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첩 반대에서 미투 지지까지…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스트

입력 2019.06.12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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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 故 이희호 여사 장례위원장(전 국무총리서리) : "(이희호 여사가) YWCA 총무를 하시면서 축첩한 정치인을 축출하는 운동을 일으키셨습니다."

기자 : "...어떤 정치인이요?"

장상 전 국무총리서리 : "아, 모르지…. 시대가 바뀌어가지고."

오늘(12일) 오후 고 이희호 여사 빈소에서 열린 장상 장례위원장의 기자회견에서 오간 문답입니다.

장상 장례위원장이 이희호 여사의 삶을 소개하며 고인이 이끈 '축첩 정치인 축출 운동' 을 설명하자 기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기자들의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본 장 위원장은 "그때는 와이프(아내)가 둘 있는 남자들이 있었다"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대부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인 젊은 기자들에게는 축첩(첩을 둔다는 뜻)이란 단어 자체가 생경했기에 벌어진 해프닝이었습니다.

이희호 여사가 YWCA(여자기독교청년회) 총무로 여성 운동을 한 건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입니다.

그 시절 이희호 여사가 제안한 첫 캠페인은 '혼인신고를 합시다'였다고 합니다.

여성들이 결혼을 한 뒤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살다가 첩으로 들어온 사람이 혼인신고를 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빈손으로 쫓겨나는 일이 흔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혼인신고 캠페인은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축첩 정치인에게 투표하지 말자'는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60년대 축첩 정치인 낙선 운동 사진60년대 축첩 정치인 낙선 운동 사진

이 여사가 주도한 축첩 정치인 축출 운동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1961년 5.16 정변으로 들어선 군사 정권도 여기에 호응했습니다.

사회 개혁 명분을 세우고 민심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축첩 공무원 천 3백여 명을 적발해 파면 등 중징계 조치를 단행했고, 이후 축첩 관행은 빠르게 사라졌습니다.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결혼한 이후에도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습니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 여성문제연구회 회장을 맡으며 여성의 정치 참여를 북돋고 여성 노동자 권익 보호에도 힘썼습니다.

정치인들이 여성 접대부가 동석하는 술자리에서 회동하는 이른바 '요정 정치'에 반대하는 활동도 펼쳤습니다.

여성문제연구회 활동 당시 이희호 여사(왼쪽 두번째)여성문제연구회 활동 당시 이희호 여사(왼쪽 두번째)

상속 등에 있어서 친족 내 남녀 차별 철폐와 이혼 배우자 재산 분할권을 명문화해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에 커다란 균열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 1989년 가족법 개정에도 이희호 여사의 숨은 노력이 있었습니다.

이 여사는 당시 제1야당인 평화민주당 총재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설득해 노태우 대통령과의 야당 총재들과의 회담에서 '5공 청산'을 매듭짓는 조건으로 가족법 개정을 요구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이희호 여사는 훗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른 정치 문제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지만, 가족법 개정 문제만큼은 내 생각을 남편에게 전했다"면서 "남편도 여성 권리 신장에 관심이 많아서 내 의견을 그대로 들어주었다"고 술회했습니다.


1998년 남편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에 입성한 이후에도 대통령 부인 의전 지원이 주역할이던 제2부속실이 아동과 여성 업무를 함께 관장하도록 하고, 여성부 신설에도 목소리를 내는 등 꾸준히 여성 권익 신장에 힘썼습니다.

이 여사의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아흔을 훌쩍 넘겨서도 계속됐습니다.

지난해 초 거세게 일어난 '미투' 운동에 대해선 "그런 일이 그동안 어떻게 벌어지고 있었는지 정말 놀랐다. 남성들은 여성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 어떻게 여성들을 그렇게 함부로 취급할 수 있는지 너무 화가 난다. 용기 있게 나서는 거 보면 좋고, 대견하고 고맙다. 우리 땐 생각도 못했다. 더 단호하고 당당하게 나갔으면 좋겠다"며 공개적으로 지지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 여사는 생전에 자신을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인격으로 차별받지 않고 사는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했습니다.

장상 장례위원장 역시 이 여사에 대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이라고만 알려져 있어서 그동안 섭섭한 마음이 있었다"면서 "시대를 앞서간 여성 운동가였다"고 회고했습니다.

장 위원장은 그러면서 "지금은 여성 권익을 얘기하면 남자들이 '너희만 권익이 있느냐'하면서 시비를 건다"며 "시대가 그렇게 바뀌었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장 위원장의 말을 듣고서 '1세대 페미니스트'로 한평생 여성 권익 신장을 위해 헌신해온 이희호 여사가 하루가 다르게 격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남녀 갈등을 지켜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말과 글을 다루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기자들 상당수가 '축첩'이란 단어를 생소해 하는 지금, 바뀐 시대에 맞는 새로운 여성 운동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은 이제 후배 여성 운동가들의 몫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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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축첩 반대에서 미투 지지까지…시대를 앞서간 페미니스트
    • 입력 2019-06-12 19:44:34
    취재K
장상 故 이희호 여사 장례위원장(전 국무총리서리) : "(이희호 여사가) YWCA 총무를 하시면서 축첩한 정치인을 축출하는 운동을 일으키셨습니다."

기자 : "...어떤 정치인이요?"

장상 전 국무총리서리 : "아, 모르지…. 시대가 바뀌어가지고."

오늘(12일) 오후 고 이희호 여사 빈소에서 열린 장상 장례위원장의 기자회견에서 오간 문답입니다.

장상 장례위원장이 이희호 여사의 삶을 소개하며 고인이 이끈 '축첩 정치인 축출 운동' 을 설명하자 기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기자들의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을 본 장 위원장은 "그때는 와이프(아내)가 둘 있는 남자들이 있었다"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대부분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인 젊은 기자들에게는 축첩(첩을 둔다는 뜻)이란 단어 자체가 생경했기에 벌어진 해프닝이었습니다.

이희호 여사가 YWCA(여자기독교청년회) 총무로 여성 운동을 한 건 1950년대 후반에서 1960년대 초반,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입니다.

그 시절 이희호 여사가 제안한 첫 캠페인은 '혼인신고를 합시다'였다고 합니다.

여성들이 결혼을 한 뒤 혼인신고를 하지 않고 살다가 첩으로 들어온 사람이 혼인신고를 하는 바람에 하루아침에 빈손으로 쫓겨나는 일이 흔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혼인신고 캠페인은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축첩 정치인에게 투표하지 말자'는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60년대 축첩 정치인 낙선 운동 사진
이 여사가 주도한 축첩 정치인 축출 운동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상당한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1961년 5.16 정변으로 들어선 군사 정권도 여기에 호응했습니다.

사회 개혁 명분을 세우고 민심을 수습하는 차원에서 축첩 공무원 천 3백여 명을 적발해 파면 등 중징계 조치를 단행했고, 이후 축첩 관행은 빠르게 사라졌습니다.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결혼한 이후에도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습니다.

1964년부터 1971년까지 여성문제연구회 회장을 맡으며 여성의 정치 참여를 북돋고 여성 노동자 권익 보호에도 힘썼습니다.

정치인들이 여성 접대부가 동석하는 술자리에서 회동하는 이른바 '요정 정치'에 반대하는 활동도 펼쳤습니다.

여성문제연구회 활동 당시 이희호 여사(왼쪽 두번째)
상속 등에 있어서 친족 내 남녀 차별 철폐와 이혼 배우자 재산 분할권을 명문화해 한국 사회의 가부장제에 커다란 균열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는 1989년 가족법 개정에도 이희호 여사의 숨은 노력이 있었습니다.

이 여사는 당시 제1야당인 평화민주당 총재이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설득해 노태우 대통령과의 야당 총재들과의 회담에서 '5공 청산'을 매듭짓는 조건으로 가족법 개정을 요구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이희호 여사는 훗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른 정치 문제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지만, 가족법 개정 문제만큼은 내 생각을 남편에게 전했다"면서 "남편도 여성 권리 신장에 관심이 많아서 내 의견을 그대로 들어주었다"고 술회했습니다.


1998년 남편인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청와대에 입성한 이후에도 대통령 부인 의전 지원이 주역할이던 제2부속실이 아동과 여성 업무를 함께 관장하도록 하고, 여성부 신설에도 목소리를 내는 등 꾸준히 여성 권익 신장에 힘썼습니다.

이 여사의 여성 인권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아흔을 훌쩍 넘겨서도 계속됐습니다.

지난해 초 거세게 일어난 '미투' 운동에 대해선 "그런 일이 그동안 어떻게 벌어지고 있었는지 정말 놀랐다. 남성들은 여성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야 한다. 어떻게 여성들을 그렇게 함부로 취급할 수 있는지 너무 화가 난다. 용기 있게 나서는 거 보면 좋고, 대견하고 고맙다. 우리 땐 생각도 못했다. 더 단호하고 당당하게 나갔으면 좋겠다"며 공개적으로 지지 의사를 밝혔습니다.

이 여사는 생전에 자신을 "남성과 여성이 동등한 인격으로 차별받지 않고 사는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페미니스트"라고 규정했습니다.

장상 장례위원장 역시 이 여사에 대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이라고만 알려져 있어서 그동안 섭섭한 마음이 있었다"면서 "시대를 앞서간 여성 운동가였다"고 회고했습니다.

장 위원장은 그러면서 "지금은 여성 권익을 얘기하면 남자들이 '너희만 권익이 있느냐'하면서 시비를 건다"며 "시대가 그렇게 바뀌었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장 위원장의 말을 듣고서 '1세대 페미니스트'로 한평생 여성 권익 신장을 위해 헌신해온 이희호 여사가 하루가 다르게 격해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남녀 갈등을 지켜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지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말과 글을 다루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기자들 상당수가 '축첩'이란 단어를 생소해 하는 지금, 바뀐 시대에 맞는 새로운 여성 운동을 고민하고 실천하는 것은 이제 후배 여성 운동가들의 몫으로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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