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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후] 인공혈관 재공급과 ‘엄마·아빠의 힘’
입력 2019.05.25 (11:59) 수정 2019.05.25 (11:59) 취재후
[취재후] 인공혈관 재공급과 ‘엄마·아빠의 힘’
5월 23일 오후,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의료기기 제조업체인 미국의 고어(GORE)사가 소아심장 수술에 꼭 필요한 인공혈관을 다시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한국선천성심장병환우회와 대한흉부외과학회가 소아심장 수술에 필요하다며 요청한 인공혈관 등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로 고어사와 합의했다”고 밝혔다.

선천성심장병환우회 부모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지난 3월 초 소아심장병 환자와 보호자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인공혈관이 부족해 수술을 무기한 연기한다는 것이다.

네 살 난 아들의 수술을 기다리고 있던 김진희 씨는 “의술 자체는 세계적인데 단순히 재료가 없어서 수술을 못 한다니까 황당하기도 하고 또 언제까지 기다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어서 앞이 깜깜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소아심장 수술인 폰탄 수술소아심장 수술인 폰탄 수술

소아심장 수술, 이른바 폰탄 수술은 인공혈관으로 심장정맥을 폐동맥에 직접 이어주는 수술이다. 이 수술에서는 혈관 안에 혈전이 생길 가능성이 높은 만큼 인공혈관의 재질이 중요하다. 현재 고어사 제품이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윤태진 대한흉부심장혈관외과학회 이사는 “고어사 인공혈관은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굉장히 좋은 성적을 보이고 있어 다른 제품을 사용한다는 것은 임상에 있는 전문가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2017년 9월 고어사 메디컬사업부가 낮은 건강보험 수가 등을 이유로 한국 시장에서 철수하면서 국내 병원에서는 재고만으로 소아심장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러다가 재고마저 소진돼 수술 중단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충북 오송의 식품의약품안전처충북 오송의 식품의약품안전처

수술 중단 등으로 여론이 악화되자 식약처는 고어사와 접촉해 당장 필요한 인공혈관 20개와 봉합사(수술 뒤 꿰매는 데 필요한 실) 등을 공급받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급한 불만 끈 격이었다.

고어사가 여전히 12, 14, 22, 24mm 등 4종류의 인공혈관과 3종류의 인조포(심장을 둘러싼 막인 심낭 수술에 필요한 섬유)에 대해서는 공급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품목들도 소아 심장 수술에 꼭 필요한 재료들이다. 하지만 심장수술이 일단 재개되자 언론의 뜨거운 관심도 점차 사그라졌다.


심장병 환우와 보호자 단체인 ‘한국선천성심장병환우회’는 달랐다. 소아심장 수술과 관련한 치료재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심장병환우회는 위에서 언급한 종류의 인공혈관과 인조포가 공급되지 않으면 제2, 제3의 수술 중단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심장병환우회는 계속해서 고어사와 이메일 등을 통해 인공혈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공급 재개 요청을 했다.

이와 함께 ‘인공혈관 공급 촉구 걷기 캠페인’도 벌였다. 남한강을 따라 100km를 걸으면서 인공혈관 등 치료재료가 심장병어린이들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리는 동시에 고어사에게는 하루빨리 치료재료를 공급해달라고 요청했다.

환우회는 ‘걷기 캠페인’을 마치면서 이런 간절한 마음을 담아 고어사에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만약 이번에도 고어사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환우회는 기자회견이나 1인 시위, 집회 등 보다 강경한 활동을 벌일 계획이었다.

당시 식약처도 고어사와 접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어사는 우리 정부에게도 공급 재개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성홍모 식약처 의료기기정책과 사무관은 “고어사가 국내에 계속 공급하겠다, 안 하겠다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등 확답을 주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마침내 고어사가 답변을 해왔다. 14일 고어사는 환우회에 연락해 그동안 공급을 중단했던 인공혈관과 인조포를 제공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어 식약처와의 접촉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마침내 22일 공문을 통해 환우회와 학회에서 추가로 필요하다고 요청한 소아용 인공혈관 4개 모델과 인조포 3개 모델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로 식약처와 합의했다.

고어사가 한국 시장에서 철수한 지 1년 8개월 만이다.


‘인공혈관 부족 사태’ 해결에는 관련 학회와 정부, 환자 단체의 노력이 큰 힘이 됐다. 특히 한국선청성심장병환우회의 활동은 눈부셨다. 이 단체는 지난 2년 동안 ‘치료재료는 심장병 어린이들의 생명입니다’라는 캠페인을 통해 인공혈관 부족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이번에도 심장병환우회가 적극적으로 나서 고어사와 논의해 추가 공급 재개 합의를 이끌어냈다.

심장병환우회는 지난 2003년 선천성심장병 어린이 부모들이 모여 만든 단체이다. 이 단체는 그동안 ‘우리아기심장알기 강연회’와 ‘심폐소생술 교육’, ‘선천성심장병 인식 개선 운동’ 등 다양한 공익 활동을 펼쳐 왔다.


기자는 <시사기획 창 – 인공혈관, 예고된 혼란> 편을 제작하기 위해 환우회 활동을 두 달 가까이 지켜봤다. 활동 중인 회원 대부분은 이미 오래전에 심장병 수술을 마친 아이를 둔 부모였으나 이들은 마치 수술을 앞둔 애를 가진 보호자 마냥 너무 열심히 캠페인을 벌였다. 대단한 열정이었다.

환우회 회원인 김관주 씨는 “같은 경험을 했다는 공감대 때문에 서로의 마음을 더 쉽게 이해하는 것 같다. 서로가 겪은 고통을, 비록 차이는 있을지라도 비슷하게 경험했다는 것 자체가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인공혈관 공급 재개 촉구 캠페인을 실질적으로 이끈 안상호 심장병환우회 대표에게 기자가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며 축하의 말을 건네자 안 대표는 “지난 고생은 이미 과거이니 고생이 아니다. 또 앞을 향해 걸어간다”고 답했다.

또다시 어떤 형태의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오더라도 지금처럼 꿋꿋하게 헤쳐나가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 [취재후] 인공혈관 재공급과 ‘엄마·아빠의 힘’
    • 입력 2019.05.25 (11:59)
    • 수정 2019.05.25 (11:59)
    취재후
[취재후] 인공혈관 재공급과 ‘엄마·아빠의 힘’
5월 23일 오후, 기쁜 소식이 날아들었다. 의료기기 제조업체인 미국의 고어(GORE)사가 소아심장 수술에 꼭 필요한 인공혈관을 다시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한국선천성심장병환우회와 대한흉부외과학회가 소아심장 수술에 필요하다며 요청한 인공혈관 등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로 고어사와 합의했다”고 밝혔다.

선천성심장병환우회 부모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지난 3월 초 소아심장병 환자와 보호자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인공혈관이 부족해 수술을 무기한 연기한다는 것이다.

네 살 난 아들의 수술을 기다리고 있던 김진희 씨는 “의술 자체는 세계적인데 단순히 재료가 없어서 수술을 못 한다니까 황당하기도 하고 또 언제까지 기다릴지 알 수 없는 상황이어서 앞이 깜깜했다”고 당시 상황을 회고했다.

소아심장 수술인 폰탄 수술소아심장 수술인 폰탄 수술

소아심장 수술, 이른바 폰탄 수술은 인공혈관으로 심장정맥을 폐동맥에 직접 이어주는 수술이다. 이 수술에서는 혈관 안에 혈전이 생길 가능성이 높은 만큼 인공혈관의 재질이 중요하다. 현재 고어사 제품이 전 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윤태진 대한흉부심장혈관외과학회 이사는 “고어사 인공혈관은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굉장히 좋은 성적을 보이고 있어 다른 제품을 사용한다는 것은 임상에 있는 전문가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다”고 말했다.

하지만 2017년 9월 고어사 메디컬사업부가 낮은 건강보험 수가 등을 이유로 한국 시장에서 철수하면서 국내 병원에서는 재고만으로 소아심장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그러다가 재고마저 소진돼 수술 중단 사태가 발생하게 된다.

충북 오송의 식품의약품안전처충북 오송의 식품의약품안전처

수술 중단 등으로 여론이 악화되자 식약처는 고어사와 접촉해 당장 필요한 인공혈관 20개와 봉합사(수술 뒤 꿰매는 데 필요한 실) 등을 공급받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급한 불만 끈 격이었다.

고어사가 여전히 12, 14, 22, 24mm 등 4종류의 인공혈관과 3종류의 인조포(심장을 둘러싼 막인 심낭 수술에 필요한 섬유)에 대해서는 공급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품목들도 소아 심장 수술에 꼭 필요한 재료들이다. 하지만 심장수술이 일단 재개되자 언론의 뜨거운 관심도 점차 사그라졌다.


심장병 환우와 보호자 단체인 ‘한국선천성심장병환우회’는 달랐다. 소아심장 수술과 관련한 치료재료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심장병환우회는 위에서 언급한 종류의 인공혈관과 인조포가 공급되지 않으면 제2, 제3의 수술 중단 사태가 발생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심장병환우회는 계속해서 고어사와 이메일 등을 통해 인공혈관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공급 재개 요청을 했다.

이와 함께 ‘인공혈관 공급 촉구 걷기 캠페인’도 벌였다. 남한강을 따라 100km를 걸으면서 인공혈관 등 치료재료가 심장병어린이들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리는 동시에 고어사에게는 하루빨리 치료재료를 공급해달라고 요청했다.

환우회는 ‘걷기 캠페인’을 마치면서 이런 간절한 마음을 담아 고어사에 마지막 편지를 보냈다. 만약 이번에도 고어사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 환우회는 기자회견이나 1인 시위, 집회 등 보다 강경한 활동을 벌일 계획이었다.

당시 식약처도 고어사와 접촉하고 있었다. 하지만 고어사는 우리 정부에게도 공급 재개에 대한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성홍모 식약처 의료기기정책과 사무관은 “고어사가 국내에 계속 공급하겠다, 안 하겠다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는 등 확답을 주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마침내 고어사가 답변을 해왔다. 14일 고어사는 환우회에 연락해 그동안 공급을 중단했던 인공혈관과 인조포를 제공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이어 식약처와의 접촉에서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마침내 22일 공문을 통해 환우회와 학회에서 추가로 필요하다고 요청한 소아용 인공혈관 4개 모델과 인조포 3개 모델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로 식약처와 합의했다.

고어사가 한국 시장에서 철수한 지 1년 8개월 만이다.


‘인공혈관 부족 사태’ 해결에는 관련 학회와 정부, 환자 단체의 노력이 큰 힘이 됐다. 특히 한국선청성심장병환우회의 활동은 눈부셨다. 이 단체는 지난 2년 동안 ‘치료재료는 심장병 어린이들의 생명입니다’라는 캠페인을 통해 인공혈관 부족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이번에도 심장병환우회가 적극적으로 나서 고어사와 논의해 추가 공급 재개 합의를 이끌어냈다.

심장병환우회는 지난 2003년 선천성심장병 어린이 부모들이 모여 만든 단체이다. 이 단체는 그동안 ‘우리아기심장알기 강연회’와 ‘심폐소생술 교육’, ‘선천성심장병 인식 개선 운동’ 등 다양한 공익 활동을 펼쳐 왔다.


기자는 <시사기획 창 – 인공혈관, 예고된 혼란> 편을 제작하기 위해 환우회 활동을 두 달 가까이 지켜봤다. 활동 중인 회원 대부분은 이미 오래전에 심장병 수술을 마친 아이를 둔 부모였으나 이들은 마치 수술을 앞둔 애를 가진 보호자 마냥 너무 열심히 캠페인을 벌였다. 대단한 열정이었다.

환우회 회원인 김관주 씨는 “같은 경험을 했다는 공감대 때문에 서로의 마음을 더 쉽게 이해하는 것 같다. 서로가 겪은 고통을, 비록 차이는 있을지라도 비슷하게 경험했다는 것 자체가 큰 힘이 된다”고 말했다.

인공혈관 공급 재개 촉구 캠페인을 실질적으로 이끈 안상호 심장병환우회 대표에게 기자가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며 축하의 말을 건네자 안 대표는 “지난 고생은 이미 과거이니 고생이 아니다. 또 앞을 향해 걸어간다”고 답했다.

또다시 어떤 형태의 어려움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것이 오더라도 지금처럼 꿋꿋하게 헤쳐나가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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