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의 늪]③ 자립 포기해야 가능, ‘가난 증명’

입력 2019.07.20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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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층과 관련된 기사를 쓰면 '혈세를 축내지 말고 일하라'는 댓글이 종종 눈에 띕니다. 심정은 이해가 갑니다. 내 살림살이도 팍팍한데 여기저기 세금이 쓰이는 게 답답할 만도 합니다.

누구나 당당히 벌어 독립적이면서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매우 당연한 욕구입니다. 그러나 '기초생활수급자'가 이 기본적인 욕구를 실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 고단한 삶의 흔적...질병·장애·노화

'2017년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 현황'을 분석했습니다. 시설 수용자를 제외하면 수급자는 149만 명, 103만 가구입니다. '일 할 나이'인 만 20세~64세에 해당하는 수급자는 67만 명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82만 명 가운데 절반인 43만 명은 65세 이상 노인이고, 35만 명은 초·중·고등학생이며, 그 나머지는 꼬마 어린이들입니다.

가족 구성을 살펴볼까요? 노인·소년소녀가장·장애인·부자·모자 가구 등 이른바 취약계층 가구가 60.8%에 이릅니다.

건강도 좋지 않습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18한국복지패널기초분석' 보고서를 보면, 중위소득 60% 미만의 저소득층 가구원의 73%가 암, 당뇨, 고혈압, 관절염 등 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중위소득 60% 이상의 일반 가구원은 이 비율이 43%로 확 줄어듭니다.


■ 불안정한 일자리...80%가 '월 소득 50만 원 이하'

이들의 처지를 보면 정상적인 근로 활동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안정적인 일자리보다는 임시직, 단순 노무직에 내몰리기 일쑤입니다. 온종일 폐지를 주워 벌어들이는 돈이 단 8천 원. 한 달 꼬박 일해도 24만 원을 손에 쥡니다.

실제로 전체 수급자 103만 가구 가운데 월 소득이 50만 원이 안 되는 가구가 81만 가구에 달합니다.


■ 일하는 만큼 깎여..."가만히 있는 게 돈 버는 것"

적은 돈이라도 버는 만큼 생활에 도움이 되면 좋겠는데 '법'이 그렇지 않습니다. 수급자에게 제공되는 각종 급여는 '소득'을 제외하고 지급됩니다. 예를 들어 생계급여로 50만 원을 받아야 하는 수급자가 일해서 30만 원을 벌었다면, 그 돈을 제외한 20만 원만 '생계급여'로 지급됩니다.

일해도, 일하지 않아도 총소득 50만 원은 똑같습니다.

일하다 다치기라도 하면 낭패입니다. 한 번 소득이 신고되면 '일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수급자 자격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 부동산·금융 재산, '소득'으로 환산

벌이는 없는데 '소득'이 잡히기도 합니다. 자가주택·전세보증금 등과 같은 재산입니다. 어느 수준까지는 봐 줍니다. 대도시는 5,400만 원, 중소도시 3,400만 원, 농어촌 2,900만 원입니다. '기본재산액'이란 명목입니다. 이 금액을 넘어가면 수급자 부동산 가격의 차액만큼이 '소득'으로 환산됩니다.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전국의 단독주택 표준 가격이 1억 3천만 원인 것을 고려하면 이 '기본재산액'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도시에 사는 A씨가 8천만 원짜리 전셋집에 살고 있다면 23만 원이 소득으로 간주됩니다. 역시 그만큼의 생계급여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럼 저소득층은 중소도시나 농어촌으로 가야 할까요? 저소득층이 대도시에 몰리는 이유는 일자리 때문입니다. 사람이 몰리는 곳에 임시직이라도 일자리가 있습니다.

내 집도, 전셋집도 없는 무일푼. 결과적으로 더 열악한 처지에 몰려야 수급자 자격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저축 등 금융재산도 소득으로 환산됩니다.

■ "끝까지 가난해져야 국가가 돌봐줍니다"

기자가 만난 한 70대 노인은 젊은 시절 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크진 않지만 건실한 사업체를 꾸렸습니다. 40대에 아내의 희귀병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괜찮은 인생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아내의 병수발을 위해 사업을 그만두고, 치료를 위해 저축해놓은 돈을 쓰고, 번듯한 집을 팔아 전셋집으로 월세방으로 여관방으로.

돈을 아껴보려고 당뇨 치료를 제대로 못 했고, 결국 합병증으로 두 다리를 잘랐습니다. 장애인이 되고 나니 할 수 있는 일은 더욱 줄었고, 생활은 더욱 곤궁해졌습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창문 하나 없는 쪽방입니다. 이 노인이 잘못한 것일까요?

노인은 "끝까지 가난해져야 국가가 돌아봤다"고 말했습니다.


아동수당·양육수당·기초연금. 국민들에게 지급하는 현금 복지가 넘쳐납니다. 관련 예산은 1년 새 10% 이상 급증했습니다. 반면, 기초생활보장에 투입되는 예산의 비중은 2년 연속 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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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빈곤의 늪]③ 자립 포기해야 가능, ‘가난 증명’
    • 입력 2019-07-20 07:01:12
    취재K
빈곤층과 관련된 기사를 쓰면 '혈세를 축내지 말고 일하라'는 댓글이 종종 눈에 띕니다. 심정은 이해가 갑니다. 내 살림살이도 팍팍한데 여기저기 세금이 쓰이는 게 답답할 만도 합니다.

누구나 당당히 벌어 독립적이면서 여유로운 삶을 살아가길 원합니다. 매우 당연한 욕구입니다. 그러나 '기초생활수급자'가 이 기본적인 욕구를 실현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 고단한 삶의 흔적...질병·장애·노화

'2017년 국민기초생활보장 수급자 현황'을 분석했습니다. 시설 수용자를 제외하면 수급자는 149만 명, 103만 가구입니다. '일 할 나이'인 만 20세~64세에 해당하는 수급자는 67만 명에 불과합니다. 나머지 82만 명 가운데 절반인 43만 명은 65세 이상 노인이고, 35만 명은 초·중·고등학생이며, 그 나머지는 꼬마 어린이들입니다.

가족 구성을 살펴볼까요? 노인·소년소녀가장·장애인·부자·모자 가구 등 이른바 취약계층 가구가 60.8%에 이릅니다.

건강도 좋지 않습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18한국복지패널기초분석' 보고서를 보면, 중위소득 60% 미만의 저소득층 가구원의 73%가 암, 당뇨, 고혈압, 관절염 등 질환을 앓고 있습니다. 중위소득 60% 이상의 일반 가구원은 이 비율이 43%로 확 줄어듭니다.


■ 불안정한 일자리...80%가 '월 소득 50만 원 이하'

이들의 처지를 보면 정상적인 근로 활동을 기대하기 힘듭니다. 안정적인 일자리보다는 임시직, 단순 노무직에 내몰리기 일쑤입니다. 온종일 폐지를 주워 벌어들이는 돈이 단 8천 원. 한 달 꼬박 일해도 24만 원을 손에 쥡니다.

실제로 전체 수급자 103만 가구 가운데 월 소득이 50만 원이 안 되는 가구가 81만 가구에 달합니다.


■ 일하는 만큼 깎여..."가만히 있는 게 돈 버는 것"

적은 돈이라도 버는 만큼 생활에 도움이 되면 좋겠는데 '법'이 그렇지 않습니다. 수급자에게 제공되는 각종 급여는 '소득'을 제외하고 지급됩니다. 예를 들어 생계급여로 50만 원을 받아야 하는 수급자가 일해서 30만 원을 벌었다면, 그 돈을 제외한 20만 원만 '생계급여'로 지급됩니다.

일해도, 일하지 않아도 총소득 50만 원은 똑같습니다.

일하다 다치기라도 하면 낭패입니다. 한 번 소득이 신고되면 '일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자칫하면 수급자 자격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 부동산·금융 재산, '소득'으로 환산

벌이는 없는데 '소득'이 잡히기도 합니다. 자가주택·전세보증금 등과 같은 재산입니다. 어느 수준까지는 봐 줍니다. 대도시는 5,400만 원, 중소도시 3,400만 원, 농어촌 2,900만 원입니다. '기본재산액'이란 명목입니다. 이 금액을 넘어가면 수급자 부동산 가격의 차액만큼이 '소득'으로 환산됩니다.

국토교통부가 발표한 전국의 단독주택 표준 가격이 1억 3천만 원인 것을 고려하면 이 '기본재산액'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대도시에 사는 A씨가 8천만 원짜리 전셋집에 살고 있다면 23만 원이 소득으로 간주됩니다. 역시 그만큼의 생계급여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럼 저소득층은 중소도시나 농어촌으로 가야 할까요? 저소득층이 대도시에 몰리는 이유는 일자리 때문입니다. 사람이 몰리는 곳에 임시직이라도 일자리가 있습니다.

내 집도, 전셋집도 없는 무일푼. 결과적으로 더 열악한 처지에 몰려야 수급자 자격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저축 등 금융재산도 소득으로 환산됩니다.

■ "끝까지 가난해져야 국가가 돌봐줍니다"

기자가 만난 한 70대 노인은 젊은 시절 부러울 게 없었습니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크진 않지만 건실한 사업체를 꾸렸습니다. 40대에 아내의 희귀병이 발견되기 전까지는 괜찮은 인생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아내의 병수발을 위해 사업을 그만두고, 치료를 위해 저축해놓은 돈을 쓰고, 번듯한 집을 팔아 전셋집으로 월세방으로 여관방으로.

돈을 아껴보려고 당뇨 치료를 제대로 못 했고, 결국 합병증으로 두 다리를 잘랐습니다. 장애인이 되고 나니 할 수 있는 일은 더욱 줄었고, 생활은 더욱 곤궁해졌습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창문 하나 없는 쪽방입니다. 이 노인이 잘못한 것일까요?

노인은 "끝까지 가난해져야 국가가 돌아봤다"고 말했습니다.


아동수당·양육수당·기초연금. 국민들에게 지급하는 현금 복지가 넘쳐납니다. 관련 예산은 1년 새 10% 이상 급증했습니다. 반면, 기초생활보장에 투입되는 예산의 비중은 2년 연속 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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