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선출’ 한선태가 소환한 기억 속의 선수 ② 장재근

입력 2019.06.28 (06:09) 수정 2019.06.28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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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서말구 교수, 프로야구단에 입단한 육상 선수 1호
장재근 선수는 대학 졸업 후 1984년 해태야구단 입단

프로야구 LG트윈스의 한선태가 '비선출(非選出)'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세간의 화제를 모으면서, 독특한 이력을 지닌 선수들이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육상 선수 출신으로 롯데에 입단했던 서말구 선수를 첫손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는 가운데, 그와 비슷한 사례가 롯데와 경쟁 구도를 형성했던 해태 구단에서도 탄생할 뻔했다.

고 서말구 교수와 함께 한국 단거리 육상을 대표했던 장재근 선수도 한때 해태 타이거즈 야구단 소속이었다. 장재근 선수는 대학 3학년인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남자 육상 100m 은메달과 200m 금메달을 따내며 단번에 아시아의 스프린터 반열에 올랐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남자 육상 200m에 출전한 장재근 선수가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다.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남자 육상 200m에 출전한 장재근 선수가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한 1984년 당시 한국 육상은 단거리 팀을 운영하는 변변한 실업팀이 없던 시절이었다. 몇몇 실업 육상팀이 있긴 했지만, 마라톤 중심의 팀이었다. 진로를 찾던 장재근 선수는 우여곡절 끝에 해태 타이거즈 구단에 입단했고, 이후 해태 구단의 동계훈련 때 김봉연과 김무종, 김성한 선수 등에 달리기를 가르치는 훈련이 보도되면서 화제가 되었다.

2019년 1월 서울시청 육상팀 감독으로 자리를 옮긴 장재근 감독이 선수단과 함께한 기념 촬영.2019년 1월 서울시청 육상팀 감독으로 자리를 옮긴 장재근 감독이 선수단과 함께한 기념 촬영.

화성시청 육상 감독으로 재직하다 올 1월 서울시청을 맡은 장재근 감독은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 오해라고 선을 그었다. '고인이 된 서말구 형과 달리, 야구 선수가 아닌 홍보실 일반 직원으로 입사했다'는 것이다.

장재근 "야구 선수 아닌 홍보실 직원으로 입사"
해태 타이거즈 소속으로 육상 최전성기 성적 내

이어 자신이 '주루플레이를 전문으로 하는 대주자로 입사했다고 대중에게 알려진 이유는 당시 해태 구단 홍보실에서 화제성을 노리고 보도자료를 배포한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1983년 말 롯데 구단에 입단한 고 서말구 선수가 계약금 2,000만 원에 연봉 1,500만 원을 받았지만, 일반 직원 신분인 장재근 선수는 한 달 급여 32만 원가량을 받았다. 당시 해태 타이거즈 홍보실 직원으로 있던 선수는 자신 말고도 전병관과 이형근 등 역도 선수도 있었다는 것이 장재근 감독의 회고다.

해태 타이거즈 프로야구단에 적을 두고 태릉선수촌에서 주로 훈련하던 장재근 선수는 이후 1985년 육상 인생의 최절정기를 맞았다. 1985년 고베유니버시아드 대회 200m에서 동메달을 따낸 데 이어, 1985년 9월 27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시아육상대회 남자 200n 준결승에서 20초 41로 한국최고기록과 아시아 최고 기록을 한꺼번에 새로 쓰는 성과를 냈다.

1985년 고베 유니버시아드대회 남자 육상 200m에 출전해 동메달을 따낸 장재근 선수1985년 고베 유니버시아드대회 남자 육상 200m에 출전해 동메달을 따낸 장재근 선수

그가 세운 200m 한국 기록은 이후 한 세대가 지나는 동안 난공불락의 기록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6월 박태건이 강원도 정선에서 열린 대회에서 20초40으로 0.01초를 단축하기까지에는 무려 33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는 다시 한번 남자 200m에서 우승하며 아시안게임 2연패의 기록을 남겼다. 이때까지 장재근 선수는 해태 타이거즈 프로야구단 소속이었다. 해태 구단 소속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장재근 선수는 1986년 12월 말 전문 육상팀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뜻을 밝힌 뒤 1987년 소속팀을 한국전력 육상팀으로 옮겼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남자 육상 200m에서 우승한 뒤 오른손을 번쩍 들어 1위의 기쁨을 표현하고 있는 장재근(사진: 스포츠동아)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남자 육상 200m에서 우승한 뒤 오른손을 번쩍 들어 1위의 기쁨을 표현하고 있는 장재근(사진: 스포츠동아)

장재근 선수는 육상이 아닌 배구로 운동을 시작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1962년 1월 광주에서 출생한 장재근은 광주 수창 초등학교 4학년 때 배구부에 들어가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6학년 때 배구부가 해체되면서 일반중학교인 전남중학교에 입학했고, 육상을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말이었다. 처음엔 단거리 선수가 아닌 3천m 선수로 시작했다가 광주 살레시오고등학교 2학년에 가서야 단거리 선수로 전환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배구 선수로 운동 시작
중2 때 3천m 선수…. 고2 때 단거리로 전환
태릉선수촌에선 고 서말구 교수와 한 방 사용

1980년 대학 진학 이후 처음 태릉 선수촌에 입촌한 장재근 선수는 서말구 선수와 한방을 사용했다. 당시 태릉선수촌 숙소는 6명이 함께 자는 옛날식 군대 생활관 같은 곳으로 서말구 선수가 가장 선참이었고, 장재근 선수는 막내였다.

고 서말구 교수와 장재근 선수는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 함께 출전해 400m 계주에서 메달에 도전했지만, 아쉽게 4위에 그쳤다.

아시아의 스프린터로 추앙받은 고 서말구와 장재근 감독의 행보는 이렇게 닮은 듯 다른 듯한 행보를 보이면서 한국 육상의 한 세대를 장식했다.

그리고 고 서말구 교수와 장재근 선수 이후로 한국 프로야구사에 육상과 야구를 접목하려는 시도는 일어나지 않았다.

[사진- 연합뉴스, 스포츠동아 DB, 장재근 감독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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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6-28 06:09:49
    • 수정2019-06-28 10:3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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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서말구 교수, 프로야구단에 입단한 육상 선수 1호
장재근 선수는 대학 졸업 후 1984년 해태야구단 입단

프로야구 LG트윈스의 한선태가 '비선출(非選出)'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세간의 화제를 모으면서, 독특한 이력을 지닌 선수들이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육상 선수 출신으로 롯데에 입단했던 서말구 선수를 첫손으로 꼽기에 부족함이 없는 가운데, 그와 비슷한 사례가 롯데와 경쟁 구도를 형성했던 해태 구단에서도 탄생할 뻔했다.

고 서말구 교수와 함께 한국 단거리 육상을 대표했던 장재근 선수도 한때 해태 타이거즈 야구단 소속이었다. 장재근 선수는 대학 3학년인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남자 육상 100m 은메달과 200m 금메달을 따내며 단번에 아시아의 스프린터 반열에 올랐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 남자 육상 200m에 출전한 장재근 선수가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고 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한 1984년 당시 한국 육상은 단거리 팀을 운영하는 변변한 실업팀이 없던 시절이었다. 몇몇 실업 육상팀이 있긴 했지만, 마라톤 중심의 팀이었다. 진로를 찾던 장재근 선수는 우여곡절 끝에 해태 타이거즈 구단에 입단했고, 이후 해태 구단의 동계훈련 때 김봉연과 김무종, 김성한 선수 등에 달리기를 가르치는 훈련이 보도되면서 화제가 되었다.

2019년 1월 서울시청 육상팀 감독으로 자리를 옮긴 장재근 감독이 선수단과 함께한 기념 촬영.
화성시청 육상 감독으로 재직하다 올 1월 서울시청을 맡은 장재근 감독은 그러나 이 부분에 대해서 오해라고 선을 그었다. '고인이 된 서말구 형과 달리, 야구 선수가 아닌 홍보실 일반 직원으로 입사했다'는 것이다.

장재근 "야구 선수 아닌 홍보실 직원으로 입사"
해태 타이거즈 소속으로 육상 최전성기 성적 내

이어 자신이 '주루플레이를 전문으로 하는 대주자로 입사했다고 대중에게 알려진 이유는 당시 해태 구단 홍보실에서 화제성을 노리고 보도자료를 배포한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1983년 말 롯데 구단에 입단한 고 서말구 선수가 계약금 2,000만 원에 연봉 1,500만 원을 받았지만, 일반 직원 신분인 장재근 선수는 한 달 급여 32만 원가량을 받았다. 당시 해태 타이거즈 홍보실 직원으로 있던 선수는 자신 말고도 전병관과 이형근 등 역도 선수도 있었다는 것이 장재근 감독의 회고다.

해태 타이거즈 프로야구단에 적을 두고 태릉선수촌에서 주로 훈련하던 장재근 선수는 이후 1985년 육상 인생의 최절정기를 맞았다. 1985년 고베유니버시아드 대회 200m에서 동메달을 따낸 데 이어, 1985년 9월 27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아시아육상대회 남자 200n 준결승에서 20초 41로 한국최고기록과 아시아 최고 기록을 한꺼번에 새로 쓰는 성과를 냈다.

1985년 고베 유니버시아드대회 남자 육상 200m에 출전해 동메달을 따낸 장재근 선수
그가 세운 200m 한국 기록은 이후 한 세대가 지나는 동안 난공불락의 기록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6월 박태건이 강원도 정선에서 열린 대회에서 20초40으로 0.01초를 단축하기까지에는 무려 33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에서는 다시 한번 남자 200m에서 우승하며 아시안게임 2연패의 기록을 남겼다. 이때까지 장재근 선수는 해태 타이거즈 프로야구단 소속이었다. 해태 구단 소속으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던 장재근 선수는 1986년 12월 말 전문 육상팀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뜻을 밝힌 뒤 1987년 소속팀을 한국전력 육상팀으로 옮겼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 남자 육상 200m에서 우승한 뒤 오른손을 번쩍 들어 1위의 기쁨을 표현하고 있는 장재근(사진: 스포츠동아)
장재근 선수는 육상이 아닌 배구로 운동을 시작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1962년 1월 광주에서 출생한 장재근은 광주 수창 초등학교 4학년 때 배구부에 들어가 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6학년 때 배구부가 해체되면서 일반중학교인 전남중학교에 입학했고, 육상을 시작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말이었다. 처음엔 단거리 선수가 아닌 3천m 선수로 시작했다가 광주 살레시오고등학교 2학년에 가서야 단거리 선수로 전환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배구 선수로 운동 시작
중2 때 3천m 선수…. 고2 때 단거리로 전환
태릉선수촌에선 고 서말구 교수와 한 방 사용

1980년 대학 진학 이후 처음 태릉 선수촌에 입촌한 장재근 선수는 서말구 선수와 한방을 사용했다. 당시 태릉선수촌 숙소는 6명이 함께 자는 옛날식 군대 생활관 같은 곳으로 서말구 선수가 가장 선참이었고, 장재근 선수는 막내였다.

고 서말구 교수와 장재근 선수는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에 함께 출전해 400m 계주에서 메달에 도전했지만, 아쉽게 4위에 그쳤다.

아시아의 스프린터로 추앙받은 고 서말구와 장재근 감독의 행보는 이렇게 닮은 듯 다른 듯한 행보를 보이면서 한국 육상의 한 세대를 장식했다.

그리고 고 서말구 교수와 장재근 선수 이후로 한국 프로야구사에 육상과 야구를 접목하려는 시도는 일어나지 않았다.

[사진- 연합뉴스, 스포츠동아 DB, 장재근 감독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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