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위에 방치됐던 기밀…‘꼬리자르기’로 해결될까?

입력 2019.05.29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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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사관 책상 위에 방치됐던 3급 기밀

자유한국당 강효상 의원에게 통화 내용을 유출한 주미 한국대사관 외교관은 "한미 정상 간 통화 기록이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고 정부 합동 감찰반에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통화 내용은 3급 비밀로 지정된 전문이었습니다. 3급 비밀은 "누설될 경우 국가 안전 보장에 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비밀"입니다. 이 외교관은 이 비밀 전문을 읽을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렇게 쉽게, 전문을 읽을 수 있었을까요?

이 외교관을 변호하는 양홍석 변호사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업무상 해당 전문을 볼 필요가 있는 주미 대사관 직원들에게 제한적으로 배포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외교관이 미국 의회 담당이라서, 정상 간 통화 내용을 알아야 업무를 진행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배포는 기존 주미 한국 대사관의 관행적인 업무 프로세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즉, 이 외교관은 열람 권한이 없는데도, 한미 정상 간 통화 내용을 업무에 참고해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 임의로 비밀 문건을 책상 위에 올려놨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관행적으로 종종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 "업무상 필요한 경우 비밀문서도 관행적으로 돌려봐"

한미 정상 간 통화 내용은 3급 비밀로 분류되긴 했지만, 그 내용은 한미 관계 실무를 담당하는 주미 한국 대사관 직원들이 공유해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한 현직 외교관은 "문제의 외교관이 야당 의원에게 기밀을 유출한 건 분명 잘못한 일이지만, 열람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까지 문제로 삼는다면 다른 공관 외교관들 대부분이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이 외교관의 기밀 유출을 엄중히 다루겠다고 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을 겁니다.

원칙대로라면 3급 비밀문서는 2중 잠금장치가 부착된 캐비닛에만 보관해야 합니다. 비밀 보관함의 열쇠는 반드시 2개를 제작해서, 1개는 소관부서가, 나머지 1개는 보안업무담당자가 보관해야 합니다. 모든 보관함에는 책임자가 표시돼야 합니다. 복사도 엄격히 제한됩니다. 복사를 하더라도 모든 사본에 일련번호를 부여해야 합니다. 또 재외공관장이 임명한 정보 보안 담당자가 비밀문서의 관리를 꼼꼼히 챙겨야 합니다.

열람은 더 까다롭습니다. 비밀 문건을 볼 권한이 없는 사람이 문건을 볼 때는 20일 전에 소속기관장의 보안조치를 받아야 합니다. 또 문건 열람자를 일일이 파악하기 위해 각 비밀문서의 끝에 있는 열람 기록에 서명해야 합니다. 이렇게 과정이 복잡하다 보니 실제 현장에서는 절차를 지키지 않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동안은 권한이 없는 직원들이 관행적으로 돌려봐도 문제가 생기지 않아서 그냥 넘어갔던 겁니다. 하지만 이번엔 기밀이 유출되면서 비밀 열람 관리의 허술한 체계가 여과 없이 드러나게 된 셈입니다.


■ 시스템이 문제인데 꼬리 자르기?…"TF에서 재발방지책 마련"

이번 사태로 징계를 받게 된 외교관은 총 3명입니다. 한 명은 기밀을 유출한 외교관입니다. 나머지 2명은 열람 권한은 있었지만, 문서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기밀 유출' 외교관이 문서를 열람할 수 있도록 허가 또는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들 중 한 명은 주미 한국 대사관의 공사급 고위 외교관입니다. 조윤제 주미 대사에 대해서도 정부 합동 감찰반이 조사했지만, 조 대사는 책임이 없는 것으로 결론지었습니다. 일차적인 책임은 문서 열람 권한이 있는 두 사람에게 있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대사관의 기밀문서 열람 시스템에 구멍이 있다는 점이 명확히 드러났는데도, 열람 선에 있던 사람들만 징계하는 건 '꼬리 자르기'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외교부는 그래서 재발 방지책 마련에 분주합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공관에서 관행적으로 문서를 열람해왔다면 이런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개선하겠다는 겁니다. 외교부 관계자는 "태스크포스팀을 꾸려서 해법을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며 "현재 내부적으로 논의가 진행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현재 외교부는 조세영 1차관을 단장으로 하고 외부 인사도 포함하는 TF 구성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TF가 꾸려지면 우선 비밀 열람 관행 실태를 조사할 것으로 보입니다.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대책이 모색될 전망입니다. 비밀 분류와 관련해서도 논의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현재 1급 비밀과 2급 비밀, 3급 비밀을 나누는 기준은 그 자체가 비밀입니다. 한 외교관은 "어떨 때는 이 문서가 왜 3급 비밀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경우도 있다"면서 "비밀 분류에도 좀 더 명확한 기준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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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책상 위에 방치됐던 기밀…‘꼬리자르기’로 해결될까?
    • 입력 2019-05-29 16:25:05
    취재K
■ 대사관 책상 위에 방치됐던 3급 기밀

자유한국당 강효상 의원에게 통화 내용을 유출한 주미 한국대사관 외교관은 "한미 정상 간 통화 기록이 자신의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고 정부 합동 감찰반에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통화 내용은 3급 비밀로 지정된 전문이었습니다. 3급 비밀은 "누설될 경우 국가 안전 보장에 해를 끼칠 우려가 있는 비밀"입니다. 이 외교관은 이 비밀 전문을 읽을 권한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렇게 쉽게, 전문을 읽을 수 있었을까요?

이 외교관을 변호하는 양홍석 변호사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업무상 해당 전문을 볼 필요가 있는 주미 대사관 직원들에게 제한적으로 배포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외교관이 미국 의회 담당이라서, 정상 간 통화 내용을 알아야 업무를 진행할 수 있는 부분이 있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배포는 기존 주미 한국 대사관의 관행적인 업무 프로세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즉, 이 외교관은 열람 권한이 없는데도, 한미 정상 간 통화 내용을 업무에 참고해야 하기 때문에, 누군가 임의로 비밀 문건을 책상 위에 올려놨다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관행적으로 종종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 "업무상 필요한 경우 비밀문서도 관행적으로 돌려봐"

한미 정상 간 통화 내용은 3급 비밀로 분류되긴 했지만, 그 내용은 한미 관계 실무를 담당하는 주미 한국 대사관 직원들이 공유해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었을 겁니다. 한 현직 외교관은 "문제의 외교관이 야당 의원에게 기밀을 유출한 건 분명 잘못한 일이지만, 열람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까지 문제로 삼는다면 다른 공관 외교관들 대부분이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이 외교관의 기밀 유출을 엄중히 다루겠다고 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고 말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을 겁니다.

원칙대로라면 3급 비밀문서는 2중 잠금장치가 부착된 캐비닛에만 보관해야 합니다. 비밀 보관함의 열쇠는 반드시 2개를 제작해서, 1개는 소관부서가, 나머지 1개는 보안업무담당자가 보관해야 합니다. 모든 보관함에는 책임자가 표시돼야 합니다. 복사도 엄격히 제한됩니다. 복사를 하더라도 모든 사본에 일련번호를 부여해야 합니다. 또 재외공관장이 임명한 정보 보안 담당자가 비밀문서의 관리를 꼼꼼히 챙겨야 합니다.

열람은 더 까다롭습니다. 비밀 문건을 볼 권한이 없는 사람이 문건을 볼 때는 20일 전에 소속기관장의 보안조치를 받아야 합니다. 또 문건 열람자를 일일이 파악하기 위해 각 비밀문서의 끝에 있는 열람 기록에 서명해야 합니다. 이렇게 과정이 복잡하다 보니 실제 현장에서는 절차를 지키지 않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동안은 권한이 없는 직원들이 관행적으로 돌려봐도 문제가 생기지 않아서 그냥 넘어갔던 겁니다. 하지만 이번엔 기밀이 유출되면서 비밀 열람 관리의 허술한 체계가 여과 없이 드러나게 된 셈입니다.


■ 시스템이 문제인데 꼬리 자르기?…"TF에서 재발방지책 마련"

이번 사태로 징계를 받게 된 외교관은 총 3명입니다. 한 명은 기밀을 유출한 외교관입니다. 나머지 2명은 열람 권한은 있었지만, 문서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기밀 유출' 외교관이 문서를 열람할 수 있도록 허가 또는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들 중 한 명은 주미 한국 대사관의 공사급 고위 외교관입니다. 조윤제 주미 대사에 대해서도 정부 합동 감찰반이 조사했지만, 조 대사는 책임이 없는 것으로 결론지었습니다. 일차적인 책임은 문서 열람 권한이 있는 두 사람에게 있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로 대사관의 기밀문서 열람 시스템에 구멍이 있다는 점이 명확히 드러났는데도, 열람 선에 있던 사람들만 징계하는 건 '꼬리 자르기'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외교부는 그래서 재발 방지책 마련에 분주합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공관에서 관행적으로 문서를 열람해왔다면 이런 사태가 재발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개선하겠다는 겁니다. 외교부 관계자는 "태스크포스팀을 꾸려서 해법을 모색할 것으로 보인다"며 "현재 내부적으로 논의가 진행 중"이라고 밝혔습니다. 현재 외교부는 조세영 1차관을 단장으로 하고 외부 인사도 포함하는 TF 구성을 추진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TF가 꾸려지면 우선 비밀 열람 관행 실태를 조사할 것으로 보입니다.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대책이 모색될 전망입니다. 비밀 분류와 관련해서도 논의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현재 1급 비밀과 2급 비밀, 3급 비밀을 나누는 기준은 그 자체가 비밀입니다. 한 외교관은 "어떨 때는 이 문서가 왜 3급 비밀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경우도 있다"면서 "비밀 분류에도 좀 더 명확한 기준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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