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휴지 생리대’로 버티는 사람들, ‘월경권’을 말하다

입력 2019.06.09 (10:55) 수정 2019.06.09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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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깔창 생리대’ 3년… 여전히 ‘휴지 생리대’로 버티는 취약계층 여성들
일부 지자체에서는 무상지급 논의도… 영국은 올해부터 시작
‘월경권’, 누구나 안전하고 건강하게 월경할 권리

“겨우 몇백 원에 자존심이 상하죠”

사업 실패로 서울역에서 노숙 중인 김 모 씨는 한 달에 한 번 월경 기간이 돌아올 때면 막막합니다. 생리대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노숙인 쉼터에 생리대가 비치돼 있지만 크기가 안 맞거나 그나마도 다 떨어져 있기가 일쑤입니다. 쉼터 직원에게 요청하려고 해도 대부분 남성 직원이라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국, 김 씨가 찾는 곳은 지하철 공중화장실입니다. 생리대는 없지만, 휴지가 있습니다. 휴지만 둘둘 말아서 쓰거나, 쉼터에서 얻어 온 생리대를 휴지에 덧대어 사용합니다. "휴지를 척척 떼면 이게 두꺼워지잖아요? 여기다가 생리대를 하나 대고 그렇게 몇 시간을 버티는 거예요." 생리대를 자주 교체하지 않으면 세균이 번식하고 발진과 염증 등 피부 질환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밤이 되고 화장실 문도 닫았는데 휴지가 다 떨어졌다면 가지고 다니는 헝겊이나 수건까지도 동원합니다. 깨끗하지 않아 꺼려지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휴지를 많이 쓴다는 이유로 쫓겨난 적도 여러 번입니다. 김 씨는 "생리대가 겨우 몇백 원이기는 하지만, 내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것도 마련하기 어려울 때가 많으니 속이 상해요."라고 말합니다.

생리대 가격 OECD 중 최고…정부 지원도 사각지대

'겨우 몇백 원'이라지만 김 씨 같은 노숙인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생리대 가격은 부담스럽습니다. 이미 2004년에 월경 용품에 붙는 부가가치세가 폐지됐는데도, 한국의 생리대 가격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습니다. 1개당 331원, 물가가 높은 덴마크 156원과 비교하면 2배입니다(한국소비자원, 2017). 사람마다 다르지만 보통 월경 기간 동안만 원이 넘게 들어갑니다. 가격 상승률도 높아 2010년부터 7년 동안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13%)의 2배에 달했습니다.

3년 전 한 여성 청소년의 '깔창 생리대' 사연이 알려진 뒤 취약 계층의 생리대 비용 부담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했습니다. 정부는 만 11~18세의 저소득층 청소년에게 생리대 현물을 지원하다가 올해부터는 본인에게 맞는 제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한 달에 만 500원의 바우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 활동을 할 수 없는 청소년들이 낙인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초경 시기가 빨라지는 상황에서 만 11세 미만 청소년들은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됩니다. 또 앞서 본 김 씨의 사례처럼 여성 노숙인이나 저소득층 등 성인 취약계층도 사각지대로 남습니다.

  

스코틀랜드·영국, 생리대는 ‘보편적 권리’

그러다 보니 생리대를 보편적 복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서울시는 지난해부터 공공기관의 화장실에 생리대를 비치하는 사업을 시범 시작했습니다. 경기도 여주시는 올해 하반기부터 모든 여성 청소년들에게 생리대 구매 비용을 지원하기로 했고 서울시의회도 비슷한 내용의 조례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28일에는 '세계 월경의 날'에 맞춰 서울시 여성청소년 생리대 보편지급 운동본부 발족식이 열렸습니다. 행사에 참가한 권수정 서울시의원은 "생리대 문제가 국민 건강권의 문제로 접근돼야 하는 문제라는 것들을 확인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해외에서는 더 일찍부터 생리대 무상지급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미국 뉴욕시는 2016년 모든 공립학교와 무주택자 쉼터, 교도소 여성들에게 월경 용품을 보급하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또 작년 스코틀랜드에 이어 올해는 영국 정부가 모든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생리 용품을 무료로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모두 한국의 '깔창 생리대' 논란과 비슷하게 생리대가 없어 학교에 가지 못 하는 청소년들이 화두가 되며 일어난 '생리 빈곤' 퇴치 운동 이후였습니다.

  

“월경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

지난달 25일과 26일, 서울 성수동에서 월경박람회가 열렸습니다. 생리대와 탐폰, 월경컵 등 다양한 월경 용품이 전시됐고, 건강한 월경에 대한 강연이 열렸습니다. 부끄럽고 더러운 일로 숨겨져 왔던 월경에 대해 적극적으로, 자연스럽게 이야기해 보자는 취지였습니다.

박람회 벽면에는 '월경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뜻에서 나온 질문이었습니다. 박람회를 주최한 '이지앤모어' 김귀선 디렉터는 "월경은 인류 절반이 하고 있는 행사"라며, "일부 여성들이 아닌 모든 여성이 월경을 얘기하고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박람회 수익금 일부는, '월경 소외'를 겪는 여성 노숙인의 월경 용품 구매 후원금으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월경은 여성 대부분이 겪는 일입니다. 선택하거나 참을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몸 건강과도 직결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누구나 안전하고 건강하게 월경을 할 수 있는 권리 '월경권'도 논의되고 있습니다. 생리대가 없어 화장실 휴지와 쓰다만 수건을 사용하는 건 안전하지 않습니다. 물론 무상지급을 확대하기 전에 지원 범위나 소요 예산, 방식 등 따져볼 일도 많습니다. '겨우 몇백 원'짜리 생리대 무상 지급이 월경권의 시작이 될 수 있을지 지켜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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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6-09 10:55:46
    • 수정2019-06-09 11:06:46
    취재후·사건후
‘깔창 생리대’ 3년… 여전히 ‘휴지 생리대’로 버티는 취약계층 여성들<br />일부 지자체에서는 무상지급 논의도… 영국은 올해부터 시작<br />‘월경권’, 누구나 안전하고 건강하게 월경할 권리
“겨우 몇백 원에 자존심이 상하죠”

사업 실패로 서울역에서 노숙 중인 김 모 씨는 한 달에 한 번 월경 기간이 돌아올 때면 막막합니다. 생리대를 구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노숙인 쉼터에 생리대가 비치돼 있지만 크기가 안 맞거나 그나마도 다 떨어져 있기가 일쑤입니다. 쉼터 직원에게 요청하려고 해도 대부분 남성 직원이라 이야기를 꺼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결국, 김 씨가 찾는 곳은 지하철 공중화장실입니다. 생리대는 없지만, 휴지가 있습니다. 휴지만 둘둘 말아서 쓰거나, 쉼터에서 얻어 온 생리대를 휴지에 덧대어 사용합니다. "휴지를 척척 떼면 이게 두꺼워지잖아요? 여기다가 생리대를 하나 대고 그렇게 몇 시간을 버티는 거예요." 생리대를 자주 교체하지 않으면 세균이 번식하고 발진과 염증 등 피부 질환이 생길 수 있습니다.

밤이 되고 화장실 문도 닫았는데 휴지가 다 떨어졌다면 가지고 다니는 헝겊이나 수건까지도 동원합니다. 깨끗하지 않아 꺼려지지만 어쩔 수 없습니다. 휴지를 많이 쓴다는 이유로 쫓겨난 적도 여러 번입니다. 김 씨는 "생리대가 겨우 몇백 원이기는 하지만, 내 상황이 이렇다 보니 그것도 마련하기 어려울 때가 많으니 속이 상해요."라고 말합니다.

생리대 가격 OECD 중 최고…정부 지원도 사각지대

'겨우 몇백 원'이라지만 김 씨 같은 노숙인뿐 아니라 일반인에게도 생리대 가격은 부담스럽습니다. 이미 2004년에 월경 용품에 붙는 부가가치세가 폐지됐는데도, 한국의 생리대 가격은 OECD 국가 중 가장 높습니다. 1개당 331원, 물가가 높은 덴마크 156원과 비교하면 2배입니다(한국소비자원, 2017). 사람마다 다르지만 보통 월경 기간 동안만 원이 넘게 들어갑니다. 가격 상승률도 높아 2010년부터 7년 동안 전체 소비자물가 상승률(13%)의 2배에 달했습니다.

3년 전 한 여성 청소년의 '깔창 생리대' 사연이 알려진 뒤 취약 계층의 생리대 비용 부담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했습니다. 정부는 만 11~18세의 저소득층 청소년에게 생리대 현물을 지원하다가 올해부터는 본인에게 맞는 제품을 구매할 수 있도록 한 달에 만 500원의 바우처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제 활동을 할 수 없는 청소년들이 낙인감을 느낄 수밖에 없고, 초경 시기가 빨라지는 상황에서 만 11세 미만 청소년들은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점은 한계로 지적됩니다. 또 앞서 본 김 씨의 사례처럼 여성 노숙인이나 저소득층 등 성인 취약계층도 사각지대로 남습니다.

 
스코틀랜드·영국, 생리대는 ‘보편적 권리’

그러다 보니 생리대를 보편적 복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서울시는 지난해부터 공공기관의 화장실에 생리대를 비치하는 사업을 시범 시작했습니다. 경기도 여주시는 올해 하반기부터 모든 여성 청소년들에게 생리대 구매 비용을 지원하기로 했고 서울시의회도 비슷한 내용의 조례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지난달 28일에는 '세계 월경의 날'에 맞춰 서울시 여성청소년 생리대 보편지급 운동본부 발족식이 열렸습니다. 행사에 참가한 권수정 서울시의원은 "생리대 문제가 국민 건강권의 문제로 접근돼야 하는 문제라는 것들을 확인해 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해외에서는 더 일찍부터 생리대 무상지급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미국 뉴욕시는 2016년 모든 공립학교와 무주택자 쉼터, 교도소 여성들에게 월경 용품을 보급하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또 작년 스코틀랜드에 이어 올해는 영국 정부가 모든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생리 용품을 무료로 지급하기로 했습니다. 모두 한국의 '깔창 생리대' 논란과 비슷하게 생리대가 없어 학교에 가지 못 하는 청소년들이 화두가 되며 일어난 '생리 빈곤' 퇴치 운동 이후였습니다.

 
“월경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

지난달 25일과 26일, 서울 성수동에서 월경박람회가 열렸습니다. 생리대와 탐폰, 월경컵 등 다양한 월경 용품이 전시됐고, 건강한 월경에 대한 강연이 열렸습니다. 부끄럽고 더러운 일로 숨겨져 왔던 월경에 대해 적극적으로, 자연스럽게 이야기해 보자는 취지였습니다.

박람회 벽면에는 '월경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데?'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사소한 일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뜻에서 나온 질문이었습니다. 박람회를 주최한 '이지앤모어' 김귀선 디렉터는 "월경은 인류 절반이 하고 있는 행사"라며, "일부 여성들이 아닌 모든 여성이 월경을 얘기하고 누릴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이유로 박람회 수익금 일부는, '월경 소외'를 겪는 여성 노숙인의 월경 용품 구매 후원금으로 사용된다고 합니다.

 
월경은 여성 대부분이 겪는 일입니다. 선택하거나 참을 수 있는 일이 아니며 몸 건강과도 직결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누구나 안전하고 건강하게 월경을 할 수 있는 권리 '월경권'도 논의되고 있습니다. 생리대가 없어 화장실 휴지와 쓰다만 수건을 사용하는 건 안전하지 않습니다. 물론 무상지급을 확대하기 전에 지원 범위나 소요 예산, 방식 등 따져볼 일도 많습니다. '겨우 몇백 원'짜리 생리대 무상 지급이 월경권의 시작이 될 수 있을지 지켜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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