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톡홀름’에 놓인 DJ의 빨간 양말…文이 보낸 ‘약속’

입력 2019.06.16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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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빨간 털 양말.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수감 중에 신었던 양말입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이희호 여사가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남편을 위해 직접 뜨개질해 만든 덧신이라고 하죠.

한 땀 한 땀 기도하는 마음으로 만들었을 이 빨간 양말은 '옥중 서신'과 함께 노벨 박물관에 전시돼있습니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 자료를 모두 전시하는 곳인데,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 있습니다. 여행 온 한국인들 뿐만 아니라, 많은 외국인들도 DJ의 빨간 양말과 서신을 한참 들여다보고 갑니다. DJ의 고난과 역경을 상징하는 유품이죠.


■ 사흘간 스톡홀름 머문 文은 왜 안 갔을까?

그런데 이번 북유럽 순방 때 스웨덴 스톡홀름에 사흘이나 머물렀던 문 대통령은 이 곳에 들르지 않았습니다. '한반도 평화'라는 화두를 들고 스톡홀름에 왔고, 무엇보다 순방 중에 이희호 여사가 별세한 만큼 DJ의 유품이 전시된 곳에 잠깐이라도 들러 애도를 표했을 법도 한데, 안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청와대 관계자는 "다른 일정이 워낙 많았고, 애초부터 노벨 박물관 방문은 검토되지도 않았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안 그래도 '천렵질' '외유성 출장' 운운하며 이번 순방을 깎아내리는 야당에 괜한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DJ처럼 노벨상 꿈꾸는 거냐' 이런 식의 비난이 나올 수도 있을테니 말이죠.


■ 이희호 "노벨상 타시라" 덕담에 文 "우리는 평화만"

2018년 4.27 남북정상회담 이후 이희호 여사는 문 대통령에게 축전을 보내 "수고하셨다. 큰일을 해내셨다" "노벨평화상을 타시라"라는 덕담을 건넸는데요. 이에 대해 문 대통령은 "노벨상은 트럼프 대통령이 받고, 우리는 평화만 가져오면 된다"고 참모들에게 밝힌 바 있습니다. 한국인이 노벨 평화상을 한 번 더 받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평화를 정착시키는 게 중요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얘기를 한 겁니다.

2018년 봄부터 2019년 겨울, 한반도는 아주 뜨거웠습니다. 4.27 남북정상회담-> 5.26 남북 정상회담-> 6.12 1차 북미 정상회담-> 9월 평양 정상회담 -> 2월 2차 북미 정상회담까지.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됐고, 남·북·미 정상은 그야말로 새 역사를 써내려갔습니다.

그러나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엔 다시 안갯속입니다. 트럼프 대통령, 김정은 위원장은 물론이고, 금방이라도 언제든 다시 만날 것처럼 인사하고 헤어졌던 남북 정상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 대통령의 오슬로·스톡홀름 연설은 이런 상황에서 나왔습니다.


■ 오슬로 '구상'…"평화가 밥 먹여주냐?"에 대한 답

먼저 오슬로 연설의 핵심은 '국민을 위한 평화' 였습니다. 남북, 북미 정상이 만나면서 자꾸 비핵화, 평화 얘기 하는데, 팍팍한 일상 속에서 국민들은 그게 우리 삶에 무슨 도움이 되냐,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평화가 밥 먹여주냐" 라는 거죠.

문 대통령은 국민들이 '평화가 내 삶에 도움이 되는구나' 라고 느껴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동력이 생길거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작지만 구체적인 평화, 평범한 평화부터 이루겠다는 구상을 밝힌 겁니다.

"평화가 국민들의 삶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때 국민들은 적극적으로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를 만들어나갈 것입니다." (12일, 오슬로 포럼 연설)

구체적으론 1972년 동독, 서독이 접경위원회를 설치해 화재, 홍수, 산사태 등에 신속하게 공동 대처한 사례를 꼽았습니다. 우리도 남북 협의체를 구성해 당장 DMZ 산불이나 홍수 등 접경 지역 주민들 피해부터 줄여보자고 사실상 북측에 제안을 한겁니다.


■ 스톡홀름 '제안'…"北 평화 지켜주는 건 대화"

스웨덴 의회 연설은 오슬로 연설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제안을 담았습니다. 핵을 포기하면 체제가 무너질까 우려하는 김정은 위원장에게, 대화의 길로 가면 국제 사회가 즉각 응답하고 제재 해제는 물론, 체제 안전도 보장되니 다시 대화의 장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북한은 완전한 핵폐기와 평화체제 구축 의지를 국제사회에 실질적으로 보여줘야 합니다…북한이 대화의 길을 걸어간다면, 전 세계 어느 누구도 북한의 체제와 안전을 위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14일, 스웨덴 의회 연설)

"한국은 국제 사회의 신뢰 회복을 위해 북한과 함께 변함없이 노력할 것"이라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도울테니, 믿고 대화하자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여러 차례 밝힌 겁니다.

지난해 10월 유럽 순방 때 문 대통령은 "적어도 북한의 비핵화가 되돌릴 수 없는 단계에 왔다는 판단이 선다면 유엔 제재의 완화를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더욱 촉진해야 한다"면서 비핵화 견인을 위한 '제재 완화' 필요성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번엔 북한의 행동을 촉구하는 쪽에 무게를 실은 것으로 보입니다.


■ "뚜벅뚜벅 반드시 평화 이룰 것"…DJ에게 보내는 약속

문 대통령이 오슬로 연설을 한 날은 마침 1차 북미 정상회담 1주년이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도 회담 1주년을 맞아 트럼프 대통령에게 "아름답고 매우 따뜻한" 친서를 보냈고, 이희호 여사 별세를 계기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김정은 위원장 명의의 조의문과 조화를 들고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북미 '친서 대화'가 재개되고, 남북 주요 인사들이 다시 만나면서 멈춰있던 한반도 비핵화 협상이 재개될 조짐이 보인다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나옵니다.

이달 말 한미 정상회담 전에 남북이 먼저 만나자는 문 대통령의 제안에 북한이 호응해온다면, 또 한번 남북-> 한미-> 북미로 이어지는 대화의 장이 열릴 수도 있죠. 그러나 북한이 어떤 답을 보내올지는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한반도 평화의 여정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한국 정부는 평화를 위해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며, 반드시 평화를 이룰 것입니다."

문 대통령이 이번 순방 연설 중 힘줘 말한 이 대목은, 어찌보면 자신보다 앞서 한반도 평화를 꿈꾼 '빨간 양말'의 주인공 DJ에게 보내는 깊은 경의를 담은 추모이자, 약속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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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톡홀름’에 놓인 DJ의 빨간 양말…文이 보낸 ‘약속’
    • 입력 2019-06-16 16:53:50
    취재K
사진 속 빨간 털 양말.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수감 중에 신었던 양말입니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이희호 여사가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남편을 위해 직접 뜨개질해 만든 덧신이라고 하죠.

한 땀 한 땀 기도하는 마음으로 만들었을 이 빨간 양말은 '옥중 서신'과 함께 노벨 박물관에 전시돼있습니다. 역대 노벨상 수상자 자료를 모두 전시하는 곳인데,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름에 있습니다. 여행 온 한국인들 뿐만 아니라, 많은 외국인들도 DJ의 빨간 양말과 서신을 한참 들여다보고 갑니다. DJ의 고난과 역경을 상징하는 유품이죠.


■ 사흘간 스톡홀름 머문 文은 왜 안 갔을까?

그런데 이번 북유럽 순방 때 스웨덴 스톡홀름에 사흘이나 머물렀던 문 대통령은 이 곳에 들르지 않았습니다. '한반도 평화'라는 화두를 들고 스톡홀름에 왔고, 무엇보다 순방 중에 이희호 여사가 별세한 만큼 DJ의 유품이 전시된 곳에 잠깐이라도 들러 애도를 표했을 법도 한데, 안 갔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청와대 관계자는 "다른 일정이 워낙 많았고, 애초부터 노벨 박물관 방문은 검토되지도 않았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안 그래도 '천렵질' '외유성 출장' 운운하며 이번 순방을 깎아내리는 야당에 괜한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DJ처럼 노벨상 꿈꾸는 거냐' 이런 식의 비난이 나올 수도 있을테니 말이죠.


■ 이희호 "노벨상 타시라" 덕담에 文 "우리는 평화만"

2018년 4.27 남북정상회담 이후 이희호 여사는 문 대통령에게 축전을 보내 "수고하셨다. 큰일을 해내셨다" "노벨평화상을 타시라"라는 덕담을 건넸는데요. 이에 대해 문 대통령은 "노벨상은 트럼프 대통령이 받고, 우리는 평화만 가져오면 된다"고 참모들에게 밝힌 바 있습니다. 한국인이 노벨 평화상을 한 번 더 받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평화를 정착시키는 게 중요하다는 지극히 당연한 얘기를 한 겁니다.

2018년 봄부터 2019년 겨울, 한반도는 아주 뜨거웠습니다. 4.27 남북정상회담-> 5.26 남북 정상회담-> 6.12 1차 북미 정상회담-> 9월 평양 정상회담 -> 2월 2차 북미 정상회담까지.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됐고, 남·북·미 정상은 그야말로 새 역사를 써내려갔습니다.

그러나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엔 다시 안갯속입니다. 트럼프 대통령, 김정은 위원장은 물론이고, 금방이라도 언제든 다시 만날 것처럼 인사하고 헤어졌던 남북 정상도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 대통령의 오슬로·스톡홀름 연설은 이런 상황에서 나왔습니다.


■ 오슬로 '구상'…"평화가 밥 먹여주냐?"에 대한 답

먼저 오슬로 연설의 핵심은 '국민을 위한 평화' 였습니다. 남북, 북미 정상이 만나면서 자꾸 비핵화, 평화 얘기 하는데, 팍팍한 일상 속에서 국민들은 그게 우리 삶에 무슨 도움이 되냐,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평화가 밥 먹여주냐" 라는 거죠.

문 대통령은 국민들이 '평화가 내 삶에 도움이 되는구나' 라고 느껴야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동력이 생길거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작지만 구체적인 평화, 평범한 평화부터 이루겠다는 구상을 밝힌 겁니다.

"평화가 국민들의 삶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때 국민들은 적극적으로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를 만들어나갈 것입니다." (12일, 오슬로 포럼 연설)

구체적으론 1972년 동독, 서독이 접경위원회를 설치해 화재, 홍수, 산사태 등에 신속하게 공동 대처한 사례를 꼽았습니다. 우리도 남북 협의체를 구성해 당장 DMZ 산불이나 홍수 등 접경 지역 주민들 피해부터 줄여보자고 사실상 북측에 제안을 한겁니다.


■ 스톡홀름 '제안'…"北 평화 지켜주는 건 대화"

스웨덴 의회 연설은 오슬로 연설보다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제안을 담았습니다. 핵을 포기하면 체제가 무너질까 우려하는 김정은 위원장에게, 대화의 길로 가면 국제 사회가 즉각 응답하고 제재 해제는 물론, 체제 안전도 보장되니 다시 대화의 장으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북한은 완전한 핵폐기와 평화체제 구축 의지를 국제사회에 실질적으로 보여줘야 합니다…북한이 대화의 길을 걸어간다면, 전 세계 어느 누구도 북한의 체제와 안전을 위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14일, 스웨덴 의회 연설)

"한국은 국제 사회의 신뢰 회복을 위해 북한과 함께 변함없이 노력할 것"이라는 점도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도울테니, 믿고 대화하자는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여러 차례 밝힌 겁니다.

지난해 10월 유럽 순방 때 문 대통령은 "적어도 북한의 비핵화가 되돌릴 수 없는 단계에 왔다는 판단이 선다면 유엔 제재의 완화를 통해 북한의 비핵화를 더욱 촉진해야 한다"면서 비핵화 견인을 위한 '제재 완화' 필요성을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번엔 북한의 행동을 촉구하는 쪽에 무게를 실은 것으로 보입니다.


■ "뚜벅뚜벅 반드시 평화 이룰 것"…DJ에게 보내는 약속

문 대통령이 오슬로 연설을 한 날은 마침 1차 북미 정상회담 1주년이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도 회담 1주년을 맞아 트럼프 대통령에게 "아름답고 매우 따뜻한" 친서를 보냈고, 이희호 여사 별세를 계기로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이 김정은 위원장 명의의 조의문과 조화를 들고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을 만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북미 '친서 대화'가 재개되고, 남북 주요 인사들이 다시 만나면서 멈춰있던 한반도 비핵화 협상이 재개될 조짐이 보인다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나옵니다.

이달 말 한미 정상회담 전에 남북이 먼저 만나자는 문 대통령의 제안에 북한이 호응해온다면, 또 한번 남북-> 한미-> 북미로 이어지는 대화의 장이 열릴 수도 있죠. 그러나 북한이 어떤 답을 보내올지는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한반도 평화의 여정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한국 정부는 평화를 위해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며, 반드시 평화를 이룰 것입니다."

문 대통령이 이번 순방 연설 중 힘줘 말한 이 대목은, 어찌보면 자신보다 앞서 한반도 평화를 꿈꾼 '빨간 양말'의 주인공 DJ에게 보내는 깊은 경의를 담은 추모이자, 약속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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