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족 앞에 놓인 김정은 사진…“이건 아니지 않나요”

입력 2019.06.07 (18:12) 수정 2019.06.07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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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일 국가유공자와 보훈가족 240여 명이 문재인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청와대 오찬에 참석했습니다. 6·25 전사자 유족과 천안함 희생자 유족 등을 비롯해 4.19와 5.18 민주유공자 가족, 그리고 강원도 산불 피해를 본 보훈대상자 등 모두 24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2002년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한상국 상사의 아내 김한나 씨도 이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국가유공자와 가족에 대한 보상과 예우는 개인을 넘어 공동체의 품위를 높이고 국가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라면서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과 그 유족의 노고를 위로했습니다. "보훈은 제2의 안보이자 국민통합의 구심점"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두 장의 사진이 문제가 됐습니다. 이날 테이블 위에는 '여러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와 문 대통령의 친필 서명이 적힌 팸플릿이 놓여 있었습니다. 안에는 음식 메뉴 소개와 함께 사진 5장이 들어 있었는데, 이 가운데 2장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모습이 있었던 겁니다.


한 장은 2017년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손잡고 백두산 천지에서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김한나 씨는 KBS와의 통화에서 사진을 보는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당황스럽고 기가 막혔고. 어떻게 하라는 거지, 갖은 생각이 다 들었어요. 유가족을 불러놓고 이건 아니지 않나 생각했어요."


또 다른 사진은 지난해 9월 19일 문 대통령이 평양 능라경기장에서 연설을 할 때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문 대통령 옆에는 김 위원장이 서 있었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그럴 용기가 없었는지..."

김한나 씨만 불편했던 건 아니었다고 합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로 숨진 서정우 하사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이건 아니지 않느냐'고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김 씨 테이블에는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이 있었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고 합니다.

김 씨는 KBS와의 통화에서 "우리가 평화 통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고, (북한을) 도와주는 것도 우리가 더 (여유가) 있으니까 도와주는 건데 그래도 때와 장소를 구분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팸플릿은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사진이 올라오며, 하루종일 뜨거운 논란이 됐습니다. 수백 개의 댓글들이 달렸습니다. 대부분 유가족들을 배려하지 못 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사진 자체야 참 좋지만 그 사진이 어디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큰 문제가 될 수는 있죠. 이건 북한에 대한 태도가 친북이냐 반북이냐를 떠나서 인간에 대한 예의 문제입니다."

"김정은에 의해 가족을 잃은 분들을 데려와서 원수와 손을 맞잡고, 원수를 긍정하는 팸플릿을 손에 쥐어주다니요."

물론 모든 참석자가 불편했던 건 아닙니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대체로 분위기는 좋았다"고 했습니다. 6.25 전쟁 때 전사한 아버지의 유해를 국가가 찾아줘 고맙다는 언급도 있었습니다.

이 팸플릿은 올해 1월부터 제작돼 행사 때마다 사용해왔다고 합니다. 이번 오찬 행사용으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사진이 들어간 팸플릿을 따로 제작한 것은 아니라는 설명입니다. 음식 메뉴와 함께 대통령의 활동 모습을 같이 나눠주고 참석자들이 기념 삼아 가져갈 수 있게 하자는 취지라는 겁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런 논란이 벌어진 점이 무척 안타깝다"면서 "6.25나 천안함, 연평해전 같은 비극적 희생자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추진하는 건데..."라면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유족들이 마음 상해하셨을 거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면서 안타까움을 전했습니다.

문 대통령 내외는 어제 현충일 추념식에서 김차희 씨의 편지가 낭독될 때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김 씨는 구순이 넘도록 6.25 전쟁에서 전사한 남편의 유해조차 찾지 못한 상황입니다.

김 씨는 편지에서 "당신의 흔적을 찾으려 국립묘지에 갈 때 마다, 회색 비석들이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쓰러져 있는 모습으로 보이는데, 어떤 이가 국립묘지에 구경하러 간다는 말에 가슴이 미어진다"고 썼습니다.

누군가 무심코 뱉은 '구경한다'는 말에도 가슴이 미어지는 게 유가족입니다. 작은 팸플릿 하나도 이들에겐 헤아리기 힘든 상처가 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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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가족 앞에 놓인 김정은 사진…“이건 아니지 않나요”
    • 입력 2019-06-07 18:12:02
    • 수정2019-06-07 18:12:24
    취재K
지난 4일 국가유공자와 보훈가족 240여 명이 문재인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청와대 오찬에 참석했습니다. 6·25 전사자 유족과 천안함 희생자 유족 등을 비롯해 4.19와 5.18 민주유공자 가족, 그리고 강원도 산불 피해를 본 보훈대상자 등 모두 240여 명이 참석했습니다. 2002년 제2연평해전에서 전사한 한상국 상사의 아내 김한나 씨도 이 자리에 참석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국가유공자와 가족에 대한 보상과 예우는 개인을 넘어 공동체의 품위를 높이고 국가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라면서 국가를 위해 희생하신 분들과 그 유족의 노고를 위로했습니다. "보훈은 제2의 안보이자 국민통합의 구심점"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런데 두 장의 사진이 문제가 됐습니다. 이날 테이블 위에는 '여러분 환영합니다'라는 문구와 문 대통령의 친필 서명이 적힌 팸플릿이 놓여 있었습니다. 안에는 음식 메뉴 소개와 함께 사진 5장이 들어 있었는데, 이 가운데 2장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모습이 있었던 겁니다. 한 장은 2017년 문 대통령이 김 위원장과 손잡고 백두산 천지에서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김한나 씨는 KBS와의 통화에서 사진을 보는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습니다. "당황스럽고 기가 막혔고. 어떻게 하라는 거지, 갖은 생각이 다 들었어요. 유가족을 불러놓고 이건 아니지 않나 생각했어요." 또 다른 사진은 지난해 9월 19일 문 대통령이 평양 능라경기장에서 연설을 할 때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문 대통령 옆에는 김 위원장이 서 있었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그럴 용기가 없었는지..." 김한나 씨만 불편했던 건 아니었다고 합니다.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로 숨진 서정우 하사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이건 아니지 않느냐'고 공개적으로 불만을 표현했다고 합니다. 김 씨 테이블에는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이 있었지만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고 합니다. 김 씨는 KBS와의 통화에서 "우리가 평화 통일을 하는 것은 당연하고, (북한을) 도와주는 것도 우리가 더 (여유가) 있으니까 도와주는 건데 그래도 때와 장소를 구분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팸플릿은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사진이 올라오며, 하루종일 뜨거운 논란이 됐습니다. 수백 개의 댓글들이 달렸습니다. 대부분 유가족들을 배려하지 못 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사진 자체야 참 좋지만 그 사진이 어디 들어가느냐에 따라서 큰 문제가 될 수는 있죠. 이건 북한에 대한 태도가 친북이냐 반북이냐를 떠나서 인간에 대한 예의 문제입니다." "김정은에 의해 가족을 잃은 분들을 데려와서 원수와 손을 맞잡고, 원수를 긍정하는 팸플릿을 손에 쥐어주다니요." 물론 모든 참석자가 불편했던 건 아닙니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대체로 분위기는 좋았다"고 했습니다. 6.25 전쟁 때 전사한 아버지의 유해를 국가가 찾아줘 고맙다는 언급도 있었습니다. 이 팸플릿은 올해 1월부터 제작돼 행사 때마다 사용해왔다고 합니다. 이번 오찬 행사용으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사진이 들어간 팸플릿을 따로 제작한 것은 아니라는 설명입니다. 음식 메뉴와 함께 대통령의 활동 모습을 같이 나눠주고 참석자들이 기념 삼아 가져갈 수 있게 하자는 취지라는 겁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런 논란이 벌어진 점이 무척 안타깝다"면서 "6.25나 천안함, 연평해전 같은 비극적 희생자들이 더 이상 생기지 않게 하기 위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추진하는 건데..."라면서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또 다른 청와대 관계자는 "유족들이 마음 상해하셨을 거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면서 안타까움을 전했습니다. 문 대통령 내외는 어제 현충일 추념식에서 김차희 씨의 편지가 낭독될 때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김 씨는 구순이 넘도록 6.25 전쟁에서 전사한 남편의 유해조차 찾지 못한 상황입니다. 김 씨는 편지에서 "당신의 흔적을 찾으려 국립묘지에 갈 때 마다, 회색 비석들이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쓰러져 있는 모습으로 보이는데, 어떤 이가 국립묘지에 구경하러 간다는 말에 가슴이 미어진다"고 썼습니다. 누군가 무심코 뱉은 '구경한다'는 말에도 가슴이 미어지는 게 유가족입니다. 작은 팸플릿 하나도 이들에겐 헤아리기 힘든 상처가 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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