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한 전대법관 격정토로] “선진국서도 직권남용 형사처벌 사례 찾기 어려워”

입력 2019.05.31 (11:19) 수정 2019.05.31 (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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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기소된 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도 29일 첫 정식 재판에서 "이번 사건은 일방적 시각에서 특정 프레임이 씌워진 사건"이라며 "선입견을 걷어내고 저의 간절한 소리에 귀 기울여 달라"고 재판부에 호소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의 발언 전문을 소개한 데 이어, 이번엔 고 전 처장의 진술을 방어권 차원에서 전문을 소개한다. 2016년부터 1년 3개월간 법원행정처장을 지낸 고 전 처장은 양 전 대법원장과 공모해 재판에 개입하고 법원 블랙리스트 작성에 개입한 혐의로 구속 영장이 청구됐으나, 기각됐고, 이후 불구속기소 됐다. 발언 전문은 실시간으로 속기한 것이라 실제 발언과 다소 차이가 있거나 생략한 부분이 있음을 밝힌다. (취재=김채린, 김성수, 정리=윤창희)

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


제가 그토록 사랑하고 지냈던 법원의 형사법정에 서보니 다 말씀을 드리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이 미어집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 자리에 섰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린 데 대해 참으로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님을 제가 잘못 보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참으로 죄송스럽고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제 가슴을 천근만근 무겁게 하는 것은 이 사건으로 인해 국민이 사법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뢰가 전례 없이 크게 훼손됐다는 사실입니다. 이 재판을 통해 그간 잘못 알려졌던 진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져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회복되는 전환점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비록 부족하긴 하지만 지난 33년간 법관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절제된 삶을 살려고 애써왔습니다. 특히 법원행정처장으로 근무할 당시 대법원장을 보좌하면서 오로지 국민의 신뢰가 없으면 사법부가 존립할 수 없다는 무신불립(無信不立·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의 신념 아래, 우리 사법부가 국민으로부터 어떻게 신뢰를 받을 것인가 하는 것에 사법행정의 주안점을 두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 공소사실은 마치 이러한 소신을 저버린 채 권한을 절제하지 못하여 오히려 남용했다고 비난하고 있어 저로서는 그 사실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마음이 참담하고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헌재와 긴장해소 노력이 부당한 이익 도모인가?”

이 사건 공소사실을 보면 제가 그토록 노심초사하면서 법원행정처장으로서 직무 수행한 부분들이 모두 직권을 남용한 것이라고 기재돼 있습니다.

법률해석을 둘러싸고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간에 존재하는 헌법적 긴장 상태를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할 건지를 고민하고, 재판에 반영시키려 한 노력이, 부당한 이익도모 또는 반헌법적 재판 개입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법관의 비위로 인한 법원조직의 위기 상황에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대응한 조치들이 부당한 조직보호라고 합니다. 어느 조직에나 있을 수 있는 광범위한 인사자료 중 일부 오해의 여지가 있는 부분을 인사 불이익 조치로 법관을 탄압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법원행정처장 재임 시절 벌어진 일이라는 사유만으로 처장인 제가 직접 지시하고 공모했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재판과 사법 행정 작용은 달라"

공소사실은 보다 근본적으로는 피고인이 관여한 사법행정의 운용과 관행이 위법부당한 행위로서 사법행정권 남용에 해당하고, 이는 곧바로 형법상의 직권남용죄를 구성한다는 전제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재판부를 담당하는 법관의 재판작용과 달리 사법행정 담당자들은 조직의 위상을 강화하고 조직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정책과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가능한 여러 합목적적 수단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폭넓은 재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진국서도 직권남용 형사처벌 사례 찾기 어려워”


사법행정 담당자들이 관여한 조치가 사후에 보기에 다소 부당하거나 적절하지 못한 측면이 있을지라도, 이를 놓고 곧바로 형사범죄에 이를 정도로 권한을 남용하거나 직무를 유기한 것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같은 경우에 독일·스위스·일본·미국 등 선진 각국에서도 징계 등 행정적 제재를 넘어서 직권남용이라는 형사범죄로 기소되고 처벌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상 유례없는 이 재판에서 사법행정상의 재량권 범위와 한계, 직권의 범위나 그 남용의 인식 등 사법행정권 남용과 직권남용죄의 성립 등에 관한 활발한 논의의 장이 반드시 이뤄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헌법의 또 다른 핵심적 가치인 죄형법정주의와 무죄추정원칙을 훼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방적 시각에서 씌워진 프레임을 걷어달라"

저는 이 사건으로 기소된 이후 혹시 법관으로서 겸손함을 잃고 교만한 적 없었는지, 다른 사람이나 법원에 누를 끼치진 않았는지 저 자신을 찬찬히 되돌아보게 됐습니다. 형사법적으로 죄가 성립하는지와 상관없이 양심적 도의적으로 책임 없는지도 깊이 성찰해 보았습니다. 만약에 제가 져야 할 십자가가 있다면 마땅히 저 자신이 지겠다는 생각으로 이 법정에 서려 합니다.

부디 재판장님과 두 분 판사님께서 혹여 그동안 유감스럽게도 일방적 시각에서 특정 프레임이 씌워진 이 사건에 관한 언론 보도를 접하며 갖게 됐을지도 모를 선입견을 걷어내신 상태에서 저의 간절한 소리에 귀 기울여 주시고, 과연 형사범죄에 이를 정도로 제가 권한을 남용하여 후배 법관들에게 의무 없는 일들을 시킨 것인지 형사법의 대원칙에 따라 신중하고 냉철하게 판단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제 불민함으로 인해 너무나 큰 부담을 드리게 된 점을 민망스럽게 생각하며 아울러 과중한 업무 속에서도 심리에 만전을 기하시는 재판부에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경청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상입니다.

[연관기사]
[양승태 격정토로]① “이런 잔인한 수사가 어디있습니까”
[박병대 전대법관 격정토로]② “세상사의 이치로 사리 가려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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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영한 전대법관 격정토로] “선진국서도 직권남용 형사처벌 사례 찾기 어려워”
    • 입력 2019-05-31 11:19:21
    • 수정2019-05-31 12:11:09
    취재K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기소된 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도 29일 첫 정식 재판에서 "이번 사건은 일방적 시각에서 특정 프레임이 씌워진 사건"이라며 "선입견을 걷어내고 저의 간절한 소리에 귀 기울여 달라"고 재판부에 호소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 전 법원행정처장의 발언 전문을 소개한 데 이어, 이번엔 고 전 처장의 진술을 방어권 차원에서 전문을 소개한다. 2016년부터 1년 3개월간 법원행정처장을 지낸 고 전 처장은 양 전 대법원장과 공모해 재판에 개입하고 법원 블랙리스트 작성에 개입한 혐의로 구속 영장이 청구됐으나, 기각됐고, 이후 불구속기소 됐다. 발언 전문은 실시간으로 속기한 것이라 실제 발언과 다소 차이가 있거나 생략한 부분이 있음을 밝힌다. (취재=김채린, 김성수, 정리=윤창희)

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대법관)


제가 그토록 사랑하고 지냈던 법원의 형사법정에 서보니 다 말씀을 드리기 어려울 정도로 가슴이 미어집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 자리에 섰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드린 데 대해 참으로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님을 제가 잘못 보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참으로 죄송스럽고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무엇보다 제 가슴을 천근만근 무겁게 하는 것은 이 사건으로 인해 국민이 사법부에 대해 가지고 있는 신뢰가 전례 없이 크게 훼손됐다는 사실입니다. 이 재판을 통해 그간 잘못 알려졌던 진실이 명명백백하게 밝혀져 사법부에 대한 국민의 신뢰가 회복되는 전환점이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저는 비록 부족하긴 하지만 지난 33년간 법관생활을 하면서 스스로 절제된 삶을 살려고 애써왔습니다. 특히 법원행정처장으로 근무할 당시 대법원장을 보좌하면서 오로지 국민의 신뢰가 없으면 사법부가 존립할 수 없다는 무신불립(無信不立·믿음이 없으면 설 수 없다)의 신념 아래, 우리 사법부가 국민으로부터 어떻게 신뢰를 받을 것인가 하는 것에 사법행정의 주안점을 두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 공소사실은 마치 이러한 소신을 저버린 채 권한을 절제하지 못하여 오히려 남용했다고 비난하고 있어 저로서는 그 사실 여부를 떠나 그 자체로 마음이 참담하고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헌재와 긴장해소 노력이 부당한 이익 도모인가?”

이 사건 공소사실을 보면 제가 그토록 노심초사하면서 법원행정처장으로서 직무 수행한 부분들이 모두 직권을 남용한 것이라고 기재돼 있습니다.

법률해석을 둘러싸고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간에 존재하는 헌법적 긴장 상태를 어떻게 슬기롭게 극복할 건지를 고민하고, 재판에 반영시키려 한 노력이, 부당한 이익도모 또는 반헌법적 재판 개입으로 묘사돼 있습니다.

법관의 비위로 인한 법원조직의 위기 상황에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대응한 조치들이 부당한 조직보호라고 합니다. 어느 조직에나 있을 수 있는 광범위한 인사자료 중 일부 오해의 여지가 있는 부분을 인사 불이익 조치로 법관을 탄압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법원행정처장 재임 시절 벌어진 일이라는 사유만으로 처장인 제가 직접 지시하고 공모했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

"재판과 사법 행정 작용은 달라"

공소사실은 보다 근본적으로는 피고인이 관여한 사법행정의 운용과 관행이 위법부당한 행위로서 사법행정권 남용에 해당하고, 이는 곧바로 형법상의 직권남용죄를 구성한다는 전제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재판부를 담당하는 법관의 재판작용과 달리 사법행정 담당자들은 조직의 위상을 강화하고 조직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정책과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가능한 여러 합목적적 수단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폭넓은 재량을 가지고 있습니다.

"선진국서도 직권남용 형사처벌 사례 찾기 어려워”


사법행정 담당자들이 관여한 조치가 사후에 보기에 다소 부당하거나 적절하지 못한 측면이 있을지라도, 이를 놓고 곧바로 형사범죄에 이를 정도로 권한을 남용하거나 직무를 유기한 것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같은 경우에 독일·스위스·일본·미국 등 선진 각국에서도 징계 등 행정적 제재를 넘어서 직권남용이라는 형사범죄로 기소되고 처벌한 사례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사상 유례없는 이 재판에서 사법행정상의 재량권 범위와 한계, 직권의 범위나 그 남용의 인식 등 사법행정권 남용과 직권남용죄의 성립 등에 관한 활발한 논의의 장이 반드시 이뤄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야만 헌법의 또 다른 핵심적 가치인 죄형법정주의와 무죄추정원칙을 훼손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방적 시각에서 씌워진 프레임을 걷어달라"

저는 이 사건으로 기소된 이후 혹시 법관으로서 겸손함을 잃고 교만한 적 없었는지, 다른 사람이나 법원에 누를 끼치진 않았는지 저 자신을 찬찬히 되돌아보게 됐습니다. 형사법적으로 죄가 성립하는지와 상관없이 양심적 도의적으로 책임 없는지도 깊이 성찰해 보았습니다. 만약에 제가 져야 할 십자가가 있다면 마땅히 저 자신이 지겠다는 생각으로 이 법정에 서려 합니다.

부디 재판장님과 두 분 판사님께서 혹여 그동안 유감스럽게도 일방적 시각에서 특정 프레임이 씌워진 이 사건에 관한 언론 보도를 접하며 갖게 됐을지도 모를 선입견을 걷어내신 상태에서 저의 간절한 소리에 귀 기울여 주시고, 과연 형사범죄에 이를 정도로 제가 권한을 남용하여 후배 법관들에게 의무 없는 일들을 시킨 것인지 형사법의 대원칙에 따라 신중하고 냉철하게 판단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제 불민함으로 인해 너무나 큰 부담을 드리게 된 점을 민망스럽게 생각하며 아울러 과중한 업무 속에서도 심리에 만전을 기하시는 재판부에 감사 말씀을 드립니다. 경청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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