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속 독립운동]① 일제가 날조한 김구의 죄는 ‘강도미수’

입력 2019.08.12 (07:00) 수정 2019.08.14 (08:01)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KBS는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국가기록원에 등재돼 있는 일제시대 판결문을 통해 김구나 유관순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독립운동가들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소소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민초들과 외국인까지, 우리에게 그동안 잘 안 알려졌던 독립운동가들의 국권 회복 노력과 고초를 재조명하는 연속보도를 마련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이전 김구의 첫 형사 재판은 '살인'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백범 김구의 대표적인 형사 사건은 청년 시절 일본인을 살해한 일입니다. 1896년 3월 8일,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 지역의 한 여관에서 만난 일본인 쓰치다 조료를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자객으로 생각하고 살해합니다.

재판부는 김구를 강도살인죄로 교수형을 내렸지만, 당시 법률상 사형에 해당하는 판결은 국왕의 확인절차가 있어야 형을 집행할 수 있었는데 고종이 사형에 대한 칙령을 유보해 김구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김구는 백범일지에 "대군주(고종)는 그것(공술)을 읽자 즉시 어전회의를 열고 의결을 한 결과, 국제관계니만큼 일단 생명이나 살리고 보자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국가기록원에 등재돼 있는 1911년 백범 김구 징역형 판결문 원본국가기록원에 등재돼 있는 1911년 백범 김구 징역형 판결문 원본

황해도에서 군자금 모집하려던 '안악 사건' 공범으로 연루

일본에 국권을 강탈당한 이후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김구는 이른바 '안악 사건'으로 이번에는 대한제국이 아닌 일제의 재판정에 서게 됩니다.

1910년 11월,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인 안명근이 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기 위해 황해도 안악 지역에서 부호들을 상대로 설립자금을 모집하려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김구를 포함한 독립운동가들이 160여 명이 대거 검거돼 큰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당시 판결문을 보면 김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또 일제가 어떻게 혐의를 뒤집어 씌웠는지 알 수 있습니다.

황해도 장련 광진학교 교사시절 김구는 애국 청년 양성을 위해 교편을 잡고 이후 황해도 양산학교 교장직을 맡게 된다.황해도 장련 광진학교 교사시절 김구는 애국 청년 양성을 위해 교편을 잡고 이후 황해도 양산학교 교장직을 맡게 된다.

"김구는 지역의 명망 높은 인사…일제의 우월한 지위 싫어해"

「피고 김구는 황해도의 사립학교 교사로 그 지역에서 명성과 인망이 있는 자인데, 일찍이 일본 제국이 한국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을 싫어하여 이를 벗어나려는 사상을 품었다. 이들은 조선 본토로부터 다수의 사람을 불러모아, 중국 영토의 서간도 등에 이주시켜 국가적 조직을 가진 대단체를 형성하고, 청년과 자제들에게 문무의 교육을 받게 하여 기회를 보아 한국의 독립을 회복할 것을 꾀하였다.」

1911년 당시, 일제의 판결문에는 김구를 황해도 지역의 인망 높은 교육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제 김구는 애국 청년들을 양성하기 위해 양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동시에 해외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했습니다. 김구는 백범 일지에 "우리는 서울에 은밀히 도독부를 두어 전국을 다스리고 만주에 이민계획을 실시함과 아울러 무관학교를 설립, 장교를 양성하여 광복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고 각 지방대표를 선정해 15일 내에 황해도에서는 대표인 내가 15만 원(당시 교사 월급 24원)을 모금해 만주에 있는 동지에게 보내기로 했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일제가 ‘안악 사건’에 관련된 황해도 독립운동가 인사들을 대규모 검거해 연행하고 있다.일제가 ‘안악 사건’에 관련된 황해도 독립운동가 인사들을 대규모 검거해 연행하고 있다.

"권총 들고 부자들을 약탈하려다 실패"…김구에 강도 미수 혐의 적용

김구를 붙잡은 일제는 김구의 형량을 어떻게 늘리지 고심했습니다. 단순 보안법 위반으로는 최대 징역 2년밖에는 처벌할 수 없기 때문에 안악 지역에서 일어난 군자금 모집 강도 사건에 김구를 포함시킵니다. 김구가 황해도 지역 부자들의 돈을 빼앗으려고 권총을 들고 모의했다가 실패했다는 혐의입니다. 이와 관련된 판결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평소 김구와 친분이 있던 피고 안명근은 무리를 모아 주민 중에 자산가가 많은 황해도 안악 읍내에 난입해 군자금을 위한 재물을 빼앗으려고 모의했다. 김구 등 일동은 그 행동을 돕기 위해 읍내 자산가의 이름과 자산 규모, 헌병대의 위치, 거주 일본인 인원 수를 조사했다. 그리고 황해도의 양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김구 등 9명의 피고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였다. 이에 황해도 신천군에서 동지 수십병이 총기를 휴대하고 원조하러 올것이라고 말하며 찬성을 구하자, 김구 등 모두가 이에 동의하였다.」

「그날 밤 안명근이 11시쯤 동지들을 모아 권총을 휴대하고 약속한 장소로 갔고, 김구 등도 약속한 것과 같이 집합했지만 모인 사람이 겨우 몇 명에 불과했다. 또한 모인 사람들 가운데 안악 읍내의 부호들은 지금 현금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어 다음 범행 날을 정하고, 그날 밤은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후 우두머리인 피고 안명근이 피해자들의 밀고로 체포되었기 때문에 피고 김구 등은 끝내 강도를 실행하지는 못했다.」

김구는 자서전인 백범일지에 당시 일제가 증거를 날조해 무리한 징형을 내렸던 사실을 기록했다.김구는 자서전인 백범일지에 당시 일제가 증거를 날조해 무리한 징형을 내렸던 사실을 기록했다.

김구는 당일 황해도가 아닌 서울에…날조된 강도 미수 혐의

강도 미수죄는 일제가 잔혹한 고문으로 허구 증언을 강요해 만들어진 혐의입니다. 김구는 회고록에서 "나는 안명근이 안악에서 부호들을 습격하기 위해 모였다고 한 날. 서울에 신민회 비밀회의로 참석해 있었다. 그런데 일제는 내 제자를 고문해 나와 안명근이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고 거짓 실토하게 했다. 나는 태연히 웃으며 '그대들은 5백여 리나 떨어진 땅에 같은 날 같은 때에 두 곳 회의에 다 참석한 김구가 되게 하느라 매우 수고롭겠습니다' 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충칭 임시정부 청사에서 찍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 기념 사진충칭 임시정부 청사에서 찍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 기념 사진

김구는 결백을 주장했지만 결국 이 사건으로 보안법 위반과 강도 미수 등을 적용 받아 징역 15년형을 받았고 옥고를 치르다 4년 뒤인 1915년 가출옥됐습니다. 김구와 함께 억울한 혐의를 받은 독립운동가 17명도 종신형을 비롯해 무거운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결과, 신민회를 비롯한 국내의 비밀결사 조직은 해체되고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이후 김구는 중국 상하이로 떠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틀을 세우게 됩니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판결문속 독립운동]① 일제가 날조한 김구의 죄는 ‘강도미수’
    • 입력 2019-08-12 07:00:30
    • 수정2019-08-14 08:01:27
    취재K
KBS는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국가기록원에 등재돼 있는 일제시대 판결문을 통해 김구나 유관순처럼 우리에게 익숙한 독립운동가들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소소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던 민초들과 외국인까지, 우리에게 그동안 잘 안 알려졌던 독립운동가들의 국권 회복 노력과 고초를 재조명하는 연속보도를 마련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이전 김구의 첫 형사 재판은 '살인'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백범 김구의 대표적인 형사 사건은 청년 시절 일본인을 살해한 일입니다. 1896년 3월 8일, 김구는 황해도 치하포 지역의 한 여관에서 만난 일본인 쓰치다 조료를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 자객으로 생각하고 살해합니다.

재판부는 김구를 강도살인죄로 교수형을 내렸지만, 당시 법률상 사형에 해당하는 판결은 국왕의 확인절차가 있어야 형을 집행할 수 있었는데 고종이 사형에 대한 칙령을 유보해 김구는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김구는 백범일지에 "대군주(고종)는 그것(공술)을 읽자 즉시 어전회의를 열고 의결을 한 결과, 국제관계니만큼 일단 생명이나 살리고 보자 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국가기록원에 등재돼 있는 1911년 백범 김구 징역형 판결문 원본
황해도에서 군자금 모집하려던 '안악 사건' 공범으로 연루

일본에 국권을 강탈당한 이후 독립운동에 매진하던 김구는 이른바 '안악 사건'으로 이번에는 대한제국이 아닌 일제의 재판정에 서게 됩니다.

1910년 11월,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인 안명근이 간도에 무관학교를 세우기 위해 황해도 안악 지역에서 부호들을 상대로 설립자금을 모집하려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김구를 포함한 독립운동가들이 160여 명이 대거 검거돼 큰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당시 판결문을 보면 김구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또 일제가 어떻게 혐의를 뒤집어 씌웠는지 알 수 있습니다.

황해도 장련 광진학교 교사시절 김구는 애국 청년 양성을 위해 교편을 잡고 이후 황해도 양산학교 교장직을 맡게 된다.
"김구는 지역의 명망 높은 인사…일제의 우월한 지위 싫어해"

「피고 김구는 황해도의 사립학교 교사로 그 지역에서 명성과 인망이 있는 자인데, 일찍이 일본 제국이 한국에 대해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것을 싫어하여 이를 벗어나려는 사상을 품었다. 이들은 조선 본토로부터 다수의 사람을 불러모아, 중국 영토의 서간도 등에 이주시켜 국가적 조직을 가진 대단체를 형성하고, 청년과 자제들에게 문무의 교육을 받게 하여 기회를 보아 한국의 독립을 회복할 것을 꾀하였다.」

1911년 당시, 일제의 판결문에는 김구를 황해도 지역의 인망 높은 교육자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실제 김구는 애국 청년들을 양성하기 위해 양산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며 동시에 해외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비밀결사를 조직했습니다. 김구는 백범 일지에 "우리는 서울에 은밀히 도독부를 두어 전국을 다스리고 만주에 이민계획을 실시함과 아울러 무관학교를 설립, 장교를 양성하여 광복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고 각 지방대표를 선정해 15일 내에 황해도에서는 대표인 내가 15만 원(당시 교사 월급 24원)을 모금해 만주에 있는 동지에게 보내기로 했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일제가 ‘안악 사건’에 관련된 황해도 독립운동가 인사들을 대규모 검거해 연행하고 있다.
"권총 들고 부자들을 약탈하려다 실패"…김구에 강도 미수 혐의 적용

김구를 붙잡은 일제는 김구의 형량을 어떻게 늘리지 고심했습니다. 단순 보안법 위반으로는 최대 징역 2년밖에는 처벌할 수 없기 때문에 안악 지역에서 일어난 군자금 모집 강도 사건에 김구를 포함시킵니다. 김구가 황해도 지역 부자들의 돈을 빼앗으려고 권총을 들고 모의했다가 실패했다는 혐의입니다. 이와 관련된 판결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평소 김구와 친분이 있던 피고 안명근은 무리를 모아 주민 중에 자산가가 많은 황해도 안악 읍내에 난입해 군자금을 위한 재물을 빼앗으려고 모의했다. 김구 등 일동은 그 행동을 돕기 위해 읍내 자산가의 이름과 자산 규모, 헌병대의 위치, 거주 일본인 인원 수를 조사했다. 그리고 황해도의 양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김구 등 9명의 피고에게 자신의 계획을 말하였다. 이에 황해도 신천군에서 동지 수십병이 총기를 휴대하고 원조하러 올것이라고 말하며 찬성을 구하자, 김구 등 모두가 이에 동의하였다.」

「그날 밤 안명근이 11시쯤 동지들을 모아 권총을 휴대하고 약속한 장소로 갔고, 김구 등도 약속한 것과 같이 집합했지만 모인 사람이 겨우 몇 명에 불과했다. 또한 모인 사람들 가운데 안악 읍내의 부호들은 지금 현금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어 다음 범행 날을 정하고, 그날 밤은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후 우두머리인 피고 안명근이 피해자들의 밀고로 체포되었기 때문에 피고 김구 등은 끝내 강도를 실행하지는 못했다.」

김구는 자서전인 백범일지에 당시 일제가 증거를 날조해 무리한 징형을 내렸던 사실을 기록했다.
김구는 당일 황해도가 아닌 서울에…날조된 강도 미수 혐의

강도 미수죄는 일제가 잔혹한 고문으로 허구 증언을 강요해 만들어진 혐의입니다. 김구는 회고록에서 "나는 안명근이 안악에서 부호들을 습격하기 위해 모였다고 한 날. 서울에 신민회 비밀회의로 참석해 있었다. 그런데 일제는 내 제자를 고문해 나와 안명근이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고 거짓 실토하게 했다. 나는 태연히 웃으며 '그대들은 5백여 리나 떨어진 땅에 같은 날 같은 때에 두 곳 회의에 다 참석한 김구가 되게 하느라 매우 수고롭겠습니다' 하였다"고 적고 있습니다.

충칭 임시정부 청사에서 찍은 대한민국임시정부 환국 기념 사진
김구는 결백을 주장했지만 결국 이 사건으로 보안법 위반과 강도 미수 등을 적용 받아 징역 15년형을 받았고 옥고를 치르다 4년 뒤인 1915년 가출옥됐습니다. 김구와 함께 억울한 혐의를 받은 독립운동가 17명도 종신형을 비롯해 무거운 징역형을 받았습니다.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탄압한 결과, 신민회를 비롯한 국내의 비밀결사 조직은 해체되고 해외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이후 김구는 중국 상하이로 떠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틀을 세우게 됩니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