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사위원장님, ‘법 지키는 것’보다 제도개선이 우선인가요?

입력 2019.07.10 (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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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직권남용이 있더라도 제도 개선을 하는 게…"

8일 밤 10시, 이목이 집중됐던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청문회도 다소 맥이 빠진 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여상규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 "저도 한두 가지 지적할 게 있다"면서 입을 열었습니다.

여 위원장은 '직권남용죄'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통상 기소가 극히 드문 직권남용죄가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만은 왜 이렇게 엄격하게 적용됐느냐는 취지의 이야기였습니다.

「(여상규) "제가 보니까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범죄 사실이 47건입니다. 공소장 규모가 A4 용지로 300페이지 가까이 되고요. 더욱 놀라운 것은요, 그 47개의 범죄 사실 중에 '직권남용죄'가 몇 건인지 아세요?"
(윤석열) "글쎄, 뭐…"
(여상규) "41건이에요. 47개 범죄 사실 중에 직권남용죄가 41개입니다. 단 한 사람 피고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 한 사람에 대한 범죄 사실이 직권남용죄가 41건이다. 이거 뭐 대법원장 재직 중인 6년 동안 거의 매년 그냥 직권남용으로 일관된 것 같아요. 이게 어떻게 그동안에 전혀 지적이 안 됐을까요? 이런 범죄행위를 일삼았다면"
-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청문회 中」


여기까지는 '직권남용죄'가 정치적 탄압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최근 자주 등장하는 지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 위원장,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여상규) "이렇게 (상고법원을) 추진하면서 조금 뭐 정치권이나 심지어 대통령한테 이런 것들을 설명하고 또 거기에 대한 반대 의견에 대해서 좀 뭐하고 하고 말이죠. 이런 것들을 다 직권남용으로 이렇게 걸어서 기소를 하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대법원장이 무슨 일을 하겠어요? 지금 김명수 대법원장, 대법관들의 업무 과중은 여전할 텐데 전혀 아무것도 안 하지 않아요? 이게 옳습니까? 약간의 직권남용이 있더라도 이런 제도 개선을 하는 게 옳겠습니까? 어느 게 옳습니까?
-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청문회 中」


상고법원 추진이라는 정당한 목적을 위한 사법행정 과정에서 '약간의 직권남용'은 있을 수도 있지 않느냐, 이런 것까지 직권남용으로 기소해서야 되겠느냐는 취지의 얘기였습니다. 국회 법사위원장이 차기 검찰총장 후보를 앞에다 놓고 '일을 하다 보면 법을 좀 어길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얘기한 셈입니다.

"사후에 보기에 적절하지 못한 측면이 있을지라도"

여 위원장의 이 같은 말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기소된 고영한 전 대법관의 주장과 놀랍게도 유사합니다.

고 전 대법관은 지난 5월 자신의 첫 재판에서 "재판부를 담당하는 법관의 재판작용과 달리 사법행정 담당자들은 조직의 위상을 강화하고 조직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정책과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가능한 여러 합목적적 수단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폭넓은 재량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법행정 담당자들이 관여한 조치가 사후에 보기에 다소 부당하거나 적절하지 못한 측면이 있을지라도, 이를 놓고 곧바로 형사범죄에 이를 정도로 권한을 남용하거나 직무를 유기한 것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사법행정이 '폭넓은 재량'을 갖고 있으니 '다소 부당하거나 적절하지 못한 측면'이 있어도 '범죄에 이를 정도로 권한 남용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전직 최고위 법관의 주장. 국민들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요?

최근 들어 부쩍 '말 많은' 직권남용

전직 대법관, 법관 출신의 법사위원장이 직권남용죄의 문제를 지적하는 게 근거 없는 주장만은 아닙니다. 형법 제123조 직권남용죄가 규정한 '직권'은 무엇이고, 이를 남용해 하게 하는 '의무없는 일'은 무엇인지, 규정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라는 지적은 계속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직권남용죄는 1953년 형법이 제정될 때부터 존재해온 조항입니다. 1995년 벌칙조항에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이 추가된 것 외에는 개정된 일도 없습니다. 2006년 한 차례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여부에 대한 판단을 받은 일도 있습니다. 당시 헌재는 재판관 8대 1의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일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지만, 60년 넘게 존재해왔고 정당성을 인정받은, 지켜야 하는 법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최근들이 부쩍 직권남용죄를 두고 '시비'가 많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 김관진 전 국방부장관 등 '힘 있는', '힘이 있었던' 사람들이 본인들의 문제가 되자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직권남용죄 적용의 문제에 대한 여 위원장과 고 전 대법관의 지적이 곧이 곧대로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도 이때문입니다.

특히 여 위원장은 국회 법사위의 대표입니다. 직권남용죄를 규정한 형법은 법사위 소관 법률입니다. 직권남용죄와 그 적용에 문제가 있다면, '약간의 직권남용은 있을 수 있지 않느냐'고 따질 일이 아니라 법을 좀 더 정교하게 가다듬어 바꾸는 게 우선 아닐까요? 검찰이 법 적용을 정치적으로 한다고 정치인으로서 문제를 제기하기 이전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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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법사위원장님, ‘법 지키는 것’보다 제도개선이 우선인가요?
    • 입력 2019-07-10 06:03:04
    취재K
"약간의 직권남용이 있더라도 제도 개선을 하는 게…"

8일 밤 10시, 이목이 집중됐던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청문회도 다소 맥이 빠진 채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여상규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이 "저도 한두 가지 지적할 게 있다"면서 입을 열었습니다.

여 위원장은 '직권남용죄'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통상 기소가 극히 드문 직권남용죄가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만은 왜 이렇게 엄격하게 적용됐느냐는 취지의 이야기였습니다.

「(여상규) "제가 보니까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범죄 사실이 47건입니다. 공소장 규모가 A4 용지로 300페이지 가까이 되고요. 더욱 놀라운 것은요, 그 47개의 범죄 사실 중에 '직권남용죄'가 몇 건인지 아세요?"
(윤석열) "글쎄, 뭐…"
(여상규) "41건이에요. 47개 범죄 사실 중에 직권남용죄가 41개입니다. 단 한 사람 피고인, 양승태 전 대법원장 한 사람에 대한 범죄 사실이 직권남용죄가 41건이다. 이거 뭐 대법원장 재직 중인 6년 동안 거의 매년 그냥 직권남용으로 일관된 것 같아요. 이게 어떻게 그동안에 전혀 지적이 안 됐을까요? 이런 범죄행위를 일삼았다면"
-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청문회 中」


여기까지는 '직권남용죄'가 정치적 탄압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최근 자주 등장하는 지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 위원장, 한 발 더 나아갑니다.

「(여상규) "이렇게 (상고법원을) 추진하면서 조금 뭐 정치권이나 심지어 대통령한테 이런 것들을 설명하고 또 거기에 대한 반대 의견에 대해서 좀 뭐하고 하고 말이죠. 이런 것들을 다 직권남용으로 이렇게 걸어서 기소를 하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대법원장이 무슨 일을 하겠어요? 지금 김명수 대법원장, 대법관들의 업무 과중은 여전할 텐데 전혀 아무것도 안 하지 않아요? 이게 옳습니까? 약간의 직권남용이 있더라도 이런 제도 개선을 하는 게 옳겠습니까? 어느 게 옳습니까?
- 윤석열 검찰총장 후보자 인사청문회 中」


상고법원 추진이라는 정당한 목적을 위한 사법행정 과정에서 '약간의 직권남용'은 있을 수도 있지 않느냐, 이런 것까지 직권남용으로 기소해서야 되겠느냐는 취지의 얘기였습니다. 국회 법사위원장이 차기 검찰총장 후보를 앞에다 놓고 '일을 하다 보면 법을 좀 어길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얘기한 셈입니다.

"사후에 보기에 적절하지 못한 측면이 있을지라도"

여 위원장의 이 같은 말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기소된 고영한 전 대법관의 주장과 놀랍게도 유사합니다.

고 전 대법관은 지난 5월 자신의 첫 재판에서 "재판부를 담당하는 법관의 재판작용과 달리 사법행정 담당자들은 조직의 위상을 강화하고 조직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정책과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가능한 여러 합목적적 수단 중의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폭넓은 재량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법행정 담당자들이 관여한 조치가 사후에 보기에 다소 부당하거나 적절하지 못한 측면이 있을지라도, 이를 놓고 곧바로 형사범죄에 이를 정도로 권한을 남용하거나 직무를 유기한 것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사법행정이 '폭넓은 재량'을 갖고 있으니 '다소 부당하거나 적절하지 못한 측면'이 있어도 '범죄에 이를 정도로 권한 남용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전직 최고위 법관의 주장. 국민들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요?

최근 들어 부쩍 '말 많은' 직권남용

전직 대법관, 법관 출신의 법사위원장이 직권남용죄의 문제를 지적하는 게 근거 없는 주장만은 아닙니다. 형법 제123조 직권남용죄가 규정한 '직권'은 무엇이고, 이를 남용해 하게 하는 '의무없는 일'은 무엇인지, 규정이 지나치게 추상적이고 포괄적이라는 지적은 계속 있어왔습니다.

하지만, 직권남용죄는 1953년 형법이 제정될 때부터 존재해온 조항입니다. 1995년 벌칙조항에 '1천만 원 이하의 벌금'이 추가된 것 외에는 개정된 일도 없습니다. 2006년 한 차례 헌법재판소에서 위헌 여부에 대한 판단을 받은 일도 있습니다. 당시 헌재는 재판관 8대 1의 의견으로 '합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일부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 있지만, 60년 넘게 존재해왔고 정당성을 인정받은, 지켜야 하는 법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최근들이 부쩍 직권남용죄를 두고 '시비'가 많습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 김관진 전 국방부장관 등 '힘 있는', '힘이 있었던' 사람들이 본인들의 문제가 되자 문제를 제기하고 있습니다. 직권남용죄 적용의 문제에 대한 여 위원장과 고 전 대법관의 지적이 곧이 곧대로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도 이때문입니다.

특히 여 위원장은 국회 법사위의 대표입니다. 직권남용죄를 규정한 형법은 법사위 소관 법률입니다. 직권남용죄와 그 적용에 문제가 있다면, '약간의 직권남용은 있을 수 있지 않느냐'고 따질 일이 아니라 법을 좀 더 정교하게 가다듬어 바꾸는 게 우선 아닐까요? 검찰이 법 적용을 정치적으로 한다고 정치인으로서 문제를 제기하기 이전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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