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못 믿을 비상용 공기호흡장비…“우리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입력 2019.06.05 (07:00) 수정 2019.06.05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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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비만 910억 원, 한 대에 40억 원이 넘는 국산 K-21 장갑차. 하지만 2010년 강을 건너는 훈련 중에 침수 사고가 일어나 부사관 1명이 숨졌습니다. 이후 육군은 K-21 장갑차를 보완합니다. 부력판도 달았으며, 혹시 모를 침수에 대비해 ‘비상용 공기호흡장비’까지 갖췄습니다. 침수 사고로 군 장병들의 생명이 위협받을 일은 없겠다는 믿음이 생기는 대목입니다.

육군, ‘안전검사 안 받은’ 비상호흡장비 1,030여 개 구매

육군에서 구매한 미국산 비상용 공기호흡장비육군에서 구매한 미국산 비상용 공기호흡장비

그런데 최근 그 믿음은 깨졌습니다. K-21 장갑차에 비치한 미국산 비상용 공기호흡장비가 안전검사를 받지 않은 제품이었던 겁니다.

비상용 공기호흡장비는 물속에서 최대 5분 동안 호흡을 하며 버틸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장비여서 장병 생명과 직결된 장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알루미늄 재질의 고압가스 용기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파열하거나 산화할 우려가 있어 반드시 한국가스안전공사의 안전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수입업자는 검사 절차가 까다롭고 미국 현지에서 검사를 진행해야 해 비용이 4천만 원이 넘는다는 등의 이유로 안전검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 장비는 2014년부터 올해 2월까지 육군에 1,030여 개가 납품됐습니다. K-21 장갑차뿐 아니라 K-2 전차, K-808 장갑차, 지휘 차량에까지 비치됐습니다.

국감 때 지적을 받고도…‘13년 동안’ 장비 구매

2011년에도 이 장비가 육군에 대량 납품돼 문제가 됐다.2011년에도 이 장비가 육군에 대량 납품돼 문제가 됐다.

이 장비의 안전검사 문제가 이번에 처음 지적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2011년에도 같은 수입업자가, 같은 제품을, 안전검사를 받지 않고 수입한 혐의로 서울 광진경찰서에 적발됐습니다. 당시에도 수년 동안 육군이 2백여 개를 대량 구매한 것이 문제가 됐고 이듬해 국정감사에서도 문제 제기가 이어지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육군군수사령관은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잘 몰라서 일어난 일’이라며 안전검사를 받겠다고 약속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안전검사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13년 동안 육군은 안전검사도 받지 않은 장비를 보급한 것입니다. 최소한 경찰 수사로 수입과 유통에 문제가 지적된 2011년, 그때라도 이에 대한 적절한 조치가 이뤄졌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일 것입니다. 국정감사에서 육군군수사령관의 말도 결국 거짓이 된 셈입니다.

비상용 공기호흡장비가 '무기(武器)' 라고요?

방위사업청과 국방기술품질원은 제구실을 못 했습니다. 오히려 방위사업청은 2012년 비상용 공기호흡장비가 현행법상 안전검사 대상에서 제외된 '무기체계'라는 잘못된 해석을 내놨습니다.

비상용 호흡장비를 ‘무기체계’라고 해석한 방위사업청의 공문비상용 호흡장비를 ‘무기체계’라고 해석한 방위사업청의 공문

전투를 위해, 군대에서만 사용되는 무기체계의 특수성을 고려해 관련 법에서 고압가스용기 안전검사 대상에 예외 조항을 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장비는 시중에서도 쉽게 구매가 가능한 제품입니다. 방위사업청 해석대로라면 군인이 쓰는 것이면 검사를 받지 않아도 되고 일반인이 쓰면 검사를 받아야 하는 모순된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취재진에게 무기체계라는 애초 입장을 고수하던 방위사업청은 결국 해석이 잘못됐음을 인정했습니다. 국방기술품질원은 이러한 방사청의 엉터리 해석만 믿고, 별도의 검수 과정도 없이 품질 검사를 마쳤습니다.

잇따르는 '결함'…뒤늦게 '사용중지'

이렇게 납품된 장비가 문제는 없는 것인지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의 기준을 통과한 유명 제품인데 단순히 국내 기준을 따르지 않았다는 문제에 그친 것은 아닙니다. 최근 일선 부대에서 제품 '불량'까지 나온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지난 3월, 육군 모 기계화 보병사단에서 비상용 공기호흡장비의 결함이 발견됐다.지난 3월, 육군 모 기계화 보병사단에서 비상용 공기호흡장비의 결함이 발견됐다.

지난 3월, 육군 모 기계화 보병사단에서 비상용 공기호흡장비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습니다. 호흡장비에 공기가 아예 들어있지 않거나, 공기를 충전하더라도 공기가 새는 결함이 발견된 것입니다. 자체 조사결과, 이 부대에 보급된 물량의 25% 정도가 불량이었습니다. 이 부대뿐 아니라 또 다른 부대에서도 보급된 장비 상당수에서 불량이 확인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국방기술품질원은 다른 부대에 보급된 제품이 어떤지는 궁금하지 않았나 봅니다. 불량이 보고된 제품에 대해서만 회수·교체 조치를 했습니다. 유사시 장병들의 목숨을 살릴 골든타임 5분을 확보하는 군 장비 보급과 관리의 현주소입니다. 취재가 시작되자 육군은 모든 비상용 공기호흡장비에 대해 뒤늦게 사용중지명령을 내리고 전수조사에 들어갔습니다.

미인증 호흡장비, ‘軍’에 이어 ‘소방’까지

소방차량에 비치된 비상용 공기호흡장비. 최근 사용중지가 된 육군의 것과 같다.소방차량에 비치된 비상용 공기호흡장비. 최근 사용중지가 된 육군의 것과 같다.

비상용 호흡장비는 군부대뿐 아니라 소방 등 수난 구조 활동을 하는 다른 기관에도 납품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어떤 안전검사도 받지 않은 비상용 호흡장비로 수년간 구조 활동에 임했던 셈입니다. 소방청도 안전검사를 받지 않은 이 장비에 대해 사용중지명령을 내렸습니다.

36년 된 군용 침낭, 총알에 뚫리는 방탄복, 물에 뜨지 않는 구명조끼…. 우리가 이러한 것들에 분노하는 까닭은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군 장병들의 목숨과 현장에서 재난과 사투를 벌이는 소방관들의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이 보도 내용을 라디오로 전할 때 어느 청취자분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더는 군 장병과 소방관들의 생명을 운에 맡기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연관 기사]
①[단독] 육군, 8년째 ‘미인증 비상 호흡장비’ 사용…장병 생명 위협
②불량 장비 버젓이…소방대원 안전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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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못 믿을 비상용 공기호흡장비…“우리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 입력 2019-06-05 07:00:12
    • 수정2019-06-05 07:00:38
    취재후·사건후
개발비만 910억 원, 한 대에 40억 원이 넘는 국산 K-21 장갑차. 하지만 2010년 강을 건너는 훈련 중에 침수 사고가 일어나 부사관 1명이 숨졌습니다. 이후 육군은 K-21 장갑차를 보완합니다. 부력판도 달았으며, 혹시 모를 침수에 대비해 ‘비상용 공기호흡장비’까지 갖췄습니다. 침수 사고로 군 장병들의 생명이 위협받을 일은 없겠다는 믿음이 생기는 대목입니다.

육군, ‘안전검사 안 받은’ 비상호흡장비 1,030여 개 구매

육군에서 구매한 미국산 비상용 공기호흡장비
그런데 최근 그 믿음은 깨졌습니다. K-21 장갑차에 비치한 미국산 비상용 공기호흡장비가 안전검사를 받지 않은 제품이었던 겁니다.

비상용 공기호흡장비는 물속에서 최대 5분 동안 호흡을 하며 버틸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장비여서 장병 생명과 직결된 장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알루미늄 재질의 고압가스 용기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파열하거나 산화할 우려가 있어 반드시 한국가스안전공사의 안전검사를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수입업자는 검사 절차가 까다롭고 미국 현지에서 검사를 진행해야 해 비용이 4천만 원이 넘는다는 등의 이유로 안전검사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이 장비는 2014년부터 올해 2월까지 육군에 1,030여 개가 납품됐습니다. K-21 장갑차뿐 아니라 K-2 전차, K-808 장갑차, 지휘 차량에까지 비치됐습니다.

국감 때 지적을 받고도…‘13년 동안’ 장비 구매

2011년에도 이 장비가 육군에 대량 납품돼 문제가 됐다.
이 장비의 안전검사 문제가 이번에 처음 지적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2011년에도 같은 수입업자가, 같은 제품을, 안전검사를 받지 않고 수입한 혐의로 서울 광진경찰서에 적발됐습니다. 당시에도 수년 동안 육군이 2백여 개를 대량 구매한 것이 문제가 됐고 이듬해 국정감사에서도 문제 제기가 이어지기까지 했습니다.

당시 육군군수사령관은 국회 국정감사에 출석해 ‘잘 몰라서 일어난 일’이라며 안전검사를 받겠다고 약속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안전검사는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13년 동안 육군은 안전검사도 받지 않은 장비를 보급한 것입니다. 최소한 경찰 수사로 수입과 유통에 문제가 지적된 2011년, 그때라도 이에 대한 적절한 조치가 이뤄졌어야 한다는 것이 상식일 것입니다. 국정감사에서 육군군수사령관의 말도 결국 거짓이 된 셈입니다.

비상용 공기호흡장비가 '무기(武器)' 라고요?

방위사업청과 국방기술품질원은 제구실을 못 했습니다. 오히려 방위사업청은 2012년 비상용 공기호흡장비가 현행법상 안전검사 대상에서 제외된 '무기체계'라는 잘못된 해석을 내놨습니다.

비상용 호흡장비를 ‘무기체계’라고 해석한 방위사업청의 공문
전투를 위해, 군대에서만 사용되는 무기체계의 특수성을 고려해 관련 법에서 고압가스용기 안전검사 대상에 예외 조항을 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장비는 시중에서도 쉽게 구매가 가능한 제품입니다. 방위사업청 해석대로라면 군인이 쓰는 것이면 검사를 받지 않아도 되고 일반인이 쓰면 검사를 받아야 하는 모순된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취재진에게 무기체계라는 애초 입장을 고수하던 방위사업청은 결국 해석이 잘못됐음을 인정했습니다. 국방기술품질원은 이러한 방사청의 엉터리 해석만 믿고, 별도의 검수 과정도 없이 품질 검사를 마쳤습니다.

잇따르는 '결함'…뒤늦게 '사용중지'

이렇게 납품된 장비가 문제는 없는 것인지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국의 기준을 통과한 유명 제품인데 단순히 국내 기준을 따르지 않았다는 문제에 그친 것은 아닙니다. 최근 일선 부대에서 제품 '불량'까지 나온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지난 3월, 육군 모 기계화 보병사단에서 비상용 공기호흡장비의 결함이 발견됐다.
지난 3월, 육군 모 기계화 보병사단에서 비상용 공기호흡장비에 대한 문제가 제기됐습니다. 호흡장비에 공기가 아예 들어있지 않거나, 공기를 충전하더라도 공기가 새는 결함이 발견된 것입니다. 자체 조사결과, 이 부대에 보급된 물량의 25% 정도가 불량이었습니다. 이 부대뿐 아니라 또 다른 부대에서도 보급된 장비 상당수에서 불량이 확인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그런데 국방기술품질원은 다른 부대에 보급된 제품이 어떤지는 궁금하지 않았나 봅니다. 불량이 보고된 제품에 대해서만 회수·교체 조치를 했습니다. 유사시 장병들의 목숨을 살릴 골든타임 5분을 확보하는 군 장비 보급과 관리의 현주소입니다. 취재가 시작되자 육군은 모든 비상용 공기호흡장비에 대해 뒤늦게 사용중지명령을 내리고 전수조사에 들어갔습니다.

미인증 호흡장비, ‘軍’에 이어 ‘소방’까지

소방차량에 비치된 비상용 공기호흡장비. 최근 사용중지가 된 육군의 것과 같다.
비상용 호흡장비는 군부대뿐 아니라 소방 등 수난 구조 활동을 하는 다른 기관에도 납품된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어떤 안전검사도 받지 않은 비상용 호흡장비로 수년간 구조 활동에 임했던 셈입니다. 소방청도 안전검사를 받지 않은 이 장비에 대해 사용중지명령을 내렸습니다.

36년 된 군용 침낭, 총알에 뚫리는 방탄복, 물에 뜨지 않는 구명조끼…. 우리가 이러한 것들에 분노하는 까닭은 국방의 의무를 다하는 군 장병들의 목숨과 현장에서 재난과 사투를 벌이는 소방관들의 생명을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저 운이 좋았을 뿐이다"

이 보도 내용을 라디오로 전할 때 어느 청취자분께서 주신 말씀입니다. 더는 군 장병과 소방관들의 생명을 운에 맡기는 일은 없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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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단독] 육군, 8년째 ‘미인증 비상 호흡장비’ 사용…장병 생명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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