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즈업 북한] 갈등·협상 30년…북핵 ‘롤러코스터’

입력 2019.06.15 (08:07) 수정 2019.06.15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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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앞서도 말씀드렸듯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지 1년이 지났지만 북미 간 갈등은 여전합니다.

비핵화 협상도 여전히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전 세계를 상대하는 미국이 왜 북한과의 갈등은 쉽게 봉합하지 못하는 걸까요?

또 북한은 미국을 상대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요?

이번주 클로즈업 북한은 30년 가까이 합의와 파기의 역사를 반복해 온 북미 외교 갈등 짚어봤습니다.

[리포트]

1993년 6월, 전 세계의 이목이 뉴욕 유엔본부에 집중됐다.

미 국무부와 북한 외교부의 만남.

북한 핵문제를 두고 1차 북미 고위급 회담이 진행된 것이다.

[강석주/당시 북한 수석대표 : "아주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유익하게 토론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회담 열흘 동안 입장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로퍼트 갈루치/당시 미국 수석대표 : "IAEA는 공정하며 우리는 이 기구의 활동을 지지합니다."]

[강석주/당시 북한 수석대표 : "(핵)사찰과 관련한 문제는 아주 복잡한 문제이고, 그건 앞으로 봐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에 대한 기구(IAEA)의 공정성이 없다는 것이 명백히 확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북핵 문제를 둘러싼 북-미 갈등이 전면화 된 것이다.

1989년, 프랑스 위성 ‘스팟 2호’는 북한의 영변 핵 단지를 촬영하고, 프랑스는 이를 국제사회에 공개했다.

국제원자력기구 IAEA가 특별사찰을 요구했지만 북한은 이를 거부하며 핵확산금지조약, NPT 탈퇴를 선언했다.

[조선중앙TV/1993년 3월 : "핵무기전파방지 조약에서 탈퇴한다는 것을 선포한다."]

냉전 종식 후 핵확산 방지를 외교정책의 최우선으로 둔 미국이 북한과의 협상 전면에 나서야 했던 이유다.

[남성욱/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 : "이제 미국이 나서지 않으면 북한은 조만간 핵무기 제조에 성공한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이에 따라서 89년 이후에는 북한의 핵을 포기시키기 위한 미국의 적극적인 노력이 시작되었고요 이 적극적인 노력은 때로는 대화 또 때로는 압박 등 외교와 압박의 두 가지 수단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1993년, 두 차례의 고위급 회담에도 미국과 북한은 심각한 의견대립만 확인 할 뿐 협상은 원점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강석주/당시 북한 수석대표 : "핵 불사용 안전담보, 팀스피리트 중지 문제 등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전진적인, 긍정적인 행동들을 취해 줄 것을 우리는 희망하고 있습니다."]

[로퍼트 갈루치/당시 미국 수석대표 : "북한이 한국, IAEA와 진지한 회담을 하지 않는 한 다음 회담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1994년, 남북 실무회담 중 나온 북한 대표단의 ‘불바다’ 발언으로 한반도의 위기감은 최고조로 치달았다.

[박영수/당시 특사교환 실무접촉 북측 대표 :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아요. 송 선생도 아마 살아남기 어려울 거예요.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다행히 위기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을 계기로 극적 전환점을 맞이했고, 카터 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만남은 북한 핵시설 동결과 대북 경수로 지원을 골자로 하는 북-미 제네바 합의로 이어졌다.

[로버트 갈루치/당시 미국 수석대표 : "미국과 북한 양측은 실무 그룹작업에 성실하게 임할 것입니다."]

[강석주/당시 북한 수석대표 : "빌 클린턴 대통령이 이 합의문을 승인하도록 갈루치한테 지시를 하였고..."]

그러나 제네바 합의의 이행도 순탄치는 못했다.

클린턴 행정부가 합의한 지원을 의회 다수당이었던 공화당이 거부하면서 약속 이행이 늦어진 것이다.

북한은 미국의 합의 불이행을 빌미로 핵개발을 이어갔고 1998년 8월, 중장거리 미사일 대포동 1호의 발사까지 강행했다.

그럼에도 빌 클린턴 대통령은 윌리엄 페리 전 국방부 장관을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임명하며 대화를 통한 북핵 협상을 이어갔다.

[남성욱/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 "아무리 미국이 세계 최강이지만 자국민이 수백 명이 살상하는 전투나 공격, 전쟁을 감행하기는 어렵겠죠. 또 세계 3차대전으로의 확대 등 여러 가지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늘 압박, 무력, 제재 등을 주장하지만 결국은 마지막에는 외교적인 협상으로 문제를 풀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미국의 딜레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북미 대화의 분위기에 맞춰 2000년엔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특사 자격으로 백악관을 방문하기에 이른다.

[조명록/당시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 :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 동지께서는 조미사이 대결과 불신관계를 새로운 평화관계 친선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는 중대 결단을 내리실 것입니다."]

북한과 미국은 이른바 공동 코뮈니케를 통해 쌍방 적대관계의 종식을 선언했고 미국에선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찾았다. 그때까지 이뤄졌던 북미 간 최고위급의 교류였다.

[매들린 올브라이트/당시 미국 국무장관 : "김정일 위원장은 미사일문제 해결을 위한 진지한 의지를 보여 줬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에게 결과를 보고할 것이고 대통령이(방북을) 결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시 정부가 출범하면서 상황은 또 한 번 반전된다.

[조지 W. 부시/미국 대통령/2002년 국정연설 : "그들은 (북한·이란·이라크) 테러리스트와 함께하는 ‘악의 축’ 입니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이란과 함께 북한을‘악의 축’으로 지목한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미국은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을 제조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제임스 켈리 동아시아 차관보를 특사 자격으로 평양에 파견한다. 미국의 고농축 우라늄 의혹 제기에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은 더한 것도 가질 권한이 있다고 맞섰고,

[제임스 켈리/당시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 "북한에 즉각적이고 가시적으로 비밀 핵무기 계획(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중단하라고 얘기했습니다."]

미국의 한 신문사는 강석주의 발언을 고농축 우라늄 보유의 시인으로 보도했다. 그러자 미국은 북한에 중유 50만 톤 지원을 중단했고, 북한은 영변 핵 시설 가동을 재개했다. 2차 북핵 위기가 조성되자 북-미는 6자회담을 통해 다시 한 번 협상 테이블에 마주앉는다. 당시 미국과 북한의 대표는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와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었다. 2005년, 4차 6자회담으로 본격적인 회담 상대가 된 두 사람은 기존의 북-미 기싸움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크리스토퍼 힐/당시 미국 수석대표 : "북한 대표단은 본국으로 돌아가 경수로가 협상테이블의 의제가 아니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김계관 /당시 북한 수석대표 : "미국이 이 휴회 기간에 우리가 어떠한 핵도 가지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바꾸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야말로 다음번 회담 진전의 열쇠입니다."]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원칙과 목표를 담은 9.19 공동 성명의 최종 타결을 이루어내기도 했다. 북한은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NPT와 IAEA에 복귀할 것을, 미국은 핵무기 등으로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못 박았다. 하지만 9.19 공동성명 직후 미국이 방코델타 아시아 은행을 제재, 북한의 해외자금을 동결시키면서 상황은 또다시 악화된다.

[조선중앙TV/2006년 10월 : "2006년 10월 9일 지하 핵실험을 안전하게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발로 2006년 10월 북한은 급기야 1차 핵실험을 단행한다. 탈북한 북한의 전직 외교관은 북한당국에게 핵은 대화의 구실이자 국면 전환의 수단이 되었다고 말한다.

[고영환/전 북한 외교관 : "제가 8개월 동안 미국의 외교관들하고 접촉을 해봤는데 미국 사람들이 계속 피했어요. 그런데 핵위기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미국 쪽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옵니다. 그러니까 이게 북한의 학습효과를 준 거예요. 체제 보존과 미국과의 협상용으로 충분히 가능한 무기다 이런 판단을 하게 된 거로 볼 수 있습니다."]

오바마 정부가 들어선 2009년, 북한은 두 번째 핵실험을 강행한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는 이에 맞서 전략적 인내 정책을 내세우며 북한과의 협상을 외면했다.

그사이 북한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른 김정은 위원장은 핵무기 기술과 장거리 미사일 기술을 고도화 하는데 집중했다.

하지만 새로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 역시 이를 두고 보지 않았다.

핵추진 항공모함 등 전략자산을 한반도 주변에 집결하며 북한에 대한 군사압박 강도를 높였다.

그야말로 강대 강의 연속, 북미 정상간 거칠고 위협적인 말들도 쉼 없이 오고 갔다.

[도널드 트럼프/미국 대통령 : "미국과 동맹국을 방어해야 한다면 우리는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켓맨(김정은)은 자신과 정권에 대한 자살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김정은/국무위원장 성명 :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제할 소리만 하는 늙다리에게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북미 외교에도 대전환이 시작됐다. 최초의 북미정상회담이 성사 된 것이다. 극으로 치닫던 발언들이 서로에 대한 칭찬으로 바뀐 1차 북미정상회담.

[도널드 트럼프/미국 대통령 : "인격도 좋고 매우 똑똑합니다. 훌륭한 협상가입니다. 협상할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김정은/국무위원장 : "이런 자리를 위해서 노력해주신 트럼프 대통령께 사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순항 할 것 같던 양국관계는 싱가폴 회담 한 달 여 만에 갈등 국면을 맞았고, 급기야 하노이에서 열린 두 번째 북미 정상회담은 결렬로 결론이 났다.

[리용호/북한 외무상 : "미국이 우리의 제안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마이크 폼페이오/미국 국무장관 : "김 위원장은 많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고, 저희는 더 많은 것을 요구했지만 김 위원장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대화의 여지는 남겨두고 있지만 여전히 자국의 입장만을 내세우며 협상의 흐름을 막는 태도는 과거 회담과 비슷하다. 북한과의 대화를 이끌었던 미국의 대표들은 최근 매체를 통해 북미 협상 경험과 지혜를 나누고 있다.

[크리스토퍼 힐/전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 "그들(북한)이 이행하면 우리(미국)도 이행해 나가는 일종의 순차적인 이행들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진정한 투명성이 담보된 상태에서 양측이 협상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문가들 역시 북미가 회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만큼 새로운 형식, 실행 의지가 담긴 내용으로 마주해야 성공적인 비핵화에 도달할 것이라 전망한다.

[남성욱/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 : "양측이 셈법을 바꾸지 않는다면 또 3차 정상 회담을 해본들 또 양측이 실망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북한의 핵포기에 대한 진정한 의지는 북한이 갖고 있는 모든 핵시설을 일단 제시하고 이 시설의 폐기 단계 단계마다 보상을 해 주는 그런 합의는 그랜드 빅딜로 가고 이행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나누어서 스몰딜로 가는 그런 양측의 절충안이 필요합니다."]

최초로, 북미 정상이 만난 지 1년.

북-미 모두가 평화와 번영의 길을 간절히 바라는 만큼 미래에 대한 준비와 노력이 절실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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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클로즈업 북한] 갈등·협상 30년…북핵 ‘롤러코스터’
    • 입력 2019-06-15 08:52:06
    • 수정2019-06-15 09:14:41
    남북의 창
[앵커]

앞서도 말씀드렸듯 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지 1년이 지났지만 북미 간 갈등은 여전합니다.

비핵화 협상도 여전히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습니다.

전 세계를 상대하는 미국이 왜 북한과의 갈등은 쉽게 봉합하지 못하는 걸까요?

또 북한은 미국을 상대로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일까요?

이번주 클로즈업 북한은 30년 가까이 합의와 파기의 역사를 반복해 온 북미 외교 갈등 짚어봤습니다.

[리포트]

1993년 6월, 전 세계의 이목이 뉴욕 유엔본부에 집중됐다.

미 국무부와 북한 외교부의 만남.

북한 핵문제를 두고 1차 북미 고위급 회담이 진행된 것이다.

[강석주/당시 북한 수석대표 : "아주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유익하게 토론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회담 열흘 동안 입장차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로퍼트 갈루치/당시 미국 수석대표 : "IAEA는 공정하며 우리는 이 기구의 활동을 지지합니다."]

[강석주/당시 북한 수석대표 : "(핵)사찰과 관련한 문제는 아주 복잡한 문제이고, 그건 앞으로 봐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에 대한 기구(IAEA)의 공정성이 없다는 것이 명백히 확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북핵 문제를 둘러싼 북-미 갈등이 전면화 된 것이다.

1989년, 프랑스 위성 ‘스팟 2호’는 북한의 영변 핵 단지를 촬영하고, 프랑스는 이를 국제사회에 공개했다.

국제원자력기구 IAEA가 특별사찰을 요구했지만 북한은 이를 거부하며 핵확산금지조약, NPT 탈퇴를 선언했다.

[조선중앙TV/1993년 3월 : "핵무기전파방지 조약에서 탈퇴한다는 것을 선포한다."]

냉전 종식 후 핵확산 방지를 외교정책의 최우선으로 둔 미국이 북한과의 협상 전면에 나서야 했던 이유다.

[남성욱/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 : "이제 미국이 나서지 않으면 북한은 조만간 핵무기 제조에 성공한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이에 따라서 89년 이후에는 북한의 핵을 포기시키기 위한 미국의 적극적인 노력이 시작되었고요 이 적극적인 노력은 때로는 대화 또 때로는 압박 등 외교와 압박의 두 가지 수단으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1993년, 두 차례의 고위급 회담에도 미국과 북한은 심각한 의견대립만 확인 할 뿐 협상은 원점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강석주/당시 북한 수석대표 : "핵 불사용 안전담보, 팀스피리트 중지 문제 등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전진적인, 긍정적인 행동들을 취해 줄 것을 우리는 희망하고 있습니다."]

[로퍼트 갈루치/당시 미국 수석대표 : "북한이 한국, IAEA와 진지한 회담을 하지 않는 한 다음 회담은 열리지 않을 것입니다."]

여기에 1994년, 남북 실무회담 중 나온 북한 대표단의 ‘불바다’ 발언으로 한반도의 위기감은 최고조로 치달았다.

[박영수/당시 특사교환 실무접촉 북측 대표 :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습니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말아요. 송 선생도 아마 살아남기 어려울 거예요. (아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다행히 위기는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의 방북을 계기로 극적 전환점을 맞이했고, 카터 전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의 만남은 북한 핵시설 동결과 대북 경수로 지원을 골자로 하는 북-미 제네바 합의로 이어졌다.

[로버트 갈루치/당시 미국 수석대표 : "미국과 북한 양측은 실무 그룹작업에 성실하게 임할 것입니다."]

[강석주/당시 북한 수석대표 : "빌 클린턴 대통령이 이 합의문을 승인하도록 갈루치한테 지시를 하였고..."]

그러나 제네바 합의의 이행도 순탄치는 못했다.

클린턴 행정부가 합의한 지원을 의회 다수당이었던 공화당이 거부하면서 약속 이행이 늦어진 것이다.

북한은 미국의 합의 불이행을 빌미로 핵개발을 이어갔고 1998년 8월, 중장거리 미사일 대포동 1호의 발사까지 강행했다.

그럼에도 빌 클린턴 대통령은 윌리엄 페리 전 국방부 장관을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임명하며 대화를 통한 북핵 협상을 이어갔다.

[남성욱/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 "아무리 미국이 세계 최강이지만 자국민이 수백 명이 살상하는 전투나 공격, 전쟁을 감행하기는 어렵겠죠. 또 세계 3차대전으로의 확대 등 여러 가지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늘 압박, 무력, 제재 등을 주장하지만 결국은 마지막에는 외교적인 협상으로 문제를 풀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미국의 딜레마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런 북미 대화의 분위기에 맞춰 2000년엔 조명록 국방위 제1부위원장이 특사 자격으로 백악관을 방문하기에 이른다.

[조명록/당시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 : "김정일 국방위원회 위원장 동지께서는 조미사이 대결과 불신관계를 새로운 평화관계 친선관계로 전환시킬 수 있는 중대 결단을 내리실 것입니다."]

북한과 미국은 이른바 공동 코뮈니케를 통해 쌍방 적대관계의 종식을 선언했고 미국에선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찾았다. 그때까지 이뤄졌던 북미 간 최고위급의 교류였다.

[매들린 올브라이트/당시 미국 국무장관 : "김정일 위원장은 미사일문제 해결을 위한 진지한 의지를 보여 줬습니다. 클린턴 대통령에게 결과를 보고할 것이고 대통령이(방북을) 결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부시 정부가 출범하면서 상황은 또 한 번 반전된다.

[조지 W. 부시/미국 대통령/2002년 국정연설 : "그들은 (북한·이란·이라크) 테러리스트와 함께하는 ‘악의 축’ 입니다.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이란과 함께 북한을‘악의 축’으로 지목한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미국은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을 제조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제임스 켈리 동아시아 차관보를 특사 자격으로 평양에 파견한다. 미국의 고농축 우라늄 의혹 제기에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은 더한 것도 가질 권한이 있다고 맞섰고,

[제임스 켈리/당시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 "북한에 즉각적이고 가시적으로 비밀 핵무기 계획(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중단하라고 얘기했습니다."]

미국의 한 신문사는 강석주의 발언을 고농축 우라늄 보유의 시인으로 보도했다. 그러자 미국은 북한에 중유 50만 톤 지원을 중단했고, 북한은 영변 핵 시설 가동을 재개했다. 2차 북핵 위기가 조성되자 북-미는 6자회담을 통해 다시 한 번 협상 테이블에 마주앉는다. 당시 미국과 북한의 대표는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차관보와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이었다. 2005년, 4차 6자회담으로 본격적인 회담 상대가 된 두 사람은 기존의 북-미 기싸움을 고스란히 답습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도

[크리스토퍼 힐/당시 미국 수석대표 : "북한 대표단은 본국으로 돌아가 경수로가 협상테이블의 의제가 아니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김계관 /당시 북한 수석대표 : "미국이 이 휴회 기간에 우리가 어떠한 핵도 가지지 못하게 하는 정책을 바꾸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야말로 다음번 회담 진전의 열쇠입니다."]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원칙과 목표를 담은 9.19 공동 성명의 최종 타결을 이루어내기도 했다. 북한은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NPT와 IAEA에 복귀할 것을, 미국은 핵무기 등으로 북한을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못 박았다. 하지만 9.19 공동성명 직후 미국이 방코델타 아시아 은행을 제재, 북한의 해외자금을 동결시키면서 상황은 또다시 악화된다.

[조선중앙TV/2006년 10월 : "2006년 10월 9일 지하 핵실험을 안전하게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발로 2006년 10월 북한은 급기야 1차 핵실험을 단행한다. 탈북한 북한의 전직 외교관은 북한당국에게 핵은 대화의 구실이자 국면 전환의 수단이 되었다고 말한다.

[고영환/전 북한 외교관 : "제가 8개월 동안 미국의 외교관들하고 접촉을 해봤는데 미국 사람들이 계속 피했어요. 그런데 핵위기가 생기면서 자연스럽게 미국 쪽에서 만나자는 연락이 옵니다. 그러니까 이게 북한의 학습효과를 준 거예요. 체제 보존과 미국과의 협상용으로 충분히 가능한 무기다 이런 판단을 하게 된 거로 볼 수 있습니다."]

오바마 정부가 들어선 2009년, 북한은 두 번째 핵실험을 강행한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는 이에 맞서 전략적 인내 정책을 내세우며 북한과의 협상을 외면했다.

그사이 북한 최고 지도자 자리에 오른 김정은 위원장은 핵무기 기술과 장거리 미사일 기술을 고도화 하는데 집중했다.

하지만 새로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 역시 이를 두고 보지 않았다.

핵추진 항공모함 등 전략자산을 한반도 주변에 집결하며 북한에 대한 군사압박 강도를 높였다.

그야말로 강대 강의 연속, 북미 정상간 거칠고 위협적인 말들도 쉼 없이 오고 갔다.

[도널드 트럼프/미국 대통령 : "미국과 동맹국을 방어해야 한다면 우리는 북한을 완전히 파괴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켓맨(김정은)은 자신과 정권에 대한 자살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김정은/국무위원장 성명 :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고 제할 소리만 하는 늙다리에게는 행동으로 보여주는 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북미 외교에도 대전환이 시작됐다. 최초의 북미정상회담이 성사 된 것이다. 극으로 치닫던 발언들이 서로에 대한 칭찬으로 바뀐 1차 북미정상회담.

[도널드 트럼프/미국 대통령 : "인격도 좋고 매우 똑똑합니다. 훌륭한 협상가입니다. 협상할 가치가 있는 사람입니다."]

[김정은/국무위원장 : "이런 자리를 위해서 노력해주신 트럼프 대통령께 사의를 표합니다."]

그러나 순항 할 것 같던 양국관계는 싱가폴 회담 한 달 여 만에 갈등 국면을 맞았고, 급기야 하노이에서 열린 두 번째 북미 정상회담은 결렬로 결론이 났다.

[리용호/북한 외무상 : "미국이 우리의 제안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마이크 폼페이오/미국 국무장관 : "김 위원장은 많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고, 저희는 더 많은 것을 요구했지만 김 위원장은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대화의 여지는 남겨두고 있지만 여전히 자국의 입장만을 내세우며 협상의 흐름을 막는 태도는 과거 회담과 비슷하다. 북한과의 대화를 이끌었던 미국의 대표들은 최근 매체를 통해 북미 협상 경험과 지혜를 나누고 있다.

[크리스토퍼 힐/전 미국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 "그들(북한)이 이행하면 우리(미국)도 이행해 나가는 일종의 순차적인 이행들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진정한 투명성이 담보된 상태에서 양측이 협상 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문가들 역시 북미가 회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는 만큼 새로운 형식, 실행 의지가 담긴 내용으로 마주해야 성공적인 비핵화에 도달할 것이라 전망한다.

[남성욱/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 : "양측이 셈법을 바꾸지 않는다면 또 3차 정상 회담을 해본들 또 양측이 실망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북한의 핵포기에 대한 진정한 의지는 북한이 갖고 있는 모든 핵시설을 일단 제시하고 이 시설의 폐기 단계 단계마다 보상을 해 주는 그런 합의는 그랜드 빅딜로 가고 이행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나누어서 스몰딜로 가는 그런 양측의 절충안이 필요합니다."]

최초로, 북미 정상이 만난 지 1년.

북-미 모두가 평화와 번영의 길을 간절히 바라는 만큼 미래에 대한 준비와 노력이 절실한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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