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싸움은 시민이 하겠다”는데…숟가락 얹는 정치권 속내는?

입력 2019.08.07 (17:58) 수정 2019.08.07 (2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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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싸움은 우리가 한다. 정부는 정공법으로 나가라"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로 일본 관련 불매 운동이 막 불붙기 시작할 무렵인 지난달 11일,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글의 제목입니다.

글의 내용을 간단히 옮기면 이렇습니다.

글쓴이는 "나라가 불매 운동을 선동한 적 없다, 여당이 그런 운동을 시사한 바도 없다"면서 "국민 하나하나가 빡쳐서(화가 나서) 스스로 하는 불매운동이다."라고 운을 뗐습니다.

이어 "유치한 놀음이라고, 오래 못 갈 것이라고 벌써 비아냥거리고 공격이 들어오고 있지만, 이번엔 다르다"면서 "이 일련의 사태가 위안부 재협상과 일제 강점기 징용 관련 배상 판결과 관련한 보복임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것은 국가와 국민의 정신·정체성과 관련된 일로 우리 국민이 양보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그러므로 적당히 협상하거나 흐지부지 타결할 일이 아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글쓴이는 그러면서 "일본 여행 안 가고, 일본 맥주 안 사고, 푼돈이고 찌질해 보일지 모르지만 누가 시킨 적 없이 국민 내부에서 일어난 개싸움이다, 개싸움은 국민들이 할 테니 정부는 정정당당하게 WTO에 제소도 하고 국제사회에 일본의 후안무치함과 편협함을 널리 알려달라, 외교적으로 당당하게 나가라"고 당부하며 글을 맺었습니다.

이 글이 짚은 대로 일본 관련 불매 운동은 우리 사회에서 조용히 확산하며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개싸움'에 숟가락 얹는 정치인들

그런데 이 '개싸움'이 큰 호응을 얻자 숟가락을 얹고 싶은 사람들이 속속 등장했습니다. 주로 정치인들입니다.

서울 중구에서는 6일, 관내 주요 도로에 태극기와 함께 '가지 않습니다·사지 않습니다.'라는 문구를 포함한 '노 재팬(No Japan)' 배너기가 내걸렸다 회수되는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민주당 소속인 서양호 구청장 지시의 따른 것이었습니다.

서울 중구청 관계자가 6일 ‘노(보이콧) 재팬’·‘가지 않습니다.’·‘사지 않습니다.’라고 적힌 배너기를 설치하고 있다.서울 중구청 관계자가 6일 ‘노(보이콧) 재팬’·‘가지 않습니다.’·‘사지 않습니다.’라고 적힌 배너기를 설치하고 있다.

역시 민주당 소속인 문석진 서울 서대문구청장은 같은 날 일본 경제 보복 조치 직원 규탄대회를 열고 구청에서 사용 중인 일본제 사무용품을 타임캡슐에 넣은 후 자물쇠를 잠그는 퍼포먼스를 했고, 이선호 울주군수는 울산 언양의 3·1 운동 사적비 앞에서 일본 정부 규탄 1인 시위에 나섰습니다.

민주당 일본경제침략대책특위 최재성 위원장은 도쿄에서 기준치 이상의 방사능이 검출됐다며 도쿄를 포함해 일본 여행에 대한 금지 조치 필요성을 주장했습니다.

정봉주 전 의원은 민주당 김현 제1 사무부총장·최민희 전 의원과 함께 '일본 가면 KOPINA(코피나)'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찍은 사진을 자신의 SNS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셔츠엔 코피를 터뜨리는 정봉주 전 의원 그림과 'go japan, your nose bleeding(일본에 가면 당신 코에서 피가 난다)'등의 문구가 담겼는데 한일 갈등을 지나치게 희화화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정 의원 측은 논란이 일자 해당 사진을 SNS에서 내리고 이 캠페인이 김 부총장·최 전 의원과는 무관하다고 해명했습니다.

사진 출처 : 정봉주 전 의원 페이스북사진 출처 : 정봉주 전 의원 페이스북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에 여행을 가지 않고 일본 물건을 사지 않는 것과 지방정부나 여당이 나서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입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불매 운동이 '개싸움', 즉 게릴라전이라면 정부·여당이 나서는 모양새의 불매 운동은 일본 측의 또 다른 반발을 불러 전면전 내지 총력전으로 비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려 탓인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서울 중구청의 '노 재팬' 배너기 설치를 중단해달라는 청원 글이 올라왔고 짧은 시간에 2만 명 가까운 사람이 동참했습니다.

청원자는 "불매 운동에 대해 찬성한다, 국민들이 힘을 합쳐 일본 기업에 피해를 주고 그걸 바탕으로 일본에서 무역 도발에 대한 자각과 반성이 일어나고 그래야 일본과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다고 본다"면서도 "서울 중심에 저런 깃발이 걸리면 불매 운동을 정부가 조장하고 있다는 그림이 생길 것이며, 이는 향후 정부의 국제 여론전에도 나쁜 영향을 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NO 아베'와 'NO JAPAN' 구분해야 …여당서도 비판 목소리

정치권에서도 비판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바른미래당 채이배 정책위의장은 오늘 당 최고위 발언을 통해 "정치권이 현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기를 당부한다, 감히 나서서 설레발 치지 말기 바란다"고 비판했습니다.

민주당 관계자도 "불매 운동을 계기로 자기 이름을 알리고 싶어하는 정치인들이 있고, 당내에서도 이들의 '튀는 행동'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있는 게 사실"이라면서 "국익보다 자기 정치를 앞세우는 행동"이라고 꼬집었습니다.

정치권은 문제 해결에 집중해야 할 때라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원내대표를 지낸 민주당 우상호 의원은 KBS와 통화에서 "아베 정부와 싸우는 것이지, 일본 국민과 싸움을 하자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면서 "국민 감정은 그럴 수 있는데 정치권이나 정부는 좀 더 냉정해야 한다"고 주문했습니다.

우 의원은 "싸움은 원래 흥분하는 쪽이 지게 되어 있다"면서 "말만 무성하게 한다고 이기는 게 아니다."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민주당 박광온 최고위원도 이번 사태의 해법을 얘기하며 "'개싸움은 우리가 할 테니 정부는 정공법으로 나가라'는 시민들의 주문에 이미 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부·여당이 불매 운동에 편승해 '일본 때리기'에 몰두할 게 아니라, 불매 운동으로 표출된 시민들의 극일 의지와 에너지를 바탕으로 한일 간의 관계 재설정을 어떻게 해나갈지 비전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지적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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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싸움은 시민이 하겠다”는데…숟가락 얹는 정치권 속내는?
    • 입력 2019-08-07 17:58:07
    • 수정2019-08-07 20:45:29
    취재K
"개싸움은 우리가 한다. 정부는 정공법으로 나가라"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로 일본 관련 불매 운동이 막 불붙기 시작할 무렵인 지난달 11일,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큰 반향을 일으킨 글의 제목입니다.

글의 내용을 간단히 옮기면 이렇습니다.

글쓴이는 "나라가 불매 운동을 선동한 적 없다, 여당이 그런 운동을 시사한 바도 없다"면서 "국민 하나하나가 빡쳐서(화가 나서) 스스로 하는 불매운동이다."라고 운을 뗐습니다.

이어 "유치한 놀음이라고, 오래 못 갈 것이라고 벌써 비아냥거리고 공격이 들어오고 있지만, 이번엔 다르다"면서 "이 일련의 사태가 위안부 재협상과 일제 강점기 징용 관련 배상 판결과 관련한 보복임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그것은 국가와 국민의 정신·정체성과 관련된 일로 우리 국민이 양보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다, 그러므로 적당히 협상하거나 흐지부지 타결할 일이 아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글쓴이는 그러면서 "일본 여행 안 가고, 일본 맥주 안 사고, 푼돈이고 찌질해 보일지 모르지만 누가 시킨 적 없이 국민 내부에서 일어난 개싸움이다, 개싸움은 국민들이 할 테니 정부는 정정당당하게 WTO에 제소도 하고 국제사회에 일본의 후안무치함과 편협함을 널리 알려달라, 외교적으로 당당하게 나가라"고 당부하며 글을 맺었습니다.

이 글이 짚은 대로 일본 관련 불매 운동은 우리 사회에서 조용히 확산하며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습니다.

'개싸움'에 숟가락 얹는 정치인들

그런데 이 '개싸움'이 큰 호응을 얻자 숟가락을 얹고 싶은 사람들이 속속 등장했습니다. 주로 정치인들입니다.

서울 중구에서는 6일, 관내 주요 도로에 태극기와 함께 '가지 않습니다·사지 않습니다.'라는 문구를 포함한 '노 재팬(No Japan)' 배너기가 내걸렸다 회수되는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민주당 소속인 서양호 구청장 지시의 따른 것이었습니다.

서울 중구청 관계자가 6일 ‘노(보이콧) 재팬’·‘가지 않습니다.’·‘사지 않습니다.’라고 적힌 배너기를 설치하고 있다.
역시 민주당 소속인 문석진 서울 서대문구청장은 같은 날 일본 경제 보복 조치 직원 규탄대회를 열고 구청에서 사용 중인 일본제 사무용품을 타임캡슐에 넣은 후 자물쇠를 잠그는 퍼포먼스를 했고, 이선호 울주군수는 울산 언양의 3·1 운동 사적비 앞에서 일본 정부 규탄 1인 시위에 나섰습니다.

민주당 일본경제침략대책특위 최재성 위원장은 도쿄에서 기준치 이상의 방사능이 검출됐다며 도쿄를 포함해 일본 여행에 대한 금지 조치 필요성을 주장했습니다.

정봉주 전 의원은 민주당 김현 제1 사무부총장·최민희 전 의원과 함께 '일본 가면 KOPINA(코피나)'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고 찍은 사진을 자신의 SNS에 올리기도 했습니다.

셔츠엔 코피를 터뜨리는 정봉주 전 의원 그림과 'go japan, your nose bleeding(일본에 가면 당신 코에서 피가 난다)'등의 문구가 담겼는데 한일 갈등을 지나치게 희화화하는 것 아니냐는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정 의원 측은 논란이 일자 해당 사진을 SNS에서 내리고 이 캠페인이 김 부총장·최 전 의원과는 무관하다고 해명했습니다.

사진 출처 : 정봉주 전 의원 페이스북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에 여행을 가지 않고 일본 물건을 사지 않는 것과 지방정부나 여당이 나서는 것은 엄연히 다른 문제입니다.

시민들의 자발적인 불매 운동이 '개싸움', 즉 게릴라전이라면 정부·여당이 나서는 모양새의 불매 운동은 일본 측의 또 다른 반발을 불러 전면전 내지 총력전으로 비화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려 탓인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서울 중구청의 '노 재팬' 배너기 설치를 중단해달라는 청원 글이 올라왔고 짧은 시간에 2만 명 가까운 사람이 동참했습니다.

청원자는 "불매 운동에 대해 찬성한다, 국민들이 힘을 합쳐 일본 기업에 피해를 주고 그걸 바탕으로 일본에서 무역 도발에 대한 자각과 반성이 일어나고 그래야 일본과 관계를 정상화할 수 있다고 본다"면서도 "서울 중심에 저런 깃발이 걸리면 불매 운동을 정부가 조장하고 있다는 그림이 생길 것이며, 이는 향후 정부의 국제 여론전에도 나쁜 영향을 줄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NO 아베'와 'NO JAPAN' 구분해야 …여당서도 비판 목소리

정치권에서도 비판 목소리가 나왔습니다.

바른미래당 채이배 정책위의장은 오늘 당 최고위 발언을 통해 "정치권이 현 사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기를 당부한다, 감히 나서서 설레발 치지 말기 바란다"고 비판했습니다.

민주당 관계자도 "불매 운동을 계기로 자기 이름을 알리고 싶어하는 정치인들이 있고, 당내에서도 이들의 '튀는 행동'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있는 게 사실"이라면서 "국익보다 자기 정치를 앞세우는 행동"이라고 꼬집었습니다.

정치권은 문제 해결에 집중해야 할 때라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원내대표를 지낸 민주당 우상호 의원은 KBS와 통화에서 "아베 정부와 싸우는 것이지, 일본 국민과 싸움을 하자는 것은 아니지 않으냐"면서 "국민 감정은 그럴 수 있는데 정치권이나 정부는 좀 더 냉정해야 한다"고 주문했습니다.

우 의원은 "싸움은 원래 흥분하는 쪽이 지게 되어 있다"면서 "말만 무성하게 한다고 이기는 게 아니다."라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민주당 박광온 최고위원도 이번 사태의 해법을 얘기하며 "'개싸움은 우리가 할 테니 정부는 정공법으로 나가라'는 시민들의 주문에 이미 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부·여당이 불매 운동에 편승해 '일본 때리기'에 몰두할 게 아니라, 불매 운동으로 표출된 시민들의 극일 의지와 에너지를 바탕으로 한일 간의 관계 재설정을 어떻게 해나갈지 비전과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는 지적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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