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기획 창] 20년 전 트럼프가 들려주는 싱가포르 회담 이야기

입력 2019.06.11 (07:05) 수정 2019.06.11 (0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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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 전인 1999년 ‘북미정상회담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트럼프

하노이 회담 결렬에 대한 실망감이 아직도 한반도 상공에 머물고 있다. 실망감의 상당 부분은 기시감에서 온다. 그렇다. 처음 겪는 일이 아니다. 지난 몇십 년간 잔뜩 기대를 품었다가 실망으로 끝났던 협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북한은 역시 어렵구나’, ‘이번에도 안 되는구나’ 이런 느낌들을 갖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비핵화를 통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은 물 건너간 걸까? 우리 아이들의 평화롭고 안전한 미래와 우리 청년들에게 열릴지 모를 엄청난 기회, 그리고 북한 주민들의 생활을 향상시켜줄 경제발전의 희망은 물거품이 돼버린 것일까? 싱가포르 회담이 그렸던 한반도의 미래는 일장춘몽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 희망을 접기엔 이르다.

실마리는 20년 전 트럼프였다. 놀랍게도 트럼프는 1999년부터 북미정상회담의 필요성을 역설해 왔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었다. CBS와 CNN 인터뷰였다. 앵커가 물었다. 대통령이라면 북한 핵시설을 폭격하겠느냐고. 53살 트럼프는 대답했다. ‘당장 북한과 협상할 것’이라고.

우연일까? 워낙에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보니 우연히 일치한 것일까? 그렇게 보기엔 발언내용들이 너무 구체적이다. 20년 전 트럼프는 거의 싱가포르 회담을 구상하고 있는 한 것처럼 말한다. 북미정상회담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런 비유를 들었다.

“뉴욕에선 그럴 일이 잘 없지만, 워싱턴 길거리에서 누군가 다가와서 머리에 총을 겨누면서 ‘돈 내놔’ 한다고 쳐요. 그런데 그 사람이 총을 겨누기 전에 도대체 왜 그러는지 먼저 이유를 알아내는 게 좋지 않겠어요?”


아주 단순한 비유다. 그러나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서울대 윤영관 명예교수는 이 비유가 매우 적절하다고 지적한다. 이 비유가 싱가포르 회담의 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얘기다. 트럼프 이전의 미국 대통령들이 ‘북한이 왜 굳이 핵을 가지려 하는지’ 그 진의를 파악하는 데 소홀했기 때문이다.

CIA의 한국 정보통이었던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는 북한에 대한 엄청난 ‘정보실패’가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자신이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해 북한의 진의를 파악하려고 시도했지만, 미국 정부 인사들은 그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북한은 미국에 여러 차례 신호를 보내왔는데 미국이 이를 외면했다는 것이다. 이런 기회들을 잘 살렸다면 북핵 문제가 이렇게까지 악화되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

북한을 악마화(demonize)하는 시각이 문제였다. 대표적인 경우가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이다. 북한을 이런 시각으로 보고 나면 진의 파악이든 협상이든 다 헛짓이 된다. 악마에게 파악할 진의가 어디 있을까? 악마와의 협상이 가능하기나 할까?

그 결과가 북미대화의 단절이었다. 대화가 끊기면 남는 건 힘자랑이다. 미국은 압도적인 힘으로 압박하면 북한이 손을 들고 나올 것이라 기대했다. 그런데 지난 30년간 일어난 일은 거꾸로였다. 미국이 북한을 압박하면 할수록 북한은 오히려 핵 개발을 더욱 가속화시켜왔다. 북한은 북한 나름대로 핵 개발로 힘자랑을 해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누구도 손대기 어려운 지경까지 이르렀다.

20년 트럼프는 북한에 대한 대안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적어도 그는 북한을 악마화하지 않았다.

“북한이 좀 정상은 아니죠. 그렇지만 멍청이들도 아닙니다.”
“북한이 재미로 핵을 개발하는 게 아닙니다. 다 이유가 있어요.”
“경제에 대해 얘기해 볼 수도 있고 안보에 대해 얘기해볼 수 있어요.”

북한이 왜 기를 쓰고 핵을 가지려는지, 정상끼리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이 불안해하는 게 있다면, 그 불안을 해소시켜 주고 안심시켜주면 된다. 그러면 핵을 포기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20년 전 트럼프가 얘기해주는 싱가포르 회담의 정신이다.

하노이 회담 결렬의 실망감이 아직도 한반도 상공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오해와 불신으로 점철된 70년 북미 관계를 대화에서부터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한다는 싱가포르 회담의 정신은 변한 것이 없다. 앞으로 있을 3차 북미정상회담에 희망을 걸 이유는 아직도 있다.

오늘 밤 10시에 1TV를 통해 방송되는 '싱가포르 회담 1주년 특집 시사기획 창 : 트럼프의 선택은?'에서 트럼프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귀담아들을 만한 20년 전 트럼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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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기획 창] 20년 전 트럼프가 들려주는 싱가포르 회담 이야기
    • 입력 2019-06-11 07:05:18
    • 수정2019-06-11 07:16:06
    취재K
  20년 전인 1999년 ‘북미정상회담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트럼프

하노이 회담 결렬에 대한 실망감이 아직도 한반도 상공에 머물고 있다. 실망감의 상당 부분은 기시감에서 온다. 그렇다. 처음 겪는 일이 아니다. 지난 몇십 년간 잔뜩 기대를 품었다가 실망으로 끝났던 협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북한은 역시 어렵구나’, ‘이번에도 안 되는구나’ 이런 느낌들을 갖게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비핵화를 통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은 물 건너간 걸까? 우리 아이들의 평화롭고 안전한 미래와 우리 청년들에게 열릴지 모를 엄청난 기회, 그리고 북한 주민들의 생활을 향상시켜줄 경제발전의 희망은 물거품이 돼버린 것일까? 싱가포르 회담이 그렸던 한반도의 미래는 일장춘몽이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 희망을 접기엔 이르다.

실마리는 20년 전 트럼프였다. 놀랍게도 트럼프는 1999년부터 북미정상회담의 필요성을 역설해 왔다. 한 번이 아니라 두 번이었다. CBS와 CNN 인터뷰였다. 앵커가 물었다. 대통령이라면 북한 핵시설을 폭격하겠느냐고. 53살 트럼프는 대답했다. ‘당장 북한과 협상할 것’이라고.

우연일까? 워낙에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보니 우연히 일치한 것일까? 그렇게 보기엔 발언내용들이 너무 구체적이다. 20년 전 트럼프는 거의 싱가포르 회담을 구상하고 있는 한 것처럼 말한다. 북미정상회담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이런 비유를 들었다.

“뉴욕에선 그럴 일이 잘 없지만, 워싱턴 길거리에서 누군가 다가와서 머리에 총을 겨누면서 ‘돈 내놔’ 한다고 쳐요. 그런데 그 사람이 총을 겨누기 전에 도대체 왜 그러는지 먼저 이유를 알아내는 게 좋지 않겠어요?”


아주 단순한 비유다. 그러나 외교통상부 장관을 지낸 서울대 윤영관 명예교수는 이 비유가 매우 적절하다고 지적한다. 이 비유가 싱가포르 회담의 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다는 얘기다. 트럼프 이전의 미국 대통령들이 ‘북한이 왜 굳이 핵을 가지려 하는지’ 그 진의를 파악하는 데 소홀했기 때문이다.

CIA의 한국 정보통이었던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 미 대사는 북한에 대한 엄청난 ‘정보실패’가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자신이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해 북한의 진의를 파악하려고 시도했지만, 미국 정부 인사들은 그런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이었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북한은 미국에 여러 차례 신호를 보내왔는데 미국이 이를 외면했다는 것이다. 이런 기회들을 잘 살렸다면 북핵 문제가 이렇게까지 악화되지 않았을 거란 얘기다.

북한을 악마화(demonize)하는 시각이 문제였다. 대표적인 경우가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이다. 북한을 이런 시각으로 보고 나면 진의 파악이든 협상이든 다 헛짓이 된다. 악마에게 파악할 진의가 어디 있을까? 악마와의 협상이 가능하기나 할까?

그 결과가 북미대화의 단절이었다. 대화가 끊기면 남는 건 힘자랑이다. 미국은 압도적인 힘으로 압박하면 북한이 손을 들고 나올 것이라 기대했다. 그런데 지난 30년간 일어난 일은 거꾸로였다. 미국이 북한을 압박하면 할수록 북한은 오히려 핵 개발을 더욱 가속화시켜왔다. 북한은 북한 나름대로 핵 개발로 힘자랑을 해온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누구도 손대기 어려운 지경까지 이르렀다.

20년 트럼프는 북한에 대한 대안적인 시각을 보여준다. 적어도 그는 북한을 악마화하지 않았다.

“북한이 좀 정상은 아니죠. 그렇지만 멍청이들도 아닙니다.”
“북한이 재미로 핵을 개발하는 게 아닙니다. 다 이유가 있어요.”
“경제에 대해 얘기해 볼 수도 있고 안보에 대해 얘기해볼 수 있어요.”

북한이 왜 기를 쓰고 핵을 가지려는지, 정상끼리 마주 앉아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는 것이다. 북한이 불안해하는 게 있다면, 그 불안을 해소시켜 주고 안심시켜주면 된다. 그러면 핵을 포기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20년 전 트럼프가 얘기해주는 싱가포르 회담의 정신이다.

하노이 회담 결렬의 실망감이 아직도 한반도 상공에 머물고 있다. 그러나 오해와 불신으로 점철된 70년 북미 관계를 대화에서부터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한다는 싱가포르 회담의 정신은 변한 것이 없다. 앞으로 있을 3차 북미정상회담에 희망을 걸 이유는 아직도 있다.

오늘 밤 10시에 1TV를 통해 방송되는 '싱가포르 회담 1주년 특집 시사기획 창 : 트럼프의 선택은?'에서 트럼프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귀담아들을 만한 20년 전 트럼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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