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도어락에 랩’…“사소한 행동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엄청난 공포예요”

입력 2019.06.04 (09:39) 수정 2019.06.04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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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당했어요", "나도 봤어요"..'신림동 사건'에 이어지는 증언들

[A씨/ 서울 마포구, 30대] "샤워하고 나와서 왠지 모르겠는데, 현관문으로 밖을 보는 구멍 있잖아요. 그 구멍으로 밖을 쳐다봤는데 어떤 남성분이 우리 집에 귀를 가만히 대고 나오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었어요. 제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 들리던 소리가 안 들리고 물소리가 끊기니 무슨 일인지 궁금했는지 렌즈로 집 안을 쳐다보더라고요. (...) 심장이 터질 것 같더라고요. 너무 무서워서 조용히 '누구세요' 얘기했는데, 그분이 도망가셨어요."

[B씨/ 인천광역시 부평구, 20대] "새벽에 술 취하신 분들이 가끔 집 잘못 찾아왔다면서 도어락을 누르고 문을 발로 차고 막 문을 흔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도어락에 덮개를 씌우게 됐는데, 밤에 누가 몰래 지문을 보고 들어올까 봐 겁도 나고 해서 그때부터 랩을 씌우기 시작했어요."

[C씨/ 서울 영등포구, 20대] "회식하고 늦게 집에 갈 때 항상 긴장되죠. 오피스텔 현관에만 CCTV가 있고 복도나 방 주변에는 CCTV가 따로 없거든요.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이라 계단으로 올라가는데, 층마다 센서등이 있어요. 센서등이 켜지기 전까지 그 어둠 속에 혹시라도 누가 있는 건 아닌가, 복도에서 누가 나오면 어쩌나 무서워요. 신림동 영상 보고 더 무서워졌어요."

[뉴스9] “도어락, 랩으로 씌워둬요”…혼자 사는 여성들 ‘공포의 일상화’

도어락에 씌워진 랩. 비밀번호 유추를 방지하기 위한 자구책입니다. 요즘에는 자동으로 번호판의 위치가 바뀌는 도어락도 많습니다.도어락에 씌워진 랩. 비밀번호 유추를 방지하기 위한 자구책입니다. 요즘에는 자동으로 번호판의 위치가 바뀌는 도어락도 많습니다.

'신림동 주거침입 강간미수' 사건 영상이 공개되자, 많은 혼자 사는 여성들이 '나도 유사한 일을 겪었다'는 잇달아 경험담을 털어놨습니다. 영상 속 사건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더 두려운 것"이란 의견이 대다수였습니다.

오죽하면, 비밀번호 유추를 막기 위해 도어락에 랩까지 씌워두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랩이 씌워진 도어락이 여성 혼자 사는 집임을 암시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많았습니다. 범행의 표적이 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전자키를 사용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또 요즘에는 번호판의 위치가 자동으로 바뀌는 도어락도 나온 만큼 가능하면 이러한 도어락으로 바꿔주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무엇보다 비밀번호를 주기적으로 바꾸고 지문도 자주 지워줘야 할 겁니다.


■"CCTV도 사후 대책일 뿐인데, 영상마저 없었다면?"..불안한 혼자 사는 여성들

지난달 28일, 신림동 사건 영상이 인터넷상에 공개됐고, 영상 속 남성이 지난달 31일 '주거침입 강간미수' 혐의로 구속됐는데요. 당초 경찰이 '주거침입' 혐의로 긴급체포를 해 혐의 적용 논란이 있었습니다. 왜 '주거침입 혐의만 적용하느냐'부터 '구체적인 행위가 없었는데 강간미수 혐의를 적용할 수 있느냐' 등의 논란이었는데요.

경찰은 체포 당시 "주거침입 혐의가 성립하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지만, 강간미수죄는 폭행 또는 협박 등 행위의 착수가 있어야 인정이 되고 이 때문에 수사가 필요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즉 법리 검토가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했던 주거침입 혐의로 체포했다가, 수사를 통해 '사안의 중대성과 위험성'을 고려해 강간미수 혐의를 적용, 구속했다는 겁니다.

경찰의 설명과는 별개로 '처벌과 대처가 미흡하다'는 공감대가 지배적인 건 부인할 수 없을 듯합니다. 취재진과 만났던 여성 대부분이 "물리적인 피해가 있지 않으면 수사기관의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운 것 아니냐"고 물었는데요. 특히 CCTV 등 영상 증거가 있으면 수사가 가능하지만 아무런 증거 없이 신고한들 수사가 제대로 진행됐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자비로 방문 앞에 CCTV 등 장치를 설치한다거나 도어락 외에 내부 잠금장치를 추가로 설치해야겠다고 말하는 여성도 있었습니다. 스스로 보호장치를 두겠다는 겁니다.

[뉴스9] 스토킹해도 고작 범칙금 8만 원?…암표판매만도 못한 스토킹 처벌

"엘리베이터 탈 때 뒤돌아보고 누가 같이 타면 안 타고 기다린다거나, 내가 모르는 사람을 의심해야 하는 이런 별거 아닌 것 같은 게 사실은 정말 별거인 노력들이고 아주 큰 공포에 의해서 나온다는 거를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공감이 필요한 것 같아요."

KBS는 지난 22일, 1심 선고가 난 살인·살인미수 판결문 381건을 분석해 범행 전에 스토킹이 포착되거나 의심되는 비율이 30%에 이른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스토킹을 처벌하는 별도의 법률이 없고, 구체적 범죄 행위가 없을 때는 스토킹이 대부분 경범죄로 처벌되는 상황을 지적했는데요.

구체적인 범죄 행위가 없더라도, 계획된 행위가 아니었을지라도, '단 건'이었더라도 당하는 사람의 기억은 오랫동안 각인되고 반복됩니다. 애꿎은 사람을 의심해야 하고, '의심했다'는 약간의 자괴감도 당한 사람의 몫입니다. 성별의 문제가 아닌 안전과 치안의 관점에서 처벌도 처벌이지만, 여성들은 무엇보다 그들 앞에 놓인 '일상화된 공포'를 공감해주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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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도어락에 랩’…“사소한 행동으로 보이지만, 사실은 엄청난 공포예요”
    • 입력 2019-06-04 09:39:08
    • 수정2019-06-04 09:42:21
    취재후·사건후
■"나도 당했어요", "나도 봤어요"..'신림동 사건'에 이어지는 증언들

[A씨/ 서울 마포구, 30대] "샤워하고 나와서 왠지 모르겠는데, 현관문으로 밖을 보는 구멍 있잖아요. 그 구멍으로 밖을 쳐다봤는데 어떤 남성분이 우리 집에 귀를 가만히 대고 나오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있었어요. 제가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니까, 들리던 소리가 안 들리고 물소리가 끊기니 무슨 일인지 궁금했는지 렌즈로 집 안을 쳐다보더라고요. (...) 심장이 터질 것 같더라고요. 너무 무서워서 조용히 '누구세요' 얘기했는데, 그분이 도망가셨어요."

[B씨/ 인천광역시 부평구, 20대] "새벽에 술 취하신 분들이 가끔 집 잘못 찾아왔다면서 도어락을 누르고 문을 발로 차고 막 문을 흔들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도어락에 덮개를 씌우게 됐는데, 밤에 누가 몰래 지문을 보고 들어올까 봐 겁도 나고 해서 그때부터 랩을 씌우기 시작했어요."

[C씨/ 서울 영등포구, 20대] "회식하고 늦게 집에 갈 때 항상 긴장되죠. 오피스텔 현관에만 CCTV가 있고 복도나 방 주변에는 CCTV가 따로 없거든요. 엘리베이터도 없는 건물이라 계단으로 올라가는데, 층마다 센서등이 있어요. 센서등이 켜지기 전까지 그 어둠 속에 혹시라도 누가 있는 건 아닌가, 복도에서 누가 나오면 어쩌나 무서워요. 신림동 영상 보고 더 무서워졌어요."

[뉴스9] “도어락, 랩으로 씌워둬요”…혼자 사는 여성들 ‘공포의 일상화’

도어락에 씌워진 랩. 비밀번호 유추를 방지하기 위한 자구책입니다. 요즘에는 자동으로 번호판의 위치가 바뀌는 도어락도 많습니다.
'신림동 주거침입 강간미수' 사건 영상이 공개되자, 많은 혼자 사는 여성들이 '나도 유사한 일을 겪었다'는 잇달아 경험담을 털어놨습니다. 영상 속 사건이 "'충분히 벌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더 두려운 것"이란 의견이 대다수였습니다.

오죽하면, 비밀번호 유추를 막기 위해 도어락에 랩까지 씌워두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랩이 씌워진 도어락이 여성 혼자 사는 집임을 암시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많았습니다. 범행의 표적이 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차라리 전자키를 사용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또 요즘에는 번호판의 위치가 자동으로 바뀌는 도어락도 나온 만큼 가능하면 이러한 도어락으로 바꿔주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무엇보다 비밀번호를 주기적으로 바꾸고 지문도 자주 지워줘야 할 겁니다.


■"CCTV도 사후 대책일 뿐인데, 영상마저 없었다면?"..불안한 혼자 사는 여성들

지난달 28일, 신림동 사건 영상이 인터넷상에 공개됐고, 영상 속 남성이 지난달 31일 '주거침입 강간미수' 혐의로 구속됐는데요. 당초 경찰이 '주거침입' 혐의로 긴급체포를 해 혐의 적용 논란이 있었습니다. 왜 '주거침입 혐의만 적용하느냐'부터 '구체적인 행위가 없었는데 강간미수 혐의를 적용할 수 있느냐' 등의 논란이었는데요.

경찰은 체포 당시 "주거침입 혐의가 성립하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었지만, 강간미수죄는 폭행 또는 협박 등 행위의 착수가 있어야 인정이 되고 이 때문에 수사가 필요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즉 법리 검토가 필요 없을 정도로 명백했던 주거침입 혐의로 체포했다가, 수사를 통해 '사안의 중대성과 위험성'을 고려해 강간미수 혐의를 적용, 구속했다는 겁니다.

경찰의 설명과는 별개로 '처벌과 대처가 미흡하다'는 공감대가 지배적인 건 부인할 수 없을 듯합니다. 취재진과 만났던 여성 대부분이 "물리적인 피해가 있지 않으면 수사기관의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운 것 아니냐"고 물었는데요. 특히 CCTV 등 영상 증거가 있으면 수사가 가능하지만 아무런 증거 없이 신고한들 수사가 제대로 진행됐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자비로 방문 앞에 CCTV 등 장치를 설치한다거나 도어락 외에 내부 잠금장치를 추가로 설치해야겠다고 말하는 여성도 있었습니다. 스스로 보호장치를 두겠다는 겁니다.

[뉴스9] 스토킹해도 고작 범칙금 8만 원?…암표판매만도 못한 스토킹 처벌

"엘리베이터 탈 때 뒤돌아보고 누가 같이 타면 안 타고 기다린다거나, 내가 모르는 사람을 의심해야 하는 이런 별거 아닌 것 같은 게 사실은 정말 별거인 노력들이고 아주 큰 공포에 의해서 나온다는 거를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공감이 필요한 것 같아요."

KBS는 지난 22일, 1심 선고가 난 살인·살인미수 판결문 381건을 분석해 범행 전에 스토킹이 포착되거나 의심되는 비율이 30%에 이른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스토킹을 처벌하는 별도의 법률이 없고, 구체적 범죄 행위가 없을 때는 스토킹이 대부분 경범죄로 처벌되는 상황을 지적했는데요.

구체적인 범죄 행위가 없더라도, 계획된 행위가 아니었을지라도, '단 건'이었더라도 당하는 사람의 기억은 오랫동안 각인되고 반복됩니다. 애꿎은 사람을 의심해야 하고, '의심했다'는 약간의 자괴감도 당한 사람의 몫입니다. 성별의 문제가 아닌 안전과 치안의 관점에서 처벌도 처벌이지만, 여성들은 무엇보다 그들 앞에 놓인 '일상화된 공포'를 공감해주길 바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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