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王)의 귀환’ 연광철…작은 체구의 그가 ‘거인’으로 불리우기까지

입력 2019.06.12 (07:01) 수정 2019.06.16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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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God) 광철', '세계적 베이스', '신공(神功)', '살아있는 교과서', '최고의 바그너 가수' ……. 성악가 연광철을 설명하는 수식어들이다. 미국 뉴욕타임스의 한 기자는 연광철을 '작지만, 거인처럼 노래하는 사람'이라 평했다.

지난 8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10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폐막공연으로 열린 국립오페라단의 '바그너 갈라.' 훈딩(등장인물 지클린데의 냉혹한 카리스마를 지닌 남편-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중 두 번째 작품 '발퀴레' 1막) 역과 구르네만츠(인간적 깊이를 지닌 성배 기사단의 노(老)기사- 바그너 최후의 역작이라는 '파르지팔' 3막) 역이라는 대조적인 두 배역을, '콘서트 형식'이라는 제약 속에서도 완벽하게 소화해낸 그에게 평론가들은 "베이스의 신(神) 연광철의 눈부신 귀환"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무대도 의상도, 가수를 극중 인물로 포장해주지 않는 '콘서트 형식.' 이같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연광철의 노련한 경지는 오히려 빛을 발했고 발성, 호흡, 발음, 연기 등 모든 것이 '살아있는 교과서' 같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더해 타고난 그만의 음색은 청중의 귀와 마음을 행복감과 위로와 감동으로 가득 채우기에 충분했다고…….

안타깝게도 이번 공연을 직접 보고 들을 순 없었지만, 공연 전 연광철 선생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동양인의 체격적·문화적 한계를 특유의 낙천성으로 극복하다

Q. 성악에서 베이스는 테너보다 주목도 덜 받고, 또 동양인으로서 바그너에서 베이스 역할을 하려면 남모르는 어려움도 많았을 텐데요.

Y. 네, 저는 주로 오페라를 많이 하는데 50% 정도는 이탈리아나 프랑스 오페라를 하고, 50% 정도는 바그너를 주로 하게 돼요. 그런데 이탈리아 오페라의 경우는 사랑 이야기가 많고 또 베이스들이 주로 아버지나 제사장 역할을 하지만, 바그너에서는 베이스라고 하면 거인이나 신들의 아버지 같은 역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동양인으로서 어려움이 많았죠. 예를 들어 제가 거인 역할을 맡으면 연출자들이 많이 힘들어해요, 키가 작으니까. 어떤 때는 파트너 거인의 키가 2m가 넘는 경우도 있어요, 저는 키가 그의 어깨 정도 오고요. 또 어떤 때는 왕이 있고 신하가 있는데 신하가 왕 역할을 하는 저보다 큰 경우도 많아요. 그러니까 그림 상으로는 어려운 점이 많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지휘자나 극장장 같은 사람들이 겉으로 보여지는 측면보다 음악적인 가치를 높이 사고, 그런 측면에서 평가하기 때문이에요.

사진 제공: 대구오페라하우스사진 제공: 대구오페라하우스

오페라라는 게 아무리 좋은 연출과 정말 키 크고 예쁜 가수들이 나와도 음악이 채워주지 못하면 감동이 없잖아요, 뮤지컬이나 오페레타 같은 경우는 꼭 성악적 테크닉이 아니더라도 무대에서 보여지는 화려한 의상들이나 춤, 마이크 같은 것들로 어느 정도 해결이 되는데 오페라는 정말 순수음악으로만 해결해야 되기 때문에 가수의 역량이 정말 중요해요. 그래서 그동안 저랑 작업하면서 힘들어했던 연출가들이 많이 있지만, 그런 분들이 결국 저를 받아들이고 같이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마 음악적인 모습에서 (제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Q. 그래서 '덩치는 작지만, 거인처럼 노래하는 존재감'이라는 찬사를 받으시는 거군요. 다니엘 바렌보임(피아니스트 겸 지휘자로 '현대 음악계의 거장'으로 불림)은 선생님에 대해 "아름다운 목소리와 대단한 음악적 감수성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음악적 지식 면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평했던데요.

Y. 이쪽도 정말 경쟁이 치열하거든요, 여기도 커피맛과 비슷해서 어떤 사람은 신맛을 좋아하지만 어떤 사람은 좀 더 깊은 맛을 좋아하기도 하고 그렇듯이 노래도 어찌 보면 똑같은 멜로디를 똑같은 베이스가 하는데 여러 사람이 서로 다른 음색으로 노래를 하잖아요. 서양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 문화에서 살아본 적도 없는 이 동양인이 자기들 것 가운데 최고의 예술이라는 오페라를 불렀을 때 과연 '감동'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거든요. 가령 아버지 역할을 한다고 했을 때 유럽의 아버지라고 해도 독일의 아버지와 프랑스 아버지, 이탈리아 아버지가 다 다르죠. 종교 같은 것도 다르지만 제스쳐라든가 표정 같은 것들요. 아버지가 딸 볼에 입맞춤을 할 때도 나라마다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다 알아내야 하는 건데, 외국 사람이 한국에 와서 판소리를 한다고 하면 신기해하고 놀라기는 해도 깊은 감동을 받게 되기까지는 정말 어렵잖아요, 외국에서 활동하는 오페라 가수들은 항상 그런 어려움을 안고 있어요. 언어만 해도 그렇죠, 제가 프랑스에 가서 프랑스어로 오페라를 하면 프랑스 관객들이 듣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발음을 해야 하고 그만큼 남다른 노력이 필요하죠. 그래서 언어 코치한테 정말 세세한 것까지 충분히 코치를 받고요, 제스쳐나 음악적 해석도 최대한 본토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습으로 다가가려고 하고…….

본토 사람들조차 동의할 수밖에 없는 정도의 '실력'을 보여줘야 비로소 수긍하고 인정한다

연광철은 1년 전 큰 상을 두 개나 받았다. 국내에서 받은 '호암상 예술상' 그리고 독일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에서 받은 '캄머쟁어(궁정가수라는 뜻으로 독일어권 성악가의 최고 영예 Kammersaenger)' 칭호가 그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어렸을 때 체계적인 음악 교육도 받아보지 못한 시골 마을 출신이다.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게 되리라는 꿈은 추구해본 적도 없다고.

지난해 ‘호암상 예술상’을 수상한 성악가 연광철(앞줄 한가운데)지난해 ‘호암상 예술상’을 수상한 성악가 연광철(앞줄 한가운데)

Q. 늦은 나이에 음악을 시작하게 되셨다고 들었어요.

Y. 네, 저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 살았어요. 그래서 봄이나 가을에는 하교하고 집에 가면 도착하기 전에 날이 어두워졌죠. 집에 갈 때 마지막 두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어두워지면 굉장히 무섭거든요, 그때 노래를 참 많이 했어요. 혼자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소리를 내면서 갔던 거죠. 그렇게 노래를 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합창단에 들어갔어요. 그렇다고 해서 성악적인 것을 배운 건 아니었고요. 중학교에 진학했는데 변성기를 거치면서 남들과 좀 다른 목소리를 갖게 됐어요. 그때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슈베르트의 '마왕'이나 '들장미' 같은 곡들이 있다고 배웠는데 정말 들어보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충주 시내 레코드 가게에 가서 몇 달 걸려 겨우 LP판을 구해서 받아왔는데 집에 전축이 없어서 다시 그걸 카세트테이프로 녹음을 해서 듣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때 든 생각이 '이 사람들이 하는 노래를 나도 충분히 할 수 있겠구나'였어요.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저는 빨리 경제활동을 하고 싶어서 원래는 3년 장학금을 주면서 졸업과 함께 하사관으로 임명을 시켜주는 대전 공군기술고등학교를 가려고 했는데, 뜻대로 안 돼서 결국 공업고등학교를 가게 됐어요. 재밌는 건 2학년 때 음악 선생님이 안 계셨는데요, 공업고등학교에 음악 선생님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에서 그랬던 건지... 그런데 어떤 선생님께서 학생들이 정서가 너무 메마르니까 교내 음악 경연 대회를 열자고 해서 딱 한 번 대회를 열었는데 그 때 제가 독창으로 1등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3학년을 마치고 (공업고등학교니까) 기능사 자격증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죠, 그래서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음악 경연 대회에서 상을 탔던 게 기억이 나는 거죠. '내가 남다른 음성을 가지고 있으니 이걸로 뭘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하다보니, 당시 충주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가 청주대학교였는데 결국 음악교육과에 성악 전공으로 진학을 하게 됐고, 노래가 계속 좋아지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대도시에 있는 성악가와 학생들은 어떻게 노래를 하는지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콩쿠르에 나갔고 거기서 입상을 하게 되면서 또다시 '비록 지방 학교의 음악교육과 성악 전공생이지만 나도 대도시 학생들 못지 않게 노래를 하고 있구나' 생각하게 됐죠.

그러니까 저는 처음부터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겠다라는 생각을 한 게 아니고, 다만 성악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 잘하는 것인가가 궁금했어요. 그런 호기심으로 콩쿠르도 나갔었고요. 그러면서 알게 된 선배님들이 유학을 권하셔서 '나도 한 번쯤 외국에 나가보고 싶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노래하고 어떤 정서에서 이런 음악들이 발전해왔는지 궁금하다'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갖게 됐어요. 그렇게 1990년 9월에 불가리아를 가게 됐고 거기서 독일 베를린으로 갔고요, 그때도 외국에서 활동할 생각은 안 했고 나중에 귀국하면 적어도 청주에서는 활동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정도였는데, 당시 저를 가르치던 선생님께서 계속 저한테 '너 정도 노래하면 유럽에서 활동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그러다가 1992년 말에 플라시도 도밍고가 자신의 이름을 건 콩쿠르를 시작했어요. 우여곡절 끝에 지역 대표로 뽑혀 파리에 가게 됐는데 거기서 도밍고가 직접 열 명을 뽑았고, 피날레에 뽑힌 유일한 남성으로 상까지 받게 됐죠.

세계적 성악가 연광철과 플라시도 도밍고, 연광철은 1992년 1회 도밍고 콩쿠르 우승자 가운데 한 명이다.세계적 성악가 연광철과 플라시도 도밍고, 연광철은 1992년 1회 도밍고 콩쿠르 우승자 가운데 한 명이다.

사실 저는 파리에 가기 전에 독일 지역 예선에서는 떨어졌었어요. 그러다 스웨덴에서 한 사람이 포기하게 되면서 운 좋게 그 사람 대신 참가하게 된 거였는데요, 그때 콩쿠르에서 떨어졌다고 들었을 때도 콩쿠르에서는 떨어졌지만 노래 연습은 항상 계속 열심히 하고 있었어요, 마치 내일 또 콩쿠르에 나가는 것처럼. 그래서 다시 오라고 연락을 받았을 때도 준비가 되어 있었죠. 근데 그렇게 해서 파리로 갈 때에도 막상 저는 '가서 파리 한번 구경하고 와야지' 하는 생각이었어요.

Q. 어떻게 보면 항상 준비는 하고 계시면서도 매사에 힘을 빼고 임하시는 스타일이시네요?

Y. 네, 베이스가 사실은 테너보다 더 집중을 받기는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늘 생각하는 것은 꼭 아름다운 소리로 아름답게 노래를 해야된다라는 것보다도 깊은 사고를 가지고, 작곡가/대본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으면서, 그것이 자신의 음성으로 해석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에요. 그럴 수 있는 한 저는 무대에 서 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요. 도밍고만 봐도 테너를 하다가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바리톤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무대에서 그분의 모습은 한 사람의 가수이지 70대 후반의 노병같은 모습은 아니잖아요, 그런 게 저에게도 굉장히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되기까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했던 게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현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현재의 저 역시 '지금까지 해온 것들의 결과가 아니라 앞으로 계속 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연광철은 1년에 적어도 30%는 새로운 작품들에 도전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금은 러시아 오페라를 공부하고 있다며 오는 2021년에는 미국에서 '보리스 고두노프'에 출연할 예정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2-3년 전부터 미리미리 공연이 계획된다면 지금보다 더 자주 국내 무대에 설 텐데라는 아쉬움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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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王)의 귀환’ 연광철…작은 체구의 그가 ‘거인’으로 불리우기까지
    • 입력 2019-06-12 07:01:53
    • 수정2019-06-16 11:38:15
    취재K
'갓(God) 광철', '세계적 베이스', '신공(神功)', '살아있는 교과서', '최고의 바그너 가수' ……. 성악가 연광철을 설명하는 수식어들이다. 미국 뉴욕타임스의 한 기자는 연광철을 '작지만, 거인처럼 노래하는 사람'이라 평했다.

지난 8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오페라하우스에서 10회 대한민국오페라페스티벌 폐막공연으로 열린 국립오페라단의 '바그너 갈라.' 훈딩(등장인물 지클린데의 냉혹한 카리스마를 지닌 남편- '니벨룽의 반지' 4부작 중 두 번째 작품 '발퀴레' 1막) 역과 구르네만츠(인간적 깊이를 지닌 성배 기사단의 노(老)기사- 바그너 최후의 역작이라는 '파르지팔' 3막) 역이라는 대조적인 두 배역을, '콘서트 형식'이라는 제약 속에서도 완벽하게 소화해낸 그에게 평론가들은 "베이스의 신(神) 연광철의 눈부신 귀환"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무대도 의상도, 가수를 극중 인물로 포장해주지 않는 '콘서트 형식.' 이같은 제약에도 불구하고 연광철의 노련한 경지는 오히려 빛을 발했고 발성, 호흡, 발음, 연기 등 모든 것이 '살아있는 교과서' 같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더해 타고난 그만의 음색은 청중의 귀와 마음을 행복감과 위로와 감동으로 가득 채우기에 충분했다고…….

안타깝게도 이번 공연을 직접 보고 들을 순 없었지만, 공연 전 연광철 선생과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동양인의 체격적·문화적 한계를 특유의 낙천성으로 극복하다

Q. 성악에서 베이스는 테너보다 주목도 덜 받고, 또 동양인으로서 바그너에서 베이스 역할을 하려면 남모르는 어려움도 많았을 텐데요.

Y. 네, 저는 주로 오페라를 많이 하는데 50% 정도는 이탈리아나 프랑스 오페라를 하고, 50% 정도는 바그너를 주로 하게 돼요. 그런데 이탈리아 오페라의 경우는 사랑 이야기가 많고 또 베이스들이 주로 아버지나 제사장 역할을 하지만, 바그너에서는 베이스라고 하면 거인이나 신들의 아버지 같은 역이거든요. 그러다 보니 동양인으로서 어려움이 많았죠. 예를 들어 제가 거인 역할을 맡으면 연출자들이 많이 힘들어해요, 키가 작으니까. 어떤 때는 파트너 거인의 키가 2m가 넘는 경우도 있어요, 저는 키가 그의 어깨 정도 오고요. 또 어떤 때는 왕이 있고 신하가 있는데 신하가 왕 역할을 하는 저보다 큰 경우도 많아요. 그러니까 그림 상으로는 어려운 점이 많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지휘자나 극장장 같은 사람들이 겉으로 보여지는 측면보다 음악적인 가치를 높이 사고, 그런 측면에서 평가하기 때문이에요.

사진 제공: 대구오페라하우스
오페라라는 게 아무리 좋은 연출과 정말 키 크고 예쁜 가수들이 나와도 음악이 채워주지 못하면 감동이 없잖아요, 뮤지컬이나 오페레타 같은 경우는 꼭 성악적 테크닉이 아니더라도 무대에서 보여지는 화려한 의상들이나 춤, 마이크 같은 것들로 어느 정도 해결이 되는데 오페라는 정말 순수음악으로만 해결해야 되기 때문에 가수의 역량이 정말 중요해요. 그래서 그동안 저랑 작업하면서 힘들어했던 연출가들이 많이 있지만, 그런 분들이 결국 저를 받아들이고 같이 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아마 음악적인 모습에서 (제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접근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Q. 그래서 '덩치는 작지만, 거인처럼 노래하는 존재감'이라는 찬사를 받으시는 거군요. 다니엘 바렌보임(피아니스트 겸 지휘자로 '현대 음악계의 거장'으로 불림)은 선생님에 대해 "아름다운 목소리와 대단한 음악적 감수성을 갖고 있을 뿐 아니라 음악적 지식 면에서도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평했던데요.

Y. 이쪽도 정말 경쟁이 치열하거든요, 여기도 커피맛과 비슷해서 어떤 사람은 신맛을 좋아하지만 어떤 사람은 좀 더 깊은 맛을 좋아하기도 하고 그렇듯이 노래도 어찌 보면 똑같은 멜로디를 똑같은 베이스가 하는데 여러 사람이 서로 다른 음색으로 노래를 하잖아요. 서양 사람들이 보기에는 우리 문화에서 살아본 적도 없는 이 동양인이 자기들 것 가운데 최고의 예술이라는 오페라를 불렀을 때 과연 '감동'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거든요. 가령 아버지 역할을 한다고 했을 때 유럽의 아버지라고 해도 독일의 아버지와 프랑스 아버지, 이탈리아 아버지가 다 다르죠. 종교 같은 것도 다르지만 제스쳐라든가 표정 같은 것들요. 아버지가 딸 볼에 입맞춤을 할 때도 나라마다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다 알아내야 하는 건데, 외국 사람이 한국에 와서 판소리를 한다고 하면 신기해하고 놀라기는 해도 깊은 감동을 받게 되기까지는 정말 어렵잖아요, 외국에서 활동하는 오페라 가수들은 항상 그런 어려움을 안고 있어요. 언어만 해도 그렇죠, 제가 프랑스에 가서 프랑스어로 오페라를 하면 프랑스 관객들이 듣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발음을 해야 하고 그만큼 남다른 노력이 필요하죠. 그래서 언어 코치한테 정말 세세한 것까지 충분히 코치를 받고요, 제스쳐나 음악적 해석도 최대한 본토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습으로 다가가려고 하고…….

본토 사람들조차 동의할 수밖에 없는 정도의 '실력'을 보여줘야 비로소 수긍하고 인정한다

연광철은 1년 전 큰 상을 두 개나 받았다. 국내에서 받은 '호암상 예술상' 그리고 독일 베를린 국립오페라극장에서 받은 '캄머쟁어(궁정가수라는 뜻으로 독일어권 성악가의 최고 영예 Kammersaenger)' 칭호가 그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그는 어렸을 때 체계적인 음악 교육도 받아보지 못한 시골 마을 출신이다. 세계 무대에서 활동하게 되리라는 꿈은 추구해본 적도 없다고.

지난해 ‘호암상 예술상’을 수상한 성악가 연광철(앞줄 한가운데)
Q. 늦은 나이에 음악을 시작하게 되셨다고 들었어요.

Y. 네, 저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시골에 살았어요. 그래서 봄이나 가을에는 하교하고 집에 가면 도착하기 전에 날이 어두워졌죠. 집에 갈 때 마지막 두 고개를 넘어야 했는데 어두워지면 굉장히 무섭거든요, 그때 노래를 참 많이 했어요. 혼자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 소리를 내면서 갔던 거죠. 그렇게 노래를 하기 시작했고 그러다가 합창단에 들어갔어요. 그렇다고 해서 성악적인 것을 배운 건 아니었고요. 중학교에 진학했는데 변성기를 거치면서 남들과 좀 다른 목소리를 갖게 됐어요. 그때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슈베르트의 '마왕'이나 '들장미' 같은 곡들이 있다고 배웠는데 정말 들어보고 싶었던 거죠. 그래서 충주 시내 레코드 가게에 가서 몇 달 걸려 겨우 LP판을 구해서 받아왔는데 집에 전축이 없어서 다시 그걸 카세트테이프로 녹음을 해서 듣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그때 든 생각이 '이 사람들이 하는 노래를 나도 충분히 할 수 있겠구나'였어요. 굉장히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저는 빨리 경제활동을 하고 싶어서 원래는 3년 장학금을 주면서 졸업과 함께 하사관으로 임명을 시켜주는 대전 공군기술고등학교를 가려고 했는데, 뜻대로 안 돼서 결국 공업고등학교를 가게 됐어요. 재밌는 건 2학년 때 음악 선생님이 안 계셨는데요, 공업고등학교에 음악 선생님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에서 그랬던 건지... 그런데 어떤 선생님께서 학생들이 정서가 너무 메마르니까 교내 음악 경연 대회를 열자고 해서 딱 한 번 대회를 열었는데 그 때 제가 독창으로 1등상을 받았어요. 그리고 3학년을 마치고 (공업고등학교니까) 기능사 자격증 시험을 봤는데 떨어졌죠, 그래서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음악 경연 대회에서 상을 탔던 게 기억이 나는 거죠. '내가 남다른 음성을 가지고 있으니 이걸로 뭘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하다보니, 당시 충주에서 가장 가까운 학교가 청주대학교였는데 결국 음악교육과에 성악 전공으로 진학을 하게 됐고, 노래가 계속 좋아지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대도시에 있는 성악가와 학생들은 어떻게 노래를 하는지 궁금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콩쿠르에 나갔고 거기서 입상을 하게 되면서 또다시 '비록 지방 학교의 음악교육과 성악 전공생이지만 나도 대도시 학생들 못지 않게 노래를 하고 있구나' 생각하게 됐죠.

그러니까 저는 처음부터 세계적인 성악가가 되겠다라는 생각을 한 게 아니고, 다만 성악하는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정말 잘하는 것인가가 궁금했어요. 그런 호기심으로 콩쿠르도 나갔었고요. 그러면서 알게 된 선배님들이 유학을 권하셔서 '나도 한 번쯤 외국에 나가보고 싶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노래하고 어떤 정서에서 이런 음악들이 발전해왔는지 궁금하다'는 생각도 자연스럽게 갖게 됐어요. 그렇게 1990년 9월에 불가리아를 가게 됐고 거기서 독일 베를린으로 갔고요, 그때도 외국에서 활동할 생각은 안 했고 나중에 귀국하면 적어도 청주에서는 활동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정도였는데, 당시 저를 가르치던 선생님께서 계속 저한테 '너 정도 노래하면 유럽에서 활동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죠.

그러다가 1992년 말에 플라시도 도밍고가 자신의 이름을 건 콩쿠르를 시작했어요. 우여곡절 끝에 지역 대표로 뽑혀 파리에 가게 됐는데 거기서 도밍고가 직접 열 명을 뽑았고, 피날레에 뽑힌 유일한 남성으로 상까지 받게 됐죠.

세계적 성악가 연광철과 플라시도 도밍고, 연광철은 1992년 1회 도밍고 콩쿠르 우승자 가운데 한 명이다.
사실 저는 파리에 가기 전에 독일 지역 예선에서는 떨어졌었어요. 그러다 스웨덴에서 한 사람이 포기하게 되면서 운 좋게 그 사람 대신 참가하게 된 거였는데요, 그때 콩쿠르에서 떨어졌다고 들었을 때도 콩쿠르에서는 떨어졌지만 노래 연습은 항상 계속 열심히 하고 있었어요, 마치 내일 또 콩쿠르에 나가는 것처럼. 그래서 다시 오라고 연락을 받았을 때도 준비가 되어 있었죠. 근데 그렇게 해서 파리로 갈 때에도 막상 저는 '가서 파리 한번 구경하고 와야지' 하는 생각이었어요.

Q. 어떻게 보면 항상 준비는 하고 계시면서도 매사에 힘을 빼고 임하시는 스타일이시네요?

Y. 네, 베이스가 사실은 테너보다 더 집중을 받기는 어려운 일이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제가 늘 생각하는 것은 꼭 아름다운 소리로 아름답게 노래를 해야된다라는 것보다도 깊은 사고를 가지고, 작곡가/대본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으면서, 그것이 자신의 음성으로 해석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에요. 그럴 수 있는 한 저는 무대에 서 있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요. 도밍고만 봐도 테너를 하다가 지금은 나이가 들어서 바리톤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무대에서 그분의 모습은 한 사람의 가수이지 70대 후반의 노병같은 모습은 아니잖아요, 그런 게 저에게도 굉장히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되기까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준비하고 했던 게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현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현재의 저 역시 '지금까지 해온 것들의 결과가 아니라 앞으로 계속 해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연광철은 1년에 적어도 30%는 새로운 작품들에 도전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금은 러시아 오페라를 공부하고 있다며 오는 2021년에는 미국에서 '보리스 고두노프'에 출연할 예정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2-3년 전부터 미리미리 공연이 계획된다면 지금보다 더 자주 국내 무대에 설 텐데라는 아쉬움도 내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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