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민정 이양된 태국…의회 첫 이슈는 ‘의사당 드레스 코드’

입력 2019.07.18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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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태국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지 5년 만에 지난 3월 실시된 총선에서 푸어타이당은 1당을 차지했지만 반(反)군부 연립정부 구성에는 실패했다. 대신 팔랑쁘라차랏당을 비롯한 친(親)군부 정당 연합이 소수정당들의 지지를 업고 연립정부 구성에 성공했다.

이달 16일 새 정부 각료가 국왕의 승인을 받음으로써 공식적으로 민간 정부가 출범했지만, 육군참모총장 출신의 쁘라윳 짠오차 총리가 연임하고 군부정권 주요 인사들이 요직을 차지하는 등 '군부정권 2기'라는 평도 나온다.

태국 의사당에 모인 하원 의원들. 친군부 정당 연합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다.태국 의사당에 모인 하원 의원들. 친군부 정당 연합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다.

친(親)군부 정당 vs. 반(反)군부정당, 의사당 '드레스 코드'로 맞붙어

다만 의회 과반 확보에는 실패했지만 반(反)군부정당 연합이 500석 가운데 246석을 차지해 앞으로 친(親)군부 연립정부의 앞날이 녹록지 않을 것을 예고하고 있다.

기선 제압용일까?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새로 구성된 하원에서 양쪽 진영 간에 뜨거운 설전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논쟁의 이슈는 정치 문제도 경제 문제도 아닌 '의사당 드레스 코드(dress code)'다.

야당 젊은 여성 의원의 등원 의상이 논란의 중심

논란의 중심에는 창당 1년 만에 제3당의 위치에 올라 반(反)군부 진영의 핵심으로 떠오른 퓨처 포워드(Future Forward)당의 젊은 여성 대변인 빠니까 와닛(31) 의원이 있다. 태국 최고 대학인 쭐라롱껀대를 졸업하고 영국에 유학해 런던정경대(LSE)에서 국제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은 엘리트 출신인 그녀는 의회에 등원하면서 서양식 재킷과 치마를 입지 않고 최근 TV 드라마로 방영돼 인기를 끌고 있는 태국 북부 지방의 전통 의상을 입었다.

빠니까 와닛 의원의 의회 등원 의상(오른쪽)은 인기 TV 드라마(왼쪽)에서 방영된 태국 북부 지역의 전통의상이다.빠니까 와닛 의원의 의회 등원 의상(오른쪽)은 인기 TV 드라마(왼쪽)에서 방영된 태국 북부 지역의 전통의상이다.

빠니까 와닛 의원은 "각 지역은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며 다른 의원들에게도 격식 파괴(?)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태국 의회 '드레스 코드', '서양식' 정장으로 규정

양복을 입든 전통 의상을 입든 일상복을 입든 뭐가 문제냐 싶을 수 있지만, 태국은 사정이 간단 지 않다. 태국 의회에는 1983년 이후 채택된 복장 규정, 이른바 '드레스 코드'가 있는데 여기에 보면 남성 의원은 양복과 넥타이를, 여성 의원은 재킷과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치마를 입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특히 재킷의 색상도 검정이나 회색, 짙은 감색(navy blue)으로 제한하고 있다.

"의회와 국민에 무례한 행동" vs. "그게 뭐 그리 중요한 문제냐"

빠니까 의원을 비롯해 몇몇 퓨처 포워드당의 여성 의원들이 지역 전통 의상을 입고 등원하자 친(親)군부 정당인 팔랑쁘라차랏당의 한 여성 의원이 논쟁에 불씨를 댕겼다. 빠리나 끄라이컵 의원은 "이는 매우 부적절하며 의회와 국민에게 무례한 행동"이라며 의회당을 패션쇼 무대(catwalk)로 만들었다고 맹비난했다. 더 나아가 의회 복장 규정 위반으로 이의를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태국 지역의 전통의상을 입고 등원한 퓨처포워드당의 여성 의원들태국 지역의 전통의상을 입고 등원한 퓨처포워드당의 여성 의원들

같은 당 남성 의원들도 퓨처포워드 당 남성 의원들이 의사당에서 흰 셔츠 대신 폴로 셔츠를 입거나 넥타이를 하지 않는다며 비난에 가세했다. 그러자 퓨처포워드당 남성 의원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의원들이 청바지나 티셔츠를 입고 심지어 슬리퍼나 샌들을 신는다 한들 그게 뭐 그리 중요한 문제냐. 중요한 것은 일"이라고 반박했다. 퓨처포워드당은 의회 복장 규정을 고치겠다는 방침이다.

결국, 국회의장이 나섰다. 추안 릭파이 의장은 "의회 복장 규정이 국제적 기준의 복식을 따르고 있다 하더라도 엄격하게 적용할 이유는 없으며, 지역 문화를 진흥시키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밝히면서도 "문제는 적절성(appropriateness)이다. 장례식에서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은 전혀 아름답지 않은 것이다"며 문제 해결에 나섰다. 조만간 복장 규정을 새롭게 정비할 뜻도 밝혔다.

태국 의회에서 ‘드레스 코드’ 논쟁을 일으킨 빠니까 와닛 의원. 방콕 출신이지만 지역 문화를 강조하며 탈(脫)방콕의 선봉에 서 있다. (출처: Khaosod)태국 의회에서 ‘드레스 코드’ 논쟁을 일으킨 빠니까 와닛 의원. 방콕 출신이지만 지역 문화를 강조하며 탈(脫)방콕의 선봉에 서 있다. (출처: Khaosod)

'드레스 코드' 논란에 국민 실망….'방콕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 해석도

여성 의원들이 지역 전통의상을 입어도 되는지, 남성 의원들이 좀 더 편한 옷을 입어도 되는지를 놓고 태국 국민의 의견도 찬반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지만 이제 막 구성된 의회에서 여야가 첨예하게 다투는 이슈가 민생 문제가 아닌 '드레스 코드' 논란이라는 데에 대부분의 국민은 실망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논쟁을 단순한 여야 간 논쟁이나 기선 잡기 차원을 넘어 태국 사회에 뿌리 박혀있는 '방콕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태국은 방콕 사람과 방콕 문화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고 그들에겐 지역의 정체성과 문화를 강조하는 것이 위협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방콕만이 태국은 아니다."라는 말은 태국에 여행 오는 관광객들만이 하는 얘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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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특파원리포트] 민정 이양된 태국…의회 첫 이슈는 ‘의사당 드레스 코드’
    • 입력 2019-07-18 06:06:09
    특파원 리포트
2014년 태국에서 군부 쿠데타가 일어난 지 5년 만에 지난 3월 실시된 총선에서 푸어타이당은 1당을 차지했지만 반(反)군부 연립정부 구성에는 실패했다. 대신 팔랑쁘라차랏당을 비롯한 친(親)군부 정당 연합이 소수정당들의 지지를 업고 연립정부 구성에 성공했다.

이달 16일 새 정부 각료가 국왕의 승인을 받음으로써 공식적으로 민간 정부가 출범했지만, 육군참모총장 출신의 쁘라윳 짠오차 총리가 연임하고 군부정권 주요 인사들이 요직을 차지하는 등 '군부정권 2기'라는 평도 나온다.

태국 의사당에 모인 하원 의원들. 친군부 정당 연합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다.
친(親)군부 정당 vs. 반(反)군부정당, 의사당 '드레스 코드'로 맞붙어

다만 의회 과반 확보에는 실패했지만 반(反)군부정당 연합이 500석 가운데 246석을 차지해 앞으로 친(親)군부 연립정부의 앞날이 녹록지 않을 것을 예고하고 있다.

기선 제압용일까?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새로 구성된 하원에서 양쪽 진영 간에 뜨거운 설전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논쟁의 이슈는 정치 문제도 경제 문제도 아닌 '의사당 드레스 코드(dress code)'다.

야당 젊은 여성 의원의 등원 의상이 논란의 중심

논란의 중심에는 창당 1년 만에 제3당의 위치에 올라 반(反)군부 진영의 핵심으로 떠오른 퓨처 포워드(Future Forward)당의 젊은 여성 대변인 빠니까 와닛(31) 의원이 있다. 태국 최고 대학인 쭐라롱껀대를 졸업하고 영국에 유학해 런던정경대(LSE)에서 국제정치학 석사학위를 받은 엘리트 출신인 그녀는 의회에 등원하면서 서양식 재킷과 치마를 입지 않고 최근 TV 드라마로 방영돼 인기를 끌고 있는 태국 북부 지방의 전통 의상을 입었다.

빠니까 와닛 의원의 의회 등원 의상(오른쪽)은 인기 TV 드라마(왼쪽)에서 방영된 태국 북부 지역의 전통의상이다.
빠니까 와닛 의원은 "각 지역은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며 다른 의원들에게도 격식 파괴(?)에 동참할 것을 권유했다.

태국 의회 '드레스 코드', '서양식' 정장으로 규정

양복을 입든 전통 의상을 입든 일상복을 입든 뭐가 문제냐 싶을 수 있지만, 태국은 사정이 간단 지 않다. 태국 의회에는 1983년 이후 채택된 복장 규정, 이른바 '드레스 코드'가 있는데 여기에 보면 남성 의원은 양복과 넥타이를, 여성 의원은 재킷과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치마를 입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 특히 재킷의 색상도 검정이나 회색, 짙은 감색(navy blue)으로 제한하고 있다.

"의회와 국민에 무례한 행동" vs. "그게 뭐 그리 중요한 문제냐"

빠니까 의원을 비롯해 몇몇 퓨처 포워드당의 여성 의원들이 지역 전통 의상을 입고 등원하자 친(親)군부 정당인 팔랑쁘라차랏당의 한 여성 의원이 논쟁에 불씨를 댕겼다. 빠리나 끄라이컵 의원은 "이는 매우 부적절하며 의회와 국민에게 무례한 행동"이라며 의회당을 패션쇼 무대(catwalk)로 만들었다고 맹비난했다. 더 나아가 의회 복장 규정 위반으로 이의를 제기하겠다고 밝혔다.

태국 지역의 전통의상을 입고 등원한 퓨처포워드당의 여성 의원들
같은 당 남성 의원들도 퓨처포워드 당 남성 의원들이 의사당에서 흰 셔츠 대신 폴로 셔츠를 입거나 넥타이를 하지 않는다며 비난에 가세했다. 그러자 퓨처포워드당 남성 의원들도 가만있지 않았다. "의원들이 청바지나 티셔츠를 입고 심지어 슬리퍼나 샌들을 신는다 한들 그게 뭐 그리 중요한 문제냐. 중요한 것은 일"이라고 반박했다. 퓨처포워드당은 의회 복장 규정을 고치겠다는 방침이다.

결국, 국회의장이 나섰다. 추안 릭파이 의장은 "의회 복장 규정이 국제적 기준의 복식을 따르고 있다 하더라도 엄격하게 적용할 이유는 없으며, 지역 문화를 진흥시키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밝히면서도 "문제는 적절성(appropriateness)이다. 장례식에서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은 전혀 아름답지 않은 것이다"며 문제 해결에 나섰다. 조만간 복장 규정을 새롭게 정비할 뜻도 밝혔다.

태국 의회에서 ‘드레스 코드’ 논쟁을 일으킨 빠니까 와닛 의원. 방콕 출신이지만 지역 문화를 강조하며 탈(脫)방콕의 선봉에 서 있다. (출처: Khaosod)
'드레스 코드' 논란에 국민 실망….'방콕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 해석도

여성 의원들이 지역 전통의상을 입어도 되는지, 남성 의원들이 좀 더 편한 옷을 입어도 되는지를 놓고 태국 국민의 의견도 찬반으로 나누어져 있다. 하지만 이제 막 구성된 의회에서 여야가 첨예하게 다투는 이슈가 민생 문제가 아닌 '드레스 코드' 논란이라는 데에 대부분의 국민은 실망을 금하지 못하고 있다.

이번 논쟁을 단순한 여야 간 논쟁이나 기선 잡기 차원을 넘어 태국 사회에 뿌리 박혀있는 '방콕 헤게모니'에 대한 도전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태국은 방콕 사람과 방콕 문화를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고 그들에겐 지역의 정체성과 문화를 강조하는 것이 위협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방콕만이 태국은 아니다."라는 말은 태국에 여행 오는 관광객들만이 하는 얘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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