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의 중심’ 한국의 서원은 어떻게 세계유산이 되었나

입력 2019.07.0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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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서쪽 끝,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서 열리고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43차 회의에서 '한국의 서원' 9곳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유네스코는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의 보호를 위한 국제적 협력을 위해 해마다 회원국의 신청을 받아 세계유산을 심사·등재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서원'은 2015년 처음 신청을 했다가 유네스코의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심사에서 '반려' 의견을 받고 이듬해 신청을 철회한 적이 있습니다. 많은 서원 가운데 특정 서원을 등재 대상으로 선정한 것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이 '반려' 의견의 주된 이유였습니다. 이후 문화재청은 서원 9곳이 16~17세기에 세워진 우리 서원의 시작점이자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됐다는 내용으로 신청서를 보완해 지난해 다시 신청서를 냈고, 두 번째 심사에서는 '등재 권고' 의견을 받았습니다.

한국 서원의 시작…주세붕의 소수서원

조선 최초의 서원인 경북 영주 소수서원의 전경조선 최초의 서원인 경북 영주 소수서원의 전경

조선 최초의 서원은 '소수서원'입니다. 소수서원은 조선 중종 때의 이름난 학자이자 문신인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뒤, 고려 때의 학자이자 영주 출신인 안향(1243~1306)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습니다. 안향은 중국의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인물로 공자와 맹자처럼 이름에 '자(子)'를 붙여 존경의 뜻을 담는 유교의 관습에 따라 '안자'라고 불릴 정도로 우리나라 성리학에서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설립 당시에는 중국의 지명을 본떠 백운동서원이었던 것을 이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명종 임금의 현판을 받아 소수서원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소수서원은 임금으로부터 편액(현판)을 내려받은 사액서원입니다. 현판과 함께 토지와 노비에 대한 면세 특권을 받아 이후 다른 서원들이 국가의 지원을 받는 길이 열립니다. 하지만 서원의 설립 주체는 국가가 아닌 지역의 유생들입니다. 이 점에서 국가가 설립한 각 지역에 설립한 향교와 서울에 있는 성균관과 구분해, 서원을 사립 교육기관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서원보다 앞서 지역마다 존재했던 서당을 포함하면 조선시대 교육기관은 '서당-서원-향교-성균관'의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로 다니던 학생들의 연령을 고려하면 사립인 서당과 서원은 지금의 유치원과 초등학교, 국립인 향교와 성균관은 각각 중고등학교와 대학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칙과 변용…한국 서원의 가치

소수서원보다 일반적으로 더 많이 알려진 서원은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일 겁니다. 도산서원은 조선의 가장 유명한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1501~1570)을 기리기 위해 1575년 후학들이 설립한 곳입니다. 퇴계가 생전에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직접 지은 도산서당의 뒤편으로 퇴계와 선현을 기리는 제향 공간이 들어서면서 서당은 서원이 됐습니다. 이렇게 교육공간이 앞쪽에 있고, 뒤쪽으로 제향 공간이 있는 구조는 서원과 향교가 기본적으로 따르는 건물 구조입니다.

‘전학후묘·전저후고’의 배치를 보여주는 안동 도산서원의 모습‘전학후묘·전저후고’의 배치를 보여주는 안동 도산서원의 모습

'전학후묘'라고도 부르는 이 구조는 중국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주희)가 언급한 것이기도 하고, 학자이자 건축가이기도 했던 퇴계 선생이 서원의 기본 구조로 정립한 것입니다. 선현을 기리는 뜻에서 교육 공간보다 제향 공간이 위쪽에 있도록 하는 '전저후고'의 배치도 퇴계가 정한 원칙이었습니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체계적인 교육기관인 동시에 건물의 구조 역시 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은 유네스코에서 서원이 높은 평가를 받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원칙이 있었다고 해서 한국의 모든 서원이 일률적인 배치를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전저후고'가 어려운 조건은 아니었지만,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처럼 평야지대에 서원을 지을 때는 '선학후묘'를 지키면서 '전저후고'는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연지형의 변형을 최소화했던 조선의 정원처럼 서원도 지형에 맞게 조금씩 다른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중국에서 들어온 성리학을 조선의 여건에 맞게 변형했던 과정처럼 서원마다 자연지형에 걸맞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도 세계유산으로서 한국의 서원이 갖는 가치입니다.

철폐됐던 서원이 유일한 세계유산으로

서원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 전국적으로 6백여 곳에 이를 정도로 숫자가 크게 늘어납니다. 당시 인구나 경제적 수준을 생각하면 상당히 많은 숫자였기 때문에 그만큼 성리학이 보편적인 국가 이념이었고 서원이 전국적인 체계를 갖춘 교육기관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붕당으로 대표되는 양반 세력이 성장하고 왕권이 약화되는 정치적인 배경과 사액서원의 면세 특권이라는 경제적인 배경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왕권 강화와 재정 확충이라는 목표 아래, 숙종은 새로운 서원의 설립을 금지하는 서원금령을 내렸고 영조는 금지령을 위반하고 설립된 서원을 철폐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사액서원의 면세특권을 취소한 데 이어, 1870년에는 대표적인 서원 47곳을 뺀 서원 대부분을 철폐했습니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남은 서원들도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습니다.

지역의 교육기관이자 자치기구이기도 했던 안동 하회마을 병산서원의 전경지역의 교육기관이자 자치기구이기도 했던 안동 하회마을 병산서원의 전경

이번에 등재된 서원 9곳은 우여곡절 속에 그나마 제모습을 지키고 있는 곳들로 현재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는 등재와 함께 해당 서원들을 통합적으로 관리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과제도 내줬습니다. 서원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베트남에도 있습니다. 한국의 서원이 유교문화의 발상지인 중국의 서원보다 먼저 세계유산에 등재됐다는 점은 의미가 적지 않습니다. 한때 철폐령이 내려졌던 서원이 현재로서는 유일한 세계유산이라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 됐습니다.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 우리가 기억해둘 만한 세계유산 9곳의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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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리학의 중심’ 한국의 서원은 어떻게 세계유산이 되었나
    • 입력 2019-07-07 10:00:45
    취재K
아시아의 서쪽 끝,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에서 열리고 있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43차 회의에서 '한국의 서원' 9곳이 세계유산으로 등재됐습니다. 유네스코는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의 보호를 위한 국제적 협력을 위해 해마다 회원국의 신청을 받아 세계유산을 심사·등재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서원'은 2015년 처음 신청을 했다가 유네스코의 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의 심사에서 '반려' 의견을 받고 이듬해 신청을 철회한 적이 있습니다. 많은 서원 가운데 특정 서원을 등재 대상으로 선정한 것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이 '반려' 의견의 주된 이유였습니다. 이후 문화재청은 서원 9곳이 16~17세기에 세워진 우리 서원의 시작점이자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됐다는 내용으로 신청서를 보완해 지난해 다시 신청서를 냈고, 두 번째 심사에서는 '등재 권고' 의견을 받았습니다.

한국 서원의 시작…주세붕의 소수서원

조선 최초의 서원인 경북 영주 소수서원의 전경
조선 최초의 서원은 '소수서원'입니다. 소수서원은 조선 중종 때의 이름난 학자이자 문신인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부임한 뒤, 고려 때의 학자이자 영주 출신인 안향(1243~1306)을 기리기 위해 건립했습니다. 안향은 중국의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인물로 공자와 맹자처럼 이름에 '자(子)'를 붙여 존경의 뜻을 담는 유교의 관습에 따라 '안자'라고 불릴 정도로 우리나라 성리학에서는 중요한 인물입니다. 설립 당시에는 중국의 지명을 본떠 백운동서원이었던 것을 이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명종 임금의 현판을 받아 소수서원으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소수서원은 임금으로부터 편액(현판)을 내려받은 사액서원입니다. 현판과 함께 토지와 노비에 대한 면세 특권을 받아 이후 다른 서원들이 국가의 지원을 받는 길이 열립니다. 하지만 서원의 설립 주체는 국가가 아닌 지역의 유생들입니다. 이 점에서 국가가 설립한 각 지역에 설립한 향교와 서울에 있는 성균관과 구분해, 서원을 사립 교육기관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서원보다 앞서 지역마다 존재했던 서당을 포함하면 조선시대 교육기관은 '서당-서원-향교-성균관'의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로 다니던 학생들의 연령을 고려하면 사립인 서당과 서원은 지금의 유치원과 초등학교, 국립인 향교와 성균관은 각각 중고등학교와 대학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원칙과 변용…한국 서원의 가치

소수서원보다 일반적으로 더 많이 알려진 서원은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일 겁니다. 도산서원은 조선의 가장 유명한 성리학자인 퇴계 이황(1501~1570)을 기리기 위해 1575년 후학들이 설립한 곳입니다. 퇴계가 생전에 후학을 가르치기 위해 직접 지은 도산서당의 뒤편으로 퇴계와 선현을 기리는 제향 공간이 들어서면서 서당은 서원이 됐습니다. 이렇게 교육공간이 앞쪽에 있고, 뒤쪽으로 제향 공간이 있는 구조는 서원과 향교가 기본적으로 따르는 건물 구조입니다.

‘전학후묘·전저후고’의 배치를 보여주는 안동 도산서원의 모습
'전학후묘'라고도 부르는 이 구조는 중국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주희)가 언급한 것이기도 하고, 학자이자 건축가이기도 했던 퇴계 선생이 서원의 기본 구조로 정립한 것입니다. 선현을 기리는 뜻에서 교육 공간보다 제향 공간이 위쪽에 있도록 하는 '전저후고'의 배치도 퇴계가 정한 원칙이었습니다.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체계적인 교육기관인 동시에 건물의 구조 역시 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은 유네스코에서 서원이 높은 평가를 받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원칙이 있었다고 해서 한국의 모든 서원이 일률적인 배치를 보이는 것은 아닙니다. 산지가 많은 우리나라에서 '전저후고'가 어려운 조건은 아니었지만,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처럼 평야지대에 서원을 지을 때는 '선학후묘'를 지키면서 '전저후고'는 따르지 않았습니다. 자연지형의 변형을 최소화했던 조선의 정원처럼 서원도 지형에 맞게 조금씩 다른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중국에서 들어온 성리학을 조선의 여건에 맞게 변형했던 과정처럼 서원마다 자연지형에 걸맞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점도 세계유산으로서 한국의 서원이 갖는 가치입니다.

철폐됐던 서원이 유일한 세계유산으로

서원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 전국적으로 6백여 곳에 이를 정도로 숫자가 크게 늘어납니다. 당시 인구나 경제적 수준을 생각하면 상당히 많은 숫자였기 때문에 그만큼 성리학이 보편적인 국가 이념이었고 서원이 전국적인 체계를 갖춘 교육기관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붕당으로 대표되는 양반 세력이 성장하고 왕권이 약화되는 정치적인 배경과 사액서원의 면세 특권이라는 경제적인 배경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왕권 강화와 재정 확충이라는 목표 아래, 숙종은 새로운 서원의 설립을 금지하는 서원금령을 내렸고 영조는 금지령을 위반하고 설립된 서원을 철폐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흥선대원군은 사액서원의 면세특권을 취소한 데 이어, 1870년에는 대표적인 서원 47곳을 뺀 서원 대부분을 철폐했습니다. 이후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거치면서 남은 서원들도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습니다.

지역의 교육기관이자 자치기구이기도 했던 안동 하회마을 병산서원의 전경
이번에 등재된 서원 9곳은 우여곡절 속에 그나마 제모습을 지키고 있는 곳들로 현재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는 등재와 함께 해당 서원들을 통합적으로 관리하고 보존해야 한다는 과제도 내줬습니다. 서원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 베트남에도 있습니다. 한국의 서원이 유교문화의 발상지인 중국의 서원보다 먼저 세계유산에 등재됐다는 점은 의미가 적지 않습니다. 한때 철폐령이 내려졌던 서원이 현재로서는 유일한 세계유산이라는 자부심을 느낄 수 있게 됐습니다.

소수서원, 남계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필암서원, 도동서원, 병산서원, 무성서원, 돈암서원. 우리가 기억해둘 만한 세계유산 9곳의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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