찰 처분과 관련해 석연찮은 정황이 있다는 내용은 앞서 보도해 드렸습니다.

[연관기사] “10년 전 국대 아이스하키 선수들의 성폭행을 고발합니다”

그 후로 10년. 피해자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지만, 김 씨와 이 씨는 재판에 넘겨지지 않으면서 아무런 처벌이나 징계도 받지 않고 국가대표 선수로 또 프로팀 선수로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지난 5일 카자흐스탄에서 2019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세계선수권 디비전 1 그룹 A 대회가 막을 내렸습니다. 10년 전 유 씨를 성폭행한 혐의가 인정된 이 모 씨와 김 모 씨 2명은 이 대회에서도 태극마크를 달고 뛰었습니다.

따져봤더니 2009년 11월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뒤 지금까지 김 씨는 13차례, 이 씨는 8차례나 태극 마크를 달고 국제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이 중 김 씨는 지난해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도 국가대표로 뛰었습니다.

이들은 지난 10년 동안 국가대표라는 타이틀을 달고, 국민의 세금으로 각종 훈련과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과연 아무 문제가 없었던 걸까요?

아이스하키 국가대표 선발규정 제5조 5항입니다.

성추행, 성희롱 등 성과 관련된 범죄행위로 선수 또는 지도자가 자격정지의 징계처분을 받고 징계가 만료된 날부터 자격정지 기간을 가산하여 그 기간이 만료되지 아니한 사람(다만, 5년 이상의 자격정지를 받은 사람은 영구히 국가대표가 될 수 없다)

간단합니다. 징계위원회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 씨 와 이 씨 모두 이 사건으로 찰나의 '자격정지' 처분도 받지 않았습니다. 협회는 KBS의 취재 이전까지는 두 선수의 성폭행 사건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으니, 협회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취재 결과 2009년 당시 협회 관계자는 이 사실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KBS와의 통화에서 "사건을 나중에 알았다. 무슨 일이 있었다고 그러더라. 문제가 없었다고 했겠지"라고 답변했습니다.


취재 과정에서 당시 협회에서 일했던 관계자들은 이 사건을 취재하는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10년 전 일을 가지고 굳이 왜 취재를 하냐", "앞날 창창한 선수들 앞길을 막는 것이 아니냐" 등의 발언들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국가대표 선수는 국민의 세금으로, 국민을 대표해 경기에 임하는 사람들입니다. 몸과 마음이 누구보다 건강하고 바른 이들이어야 합니다. 일반인의 도덕성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이들이 나라를 대표해 경기에 참여한 것 자체가 큰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이들의 범죄 사실에 대해 인지했으면서도, 10년 동안 어떠한 징계나 처분을 내리지 않은 협회는 분명 직무 유기의 책임이 있습니다.

반성 없는 가해자들...피해자는 고통의 10년

다시 피해자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사건 당시 가해자 어머니들은 유 씨에게 합의해 달라고 간곡히 호소했다고 합니다. 가해자 변호인은 합의해도 이 씨와 김 씨가 처벌받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고 합니다. 성폭행 사건이 발생한 직후였습니다. 경황이 없었던 유 씨는 여러 고민 끝에 합의해 줬습니다.

하지만 가해자 측은 약속한 합의금조차 일부는 뒤늦게 지급했습니다. 성폭행 피해자인 유 씨가 오히려 합의금을 왜 안주냐고 다퉈야 하는 황당한 상황이 일어난 거죠. 유 씨가 당초 합의를 했다가 이후 수사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요청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결국, 검찰의 처분 직전 유 씨는 이들이 써 온 '처벌불원서'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이들이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반성하고 살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한 번 이들과 관련된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들이 2014년 군 복무 중 병장 시절에 숙소를 무단으로 이탈한 것이 드러나 한동안 소속팀 출전 정지와 국가대표 선수 자격 박탈이란 징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유 씨는 이때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들이 결국 처벌받지 않기 위해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또 본인을 차례로 성폭행하고도 아무 징계도 받지 않았던 이들이 해당 사건으로는 '출전 정지'와 '국가대표 자격 박탈'이란 징계를 받은 것도 유 씨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런 징계마저도 길지는 않았습니다. 아이스하키 대표팀의 전력 보강을 이유로 이듬해 이들은 팀에 복귀했습니다. TV에서 이들과 관련된 뉴스가 흘러나올 때마다 유 씨는 극심한 분노와 억울함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KBS 취재진과 인터뷰한 유 씨KBS 취재진과 인터뷰한 유 씨

지난 10년 동안 유 씨는 6차례나 자살 시도를 했습니다. 정신과 치료도 많이 받았습니다.

유 씨는 말합니다.

"저는 저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잃었어요. 아니 모든 걸 다 잃었어요. 뭔가를 시도하려고 해도 두려움이 자꾸 올라왔어요. 당시 바깥에도 못 나갔고,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했어요. 살고 싶었던 의욕이 없었고, 살 이유도 없었어요. 그 무엇도 내 편이 아닌 기분. 원망도 많았고, 정신과 치료도 받았어요."

유 씨는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린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범죄를 한 사람이 국가대표로 운동선수가 되고, 그걸로 징계도 받지 않고 너무나 잘살고 있잖아요. 성폭행 가해자들이 그렇게 계속 사는 게 전 너무 이해가 안 돼요. 이들을 응징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보를 한 건 아니에요. 다만 이런 문제가 또다시 반복되지 않길 바라요. 대한민국 사회 정의에 대한 의문도 제기하고 싶고요. 피해자는 숨죽이며 고통받고, 가해자는 계속 나라를 대표해 활동해도 되는 것인지. 저는 정말 묻고 싶습니다."

2009년 3월에 일어난 국가대표 선수들의 성폭행 사건은 일어난 지 10년 만인 2019년 5월에 알려졌습니다. 그동안 피해자와 가해자의 시간은 다르게 흘렀습니다. 한 사람이 음지에서 고통을 받는 사이 누군가는 국민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태극마크를 달고 뛰었습니다.

누군가는 10년이나 지난 일에 문제 제기하는 것을 놓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왜 합의해놓고 문제 삼느냐고 따질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정의'의 문제입니다. 사건 이후 피해자만 겪어야 하는 가혹한 시간은 결코 옳지 않을 겁니다. 성폭행 가해자가 다른 이유로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당했다가 쉽게 복권된 것 역시 결코 옳은 일이 아닐 겁니다. 이번 사건이 '죄와 벌'에 대해 고민을 안기는 이유입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성폭행 그 후 10년…피해자는 정신과 치료, 가해자들은 국가대표
    • 입력 2019-05-24 19:42:38
    취재K
10년 전 그 일

KBS는 10년 전 국가대표 아이스하키 성폭행 사건에 대해 최근 연속 보도했습니다. 국가대표 아이스하키 선수 김 모 씨와 이 모 씨가 여성 유 모 씨를 차례로 성폭행한 사건입니다. 해당 사건은 검찰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습니다. 검찰 처분과 관련해 석연찮은 정황이 있다는 내용은 앞서 보도해 드렸습니다.

[연관기사] “10년 전 국대 아이스하키 선수들의 성폭행을 고발합니다”

그 후로 10년. 피해자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지만, 김 씨와 이 씨는 재판에 넘겨지지 않으면서 아무런 처벌이나 징계도 받지 않고 국가대표 선수로 또 프로팀 선수로 활발하게 활동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지난 5일 카자흐스탄에서 2019 국제아이스하키연맹(IIHF) 세계선수권 디비전 1 그룹 A 대회가 막을 내렸습니다. 10년 전 유 씨를 성폭행한 혐의가 인정된 이 모 씨와 김 모 씨 2명은 이 대회에서도 태극마크를 달고 뛰었습니다.

따져봤더니 2009년 11월 기소유예 처분을 받은 뒤 지금까지 김 씨는 13차례, 이 씨는 8차례나 태극 마크를 달고 국제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이 중 김 씨는 지난해 평창 동계올림픽에서도 국가대표로 뛰었습니다.

이들은 지난 10년 동안 국가대표라는 타이틀을 달고, 국민의 세금으로 각종 훈련과 지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과연 아무 문제가 없었던 걸까요?

아이스하키 국가대표 선발규정 제5조 5항입니다.

성추행, 성희롱 등 성과 관련된 범죄행위로 선수 또는 지도자가 자격정지의 징계처분을 받고 징계가 만료된 날부터 자격정지 기간을 가산하여 그 기간이 만료되지 아니한 사람(다만, 5년 이상의 자격정지를 받은 사람은 영구히 국가대표가 될 수 없다)

간단합니다. 징계위원회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 씨 와 이 씨 모두 이 사건으로 찰나의 '자격정지' 처분도 받지 않았습니다. 협회는 KBS의 취재 이전까지는 두 선수의 성폭행 사건을 전혀 알지 못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으니, 협회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취재 결과 2009년 당시 협회 관계자는 이 사실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 KBS와의 통화에서 "사건을 나중에 알았다. 무슨 일이 있었다고 그러더라. 문제가 없었다고 했겠지"라고 답변했습니다.


취재 과정에서 당시 협회에서 일했던 관계자들은 이 사건을 취재하는 자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10년 전 일을 가지고 굳이 왜 취재를 하냐", "앞날 창창한 선수들 앞길을 막는 것이 아니냐" 등의 발언들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국가대표 선수는 국민의 세금으로, 국민을 대표해 경기에 임하는 사람들입니다. 몸과 마음이 누구보다 건강하고 바른 이들이어야 합니다. 일반인의 도덕성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이들이 나라를 대표해 경기에 참여한 것 자체가 큰 문제입니다.

무엇보다 이들의 범죄 사실에 대해 인지했으면서도, 10년 동안 어떠한 징계나 처분을 내리지 않은 협회는 분명 직무 유기의 책임이 있습니다.

반성 없는 가해자들...피해자는 고통의 10년

다시 피해자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사건 당시 가해자 어머니들은 유 씨에게 합의해 달라고 간곡히 호소했다고 합니다. 가해자 변호인은 합의해도 이 씨와 김 씨가 처벌받을 수 있다고 설득했다고 합니다. 성폭행 사건이 발생한 직후였습니다. 경황이 없었던 유 씨는 여러 고민 끝에 합의해 줬습니다.

하지만 가해자 측은 약속한 합의금조차 일부는 뒤늦게 지급했습니다. 성폭행 피해자인 유 씨가 오히려 합의금을 왜 안주냐고 다퉈야 하는 황당한 상황이 일어난 거죠. 유 씨가 당초 합의를 했다가 이후 수사과정에서 이들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요청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결국, 검찰의 처분 직전 유 씨는 이들이 써 온 '처벌불원서'에 도장을 찍었습니다. 이들이 자신의 죄를 진심으로 반성하고 살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또 한 번 이들과 관련된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들이 2014년 군 복무 중 병장 시절에 숙소를 무단으로 이탈한 것이 드러나 한동안 소속팀 출전 정지와 국가대표 선수 자격 박탈이란 징계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유 씨는 이때 매우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이들이 결국 처벌받지 않기 위해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죠. 또 본인을 차례로 성폭행하고도 아무 징계도 받지 않았던 이들이 해당 사건으로는 '출전 정지'와 '국가대표 자격 박탈'이란 징계를 받은 것도 유 씨를 힘들게 했습니다.

그런 징계마저도 길지는 않았습니다. 아이스하키 대표팀의 전력 보강을 이유로 이듬해 이들은 팀에 복귀했습니다. TV에서 이들과 관련된 뉴스가 흘러나올 때마다 유 씨는 극심한 분노와 억울함을 느꼈다고 말합니다.

KBS 취재진과 인터뷰한 유 씨
지난 10년 동안 유 씨는 6차례나 자살 시도를 했습니다. 정신과 치료도 많이 받았습니다.

유 씨는 말합니다.

"저는 저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잃었어요. 아니 모든 걸 다 잃었어요. 뭔가를 시도하려고 해도 두려움이 자꾸 올라왔어요. 당시 바깥에도 못 나갔고, 끊임없이 자살을 시도했어요. 살고 싶었던 의욕이 없었고, 살 이유도 없었어요. 그 무엇도 내 편이 아닌 기분. 원망도 많았고, 정신과 치료도 받았어요."

유 씨는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린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성범죄를 한 사람이 국가대표로 운동선수가 되고, 그걸로 징계도 받지 않고 너무나 잘살고 있잖아요. 성폭행 가해자들이 그렇게 계속 사는 게 전 너무 이해가 안 돼요. 이들을 응징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보를 한 건 아니에요. 다만 이런 문제가 또다시 반복되지 않길 바라요. 대한민국 사회 정의에 대한 의문도 제기하고 싶고요. 피해자는 숨죽이며 고통받고, 가해자는 계속 나라를 대표해 활동해도 되는 것인지. 저는 정말 묻고 싶습니다."

2009년 3월에 일어난 국가대표 선수들의 성폭행 사건은 일어난 지 10년 만인 2019년 5월에 알려졌습니다. 그동안 피해자와 가해자의 시간은 다르게 흘렀습니다. 한 사람이 음지에서 고통을 받는 사이 누군가는 국민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태극마크를 달고 뛰었습니다.

누군가는 10년이나 지난 일에 문제 제기하는 것을 놓고, 의문을 품을 수도 있습니다. 왜 합의해놓고 문제 삼느냐고 따질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정의'의 문제입니다. 사건 이후 피해자만 겪어야 하는 가혹한 시간은 결코 옳지 않을 겁니다. 성폭행 가해자가 다른 이유로 국가대표 자격을 박탈당했다가 쉽게 복권된 것 역시 결코 옳은 일이 아닐 겁니다. 이번 사건이 '죄와 벌'에 대해 고민을 안기는 이유입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