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3대 정원 ‘성락원’ 이조판서 별장이라더니…

입력 2019.05.26 (10:02) 수정 2019.05.26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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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여러 매체에서 보도해 화제가 된 문화재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서울 성북구에 있는 명승 제35호 '성락원'입니다. 1992년 처음 사적으로 지정됐다가 2008년 명승으로 다시 지정된 조선시대 정원인데요.

"한국 3대정원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성락원이 23일 일반에 공개됐다. 성락원은 서울 도심 속 전통정원으로 고종의 아들 의친왕 이강(1877~1955)이 35년동안 별궁으로 쓰던 곳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본거지로도 이용됐다. 이전에는 조선 철종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이었다." - 4월 23일자 <한겨레>

"성락원은 조선 정조 시절인 1790년대 황지사가 처음 조성했다. 19세기 철종 시절엔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이 정원으로 썼고, 일제강점기에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이 35년간 별장으로 썼다." - 5월 1일자 <조선일보>


이 밖에도 여러 신문과 방송사에서 성락원에 대해 보도했습니다. 공통적으로 성락원이 철종 시대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이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인터넷 매체와 SNS에서 이런 내용이 거짓이라는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정말일까요? 문화재청에 정식으로 답변을 요청하고, 확인했습니다.

[연관기사][뉴스9]‘조선 3대 비밀정원’ 성락원, 이조판서 별장인 줄 알았는데…

■ 성락원은 철종 시대 이조판서 지낸 심상응의 별서일까?

성락원을 별서로 썼다는 심상응이라는 인물은 어떤 인물일까요? 알려진 것과 달리,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공개한 승정원일기 기록을 보면 고종 시대에 주사를 지낸 인물이 한 사람 나옵니다. "경기관찰부 주사에 심상응(沈相應)을 임용하고, 내부 주사에 홍붕관(洪鵬觀)을 임용하였다"고 돼 있습니다. 장관급인 판서와는 달리 주사는 실무직 정도에 불과합니다.

고종 35년 2월 22일 승정원일기에 등장하는 ‘심상응’이라는 인물의 관련 기록은 이조판서가 아닌 경기관찰부 주사에 임용한다는 내용입니다.고종 35년 2월 22일 승정원일기에 등장하는 ‘심상응’이라는 인물의 관련 기록은 이조판서가 아닌 경기관찰부 주사에 임용한다는 내용입니다.

문화재청도 "이 이름에 대한 문헌적인 근거를 발견하지는 못했다"고 답변했습니다.

혹시 청송 심씨 족보에는 올라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청송 심씨 대종회에 문의했습니다. 대종회 관계자는 "(이조판서를 했다는)심상응과 관련된 인물들을 족보에서 찾을 수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또 과거 관직을 맡았던 인물이 족보에서 빠지는 일은 드물다고도 덧붙였습니다.

결국 성락원과 관련된 '심상응'이 고종 때 인물인지, 철종 때 인물인지, 또는 이조판서였는지, 주사였는지, 혹은 전혀 다른 인물인지 근거를 통해서 확인된 내용은 '아직' 없다는 겁니다.

■ 정자와 연못은 1950년대 들어서야 조성돼

한편 성락원에 대해서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있습니다. 바로 성락원의 대표적인 건축물 '송석정'이라는 정자와 그 앞에 있는 연못의 조성 시기인데요.

성락원 안에 있기 때문에 조선 시대부터 있었던 건축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1950년대 들어서야 만들어진 곳입니다.

1961년 6월 2일자 동아일보, ‘현대식 종합 공원, 의친왕 별저 자리에’1961년 6월 2일자 동아일보, ‘현대식 종합 공원, 의친왕 별저 자리에’

1961년 6월 2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이 안에 성락원이란 이름의 종합적인 관광시설을 갖춘 현대식 공원을 만든다는 것이다"라면서 "공사는 7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 "중심부에 연못을 파고 그 옆에 지은 수각정은 고목을 베지 않고"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수각정'은 지금의 송석정을 일컫습니다.

'성락원'을 관리해 온 한국가구박물관 관계자는 "정자와 연못은 1953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이런 내용은 성락원에 방문하는 시민들은 안내를 받을 수 있지만, 일반 시민들에게는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고 있지 않습니다. 성락원 입구에 있는 안내문에도 송석정의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 문화재 가치 '있다' vs '없다' 논쟁까지…왜 불확실한 정보 그대로 퍼졌을까?

성락원을 사적으로 지정할 당시 작성된 조사 보고서성락원을 사적으로 지정할 당시 작성된 조사 보고서


가. 연혁
○ 성락원은 조선철종(재위 : 1849~1863)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沈相應)의 별장이었으나 의친왕 이강(李堈 : 1877~1955)공이 35년간 살아 별궁(別宮)으로 사용되기도 한 곳이다. - 1994.5.,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사적)지정자료

1992년 성락원이 처음 문화재로 지정될 때 조사보고서입니다. 이 문서 역시, 어떤 사료를 참고했는지 출처는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화재청은 2008년 성락원을 명승으로 다시 분류할 때에도 이 내용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이 때 이런 내용을 다시 검토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 의문에 대해 문화재청은 "이 과정의 검토는 문화재의 성격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아쉽게도 이 부분은 검증되지 못했다"고 답변했습니다. 또 "다만 2012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연구 결과 인물과 연혁 등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내용에 대해 이미 밝힌 바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13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논문을 확인해봐도 '심상응'에 대한 내용은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인물이라는 내용 그대로입니다.

문화재청이나 한국가구박물관이 불확실한 내용을 적극적으로 바로 잡으려 하지 않은 사이, 문헌적 근거가 없는 내용이 사실처럼 일반에 퍼졌습니다. 이 때문에 인터넷에서 성락원의 문화재 가치 유무 논쟁까지 일었습니다. 한국가구박물관 관계자는 "일부 역사적 사실이 불명확하다고 해서 성락원의 가치마저 폄하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면서 "성락원이라는 정원이 실제로 조선시대 때부터 내려져 와 현존하고 있으니 경관적 가치에 더 주목해줬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문화재청의 입장도 '배경 중 일부가 틀렸다 해도 성락원의 가치 평가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성락원의 문화재 가치는,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던 선조의 전통문화를 잘 보여주는 정원 유산이라는 것입니다. 바위에 새겨진 많은 각자(刻字)글씨, 적당한 위치에 세워진 정자, 물 흐르는 경치와 소리를 듣던 계류, 이러한 전통적인 조경 요소들이 아주 잘 남아있습니다. 일부 연혁이 분명치 않은 점은 있지만, 아름다운 숲과 흐르는 물과 그 속의 사람이 하나 되는 명승 문화재로서 부족함이 없습니다." - 문화재청

또 "확인되지 않은 내용은 보완해나가도록 하겠다"며 현재 연혁을 포함한 역사적 근거에 대한 용역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용역을 수행하고 있는 주체는 성북구청인데요, 지난해 4월부터 올해 7월까지 성락원을 어떻게 복원할지 연구한다고 합니다. 이 안에 성락원의 연혁 등 사료 연구가 포함되는 겁니다.

성북구청의 연구 용역에는 1억2천만 원이 들어갔습니다. 성락원 복원 사업에는 2017년부터 예산이 20억 넘게 투입됐습니다.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역사적 배경에 대한 기초적 사실조차 정확히 확인되지 않은 채로 알려진 겁니다. '명승'은 국가가 지정하는 문화재입니다. 그런데도 객관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먼저 내세운 뒤에 추후 근거를 보완하겠다고 하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성락원이 오랜 시간 제자리를 지키며 현존하고 있으며 경관적 가치가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불명확한 사실은 확실히 한 뒤 진정한 가치를 봐달라고 해야 '명승' 성락원의 아름다움이 더 부각되지 않을까요?

문화재청에서 성락원을 유일하게 연구하고 있다는 이원호 박사는 "아직 관련 연구가 진행 중이고, 지금까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활발하게 연구되지 않았다"며 "이번 기회에 조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한국 정원의 아름다움이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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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3대 정원 ‘성락원’ 이조판서 별장이라더니…
    • 입력 2019-05-26 10:02:33
    • 수정2019-05-26 22:10:51
    취재K
얼마 전 여러 매체에서 보도해 화제가 된 문화재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서울 성북구에 있는 명승 제35호 '성락원'입니다. 1992년 처음 사적으로 지정됐다가 2008년 명승으로 다시 지정된 조선시대 정원인데요.

"한국 3대정원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성락원이 23일 일반에 공개됐다. 성락원은 서울 도심 속 전통정원으로 고종의 아들 의친왕 이강(1877~1955)이 35년동안 별궁으로 쓰던 곳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본거지로도 이용됐다. 이전에는 조선 철종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이었다." - 4월 23일자 <한겨레>

"성락원은 조선 정조 시절인 1790년대 황지사가 처음 조성했다. 19세기 철종 시절엔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이 정원으로 썼고, 일제강점기에는 고종의 다섯째 아들인 의친왕 이강이 35년간 별장으로 썼다." - 5월 1일자 <조선일보>


이 밖에도 여러 신문과 방송사에서 성락원에 대해 보도했습니다. 공통적으로 성락원이 철종 시대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의 별장이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런데 얼마 전 인터넷 매체와 SNS에서 이런 내용이 거짓이라는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정말일까요? 문화재청에 정식으로 답변을 요청하고, 확인했습니다.

[연관기사][뉴스9]‘조선 3대 비밀정원’ 성락원, 이조판서 별장인 줄 알았는데…

■ 성락원은 철종 시대 이조판서 지낸 심상응의 별서일까?

성락원을 별서로 썼다는 심상응이라는 인물은 어떤 인물일까요? 알려진 것과 달리,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가 없습니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공개한 승정원일기 기록을 보면 고종 시대에 주사를 지낸 인물이 한 사람 나옵니다. "경기관찰부 주사에 심상응(沈相應)을 임용하고, 내부 주사에 홍붕관(洪鵬觀)을 임용하였다"고 돼 있습니다. 장관급인 판서와는 달리 주사는 실무직 정도에 불과합니다.

고종 35년 2월 22일 승정원일기에 등장하는 ‘심상응’이라는 인물의 관련 기록은 이조판서가 아닌 경기관찰부 주사에 임용한다는 내용입니다.
문화재청도 "이 이름에 대한 문헌적인 근거를 발견하지는 못했다"고 답변했습니다.

혹시 청송 심씨 족보에는 올라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청송 심씨 대종회에 문의했습니다. 대종회 관계자는 "(이조판서를 했다는)심상응과 관련된 인물들을 족보에서 찾을 수 없었다"고 밝혔습니다. 또 과거 관직을 맡았던 인물이 족보에서 빠지는 일은 드물다고도 덧붙였습니다.

결국 성락원과 관련된 '심상응'이 고종 때 인물인지, 철종 때 인물인지, 또는 이조판서였는지, 주사였는지, 혹은 전혀 다른 인물인지 근거를 통해서 확인된 내용은 '아직' 없다는 겁니다.

■ 정자와 연못은 1950년대 들어서야 조성돼

한편 성락원에 대해서 일반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도 있습니다. 바로 성락원의 대표적인 건축물 '송석정'이라는 정자와 그 앞에 있는 연못의 조성 시기인데요.

성락원 안에 있기 때문에 조선 시대부터 있었던 건축물로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1950년대 들어서야 만들어진 곳입니다.

1961년 6월 2일자 동아일보, ‘현대식 종합 공원, 의친왕 별저 자리에’
1961년 6월 2일자 동아일보 기사를 보면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이 안에 성락원이란 이름의 종합적인 관광시설을 갖춘 현대식 공원을 만든다는 것이다"라면서 "공사는 7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또 "중심부에 연못을 파고 그 옆에 지은 수각정은 고목을 베지 않고"라는 대목이 나오는데, '수각정'은 지금의 송석정을 일컫습니다.

'성락원'을 관리해 온 한국가구박물관 관계자는 "정자와 연못은 1953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이런 내용은 성락원에 방문하는 시민들은 안내를 받을 수 있지만, 일반 시민들에게는 충분한 정보가 제공되고 있지 않습니다. 성락원 입구에 있는 안내문에도 송석정의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 문화재 가치 '있다' vs '없다' 논쟁까지…왜 불확실한 정보 그대로 퍼졌을까?

성락원을 사적으로 지정할 당시 작성된 조사 보고서

가. 연혁
○ 성락원은 조선철종(재위 : 1849~1863)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沈相應)의 별장이었으나 의친왕 이강(李堈 : 1877~1955)공이 35년간 살아 별궁(別宮)으로 사용되기도 한 곳이다. - 1994.5.,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사적)지정자료

1992년 성락원이 처음 문화재로 지정될 때 조사보고서입니다. 이 문서 역시, 어떤 사료를 참고했는지 출처는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화재청은 2008년 성락원을 명승으로 다시 분류할 때에도 이 내용을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이 때 이런 내용을 다시 검토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이 의문에 대해 문화재청은 "이 과정의 검토는 문화재의 성격에 대한 것이었기 때문에 아쉽게도 이 부분은 검증되지 못했다"고 답변했습니다. 또 "다만 2012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연구 결과 인물과 연혁 등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내용에 대해 이미 밝힌 바 있다"고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013년 국립문화재연구소의 논문을 확인해봐도 '심상응'에 대한 내용은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인물이라는 내용 그대로입니다.

문화재청이나 한국가구박물관이 불확실한 내용을 적극적으로 바로 잡으려 하지 않은 사이, 문헌적 근거가 없는 내용이 사실처럼 일반에 퍼졌습니다. 이 때문에 인터넷에서 성락원의 문화재 가치 유무 논쟁까지 일었습니다. 한국가구박물관 관계자는 "일부 역사적 사실이 불명확하다고 해서 성락원의 가치마저 폄하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면서 "성락원이라는 정원이 실제로 조선시대 때부터 내려져 와 현존하고 있으니 경관적 가치에 더 주목해줬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문화재청의 입장도 '배경 중 일부가 틀렸다 해도 성락원의 가치 평가에는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성락원의 문화재 가치는, 자연 속에서 풍류를 즐기던 선조의 전통문화를 잘 보여주는 정원 유산이라는 것입니다. 바위에 새겨진 많은 각자(刻字)글씨, 적당한 위치에 세워진 정자, 물 흐르는 경치와 소리를 듣던 계류, 이러한 전통적인 조경 요소들이 아주 잘 남아있습니다. 일부 연혁이 분명치 않은 점은 있지만, 아름다운 숲과 흐르는 물과 그 속의 사람이 하나 되는 명승 문화재로서 부족함이 없습니다." - 문화재청

또 "확인되지 않은 내용은 보완해나가도록 하겠다"며 현재 연혁을 포함한 역사적 근거에 대한 용역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용역을 수행하고 있는 주체는 성북구청인데요, 지난해 4월부터 올해 7월까지 성락원을 어떻게 복원할지 연구한다고 합니다. 이 안에 성락원의 연혁 등 사료 연구가 포함되는 겁니다.

성북구청의 연구 용역에는 1억2천만 원이 들어갔습니다. 성락원 복원 사업에는 2017년부터 예산이 20억 넘게 투입됐습니다. 결코 적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역사적 배경에 대한 기초적 사실조차 정확히 확인되지 않은 채로 알려진 겁니다. '명승'은 국가가 지정하는 문화재입니다. 그런데도 객관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먼저 내세운 뒤에 추후 근거를 보완하겠다고 하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성락원이 오랜 시간 제자리를 지키며 현존하고 있으며 경관적 가치가 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겁니다.
하지만, 아무리 사소할지라도 불명확한 사실은 확실히 한 뒤 진정한 가치를 봐달라고 해야 '명승' 성락원의 아름다움이 더 부각되지 않을까요?

문화재청에서 성락원을 유일하게 연구하고 있다는 이원호 박사는 "아직 관련 연구가 진행 중이고, 지금까지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활발하게 연구되지 않았다"며 "이번 기회에 조사가 활발하게 이루어져서 한국 정원의 아름다움이 많이 알려졌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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