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대신 ‘목소리’로 만화를 그린다고?”…만화가 천계영의 멈추지 않는 선

입력 2019.07.03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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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23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작은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유명 만화가, 천계영 씨가 본인 유튜브 채널에 올린 한 영상 때문이었죠. 영상에서 천 작가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종양 수술로 손가락을 예전처럼 잘 쓰지 못하게 돼, 손으로 하던 컴퓨터 만화 작업을 더는 이어갈 수 없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희망찬 소식도 덧붙였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컴퓨터에 있는 장애인을 위한 기능을 이용해 ‘목소리’로 만화를 그리는 일에 도전하게 됐다”고 말입니다.

당시 천 작가는 새로운 방식이 자세히 어떤 방식인지는 공개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오늘(3일) 정오에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 시즌 8의 첫 화의 작업을 라이브 방송으로 공개하겠다 예고했었죠.

드디어 오늘, 천 작가는 1시간의 라이브 방송을 통해, ‘목소리’로 만화를 그리는 과정을 공개했습니다. 그녀의 말처럼 아직은 서툴고 느렸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기엔 충분했습니다.

▶바로 가기 : 만화가 천계영의 작업 라이브 유튜브 방송

'목소리'로 만화를 어떻게 그리는 건가요?

방송을 통해 공개된 천 작가의 작업실에는 마이크, 마우스, 키보드, 트랙패드가 놓여 있었습니다. "뭐, 다른 만화가 작업실과 다를 게 있어?"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 작가는 마이크를 주요 도구로 사용하고, 그 외의 도구는 보조적으로 사용하며 원고 작업을 했습니다. 마우스는 커서의 좌표를 움직이는 용도로만 주로 사용하고, 키보드와 트랙패드도 급할 때만 사용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마우스 클릭이나 휠을 돌리면 손이 아프니, 손 사용은 최소화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주요 도구인 '마이크'는 어떻게 사용하느냐고요? 쉽게 설명하자면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클릭하는 대신, 목소리로 '클릭'이라 지시하는 겁니다. 천 작가가 마이크를 통해 지시어인 '클릭'을 말하면, 컴퓨터는 '클릭' 동작을 수행하는 거죠.

이를 위해 천 작가는 만화를 그리는 데 필요한 수많은 동작을 모두 컴퓨터가 수행할 수 있도록 미리 설정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동작에 맞는 명령어들을 지정해 둔 겁니다. 목소리로 해당 명령어를 말하면 컴퓨터가 그 동작을 수행하도록 말이죠.

천계영 작가가 ‘왼쪽 말칸’이라 말하자, 원고에 말풍선이 생기는 모습천계영 작가가 ‘왼쪽 말칸’이라 말하자, 원고에 말풍선이 생기는 모습

예를 들어, 천 작가가 "아니야"라고 말하자, 컴퓨터는 이 명령어를 'Ctrl + z(이전 동작 취소)'로 인식하고, 바로 전에 수행한 작업 동작을 취소했습니다. 천 작가가 "지워줘"라고 말하자, 컴퓨터는 해당 글이나 그림을 지우기도 했습니다. "왼쪽 말칸"이라고 말하자, 왼쪽에 '말풍선'이 생겼습니다.

3D로 미리 그려둔 만화 캐릭터 불러와…미세한 표정 조절해

“봉식이 찾아줘”라 말하자, 미리 만들어둔 해당 3D 캐릭터 목록이 뜨는 모습“봉식이 찾아줘”라 말하자, 미리 만들어둔 해당 3D 캐릭터 목록이 뜨는 모습

"봉식이(만화 캐릭터 이름) 찾아줘, 더블 클릭" "됐고"

천 작가는 3D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인 '시네마 4D'로 미리 만들어 둔 캐릭터를 목소리로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봉식이 찾아줘"라고 말하면, 3D로 만들어둔 해당 캐릭터의 다양한 버전 파일이 화면에 떴습니다. 천 작가는 그중 하나를 고르고, 목소리로 지시를 내려 원고 내용에 맞게 미세한 표정과 동작을 조정했습니다.

불러온 3D 캐릭터의 표정과 동작을 원고에 맞게 조정하는 모습불러온 3D 캐릭터의 표정과 동작을 원고에 맞게 조정하는 모습

천 작가는 2000년대 초부터 3D 프로그램을 접목해 만화 캐릭터들을 만들어 두고, 자세나 표정을 고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해왔습니다. 주인공 한 명을 장면이 바뀔 때마다 수없이 반복해서 그리는 만화 수작업에서 과감하게 벗어났던 거죠.

"아직은 서툴고 느리지만…계속 만화를 그릴 수 있어."

"미디어가 어떻게 발전하느냐에 따라 만화는 적합한 생존의 형태로 계속해서 모양을 바꿔 갈 것이다. 나 역시 언제고 거기에 맞춰 계속 만화를 생산해내고 싶다." (이탤릭)
-천계영 작가 인터뷰,

과거 천 작가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기술이 어떻게 발전하든, 거기에 맞춰서 만화를 계속 그려갈 거라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오늘 공개된 그녀의 첫 도전도 그런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물론 아직은 목소리를 이용해 만화를 그리는 작업이 쉽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반복해서 명령어를 말해도 컴퓨터가 잘못 알아듣기도 하고, 컴퓨터 프로그램이 중간중간 멈추기도 했습니다. "제가 마우스를 사용할 때마다 약간 자존심이 좀 상해요, 안 쓴다고 했는데", 천 작가도 마음처럼 작업이 이뤄지지 않는지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도전은 여전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일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방식을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초기 단계라 작업 속도가 더디기도 하지만, 파일을 여닫는 작업 등은 더 빨라졌다"며 천 작가는 웃으며 원고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분명한 건, 천 작가의 도전은 다른 '누군가'에게도 '가능성'을 안겨줄 수 있다는 겁니다. '불가능하다'와 '어렵다'는 게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어렵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천 작가의 도전이 점점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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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 대신 ‘목소리’로 만화를 그린다고?”…만화가 천계영의 멈추지 않는 선
    • 입력 2019-07-03 18:44:48
    취재K
지난 6월 23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작은 ‘소동’이 벌어졌습니다. 바로 유명 만화가, 천계영 씨가 본인 유튜브 채널에 올린 한 영상 때문이었죠. 영상에서 천 작가는 안타까운 소식을 전했습니다. 종양 수술로 손가락을 예전처럼 잘 쓰지 못하게 돼, 손으로 하던 컴퓨터 만화 작업을 더는 이어갈 수 없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희망찬 소식도 덧붙였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컴퓨터에 있는 장애인을 위한 기능을 이용해 ‘목소리’로 만화를 그리는 일에 도전하게 됐다”고 말입니다.

당시 천 작가는 새로운 방식이 자세히 어떤 방식인지는 공개하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오늘(3일) 정오에 자신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웹툰 ‘좋아하면 울리는’ 시즌 8의 첫 화의 작업을 라이브 방송으로 공개하겠다 예고했었죠.

드디어 오늘, 천 작가는 1시간의 라이브 방송을 통해, ‘목소리’로 만화를 그리는 과정을 공개했습니다. 그녀의 말처럼 아직은 서툴고 느렸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기엔 충분했습니다.

▶바로 가기 : 만화가 천계영의 작업 라이브 유튜브 방송

'목소리'로 만화를 어떻게 그리는 건가요?

방송을 통해 공개된 천 작가의 작업실에는 마이크, 마우스, 키보드, 트랙패드가 놓여 있었습니다. "뭐, 다른 만화가 작업실과 다를 게 있어?"라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천 작가는 마이크를 주요 도구로 사용하고, 그 외의 도구는 보조적으로 사용하며 원고 작업을 했습니다. 마우스는 커서의 좌표를 움직이는 용도로만 주로 사용하고, 키보드와 트랙패드도 급할 때만 사용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마우스 클릭이나 휠을 돌리면 손이 아프니, 손 사용은 최소화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면 주요 도구인 '마이크'는 어떻게 사용하느냐고요? 쉽게 설명하자면 손가락으로 마우스를 클릭하는 대신, 목소리로 '클릭'이라 지시하는 겁니다. 천 작가가 마이크를 통해 지시어인 '클릭'을 말하면, 컴퓨터는 '클릭' 동작을 수행하는 거죠.

이를 위해 천 작가는 만화를 그리는 데 필요한 수많은 동작을 모두 컴퓨터가 수행할 수 있도록 미리 설정했다고 밝혔습니다. 그리고 동작에 맞는 명령어들을 지정해 둔 겁니다. 목소리로 해당 명령어를 말하면 컴퓨터가 그 동작을 수행하도록 말이죠.

천계영 작가가 ‘왼쪽 말칸’이라 말하자, 원고에 말풍선이 생기는 모습
예를 들어, 천 작가가 "아니야"라고 말하자, 컴퓨터는 이 명령어를 'Ctrl + z(이전 동작 취소)'로 인식하고, 바로 전에 수행한 작업 동작을 취소했습니다. 천 작가가 "지워줘"라고 말하자, 컴퓨터는 해당 글이나 그림을 지우기도 했습니다. "왼쪽 말칸"이라고 말하자, 왼쪽에 '말풍선'이 생겼습니다.

3D로 미리 그려둔 만화 캐릭터 불러와…미세한 표정 조절해

“봉식이 찾아줘”라 말하자, 미리 만들어둔 해당 3D 캐릭터 목록이 뜨는 모습
"봉식이(만화 캐릭터 이름) 찾아줘, 더블 클릭" "됐고"

천 작가는 3D 애니메이션 소프트웨어인 '시네마 4D'로 미리 만들어 둔 캐릭터를 목소리로 불러오기도 했습니다. "봉식이 찾아줘"라고 말하면, 3D로 만들어둔 해당 캐릭터의 다양한 버전 파일이 화면에 떴습니다. 천 작가는 그중 하나를 고르고, 목소리로 지시를 내려 원고 내용에 맞게 미세한 표정과 동작을 조정했습니다.

불러온 3D 캐릭터의 표정과 동작을 원고에 맞게 조정하는 모습
천 작가는 2000년대 초부터 3D 프로그램을 접목해 만화 캐릭터들을 만들어 두고, 자세나 표정을 고치는 방식으로 작업을 해왔습니다. 주인공 한 명을 장면이 바뀔 때마다 수없이 반복해서 그리는 만화 수작업에서 과감하게 벗어났던 거죠.

"아직은 서툴고 느리지만…계속 만화를 그릴 수 있어."

"미디어가 어떻게 발전하느냐에 따라 만화는 적합한 생존의 형태로 계속해서 모양을 바꿔 갈 것이다. 나 역시 언제고 거기에 맞춰 계속 만화를 생산해내고 싶다." (이탤릭)
-천계영 작가 인터뷰,

과거 천 작가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기술이 어떻게 발전하든, 거기에 맞춰서 만화를 계속 그려갈 거라는 의지를 밝혔습니다. 오늘 공개된 그녀의 첫 도전도 그런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물론 아직은 목소리를 이용해 만화를 그리는 작업이 쉽지는 않아 보였습니다. 반복해서 명령어를 말해도 컴퓨터가 잘못 알아듣기도 하고, 컴퓨터 프로그램이 중간중간 멈추기도 했습니다. "제가 마우스를 사용할 때마다 약간 자존심이 좀 상해요, 안 쓴다고 했는데", 천 작가도 마음처럼 작업이 이뤄지지 않는지 아쉬움을 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도전은 여전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예전과 같은 방식으로 일하지 못하는 상황이 오더라도 좌절하지 않고, 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방식을 찾아냈기 때문입니다. "아직은 초기 단계라 작업 속도가 더디기도 하지만, 파일을 여닫는 작업 등은 더 빨라졌다"며 천 작가는 웃으며 원고 작업을 이어갔습니다.

분명한 건, 천 작가의 도전은 다른 '누군가'에게도 '가능성'을 안겨줄 수 있다는 겁니다. '불가능하다'와 '어렵다'는 게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어렵지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가는 천 작가의 도전이 점점 기대되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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