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어디까지 보호해야 하나’…풍력학계에 불어닥친 ‘기술유출 폭풍’

입력 2019.05.29 (15:30) 수정 2019.05.29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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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국책 연구소 연구원, 대학으로 이직
이직하며 연구소 자료 옮겨
검찰, '기술 유출 혐의' 기소
1심 "유출 아니다" 무죄 선고

지난해 봄, 검찰 수사관들이 한국항공대 이학구 교수에게 들이닥쳤다. 압수수색이었다. 출근 시간 무렵에 집으로 찾아온 수사관들은 집과 학교 연구실을 뒤졌다.

대학에 오기 전 몸담았던 국책 연구소에서 기술을 유출한 혐의라고 했다.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구속기소까지 2달 만에 속전속결로 끝났다.

유죄가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이 사건은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산업기술보호법 위반,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업무상 배임 혐의 모두 무죄였다.

연구소에서 대학으로…자료도 옮겨

이 교수는 2009년부터 국책 연구소에서 일했다. 풍력발전기의 날개인 '블레이드'의 성능 실험이 주 연구 분야였다. 블레이드가 풍력발전에 적합하게 만들어졌는지 시험하는 일이다.

이 교수는 2017년 초 연구소를 나와 대학으로 옮겼다. 이때 연구소에서 가지고 있던 연구 자료를 모두 들고 나왔다. 600GB 정도 되는 분량이다. 이 교수는 "(연구소에서 맡았던) 국책 과제를 계속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정식 외부참여연구원 신분이었다"고 설명했다. 연구원 소속은 아니었지만, 자료를 활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학구 교수(왼쪽)가 블레이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학구 교수(왼쪽)가 블레이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교수는 연구소에서도 같이 일한 적이 있는 중국 업체와도 함께 일했다. 블레이드 성능 실험을 어떻게 할지 시험계획서를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연구소에서 들고나온 파일을 바탕으로 중국 업체에 맞게 내용을 바꿔서 계획서를 만들었다. 이 작업은 중국 업체와 학교와의 컨설팅 계약을 통해 이뤄졌다.

검찰 "돈 받고 기술 넘겼다"…구속기소

이 일은 국가정보원 산업기밀보호센터가 첩보로 입수했다. 첨단산업보호 중점 검찰청인 수원지검에서 수사를 맡았다.

검찰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투자한 국책 연구소의 기술을 이 교수가 중국 업체에서 수천만 원을 받고 넘겼다고 판단했다. 풍력발전은 그동안 나랏돈 600억 원이 들어갔고, 기술 수준이 세계 최고라고도 덧붙였다.

검찰은 이 교수에게 ①법적으로 보호 의무가 있는 산업기술을 연구소에서 가지고 나온 '산업기술보호법 위반 혐의', ②기술을 해외로 넘긴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혐의', ③기술을 빼돌려 연구소에 손해를 끼친 '업무상 배임 혐의'를 적용해 구속기소 했다. 나라에서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있는 분야의 기술을 해외로 넘긴 건 무거운 죄라고 판단했다.

수원지검의 ‘풍력 블레이드 산업기술 해외 유출 사건’ 보도자료 수원지검의 ‘풍력 블레이드 산업기술 해외 유출 사건’ 보도자료

'보호해야할 연구였나' 쟁점

이 사건의 쟁점은 문제가 된 자료가 '보호해야 할 연구였나'이다. 검찰은 그렇다는 입장이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해당 연구소에서 개인 외장 하드는 사용이 금지돼 있고, 사전 승인 없이 기술자료 유출을 제한하고 있으며, 실험자료 등은 연구소 내 업무용 컴퓨터로 연구원들에게만 공유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활용해 접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연구소에서 해당 자료를 비밀로 보호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검찰은 또 산업통상자원부에서 발급받은 '산업기술 확인서'를 증거로 내면서 이 교수가 가지고 나온 자료는 산업기술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산업기술은 산업기술보호법에 따라 외부로 유출하면 처벌을 받는다.

이학구 교수가 자신이 기소된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이학구 교수가 자신이 기소된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교수 "오히려 공개해야 하는 기술"

이 교수는 자신이 들고나온 자료는 오히려 외부로 공개해야 하는 자료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공적자금을 사용해 얻은 국가과학기술 공공데이터를 공공기관이며 비영리기관인 정부출연연구소가 연구소의 영업비밀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며 "검찰이 국책연구과제 관련 법을 완전히 무시한 채 사기업에서 사적자금을 사용하여 얻은 연구결과물과 동일시하여 구속기소 한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과학기술기본법에는 정부는 소요경비의 전부 또는 일부를 지원하여 얻은 지식과 기술 등을 공개하고 성과를 확산하며 실용화를 촉진하게 돼 있다"며 "보호할 가치가 있는 국가연구개발사업 및 민간연구개발의 성과에 대하여는 지식재산권의 설정 등을 통하여 보호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여야 한다고 돼 있다"고 말했다.

국책 연구소의 연구 성과는 공개가 원칙이고, 보호하려면 조치가 있어야 하는데, 자신이 가지고 나온 자료는 아무런 보호 노력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이 교수는 또 중국 업체에서 돈을 받는 건 자신이 개인적으로 받은 게 아니라 학교와의 컨설팅 계약을 통해서 정당하게 받은 것인데, 검찰은 마치 자신이 개인적으로 돈을 챙긴 것처럼 결론 내렸다고 주장했다.

이학구 교수 사건 1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법원 판결문 이학구 교수 사건 1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법원 판결문

1심 법원 "보호할 필요 없어"…무죄 선고

1심을 맡은 수원지법은 이 교수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 무죄 근거로 연구소에서 비밀 유지 노력을 하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이 교수의 자료 중 일부는 보고서에, 일부는 연구소에서 홈페이지에 올린 동영상에도 담겨 있고, 공개 세미나에서 발표된 적도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또 국책 과제는 비밀로 보호해야 하면 '보안과제'로 지정하는데, 문제가 된 자료는 '일반과제' 관련 자료였다는 점도 강조했다. 외부로 알려져서는 안 되는 기술이라면 그에 맞는 보호 노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노력이 없었기 때문에 보호할 필요가 없는 기술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법원은 또 문제가 된 자료가 산업기술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산업부에서 만든 관련 고시에 이 교수가 가지고 나온 자료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산업부는 고시에 빠져있는 기술인데도 산업기술이 맞는다고 확인서를 발급해줬는데, 법원은 이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검찰이 항소하면서 이 사건은 항소심에서 다시 한번 유무죄를 가리게 됐다. 항소심에서는 검찰이 제출한 산업기술 확인서가 효력이 있는지가 집중적으로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국책 연구소 연구 성과가 외부로 공유해야 하는 공공데이터의 성격을 얼마나 가졌는지도 또 다른 쟁점이다. 재판 결과에 따라 국책 연구소 연구 성과의 외부 활용 기준이 세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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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어디까지 보호해야 하나’…풍력학계에 불어닥친 ‘기술유출 폭풍’
    • 입력 2019-05-29 15:30:28
    • 수정2019-05-29 15:34:28
    취재후·사건후
국책 연구소 연구원, 대학으로 이직<br />이직하며 연구소 자료 옮겨<br />검찰, '기술 유출 혐의' 기소 <br />1심 "유출 아니다" 무죄 선고
지난해 봄, 검찰 수사관들이 한국항공대 이학구 교수에게 들이닥쳤다. 압수수색이었다. 출근 시간 무렵에 집으로 찾아온 수사관들은 집과 학교 연구실을 뒤졌다.

대학에 오기 전 몸담았던 국책 연구소에서 기술을 유출한 혐의라고 했다. 구속영장이 발부됐다. 구속기소까지 2달 만에 속전속결로 끝났다.

유죄가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이 사건은 1심에서 '무죄'가 선고됐다. 산업기술보호법 위반,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업무상 배임 혐의 모두 무죄였다.

연구소에서 대학으로…자료도 옮겨

이 교수는 2009년부터 국책 연구소에서 일했다. 풍력발전기의 날개인 '블레이드'의 성능 실험이 주 연구 분야였다. 블레이드가 풍력발전에 적합하게 만들어졌는지 시험하는 일이다.

이 교수는 2017년 초 연구소를 나와 대학으로 옮겼다. 이때 연구소에서 가지고 있던 연구 자료를 모두 들고 나왔다. 600GB 정도 되는 분량이다. 이 교수는 "(연구소에서 맡았던) 국책 과제를 계속해야 하는 상황이었고, 정식 외부참여연구원 신분이었다"고 설명했다. 연구원 소속은 아니었지만, 자료를 활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는 주장이다.

이학구 교수(왼쪽)가 블레이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교수는 연구소에서도 같이 일한 적이 있는 중국 업체와도 함께 일했다. 블레이드 성능 실험을 어떻게 할지 시험계획서를 만들어주는 일이었다. 연구소에서 들고나온 파일을 바탕으로 중국 업체에 맞게 내용을 바꿔서 계획서를 만들었다. 이 작업은 중국 업체와 학교와의 컨설팅 계약을 통해 이뤄졌다.

검찰 "돈 받고 기술 넘겼다"…구속기소

이 일은 국가정보원 산업기밀보호센터가 첩보로 입수했다. 첨단산업보호 중점 검찰청인 수원지검에서 수사를 맡았다.

검찰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투자한 국책 연구소의 기술을 이 교수가 중국 업체에서 수천만 원을 받고 넘겼다고 판단했다. 풍력발전은 그동안 나랏돈 600억 원이 들어갔고, 기술 수준이 세계 최고라고도 덧붙였다.

검찰은 이 교수에게 ①법적으로 보호 의무가 있는 산업기술을 연구소에서 가지고 나온 '산업기술보호법 위반 혐의', ②기술을 해외로 넘긴 '부정경쟁방지법 위반 혐의', ③기술을 빼돌려 연구소에 손해를 끼친 '업무상 배임 혐의'를 적용해 구속기소 했다. 나라에서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있는 분야의 기술을 해외로 넘긴 건 무거운 죄라고 판단했다.

수원지검의 ‘풍력 블레이드 산업기술 해외 유출 사건’ 보도자료
'보호해야할 연구였나' 쟁점

이 사건의 쟁점은 문제가 된 자료가 '보호해야 할 연구였나'이다. 검찰은 그렇다는 입장이다.

검찰은 공소장에서 해당 연구소에서 개인 외장 하드는 사용이 금지돼 있고, 사전 승인 없이 기술자료 유출을 제한하고 있으며, 실험자료 등은 연구소 내 업무용 컴퓨터로 연구원들에게만 공유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활용해 접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연구소에서 해당 자료를 비밀로 보호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검찰은 또 산업통상자원부에서 발급받은 '산업기술 확인서'를 증거로 내면서 이 교수가 가지고 나온 자료는 산업기술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산업기술은 산업기술보호법에 따라 외부로 유출하면 처벌을 받는다.

이학구 교수가 자신이 기소된 사건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 교수 "오히려 공개해야 하는 기술"

이 교수는 자신이 들고나온 자료는 오히려 외부로 공개해야 하는 자료라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공적자금을 사용해 얻은 국가과학기술 공공데이터를 공공기관이며 비영리기관인 정부출연연구소가 연구소의 영업비밀이라고 주장하고 있다"며 "검찰이 국책연구과제 관련 법을 완전히 무시한 채 사기업에서 사적자금을 사용하여 얻은 연구결과물과 동일시하여 구속기소 한 사건"이라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과학기술기본법에는 정부는 소요경비의 전부 또는 일부를 지원하여 얻은 지식과 기술 등을 공개하고 성과를 확산하며 실용화를 촉진하게 돼 있다"며 "보호할 가치가 있는 국가연구개발사업 및 민간연구개발의 성과에 대하여는 지식재산권의 설정 등을 통하여 보호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하여야 한다고 돼 있다"고 말했다.

국책 연구소의 연구 성과는 공개가 원칙이고, 보호하려면 조치가 있어야 하는데, 자신이 가지고 나온 자료는 아무런 보호 노력이 없었다는 주장이다.

이 교수는 또 중국 업체에서 돈을 받는 건 자신이 개인적으로 받은 게 아니라 학교와의 컨설팅 계약을 통해서 정당하게 받은 것인데, 검찰은 마치 자신이 개인적으로 돈을 챙긴 것처럼 결론 내렸다고 주장했다.

이학구 교수 사건 1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법원 판결문
1심 법원 "보호할 필요 없어"…무죄 선고

1심을 맡은 수원지법은 이 교수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 무죄 근거로 연구소에서 비밀 유지 노력을 하지 않은 점을 지적했다.

이 교수의 자료 중 일부는 보고서에, 일부는 연구소에서 홈페이지에 올린 동영상에도 담겨 있고, 공개 세미나에서 발표된 적도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또 국책 과제는 비밀로 보호해야 하면 '보안과제'로 지정하는데, 문제가 된 자료는 '일반과제' 관련 자료였다는 점도 강조했다. 외부로 알려져서는 안 되는 기술이라면 그에 맞는 보호 노력이 있어야 하는데, 이런 노력이 없었기 때문에 보호할 필요가 없는 기술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법원은 또 문제가 된 자료가 산업기술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산업부에서 만든 관련 고시에 이 교수가 가지고 나온 자료는 포함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산업부는 고시에 빠져있는 기술인데도 산업기술이 맞는다고 확인서를 발급해줬는데, 법원은 이에 대해서는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검찰이 항소하면서 이 사건은 항소심에서 다시 한번 유무죄를 가리게 됐다. 항소심에서는 검찰이 제출한 산업기술 확인서가 효력이 있는지가 집중적으로 다뤄질 것으로 보인다. 국책 연구소 연구 성과가 외부로 공유해야 하는 공공데이터의 성격을 얼마나 가졌는지도 또 다른 쟁점이다. 재판 결과에 따라 국책 연구소 연구 성과의 외부 활용 기준이 세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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