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단체의 젊은 간부는 왜 협박 소포를 보냈나?

입력 2019.07.31 (22:30) 수정 2019.07.31 (2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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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정의당 윤소하 원내대표 앞으로 죽은 새와 흉기가 담긴 괴소포가 배달됐습니다. '태극기 자결단' 명의로 된 협박 편지도 들어 있었습니다. "윤소하, 너는 민주당 2중대 앞잡이로 문재인 좌파독재 특등 홍위병이 됐는데 조심하라. 너는 우리 사정권에 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소포 협박' 극우 인사 소행인 줄 알았는데

기자는 이날 저녁 윤소하 원내대표와 저녁 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괴소포 협박의 충격 탓인지 윤 원내대표는 꽤 빨리 술잔을 비워 갔습니다. 그는 연신 '괜찮다'면서도 '우리 정치가 이렇게 증오의 정치로 가서는 안 된다'며 안타깝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그날 술자리에 동석한 사람들은, 이 협박의 배후가 극우 세력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소포의 배달 주체로 명시된 '태극기 자결단'도 그렇고 협박 편지에 나온 '좌파 독재', '홍위병' 등의 단어들도 극우 인사들이 주로 쓰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0여 일 넘는 수사 끝에 경찰에 붙잡힌 용의자는 '극우'도 '태극기'도 아닌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라는 진보단체 간부 35살 유 모 씨였습니다. 정의당과 윤소하 원내대표는 이번 일이 진보 단체 간부의 소행으로 드러나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당의 공식 논평도 검거 사실이 보도된 지 만 하루가 지난 어제(30일)에야 나왔습니다. '한 점 의혹 없이 수사해 달라, 피의자가 누구든 어떤 동기든 폭력과 테러는 용납할 수 없다'는 짤막한 내용이었습니다.


진보단체 간부가 왜 진보정당 원내대표에게 괴소포를 보냈나

진보 단체의 젊은 간부가 극우 세력을 가장해 진보정당의 원내대표에게 괴소포와 협박 편지를 보낸 사건. 정의당 관계자들은 "짚이는 게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진보 진영에 아직도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 '통합진보당 분당 사태'의 구원(舊怨)입니다.

통합진보당은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NL계)과 진보신당 탈당파(PD계), 국민참여당(참여계), 시민사회단체 출신 등 진보 진영 전반을 아우르는 정당으로 출범했습니다. 당시 민주통합당과 야권 연대를 통해 진보 정당으로선 역대 최다인 13석을 확보하는 성과도 거뒀습니다. 그러나 영광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이내 부정 경선 논란이 불거지며 계파간 극심한 갈등에 휘말렸고, 그해 9월 끝내 당이 쪼개지고 말았습니다. 국민참여당계와 PD계, NL계의 일부(인천연합)는 지금의 정의당으로 뭉쳤고, NL계 주류(경기동부연합, 광주전남연합, 울산연합 등)는 통진당에 잔류했습니다.

2012년 5월 12일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가 주류-비주류 간 폭력 사태로 파행을 빚었다2012년 5월 12일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가 주류-비주류 간 폭력 사태로 파행을 빚었다

분당 과정은 처절했습니다. 특히 분당의 결정적 분수령이 됐던 2012년 5월 12일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는 극심한 폭력으로 얼룩졌습니다. 조준호 공동대표는 머리채를 잡혔고, 유시민 공동대표는 몸싸움 끝에 안경이 부러졌습니다. 이 아수라장의 한복판에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 소속 대학생들이 있었습니다. 통진당 주류인 경기동부연합·광주전남연합과 뜻을 같이 하던 한대련 대학생들이 비주류(국민참여계·PD계)의 의사 진행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폭력 사태가 빚어진 겁니다. 이 한대련은 이번 소포 협박 용의자 유 모 씨가 속한 대진연의 전신입니다.

분당 이후 양 정파의 정치적 운명은 더욱 극적으로 벌어졌습니다. 통진당 탈당파들이 만든 정의당은 어찌 됐든 20대 총선에서 6석을 얻으며 원내 제5당으로서 국정의 한 축이 됐습니다. 반면 통진당 잔류파는 2013년 내란 음모 사건으로 이듬해 헌법재판소 결정에 의해 '당 해산'이라는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고 몰락했습니다. 5년이 흐른 지금은 민중당의 깃발 아래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분당 이후 깊이 팬 골…"윤 원내대표에도 반감 상당"

이런 악연 탓에 지금도 정의당 사람들과 옛 통진당 잔류파 사람들은 같은 진보 진영으로 묶여 있어도 서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습니다. 특히 NL이라는 한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분당을 거치며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게 된 경기동부·광주전남·울산연합과 인천연합의 사이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정의당의 한 관계자는 경기동부·광주전남·울산연합 쪽 인사들이 인천연합 인사들을 가리켜 공공연하게 '배신자', '변절자'라고 비난한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윤소하 원내대표는 바로 인천연합 출신입니다.

정의당 관계자들이 공개적인 언급을 자제하면서도 이번 소포 협박 사건에 혹시 이런 구원(舊怨)이 깔려 있는 건 아닌가 의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정의당 핵심 관계자는 KBS와의 통화에서 "옛 통진당 잔류파가 윤소하 원내대표에게도 내란 음모 사건으로 수감된 이석기 전 의원 구명에 나서 달라고 여러 차례 부탁했지만, 윤 원내대표가 거절한 걸로 안다"면서 "유 씨가 속한 대진련 역시 그런 이유 등으로 정의당과 윤 원내대표에게 반감이 상당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추론은 아직까지는 말 그대로 추론입니다. 아직 범행 동기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고, 유 씨 본인은 경찰 조사에서 묵비권을 행사하며 진술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유 씨가 소속된 대학생진보연합은 '같은 진보 세력인 윤 의원을 유 씨가 협박할 이유가 없다', '조작된 사건이다'라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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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7-31 22:30:37
    • 수정2019-07-31 22:35:18
    취재K
지난 3일, 정의당 윤소하 원내대표 앞으로 죽은 새와 흉기가 담긴 괴소포가 배달됐습니다. '태극기 자결단' 명의로 된 협박 편지도 들어 있었습니다. "윤소하, 너는 민주당 2중대 앞잡이로 문재인 좌파독재 특등 홍위병이 됐는데 조심하라. 너는 우리 사정권에 있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소포 협박' 극우 인사 소행인 줄 알았는데

기자는 이날 저녁 윤소하 원내대표와 저녁 자리를 같이 했습니다. 괴소포 협박의 충격 탓인지 윤 원내대표는 꽤 빨리 술잔을 비워 갔습니다. 그는 연신 '괜찮다'면서도 '우리 정치가 이렇게 증오의 정치로 가서는 안 된다'며 안타깝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그날 술자리에 동석한 사람들은, 이 협박의 배후가 극우 세력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소포의 배달 주체로 명시된 '태극기 자결단'도 그렇고 협박 편지에 나온 '좌파 독재', '홍위병' 등의 단어들도 극우 인사들이 주로 쓰는 말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20여 일 넘는 수사 끝에 경찰에 붙잡힌 용의자는 '극우'도 '태극기'도 아닌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이라는 진보단체 간부 35살 유 모 씨였습니다. 정의당과 윤소하 원내대표는 이번 일이 진보 단체 간부의 소행으로 드러나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당의 공식 논평도 검거 사실이 보도된 지 만 하루가 지난 어제(30일)에야 나왔습니다. '한 점 의혹 없이 수사해 달라, 피의자가 누구든 어떤 동기든 폭력과 테러는 용납할 수 없다'는 짤막한 내용이었습니다.


진보단체 간부가 왜 진보정당 원내대표에게 괴소포를 보냈나

진보 단체의 젊은 간부가 극우 세력을 가장해 진보정당의 원내대표에게 괴소포와 협박 편지를 보낸 사건. 정의당 관계자들은 "짚이는 게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바로 진보 진영에 아직도 깊은 상처로 남아 있는 '통합진보당 분당 사태'의 구원(舊怨)입니다.

통합진보당은 2012년 19대 총선을 앞두고 민주노동당(NL계)과 진보신당 탈당파(PD계), 국민참여당(참여계), 시민사회단체 출신 등 진보 진영 전반을 아우르는 정당으로 출범했습니다. 당시 민주통합당과 야권 연대를 통해 진보 정당으로선 역대 최다인 13석을 확보하는 성과도 거뒀습니다. 그러나 영광은 거기까지였습니다. 이내 부정 경선 논란이 불거지며 계파간 극심한 갈등에 휘말렸고, 그해 9월 끝내 당이 쪼개지고 말았습니다. 국민참여당계와 PD계, NL계의 일부(인천연합)는 지금의 정의당으로 뭉쳤고, NL계 주류(경기동부연합, 광주전남연합, 울산연합 등)는 통진당에 잔류했습니다.

2012년 5월 12일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가 주류-비주류 간 폭력 사태로 파행을 빚었다
분당 과정은 처절했습니다. 특히 분당의 결정적 분수령이 됐던 2012년 5월 12일 경기도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는 극심한 폭력으로 얼룩졌습니다. 조준호 공동대표는 머리채를 잡혔고, 유시민 공동대표는 몸싸움 끝에 안경이 부러졌습니다. 이 아수라장의 한복판에 21세기 한국대학생연합 소속 대학생들이 있었습니다. 통진당 주류인 경기동부연합·광주전남연합과 뜻을 같이 하던 한대련 대학생들이 비주류(국민참여계·PD계)의 의사 진행에 항의하는 과정에서 폭력 사태가 빚어진 겁니다. 이 한대련은 이번 소포 협박 용의자 유 모 씨가 속한 대진연의 전신입니다.

분당 이후 양 정파의 정치적 운명은 더욱 극적으로 벌어졌습니다. 통진당 탈당파들이 만든 정의당은 어찌 됐든 20대 총선에서 6석을 얻으며 원내 제5당으로서 국정의 한 축이 됐습니다. 반면 통진당 잔류파는 2013년 내란 음모 사건으로 이듬해 헌법재판소 결정에 의해 '당 해산'이라는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고 몰락했습니다. 5년이 흐른 지금은 민중당의 깃발 아래 간신히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분당 이후 깊이 팬 골…"윤 원내대표에도 반감 상당"

이런 악연 탓에 지금도 정의당 사람들과 옛 통진당 잔류파 사람들은 같은 진보 진영으로 묶여 있어도 서로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습니다. 특히 NL이라는 한 뿌리에서 출발했지만 분당을 거치며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게 된 경기동부·광주전남·울산연합과 인천연합의 사이는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정의당의 한 관계자는 경기동부·광주전남·울산연합 쪽 인사들이 인천연합 인사들을 가리켜 공공연하게 '배신자', '변절자'라고 비난한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윤소하 원내대표는 바로 인천연합 출신입니다.

정의당 관계자들이 공개적인 언급을 자제하면서도 이번 소포 협박 사건에 혹시 이런 구원(舊怨)이 깔려 있는 건 아닌가 의심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정의당 핵심 관계자는 KBS와의 통화에서 "옛 통진당 잔류파가 윤소하 원내대표에게도 내란 음모 사건으로 수감된 이석기 전 의원 구명에 나서 달라고 여러 차례 부탁했지만, 윤 원내대표가 거절한 걸로 안다"면서 "유 씨가 속한 대진련 역시 그런 이유 등으로 정의당과 윤 원내대표에게 반감이 상당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추론은 아직까지는 말 그대로 추론입니다. 아직 범행 동기는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고, 유 씨 본인은 경찰 조사에서 묵비권을 행사하며 진술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유 씨가 소속된 대학생진보연합은 '같은 진보 세력인 윤 의원을 유 씨가 협박할 이유가 없다', '조작된 사건이다'라는 주장을 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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