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미’에서 ‘비핵화’로…기념주화로 북한 읽기

입력 2019.07.03 (18:42) 수정 2019.07.03 (2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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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말,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을 며칠 앞두고 공개된 미국 백악관의 기념주화가 화제가 됐습니다. 앞면 한가운데는 2차 회담을 뜻하는 숫자 '2'가 큼지막하게 자리했고, '평화를 향한 새로운 길(New Avenue Towards Peace)'이라는 영문 문구, '하나의 평화 세 명의 지도자'라는 한글 문구와 함께 남북미 정상의 이름이 새겨졌습니다. 뒷면에는 '한반도 비핵화를 향한 노력'이라는 문구와 태극기를 중심으로 양옆에 성조기와 인공기 문양, 그리고 베트남 주석궁의 모습이 담겼습니다.


정식 기념주화는 아니었지만, 백악관의 '공식 기념품'으로 개당 100달러, 1000개 한정판매로 출시됐던 이 주화(summit coin)는 하노이 회담에 대한 기대만큼이나 눈길을 끌었는데요. 비록 하노이 회담은 '결렬'로 끝났지만, 북미정상회담이라는 큰 이벤트를 앞두고 당시 백악관이 담고자 했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준 것으로 평가됐습니다.

세계 각국에선 이렇게 대형 이벤트나 국가적으로 기념할 일 또는 인물이 있을 때 기념주화가 발행되곤 합니다. 기념주화란 원칙적으로 국가의 중앙은행이 발행한 '법정 통화'입니다. 우리나라도 1975년 '광복 30주년 기념주화'를 시작으로 '88 올림픽', '2002년 월드컵' 등의 기념주화를 발행했는데요. 이외 위 백악관 기념주화처럼 특정 이벤트를 기념해 통화 개념 없이 순수 기념 목적으로 제작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엔 기념 주화(coin) 대신 기념 메달(medal)이라는 이름으로 구분해 부르기도 합니다. 지난해 조폐공사가 출시한 남북정상회담 기념메달도 이런 순수 기념 목적의 메달이었습니다.

북한도 예외는 아닙니다. 북한 조선중앙은행은 1987년 무렵부터 국가적 행사를 기념하는 등의 기념주화를 꾸준히 발행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주요 정책을 선전하는 문구를 담아 일종의 '선전 포스터'와 같은 기념주화를 자주 발행하는 것도 눈여겨볼 부분입니다.

이런 면에서, 최근 발행된 북한의 기념주화들엔 눈에 띄는 점이 있습니다. 반미 메시지나 호전적 도안들이 사라지고 '비핵화'나 '평화'를 강조하는 문구와 그림들이 주화에 등장하고 있다는 거죠.

[관련기사] [단독] 北 올해 기념주화 입수…핵무기 짓누르며 ‘비핵화·평화’ 강조

아래에 나온 사진은 북한이 올해 4월 발행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념주화입니다. '조선반도의 비핵화', '세계의 평화와 안전수호'라는 문구와 함께, 핵무기를 뜻하는 'N'자가 쓰여 있는 무기를 손으로 눌러 부수는 듯한 도안이 들어가 있습니다.


아래 최근 몇 년간 발행됐던 기념주화들과 비교해 보면 차이가 확연히 느껴집니다. 2016년, 북한은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과 중장거리탄도미사일, '광명성 4호'와 같은 우주발사체를 잇달아 쏘아대던 시기답게 온통 이들 무기의 시험발사를 기념하는 도안과 문구로 기념주화를 가득 채웠습니다.

2016년 발행된 북한 기념주화들2016년 발행된 북한 기념주화들

2017년은 북한이 핵실험과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급인 '화성' 시리즈 등을 잇달아 시험 발사한 뒤 이른바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해입니다. 기념주화에도 역시 '화성14형'의 발사 장면과 함께 최대정점고도, 사거리, 비행시간까지 꼼꼼히 기록해 놨습니다.


첫번째 북미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인 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북한은 '반미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기념주화에 담기도 했습니다. 아래 2018년 상반기 발행된 주화에는 '주체조선의 정의의 대답은 오직 하나'라는 문구와 함께 인공기 앞 커다란 주먹이 뭔가를 짓눌러 부수는 그림이 들어가 있는데요. 잘 보면 미사일로 보이는 발사체에 'USA'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 옆엔 성조기의 별들이 보입니다.


이렇듯 북한이 과거에 발행한 주화를 보면 올해 발행한 주화가 얼마나 이례적인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 북한은 '4.27 남북정상회담'을 기념하는 주화도 발행했는데요. 보통 기념주화가 1온스(31g)짜리 은화인 것과 달리 이 기념주화는 2배의 은을 사용해 제작됐습니다. 그 의미를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남북 정상이 함께 찍은 소나무와 기념표석, 한반도 지도가 있고 그 주위를 비둘기가 날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10여 년 전부터 북한 기념주화를 수집하고 분석해 온 이상현 민화협 체육위원(㈜태인 대표)는 이 같은 변화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북한 화폐 전문가인 그는 "올해 기념주화들은 지난해까지와는 거의 180도 다른 도안과 메시지를 담고 있다."며 "특히 '비핵화' 문구를 담은 주화의 발행 시기가 4월로 추정되는데,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에도 다시 화해협력의 제스처를 취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일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북한 화폐 전문가인 이상현 민화협 체육위원이 북한 기념주화들을 설명하고 있다.북한 화폐 전문가인 이상현 민화협 체육위원이 북한 기념주화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북한의 '고심의 흔적'이 보이는 듯한 부분들도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가장 최근, 올해 5월경 발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념주화인데요. 앞면은 북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치선전 문구를 담고 있는데, 뒷면이 특이합니다. 북한 기념주화는 1987년 첫 발행 이후 뒷면에는 거의 동일한 도안, 즉 북한의 국장을 새겨왔는데요(아래 왼쪽). 새로운 도안은 지구를 인공기가 감싸고 있고 그 위에 한반도 지도가 있습니다(아래 오른쪽). 옆으로는 조그맣게 '화성'으로 보이는 행성도 있는데요.


이에 대해 이상현 위원은 "전면에 호전적 메시지들을 뺀 대신, 뒷면에 지금 정세를 함축적으로 반영한 도안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며 "세계 전역을 자신들이 다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내면서, 특히 '화성' 그림으로 북한이 개발한 화성 시리즈 미사일을 간접적·은유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도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30여 년간 써온 국장을 대체하면서까지 지금의 정세, 북미협상을 얼마나 중요하게 보고 있는지를 표현하고, 또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겠다는, 미국을 의식한 듯한 메시지를 담았다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한편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이 뒷면 문양이 "미국과 협상중인 상황에서 북한의 자존심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라며 "화성 그림은 화성 미사일보다는 지금까지 이루어 온 과학기술 분야의 성과를 강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습니다.

북한에서는 한해 많게는 30~40여 종의 기념주화를 발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발행된 주화들이 국제 수집상과 수집업체, 인증업체 등을 거쳐 국내로 들어오기까지 보통 1~2개월 정도가 걸리는데요. 임을출 교수는 지난 4월 발행된 '비핵화' 문구를 담은 기념주화가 "자신들의 비핵화 의지를 재차 천명하고, 그 진정성을 믿어달라는 메시지일 수 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북미협상 재개가 임박한 시점, 앞으로 북한이 어떤 메시지를 담은 기념주화들을 추가로 발행할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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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반미’에서 ‘비핵화’로…기념주화로 북한 읽기
    • 입력 2019-07-03 18:42:50
    • 수정2019-07-03 21:12:10
    취재K
지난 2월 말,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을 며칠 앞두고 공개된 미국 백악관의 기념주화가 화제가 됐습니다. 앞면 한가운데는 2차 회담을 뜻하는 숫자 '2'가 큼지막하게 자리했고, '평화를 향한 새로운 길(New Avenue Towards Peace)'이라는 영문 문구, '하나의 평화 세 명의 지도자'라는 한글 문구와 함께 남북미 정상의 이름이 새겨졌습니다. 뒷면에는 '한반도 비핵화를 향한 노력'이라는 문구와 태극기를 중심으로 양옆에 성조기와 인공기 문양, 그리고 베트남 주석궁의 모습이 담겼습니다.


정식 기념주화는 아니었지만, 백악관의 '공식 기념품'으로 개당 100달러, 1000개 한정판매로 출시됐던 이 주화(summit coin)는 하노이 회담에 대한 기대만큼이나 눈길을 끌었는데요. 비록 하노이 회담은 '결렬'로 끝났지만, 북미정상회담이라는 큰 이벤트를 앞두고 당시 백악관이 담고자 했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준 것으로 평가됐습니다.

세계 각국에선 이렇게 대형 이벤트나 국가적으로 기념할 일 또는 인물이 있을 때 기념주화가 발행되곤 합니다. 기념주화란 원칙적으로 국가의 중앙은행이 발행한 '법정 통화'입니다. 우리나라도 1975년 '광복 30주년 기념주화'를 시작으로 '88 올림픽', '2002년 월드컵' 등의 기념주화를 발행했는데요. 이외 위 백악관 기념주화처럼 특정 이벤트를 기념해 통화 개념 없이 순수 기념 목적으로 제작되는 경우도 있는데, 이 경우엔 기념 주화(coin) 대신 기념 메달(medal)이라는 이름으로 구분해 부르기도 합니다. 지난해 조폐공사가 출시한 남북정상회담 기념메달도 이런 순수 기념 목적의 메달이었습니다.

북한도 예외는 아닙니다. 북한 조선중앙은행은 1987년 무렵부터 국가적 행사를 기념하는 등의 기념주화를 꾸준히 발행해 온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주요 정책을 선전하는 문구를 담아 일종의 '선전 포스터'와 같은 기념주화를 자주 발행하는 것도 눈여겨볼 부분입니다.

이런 면에서, 최근 발행된 북한의 기념주화들엔 눈에 띄는 점이 있습니다. 반미 메시지나 호전적 도안들이 사라지고 '비핵화'나 '평화'를 강조하는 문구와 그림들이 주화에 등장하고 있다는 거죠.

[관련기사] [단독] 北 올해 기념주화 입수…핵무기 짓누르며 ‘비핵화·평화’ 강조

아래에 나온 사진은 북한이 올해 4월 발행한 것으로 추정되는 기념주화입니다. '조선반도의 비핵화', '세계의 평화와 안전수호'라는 문구와 함께, 핵무기를 뜻하는 'N'자가 쓰여 있는 무기를 손으로 눌러 부수는 듯한 도안이 들어가 있습니다.


아래 최근 몇 년간 발행됐던 기념주화들과 비교해 보면 차이가 확연히 느껴집니다. 2016년, 북한은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과 중장거리탄도미사일, '광명성 4호'와 같은 우주발사체를 잇달아 쏘아대던 시기답게 온통 이들 무기의 시험발사를 기념하는 도안과 문구로 기념주화를 가득 채웠습니다.

2016년 발행된 북한 기념주화들
2017년은 북한이 핵실험과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급인 '화성' 시리즈 등을 잇달아 시험 발사한 뒤 이른바 '국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해입니다. 기념주화에도 역시 '화성14형'의 발사 장면과 함께 최대정점고도, 사거리, 비행시간까지 꼼꼼히 기록해 놨습니다.


첫번째 북미정상회담이 열리기 전인 지난해 상반기까지만 해도 북한은 '반미 메시지'를 노골적으로 기념주화에 담기도 했습니다. 아래 2018년 상반기 발행된 주화에는 '주체조선의 정의의 대답은 오직 하나'라는 문구와 함께 인공기 앞 커다란 주먹이 뭔가를 짓눌러 부수는 그림이 들어가 있는데요. 잘 보면 미사일로 보이는 발사체에 'USA'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그 옆엔 성조기의 별들이 보입니다.


이렇듯 북한이 과거에 발행한 주화를 보면 올해 발행한 주화가 얼마나 이례적인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슷한 시기, 북한은 '4.27 남북정상회담'을 기념하는 주화도 발행했는데요. 보통 기념주화가 1온스(31g)짜리 은화인 것과 달리 이 기념주화는 2배의 은을 사용해 제작됐습니다. 그 의미를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남북 정상이 함께 찍은 소나무와 기념표석, 한반도 지도가 있고 그 주위를 비둘기가 날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10여 년 전부터 북한 기념주화를 수집하고 분석해 온 이상현 민화협 체육위원(㈜태인 대표)는 이 같은 변화가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고 평가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북한 화폐 전문가인 그는 "올해 기념주화들은 지난해까지와는 거의 180도 다른 도안과 메시지를 담고 있다."며 "특히 '비핵화' 문구를 담은 주화의 발행 시기가 4월로 추정되는데,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이 실패로 돌아간 이후에도 다시 화해협력의 제스처를 취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일 수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북한 화폐 전문가인 이상현 민화협 체육위원이 북한 기념주화들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북한의 '고심의 흔적'이 보이는 듯한 부분들도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가장 최근, 올해 5월경 발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념주화인데요. 앞면은 북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정치선전 문구를 담고 있는데, 뒷면이 특이합니다. 북한 기념주화는 1987년 첫 발행 이후 뒷면에는 거의 동일한 도안, 즉 북한의 국장을 새겨왔는데요(아래 왼쪽). 새로운 도안은 지구를 인공기가 감싸고 있고 그 위에 한반도 지도가 있습니다(아래 오른쪽). 옆으로는 조그맣게 '화성'으로 보이는 행성도 있는데요.


이에 대해 이상현 위원은 "전면에 호전적 메시지들을 뺀 대신, 뒷면에 지금 정세를 함축적으로 반영한 도안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며 "세계 전역을 자신들이 다룰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내면서, 특히 '화성' 그림으로 북한이 개발한 화성 시리즈 미사일을 간접적·은유적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도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30여 년간 써온 국장을 대체하면서까지 지금의 정세, 북미협상을 얼마나 중요하게 보고 있는지를 표현하고, 또 호락호락 당하지는 않겠다는, 미국을 의식한 듯한 메시지를 담았다고 볼 수 있다는 겁니다. 한편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이 뒷면 문양이 "미국과 협상중인 상황에서 북한의 자존심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라며 "화성 그림은 화성 미사일보다는 지금까지 이루어 온 과학기술 분야의 성과를 강조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습니다.

북한에서는 한해 많게는 30~40여 종의 기념주화를 발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발행된 주화들이 국제 수집상과 수집업체, 인증업체 등을 거쳐 국내로 들어오기까지 보통 1~2개월 정도가 걸리는데요. 임을출 교수는 지난 4월 발행된 '비핵화' 문구를 담은 기념주화가 "자신들의 비핵화 의지를 재차 천명하고, 그 진정성을 믿어달라는 메시지일 수 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북미협상 재개가 임박한 시점, 앞으로 북한이 어떤 메시지를 담은 기념주화들을 추가로 발행할지 주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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