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용사에 전한 치유의 편지…“당신 덕분에 살고 있습니다”

입력 2019.06.25 (13:42) 수정 2019.06.25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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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태국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32살 박근우 씨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국인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받는 이는, 미국 조지아 주에 사는 90살 제임스 클레이헌. 박 씨와 함께 식당을 운영하는 대학 선배 이태하 씨도 편지쓰기에 동참했습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클레이헌, 당신 덕분에 우리가 살 수 있었습니다. 지켜줘서 고맙습니다."

태어나서 몇 해 전까지 줄곧 한국에서만 살아온 두 남성. 둘은 어쩌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클레이헌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게 됐을까요?

■ "우리 할아버지는 21살 때 한국에 계셨어"…전쟁이 이어준 지구 반대편의 인연

대학 선후배 사이인 박 씨와 이 씨는 지난해 10월 태국 파혼요틴에 '부산-요틴(Busan-Yothin)'이라는 식당을 엽니다. 우리나라를 알려보겠다는 마음으로 식당을 열고, 김치찌개와 순두부찌개, 제육볶음 같은 우리 음식을 팔았습니다. 이곳에 38살의 미국인 그레이엄 그로스가 어느 날 손님으로 찾아옵니다.

태국에 정착해 늦깎이 대학 생활을 하고 있는 그로스는 예전엔 직업 군인이었습니다. 2000년대 초 아프가니스탄전에도 파병됐다가,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심해져서 군 생활을 그만뒀습니다. 그는 일주일에 서너 번 '부산-요틴'을 찾아와 한국 음식을 즐겼습니다. 또, 박 씨와 이 씨에게 한국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보곤 했습니다. 특히, 그로스는 한국의 군 생활은 어떤지 궁금한 게 많았습니다. 그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한 경험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중에 보니 더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로스는 어느 날 박 씨와 이 씨에게 자신과 비슷하게 타지에서 전장을 누빈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레이엄 그로스와 이태하(좌), 박근우(우) 씨 [사진 출처 : WRCB]그레이엄 그로스와 이태하(좌), 박근우(우) 씨 [사진 출처 : WRCB]

그로스의 외할아버지인 제임스 클레이헌은 올해 90살입니다.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엔 21살이던 클레이헌 할아버지는 한국전쟁에 의무병으로 참전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총에 맞고 피 흘리는 동료를 둘러업고 총탄을 피해 전장 속을 뛰어다녔습니다. 살육의 현장에서 팔과 다리를 잃은 처참한 모습, 고통에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난무하는 치료 공간에서 스스로 받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돌볼 틈 없이 전우들을 치료하며 3년여를 보내고 고향에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그 뒤 70년 가까이 할아버지는 전쟁 트라우마로 고통받으며 지냈다고 합니다. 그로스는 "할아버지는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전장에서 마주한 동료들의 고통과 죽음 때문에 고향에 돌아간 이후에도 내내 힘들어했다"고 기억했습니다.

■ "당신 덕분에 살고 있습니다"… 25시간을 날아 할아버지에게 닿은 감사 편지

할아버지와 손자가 겪은 전쟁, 그로 인해 입은 전쟁 트라우마의 고통 이야기를 들은 박 씨는 이들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것이 없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그로스에게 제안을 하나 했습니다. 클레이헌 할아버지에게 한국의 후손으로서 감사의 마음을 담은 편지 한 통을 전해드리고 싶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박 씨와 이 씨의 마음을 담은 편지는 그로스의 손에 실려 25시간의 비행 끝에 클레이헌 할아버지에게 닿았습니다.

박 씨와 이 씨가 쓴 편지와 그레이엄 그로스와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출처 : WRCB]박 씨와 이 씨가 쓴 편지와 그레이엄 그로스와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출처 : WRCB]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6·25 한국전쟁에 대해 잘 모르는데, 제가 후손들에게도 알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박근우 씨가 쓴 편지 내용 일부

박 씨는 KBS와의 통화에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말했습니다. 또 "이제 한국전쟁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알리고 싶었다"고 덧붙였습니다.

■ “멋진 90살 생일이네요”…조금 특별한 클레이헌 할아버지의 생일파티

박 씨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받고 크게 기뻐했던 클레이헌 할아버지는 가족들에게 "포화 속에서 숨져가는 동료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슬픔에 힘든 날도 있었지만, 나의 참전이 헛된 일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곤, 마주치는 동네 사람들에게 편지와 사진을 보여주며 "내가 잘살아온 것 같다"고 자랑스러워 했다고 합니다.

아들 마이크 클레이헌(좌)과 아버지 제임스 클레이헌(우) [사진 출처 : WRCB]아들 마이크 클레이헌(좌)과 아버지 제임스 클레이헌(우) [사진 출처 : WRCB]

지난 10일, 클레이헌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미국의 지역 언론 WRCB를 통해 방송됐습니다. 할아버지의 90살 생일 파티 장면도 담겼습니다. 11명의 자녀와 수십 명의 손자·손녀가 자리한 이 파티에서는 클레이헌 할아버지는 한국 정부로부터 '평화 대사' 메달과, 조지아 주지사로부터 '감사 표창'도 받았습니다. 전장에서 동료들을 구했던 공로를 뒤늦게 인정받게 됐습니다.

메달과 표창을 받는 것도 기쁜 일이지만, 할아버지에겐 이 감사의 편지가 더 각별했습니다. 뉴스에 등장한 할아버지의 아들 마이크 클레이헌은 "(편지를 받은 후) 아버지가 매일 행복한 사람, 긍정적인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전했습니다. 전쟁 후 70여 년 만에 받은 감사 편지가 할아버지의 전쟁 트라우마를 떨쳐버리게 하는 힘이 된 셈입니다.

1950년 6월 오늘 발발한 한국전쟁. 1,129일 동안 우리 군인만 17만여 명이 숨졌고 56만 명 가까이 다쳤습니다. 또, 우리를 돕겠다며 참전한 유엔군 중 10만여 명이 부상을 당했고, 4만여 명은 살아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참혹한 전쟁의 경험으로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도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분이 우리 주변엔 여전히 많습니다. 그분들에게 '당신 덕분에 살고 있습니다'라는 감사의 말 한마디가 크나큰 치유의 약이 될 수 있음을. 박근우 씨와 이태하 씨가 보낸 이 편지가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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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전용사에 전한 치유의 편지…“당신 덕분에 살고 있습니다”
    • 입력 2019-06-25 13:42:46
    • 수정2019-06-25 13:4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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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태국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32살 박근우 씨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국인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받는 이는, 미국 조지아 주에 사는 90살 제임스 클레이헌. 박 씨와 함께 식당을 운영하는 대학 선배 이태하 씨도 편지쓰기에 동참했습니다. 내용은 이랬습니다. "클레이헌, 당신 덕분에 우리가 살 수 있었습니다. 지켜줘서 고맙습니다."

태어나서 몇 해 전까지 줄곧 한국에서만 살아온 두 남성. 둘은 어쩌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클레이헌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쓰게 됐을까요?

■ "우리 할아버지는 21살 때 한국에 계셨어"…전쟁이 이어준 지구 반대편의 인연

대학 선후배 사이인 박 씨와 이 씨는 지난해 10월 태국 파혼요틴에 '부산-요틴(Busan-Yothin)'이라는 식당을 엽니다. 우리나라를 알려보겠다는 마음으로 식당을 열고, 김치찌개와 순두부찌개, 제육볶음 같은 우리 음식을 팔았습니다. 이곳에 38살의 미국인 그레이엄 그로스가 어느 날 손님으로 찾아옵니다.

태국에 정착해 늦깎이 대학 생활을 하고 있는 그로스는 예전엔 직업 군인이었습니다. 2000년대 초 아프가니스탄전에도 파병됐다가, 전쟁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심해져서 군 생활을 그만뒀습니다. 그는 일주일에 서너 번 '부산-요틴'을 찾아와 한국 음식을 즐겼습니다. 또, 박 씨와 이 씨에게 한국에 관해 이것저것 물어보곤 했습니다. 특히, 그로스는 한국의 군 생활은 어떤지 궁금한 게 많았습니다. 그가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한 경험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중에 보니 더 큰 이유가 있었습니다. 바로 자신의 외할아버지가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로스는 어느 날 박 씨와 이 씨에게 자신과 비슷하게 타지에서 전장을 누빈 외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레이엄 그로스와 이태하(좌), 박근우(우) 씨 [사진 출처 : WRCB]
그로스의 외할아버지인 제임스 클레이헌은 올해 90살입니다.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엔 21살이던 클레이헌 할아버지는 한국전쟁에 의무병으로 참전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총에 맞고 피 흘리는 동료를 둘러업고 총탄을 피해 전장 속을 뛰어다녔습니다. 살육의 현장에서 팔과 다리를 잃은 처참한 모습, 고통에 내지르는 비명소리가 난무하는 치료 공간에서 스스로 받는 정신적 육체적 고통은 돌볼 틈 없이 전우들을 치료하며 3년여를 보내고 고향에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그 뒤 70년 가까이 할아버지는 전쟁 트라우마로 고통받으며 지냈다고 합니다. 그로스는 "할아버지는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전장에서 마주한 동료들의 고통과 죽음 때문에 고향에 돌아간 이후에도 내내 힘들어했다"고 기억했습니다.

■ "당신 덕분에 살고 있습니다"… 25시간을 날아 할아버지에게 닿은 감사 편지

할아버지와 손자가 겪은 전쟁, 그로 인해 입은 전쟁 트라우마의 고통 이야기를 들은 박 씨는 이들의 아픔을 치유하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것이 없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그로스에게 제안을 하나 했습니다. 클레이헌 할아버지에게 한국의 후손으로서 감사의 마음을 담은 편지 한 통을 전해드리고 싶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박 씨와 이 씨의 마음을 담은 편지는 그로스의 손에 실려 25시간의 비행 끝에 클레이헌 할아버지에게 닿았습니다.

박 씨와 이 씨가 쓴 편지와 그레이엄 그로스와 함께 찍은 사진 [사진 출처 : WRCB]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이 6·25 한국전쟁에 대해 잘 모르는데, 제가 후손들에게도 알리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박근우 씨가 쓴 편지 내용 일부

박 씨는 KBS와의 통화에서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고 말했습니다. 또 "이제 한국전쟁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아져서, 알리고 싶었다"고 덧붙였습니다.

■ “멋진 90살 생일이네요”…조금 특별한 클레이헌 할아버지의 생일파티

박 씨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받고 크게 기뻐했던 클레이헌 할아버지는 가족들에게 "포화 속에서 숨져가는 동료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슬픔에 힘든 날도 있었지만, 나의 참전이 헛된 일이 아니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곤, 마주치는 동네 사람들에게 편지와 사진을 보여주며 "내가 잘살아온 것 같다"고 자랑스러워 했다고 합니다.

아들 마이크 클레이헌(좌)과 아버지 제임스 클레이헌(우) [사진 출처 : WRCB]
지난 10일, 클레이헌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미국의 지역 언론 WRCB를 통해 방송됐습니다. 할아버지의 90살 생일 파티 장면도 담겼습니다. 11명의 자녀와 수십 명의 손자·손녀가 자리한 이 파티에서는 클레이헌 할아버지는 한국 정부로부터 '평화 대사' 메달과, 조지아 주지사로부터 '감사 표창'도 받았습니다. 전장에서 동료들을 구했던 공로를 뒤늦게 인정받게 됐습니다.

메달과 표창을 받는 것도 기쁜 일이지만, 할아버지에겐 이 감사의 편지가 더 각별했습니다. 뉴스에 등장한 할아버지의 아들 마이크 클레이헌은 "(편지를 받은 후) 아버지가 매일 행복한 사람, 긍정적인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고 전했습니다. 전쟁 후 70여 년 만에 받은 감사 편지가 할아버지의 전쟁 트라우마를 떨쳐버리게 하는 힘이 된 셈입니다.

1950년 6월 오늘 발발한 한국전쟁. 1,129일 동안 우리 군인만 17만여 명이 숨졌고 56만 명 가까이 다쳤습니다. 또, 우리를 돕겠다며 참전한 유엔군 중 10만여 명이 부상을 당했고, 4만여 명은 살아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참혹한 전쟁의 경험으로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도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와 트라우마를 안고 사는 분이 우리 주변엔 여전히 많습니다. 그분들에게 '당신 덕분에 살고 있습니다'라는 감사의 말 한마디가 크나큰 치유의 약이 될 수 있음을. 박근우 씨와 이태하 씨가 보낸 이 편지가 말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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