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이란의 유조선 나포?…영국은 “진로방해”였다는데 미국은 왜 “나포시도”?

입력 2019.07.13 (07:05) 수정 2019.07.14 (14:25)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이란 혁명수비대가 지난 10일 페르시아만에서 영국 유조선을 나포하려고 시도했다는 소식은 영국이 아닌 미국 매체들에 의해 처음 알려졌다. 사건 당시 인근에서 미군 정찰기가 비행중이었고, 이 정찰기가 미군 지휘부에 상황을 신속히 보고하자 미국 정부 관계자가 이런 정보를 언론에 알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정보에 따르면 5척의 무장 선박이 영국 유조선 브리티시 헤리티지호에 접근해 인근 이란 영해에 정박할 것을 강요했다. 명백한 나포 시도 행위다. 이 때문에 인근에 있던 영국의 몬트로즈 구축함이 30mm 함포를 무장선박에 겨냥하면서 발포 경고를 하고 나서야 이 무장선박들은 물러났다는 게 미국 매체들의 보도 내용이다.


그런데 한참 뒤에 나온 영국의 설명은 좀 다르다. 영국 정부가 발표한 성명은 "몬트로즈함이 브리티시 헤리티지호와 이란 선박들 사이에 위치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이란 선박에 무전으로 구두 경고를 하자 이 선박들이 돌아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 '항행의 자유'를 강조했다.

즉, 영국은 이란 선박의 활동을 나포 시도라고 명확히 규정하지 않고, 유조선 항로를 방해하려다 성공하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제러미 헌트 영국 외무장관도 알자지라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란이 영국 유조선의 항해를 방해한 사건 이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영국 해군의 활약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긴장 고조는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영국은 또 당시 항해를 방해한 이란 선박이 3척이라고 설명했다. 5척의 무장선박이 나포 시도를 했다는 미국 매체들의 보도와는 차이가 난다.

물론 급박한 상황에서 당시 현장에 있던 선박이 3척이었는지 5척이었는지 혼란스러울 수 있다. 게다가 영국이 지브롤터 해상에서 이란 유조선을 억류한 지 일주일도 채 안 된 시점에서 일어난 일이다. 지브롤터 경찰은 이 유조선의 선장과 선원까지 유럽연합 제재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이에 대해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영국에 대한 대응을 경고한 상태였기 때문에 진로 방해와 나포시도의 경계선에 대한 판단도 모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미국과 영국의 태도 차이다. 한쪽에서는 어떻게든 사건을 키워보려고 하는 뉘앙스가 느껴지지만, 다른 쪽은 좀 차분하게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싶다는 의지가 읽히기 때문이다.

상황을 돌이켜보면 현재 이란의 핵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갈등의 출발점은 지난해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가 이란의 한 창고를 급습해 핵무기 개발 기밀문서를 확보해 공개했던 시점이다. 무려 5만 5천 쪽에 이르는 이란 핵 기밀 정보를 확보했다고 당시 이스라엘은 주장했다.


이 소식을 가장 반긴 건 미국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바마 행정부가 이란과 맺은 핵 합의에 대해 불만이 가득하던 트럼프 행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이란의 핵무기 개발 야욕을 재차 규탄하며 지난해 5월 8일 이란 핵 합의에서 탈퇴했다. 이후 미국은 이란산 원유 거래를 금지하며 최대의 압박 작전에 돌입했다.

하지만 이런 미국의 결정에 유럽 국가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란 핵 합의는 미국과 이란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독일,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까지 참여한 합의다. 이란의 우라늄 농축 수준을 3.67%로 제한하고, 저농축 우라늄도 재고량을 제한하며, 우라늄을 농축하는 원심분리기의 가동을 제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당시 국제원자력기구 IAEA조차 이란이 이런 핵 합의를 준수하고 있다고 했는데, 미국 혼자 아니라며 합의에서 탈퇴한 것이다.


물론 가장 화가 난 건 이란이다. 이란은 어차피 미국이야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 포기한 셈 치고, 유럽 국가들이라도 핵 합의를 계속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즉, 이란 핵 합의 성사 이후 이란에 대한 제재가 해제됐으니, 그 제재 해제 상태가 계속 유지돼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이란과 거래하는 국가까지 제재하는 '세컨더리 보이콧' 시행에 들어갔고, 미국이 지배하는 금융질서 속에서 무역을 하는 나라들은 이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요청에 따라 이란 유조선을 억류했다가 이란에게 완전히 '찍히고 만' 영국의 입장은 난처할 수밖에 없다. 유조선을 풀어주자니 미국 눈치가 보이고, 계속 억류하고 있으려니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가는 자국 유조선의 안전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유조선마다 해군 구축함이 따라다닐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유조선 나포 시도 사건을 놓고 미국과 영국이 보이는 미묘한 입장 차이는 이 때문이다.


프랑스는 한 발 더 나갔다. 마크롱 대통령의 특사를 이란에 보내 중재를 시도하는가 하면, 르 드리앙 프랑스 외무장관은 상원에 출석해 "이란의 반응도 나쁘지만, 핵 합의에서 탈퇴한 미국의 결정도 나쁘다"며 양비론을 펼쳤다.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을 공개 비판하는 건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걱정되는 건 미국과 이란의 군사적 충돌이다.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을 목도한 세계인들은 중동은 화약고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고, 그 화약고에 미국과 이란이 불씨를 던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할 수밖에 없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세게 원유 수급은 막대한 차질을 빚게 되고 우리나라와 같은 원유 수입국들은 큰 위기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원유 수출 판로를 걱정해야 하는 중동 국가 사람들의 반응은 오히려 덤덤하다. 미국이 중동의 정세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려면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을 이용해야 하니, 시아파 대부인 이란을 완전히 없애지는 않을 거라고 말한다. 흔한 음모론 중의 하나일 수는 있고, 국지적 무력 충돌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는 없는 이론이지만, 어쨌든 전쟁을 바라지 않는 입장에서는 은근히 의지하게 되는 분석이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특파원리포트] 이란의 유조선 나포?…영국은 “진로방해”였다는데 미국은 왜 “나포시도”?
    • 입력 2019-07-13 07:05:07
    • 수정2019-07-14 14:25:10
    특파원 리포트
이란 혁명수비대가 지난 10일 페르시아만에서 영국 유조선을 나포하려고 시도했다는 소식은 영국이 아닌 미국 매체들에 의해 처음 알려졌다. 사건 당시 인근에서 미군 정찰기가 비행중이었고, 이 정찰기가 미군 지휘부에 상황을 신속히 보고하자 미국 정부 관계자가 이런 정보를 언론에 알린 것으로 추정된다.

이 정보에 따르면 5척의 무장 선박이 영국 유조선 브리티시 헤리티지호에 접근해 인근 이란 영해에 정박할 것을 강요했다. 명백한 나포 시도 행위다. 이 때문에 인근에 있던 영국의 몬트로즈 구축함이 30mm 함포를 무장선박에 겨냥하면서 발포 경고를 하고 나서야 이 무장선박들은 물러났다는 게 미국 매체들의 보도 내용이다.


그런데 한참 뒤에 나온 영국의 설명은 좀 다르다. 영국 정부가 발표한 성명은 "몬트로즈함이 브리티시 헤리티지호와 이란 선박들 사이에 위치하는 상황이 발생했고, 이란 선박에 무전으로 구두 경고를 하자 이 선박들이 돌아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 '항행의 자유'를 강조했다.

즉, 영국은 이란 선박의 활동을 나포 시도라고 명확히 규정하지 않고, 유조선 항로를 방해하려다 성공하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제러미 헌트 영국 외무장관도 알자지라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이란이 영국 유조선의 항해를 방해한 사건 이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며 "영국 해군의 활약에 자부심을 느끼지만, 긴장 고조는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영국은 또 당시 항해를 방해한 이란 선박이 3척이라고 설명했다. 5척의 무장선박이 나포 시도를 했다는 미국 매체들의 보도와는 차이가 난다.

물론 급박한 상황에서 당시 현장에 있던 선박이 3척이었는지 5척이었는지 혼란스러울 수 있다. 게다가 영국이 지브롤터 해상에서 이란 유조선을 억류한 지 일주일도 채 안 된 시점에서 일어난 일이다. 지브롤터 경찰은 이 유조선의 선장과 선원까지 유럽연합 제재 위반 혐의로 체포했다. 이에 대해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영국에 대한 대응을 경고한 상태였기 때문에 진로 방해와 나포시도의 경계선에 대한 판단도 모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미국과 영국의 태도 차이다. 한쪽에서는 어떻게든 사건을 키워보려고 하는 뉘앙스가 느껴지지만, 다른 쪽은 좀 차분하게 분위기를 가라앉히고 싶다는 의지가 읽히기 때문이다.

상황을 돌이켜보면 현재 이란의 핵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갈등의 출발점은 지난해 4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스라엘의 정보기관 모사드가 이란의 한 창고를 급습해 핵무기 개발 기밀문서를 확보해 공개했던 시점이다. 무려 5만 5천 쪽에 이르는 이란 핵 기밀 정보를 확보했다고 당시 이스라엘은 주장했다.


이 소식을 가장 반긴 건 미국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오바마 행정부가 이란과 맺은 핵 합의에 대해 불만이 가득하던 트럼프 행정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이란의 핵무기 개발 야욕을 재차 규탄하며 지난해 5월 8일 이란 핵 합의에서 탈퇴했다. 이후 미국은 이란산 원유 거래를 금지하며 최대의 압박 작전에 돌입했다.

하지만 이런 미국의 결정에 유럽 국가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란 핵 합의는 미국과 이란뿐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 독일, 그리고 중국과 러시아까지 참여한 합의다. 이란의 우라늄 농축 수준을 3.67%로 제한하고, 저농축 우라늄도 재고량을 제한하며, 우라늄을 농축하는 원심분리기의 가동을 제한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당시 국제원자력기구 IAEA조차 이란이 이런 핵 합의를 준수하고 있다고 했는데, 미국 혼자 아니라며 합의에서 탈퇴한 것이다.


물론 가장 화가 난 건 이란이다. 이란은 어차피 미국이야 말이 통하지 않을 것이라 포기한 셈 치고, 유럽 국가들이라도 핵 합의를 계속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즉, 이란 핵 합의 성사 이후 이란에 대한 제재가 해제됐으니, 그 제재 해제 상태가 계속 유지돼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은 이란과 거래하는 국가까지 제재하는 '세컨더리 보이콧' 시행에 들어갔고, 미국이 지배하는 금융질서 속에서 무역을 하는 나라들은 이를 따를 수밖에 없게 됐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의 요청에 따라 이란 유조선을 억류했다가 이란에게 완전히 '찍히고 만' 영국의 입장은 난처할 수밖에 없다. 유조선을 풀어주자니 미국 눈치가 보이고, 계속 억류하고 있으려니 호르무즈 해협을 지나가는 자국 유조선의 안전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유조선마다 해군 구축함이 따라다닐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유조선 나포 시도 사건을 놓고 미국과 영국이 보이는 미묘한 입장 차이는 이 때문이다.


프랑스는 한 발 더 나갔다. 마크롱 대통령의 특사를 이란에 보내 중재를 시도하는가 하면, 르 드리앙 프랑스 외무장관은 상원에 출석해 "이란의 반응도 나쁘지만, 핵 합의에서 탈퇴한 미국의 결정도 나쁘다"며 양비론을 펼쳤다. 중국과 러시아가 미국을 공개 비판하는 건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걱정되는 건 미국과 이란의 군사적 충돌이다. 이라크 전쟁, 아프가니스탄 전쟁 등을 목도한 세계인들은 중동은 화약고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고, 그 화약고에 미국과 이란이 불씨를 던지는 것은 아닌지 걱정할 수밖에 없다. 만약 전쟁이 일어나면 세게 원유 수급은 막대한 차질을 빚게 되고 우리나라와 같은 원유 수입국들은 큰 위기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원유 수출 판로를 걱정해야 하는 중동 국가 사람들의 반응은 오히려 덤덤하다. 미국이 중동의 정세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끌고 가려면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을 이용해야 하니, 시아파 대부인 이란을 완전히 없애지는 않을 거라고 말한다. 흔한 음모론 중의 하나일 수는 있고, 국지적 무력 충돌 가능성까지 배제할 수는 없는 이론이지만, 어쨌든 전쟁을 바라지 않는 입장에서는 은근히 의지하게 되는 분석이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