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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태훈의 시사본부] 김복동 할머니 생전 인터뷰 “미안하고 또 고맙습니다”
입력 2019.08.14 (16:09) 수정 2019.08.14 (19:53) 오태훈의 시사본부
[오태훈의 시사본부] 김복동 할머니 생전 인터뷰 “미안하고 또 고맙습니다”
- 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피해 사실 공개적으로 증언
- 그 뒤로 92년 일본 총리 방한을 계기로, 1월 8일에 첫 수요시위 시작
- 수요시위는 그 뒤로 27년 7개월 동안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늘 1400회 맞아
- 위안부에 대한 문제제기 시작, 그 뒤로 증언 쏟아져 나와 김복동 할머니도 그 중 한 분
- 김복동 할머니 생전 인터뷰 “더운데 매주 수요시위 나와 주셔서 참 고맙고 미안해.”
- 위안부 문제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인 기자, 지금도 일본 우익의 협박에 시달려
- 후소샤 “위안부 거론은, 국제적인 반일세력이 전개하는 거대한 일본 파멸의 음모.” 주장
- 그러나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증거는 여러 일본 관련 문서를 통해서도 이미 밝혀져
- 국내 극우 세력 ‘성매매’ 언급하면서 일본 우익과 같은 주장 펼치고 있어

■ 프로그램명 : 오태훈의 시사본부
■ 코너명 : 김성완의 뉴스쏘다
■ 방송시간 : 8월 14일(수요일) 12:20~14:00 KBS 1라디오
■ 출연자 : 김성완 시사평론가



▷ 오태훈 : 앞서 1400회를 맞는 수요집회 현장 연결해서 현장의 분위기도 들었습니다만 27년 동안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촉구해온 집회였습니다. 참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그럼에도 일본은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위안부 기림의 날에 대해서 저희가 자세히 짚어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싶어서요. <김성완의 뉴스쏘다>에서 정리하는 시간 갖겠습니다. 시사평론가 김성완 씨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 김성완 : 안녕하세요?

▷ 오태훈 : 마침 조금 전에 문재인 대통령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메시지를 발표했죠?

▶ 김성완 : 네, 오늘 SNS에 글을 올렸는데요. “28년 전, 오늘 김학순 할머니가 ‘내가 살아있는 증거입니다.’라는 말씀으로 오랜 침묵의 벽을 깼다.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존엄과 명예를 행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회와 공유하고 확산해나가겠다.” 이렇게 밝혔습니다. 아무래도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 이후에 위안부 기림의 날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또 2015년 박근혜 정부 시절에 한일 위안부 합의가 있었지만 사실상 파기가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연장선에 있어서 문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이 드러난 그런 메시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 오태훈 : 28년 전 오늘 1991년 8월 14일, 수요시위라든가 위안부 기림의 날 모두 김학순 할머니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잖아요, 우리가.

▶ 김성완 : 맞습니다. 1991년 8월 14일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당시 67세였던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는 처음으로 피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증언한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이 의미가 있는 것이고요. 이 일을 계기로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이 잇따랐고요. 하지만 일본 정부는 군 위안부를 운영한 사실을 계속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가 방한을 하게 되는데요. 그 방한을 계기로 그러니까 1992년 1월 8일 수요시위가 처음 시작이 됐습니다.

▷ 오태훈 : 그러니까 1회 수요집회가 열린 것 아니에요? 92년 1월에.

▶ 김성완 : 맞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27년 7개월 동안 지금 계속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한 28년 됐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고요. 그러니까 그 발단은 다 김학순 할머님으로부터 시작이 됐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거죠.

▷ 오태훈 : 그러니까 김학순 할머니가 첫 공개 증언, 기자회견을 통해서 밝힌 내용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잖아요.

▶ 김성완 : 그렇죠. 당시에는 위안부라는 존재조차 잘 몰랐던 시절이었어요.

▷ 오태훈 : 당시에 MBC 뉴스에서 이걸 한 것을 봤거든요. 정신대라는 단어를 쓰더라고요.

▶ 김성완 : 맨처음에 정신대라고 표현했어요. 그래서 그 당시에 한국정신대연구회,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 지금 정대협이라고 하는 단체가 바로 그 무렵쯤에 나온 거예요. 그런데 이게 시작은 1988년 정도부터였어요. 그러니까 여성 단체들이 당시 민주화 이후부터 시작된 얘기인데요. 여성 단체들이 중심이 돼서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1990년부터는 한국정신대연구회하고 정신대대책협의회가 조직이 됐고요. 그렇지만 사료가 많지 않아서 피해자가 또 나서지도 않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증명할 것이냐? 이 문제가 남아 있었던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딱 공개적인 자리에 등장한 거죠. 그러니까 과거 내가 이런 피해를 겪었다고 얘기를 하고 나니까 그 파장이 클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런데 이것은 국내는 물론이고 네덜란드나 타이완 비롯해서 일본이 해외에 주둔하고 점령을 했던 곳들 그리고 거기에서 관련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입으로부터 피해 사실이 막 증언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거죠. 그리고 국내에서는 그렇게 해서 피해자로 나타나신 분 중에 한 분이 바로 김복동 할머니입니다. 여기서 김복동 할머니의 생전 목소리를 한번 들어볼까요?

▶ 김복동 :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라, 옛날 말이 있잖아요. 정부하고 우리가 싸우는 거지, 국민들하고 싸우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우리 교포들도 많이 살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많아서 내가 밑천이 짧아서 조금이라도 돌봐주지만 그 돌보는 것은 이것하고는 관계가 없잖아요. 하고 싶은 말은 하루라도 빨리 해결이 나야 국민들도 마음을 놓을 텐데 이 더운 데도 불구하고 매주 나오시는 것 볼 때면 참으로 고맙고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내가 당한 일같이 국민들이 나와서 환영을 해주고 또 학생들이랑 전체적으로 나와서 후원을 해주니까 늙어가는 우리들에게 무슨 힘이 있습니까? 젊은 사람들 믿고. 내가 수요집회 안 나간 지가 오래됩니다. 미안하고 우리들 일에 국민들 보기에 진짜 미안하고요, 고맙고 그렇습니다.

▷ 오태훈 : 바로 1년 전이었습니다. 저희 시사본부에서 광복절에 할머니와 인터뷰를 했고 또 이제 더 이상 할머니 육성을 들을 수 없는 상황이 됐네요. 1년 사이에 정말 여러 가지 감회가 드는데 참...

▶ 김성완 : 많은 분들이 계속 돌아가고 계시는 거죠. 그게 너무 안타깝고 오늘 이용수 할머니하고 김경애 할머님이 나왔다고 말씀하시는데 지금 스무 분밖에 생존자가 남아 계시지 않잖아요. 그리고 대부분 병환 중이시거나 아니면 치매에 걸리신 분들도 계셔서 더 이상 증언을 하려고 해도 증언할 수 없는 상황이거든요. 그런 부분이 안타깝습니다.

▷ 오태훈 : 앞서서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대표 같은 경우에는 “이분들이 살아계실 때가 일본이 사죄하고 속죄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다, 빨리해야 된다.”고 계속해서 말씀하시는데.

▶ 김성완 : 김학순 할머님은 마지막까지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을 제가 또 오늘 보고 왔거든요. 끝까지 일왕이라는 표현을 쓰셨어요. 일왕이라고 얘기하시고 “일왕한테 내가 끝까지 사죄를 받았으면 좋겠다.” 이런 말씀하셨는데 결국 그 뜻은 이루지 못한 상황이죠.


▷ 오태훈 : 하지만 그 할머님의 용기가 지금의 상황까지 오지 않았나, 그런 결정적인 계기고 씨앗이 되지 않았나 싶은데 김학순 할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 김성완 : 너무 기구한 인생이어서 제가 다 말씀 드리기는 그런데요. 축약해서 말씀 드리면 1924년 중국, 우리가 길림이라고 부르는 지린에서 태어나셨어요. 그러니까 100일도 되기 전에 아버지가 사망을 했고요. 어머니가 자녀들이 있으니까 남편이 숨진 상태였기 때문에 평양으로 다시 되돌아옵니다. 그리고 굉장히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는데요. 재혼을 했지만 김학순 할머니하고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하고요. 그래서 17세에 중국으로 베이징으로 건너가려고 갑니다. 가서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일본군에게 잡혀서 군부대로 끌려가게 되는데요. 베이징 부근의 군위안소에 배치가 돼서 두 군데 정도 배치가 됐던 것으로 기억을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위치가 정확하게 어디인지를 나중에 증언을 하면서도 많이 헷갈렸던 측면이 있는데요. 여기서 굉장히 큰 고통을 겪으셨고요. 군인들이 토벌을 나간 틈을 타서 조선인의 도움으로 위안소를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인연으로 그 도움을 줬던 조선인과 결혼을 하셨어요. 그래서 그 사이에서 자녀들을 낳고 상하이에서 살다가 해방을 맞게 되는 거죠. 그래서 1946년 인천을 통해 귀국했는데 딸은 콜레라로 잃고 남편은 한국전쟁 중에 사망을 하고요. 아들이 1명 남아 있었는데 하나 남은 아들마저 죽으니까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혼자 굉장히 외롭게 사시다가 한 번은 치료 사업을 나가셨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원폭 피해자를 만나셨어요, 할머니를. 그래서 당시 원폭 피해를 당했을 때 억울했던 사연이나 이런 것들을 들으면서 나도 이걸 뭔가 누군가에게 얘기해야겠다, 다시는 이런 설움이나 고통을 겪어서는 안 되겠다. 용기를 얻어서 증언을 하게 됐던 거죠.

▷ 오태훈 : 그야말로 그때 당시 말씀을 들어보면 신문이나 뉴스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고 정말 참을 수 없다, 그래서 내가 밝혀야겠다고 해서 세상에 공개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이 위안부 문제를 처음 세상에 알린 사람이 또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의 기자였다면서요?

▶ 김성완 : 참 아이러니한 사실인데요. 아사히신문의 우에무라 다카시라고 하는 기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앞서 제가 1991년 8월 14일 그날 첫 증언이 있었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아사히신문이 보도한 건 8월 11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사카판 사회면에 이 기사가 실렸는데요. 이것도 사실은 아사히신문 본판에 실으려고 했는데 오사카판으로 밀렸다고 해요. 이때 김학순 할머니 증언이 공개가 되면서 파장이 엄청나게 커지는데요. 그러니까 당시 정대협이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먼저 입수를 했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에무라 기자가 그 내용을 알게 됐고 그러면서 일본 언론에 처음으로 보도를 한 거죠. 그러니까 사실 아사히 신문은 1982년부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특히 그 중심에 우에무라 기자가 있었는데요. 그러니까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만 보도한 게 아니고 일본군이 위안소를 운영한 사료까지 발굴을 해서 보도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1992년 1월에 보도한 것을 보면 방위연구소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던 자료를 찾아냈는데, 한 교수가 찾아낸 자료를 제보를 한 거예요. 일본군이 전시 중에 위안소의 설치와 위안부 모집을 감독하고 통제하고 현지 부대에 위안소를 설치하도록 명령한 사실이 거기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폭로하기도 했던 거죠. 얼마 전에 일본 나고야시가 소녀상 전시를 취소해서 큰 파장이 일지 않았습니까? 그때 아사히신문이 1면 머리기사로 비판 기사를 실었어요.

▷ 오태훈 : 아사히신문이.

▶ 김성완 : 네, 그러니까 이런 어떤 과거의 전통이라든가 논조가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에무라 기자는 그것을 보도하고 난 다음에 일본 극우세력으로부터 엄청나게 협박에 많이 시달렸어요. 그러니까 대학 교수로 사실은 가려고 내정이 되어 있었지만 폭발 테러 협박이나 이런 것들 또 이메일이나 이런 것들이 쏟아지는 바람에 대학 쪽에서 임용을 취소하는 일도 있었고요. 딸을 죽이겠다는 협박도 몇십 년 지난 지금까지도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 오태훈 : 일본의 우익이라는 사람들 왜 이렇게 위안부 문제에 집착하는 거예요?

▶ 김성완 :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라고 하시죠?

▷ 오태훈 : 후소샤.

▶ 김성완 : 후소샤, 일본 역사 왜곡을 주도하는 단체죠. 단체에서 1996년부터 교과서에서 위안부 기술을 삭제하라, 이런 캠페인을 벌였거든요. 그때 어떤 논리를 내세웠느냐 하면 “종군 위안부를 거론하는 것은 일본인으로서의 자각과 기개를 짓밟고 일본이라는 국가를 정신적으로 해체하기 위해 국제적인 반일세력이 연대해 전개하는 거대한 일본 파멸의 음모다.”

▷ 오태훈 : 음모라고요?

▶ 김성완 : 네, 이렇게 규정을 했어요. 그러니까 일본 우익은 일본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전범국의 책임이라고 하는 생각은 안 하고 원폭 피해국이라는 사실만 강조하고 그러면서 전쟁의 피해자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이런 인식과 배치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뼈 아픈 과오에 해당하기 때문에 자꾸 이것을 바꾸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거죠. 그런데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우리도 사실 역사를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아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 오태훈 : 그러니까 해방 이후에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이게 쉬쉬하고 감춰진 내용이었잖아요.

▶ 김성완 : 그리고 굉장히 파편화된 지식을 많이 접하고 있기 때문에 달리 말하면 귀가 솔깃해지고 진짜인가, 이렇게 생각하는데요. 일본군이 왜 위안소를 설치할 수밖에 없었느냐? 1937년 2차 중일전쟁이 터지고요. 또 난징대학살이 있지 않았습니까? 한 30만 명이 숨졌다고 얘기되는 그런 사건인데, 일본군이 만주국 국경을 넘어서 중국 내륙으로 진격을 하게 되죠, 그때.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일본 군인들이 수많은 여성을 강 간하고 살해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당시 난징에 있던 독일인 나베라고 하는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도시 곳곳에 강 간 당한 후에 끔찍하게 살해된 여자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고 합니다.

▷ 오태훈 : 일본 군인들이 저지른 만행 때문에.

▶ 김성완 : 네, 그러니까 이것을 일본군들은 어떻게 해석을 했느냐 하면 병사들의 폭력적 광기가 나오고 있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뭔가 받고 그것을 어디에 분출할 수 있는 그런 틈새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서 그 광기를 분출시키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일종의 치안 유지 장치로 만든 게 위안부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본 육군성이 1938년 3월 4일에 휘하 부대에 내린 문서를 보면 위안부 모집해서 군이 통제하고 헌병이나 경찰이 긴밀히 연계해서 사회 문제상 유감이 없도록 배려하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에도 문제될 것을 알고 위안소를 설치했다는 얘기고요. 1940년 9월 19일 육군성이 휘하 부대에 보낸 문서에는 군기, 그러니까 군 기강, 군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서 성적 위안소에서 받는 병사들의 정신적 영향이 크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내용이 그대로 문서에 나와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자꾸 증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니까 1993년이죠. 일본 정부, 고노담화를 발표하게 되는 거죠.

▷ 오태훈 : 93년에 그렇죠.

▶ 김성완 : 그러니까 고노 요헤이 당시 내각 관방장관이 담화를 발표하는데요. 그 담화 내용을 보면 재재작년부터 위안부 강제 동원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조사했다. 조사한 결과,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이 있었다. 그리고 위안분들은 참혹한 현실에서 고통받았다고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건 움직일 수 없는 증거라고 볼 수가 없는 거죠. 그걸 자꾸 지우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겁니다.

▷ 오태훈 : 반박할 수 없는 증거가 있고 또 거기에 대해서 일본인 스스로 사과를 한 경험도 있다고 하는데, 지금 상황이 달라져서 다시 또 말을 바꾸고 있고 일본의 경제 도발까지도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만 그쪽은 그렇다고 치고. 지금 국내에서 이런 일본인들과 비슷한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 김성완 : 요즘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이 큰 논란이잖아요. 그런데 전에 말씀하셨던 것에 제가 참고로 왜 일본의 태도가 이렇게 바뀌었을까 궁금하신 분들이 있어서 말씀 드리면 고노담화가 발표될 때 일본이 자민당의 장기 집권이 이루어지잖아요. 그때 처음으로 자민당의 과반이 깨집니다. 그래서 야당들이 일종의 연정 같은 것을 구성해요. 그랬을 때 만들어진 내각이 바로 일본 정부가 당시에 고노담화를 발표했던 시점하고 일치합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자민당하고 또 다른 연립정권이 만들어졌던 시기였다. 그리고 야권의 힘이 강했을 때였다.

▷ 오태훈 : 그러니까 정치적인 어떤 상황 때문에 그게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로는. 허나 지금은 그렇지 않고?

▶ 김성완 : 지금 그것을 다 부인하고 있는 상황인 거죠. 얘기 이어서 말씀 드리면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이 화제가 돼서 제가 사실은 저는 방송을 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어떤 책인지 알아야 방송을 할 수 있으니까 사러 갔더니 서점에 한 100권씩 쌓여 있고 하더라고요, 베스트셀러라고 올라왔다고 하던데요.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기술했는지를 살펴봤어요. 그랬더니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15세기 이래 조선시대부터 일제 폐망 후까지 위안부는 늘 있어 왔다. 아니, 지금도 있다.” 이른바 기생, 양공주라는 말을 거침없이 사용하면서 공창제하고 매춘 문제하고 연결합니다. 그러니까 위안부는 그냥 성매매를 했던 여성들이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논리가 우리나라 극우진영한테 먹히고 있다는 사실이고요. 심지어 보수 정치권에서도 그럴싸한 논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건데요. 좀 논란이 됐던 얘기지만 자유한국당 중진인 심재철 의원은 뭐라고 얘기했느냐 하면 이 책을 읽고 “몰랐던 부분을 일깨워 주셔서 너무 감사 드립니다.” 이렇게 표현했고요. 정종섭 의원은 2명 다 중진이죠. “100만 권이 팔려 전 국민이 눈을 뜨고 한일문제가 좀 더 미래 지향적으로 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문제만 나와 있는 게 아니고요. 일본이 착취를 했다고 하는 논리는 착취가 아니었다, 이렇게 얘기하고요. 일본군 강제징용을 통해서 피해자들 있잖아요. 그것도 일본 기업은 전부 다 돈을 줬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왜 돈을 줬다고 하는 논리가 나오느냐 하면 징용 피해자들이 기숙사 같은 데서 생활했는데 조선인이 사감을 했다는 거예요. 그 조선인 사감이 다 돈을 떼어 먹은 것이다, 이런 논리를 동원합니다. 제가 굳이 말씀 드리지 않아도 이런 논리는 일본의 극우 주장하고 거의 똑같은 거죠.

▷ 오태훈 : 알겠습니다. 청취자 4660님께서 “영화 김복동 보려고 상영 시간 알아보는데 새벽이나 한밤중밖에 없습니다. 안타깝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시간대로 배정돼서 많은 분들이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의견도 보내주셨습니다. 시사평론가 김성완 씨 함께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김성완 : 고맙습니다.
  • [오태훈의 시사본부] 김복동 할머니 생전 인터뷰 “미안하고 또 고맙습니다”
    • 입력 2019.08.14 (16:09)
    • 수정 2019.08.14 (19:53)
    오태훈의 시사본부
[오태훈의 시사본부] 김복동 할머니 생전 인터뷰 “미안하고 또 고맙습니다”
- 91년 8월 14일,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피해 사실 공개적으로 증언
- 그 뒤로 92년 일본 총리 방한을 계기로, 1월 8일에 첫 수요시위 시작
- 수요시위는 그 뒤로 27년 7개월 동안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오늘 1400회 맞아
- 위안부에 대한 문제제기 시작, 그 뒤로 증언 쏟아져 나와 김복동 할머니도 그 중 한 분
- 김복동 할머니 생전 인터뷰 “더운데 매주 수요시위 나와 주셔서 참 고맙고 미안해.”
- 위안부 문제 세상에 처음 알린 사람은 일본인 기자, 지금도 일본 우익의 협박에 시달려
- 후소샤 “위안부 거론은, 국제적인 반일세력이 전개하는 거대한 일본 파멸의 음모.” 주장
- 그러나 위안부가 존재했다는 증거는 여러 일본 관련 문서를 통해서도 이미 밝혀져
- 국내 극우 세력 ‘성매매’ 언급하면서 일본 우익과 같은 주장 펼치고 있어

■ 프로그램명 : 오태훈의 시사본부
■ 코너명 : 김성완의 뉴스쏘다
■ 방송시간 : 8월 14일(수요일) 12:20~14:00 KBS 1라디오
■ 출연자 : 김성완 시사평론가



▷ 오태훈 : 앞서 1400회를 맞는 수요집회 현장 연결해서 현장의 분위기도 들었습니다만 27년 동안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를 촉구해온 집회였습니다. 참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그럼에도 일본은 공식적인 사과를 하지 않고 있는 상황입니다. 위안부 기림의 날에 대해서 저희가 자세히 짚어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 싶어서요. <김성완의 뉴스쏘다>에서 정리하는 시간 갖겠습니다. 시사평론가 김성완 씨 나오셨습니다. 어서 오세요.

▶ 김성완 : 안녕하세요?

▷ 오태훈 : 마침 조금 전에 문재인 대통령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메시지를 발표했죠?

▶ 김성완 : 네, 오늘 SNS에 글을 올렸는데요. “28년 전, 오늘 김학순 할머니가 ‘내가 살아있는 증거입니다.’라는 말씀으로 오랜 침묵의 벽을 깼다. 정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존엄과 명예를 행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회와 공유하고 확산해나가겠다.” 이렇게 밝혔습니다. 아무래도 문재인 대통령이 집권 이후에 위안부 기림의 날을 국가 기념일로 지정을 했거든요. 그러니까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었고 또 2015년 박근혜 정부 시절에 한일 위안부 합의가 있었지만 사실상 파기가 된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연장선에 있어서 문 대통령의 각별한 관심이 드러난 그런 메시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 오태훈 : 28년 전 오늘 1991년 8월 14일, 수요시위라든가 위안부 기림의 날 모두 김학순 할머니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잖아요, 우리가.

▶ 김성완 : 맞습니다. 1991년 8월 14일이라고 말씀하셨는데 당시 67세였던 김학순 할머니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는 처음으로 피해 사실을 공개적으로 증언한 날입니다. 그래서 이 날이 의미가 있는 것이고요. 이 일을 계기로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이 잇따랐고요. 하지만 일본 정부는 군 위안부를 운영한 사실을 계속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미야자와 기이치 일본 총리가 방한을 하게 되는데요. 그 방한을 계기로 그러니까 1992년 1월 8일 수요시위가 처음 시작이 됐습니다.

▷ 오태훈 : 그러니까 1회 수요집회가 열린 것 아니에요? 92년 1월에.

▶ 김성완 : 맞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27년 7개월 동안 지금 계속 이어져 오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한 28년 됐다, 이렇게 표현을 한 것이고요. 그러니까 그 발단은 다 김학순 할머님으로부터 시작이 됐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거죠.

▷ 오태훈 : 그러니까 김학순 할머니가 첫 공개 증언, 기자회견을 통해서 밝힌 내용들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다르잖아요.

▶ 김성완 : 그렇죠. 당시에는 위안부라는 존재조차 잘 몰랐던 시절이었어요.

▷ 오태훈 : 당시에 MBC 뉴스에서 이걸 한 것을 봤거든요. 정신대라는 단어를 쓰더라고요.

▶ 김성완 : 맨처음에 정신대라고 표현했어요. 그래서 그 당시에 한국정신대연구회, 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 지금 정대협이라고 하는 단체가 바로 그 무렵쯤에 나온 거예요. 그런데 이게 시작은 1988년 정도부터였어요. 그러니까 여성 단체들이 당시 민주화 이후부터 시작된 얘기인데요. 여성 단체들이 중심이 돼서 위안부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1990년부터는 한국정신대연구회하고 정신대대책협의회가 조직이 됐고요. 그렇지만 사료가 많지 않아서 피해자가 또 나서지도 않는 상황이었거든요.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증명할 것이냐? 이 문제가 남아 있었던 거예요. 이런 상황에서 김학순 할머니가 처음으로 딱 공개적인 자리에 등장한 거죠. 그러니까 과거 내가 이런 피해를 겪었다고 얘기를 하고 나니까 그 파장이 클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런데 이것은 국내는 물론이고 네덜란드나 타이완 비롯해서 일본이 해외에 주둔하고 점령을 했던 곳들 그리고 거기에서 관련된 사람들, 이런 사람들의 입으로부터 피해 사실이 막 증언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는 거죠. 그리고 국내에서는 그렇게 해서 피해자로 나타나신 분 중에 한 분이 바로 김복동 할머니입니다. 여기서 김복동 할머니의 생전 목소리를 한번 들어볼까요?

▶ 김복동 :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라, 옛날 말이 있잖아요. 정부하고 우리가 싸우는 거지, 국민들하고 싸우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우리 교포들도 많이 살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많아서 내가 밑천이 짧아서 조금이라도 돌봐주지만 그 돌보는 것은 이것하고는 관계가 없잖아요. 하고 싶은 말은 하루라도 빨리 해결이 나야 국민들도 마음을 놓을 텐데 이 더운 데도 불구하고 매주 나오시는 것 볼 때면 참으로 고맙고 뭐라고 말할 수가 없어요. 내가 당한 일같이 국민들이 나와서 환영을 해주고 또 학생들이랑 전체적으로 나와서 후원을 해주니까 늙어가는 우리들에게 무슨 힘이 있습니까? 젊은 사람들 믿고. 내가 수요집회 안 나간 지가 오래됩니다. 미안하고 우리들 일에 국민들 보기에 진짜 미안하고요, 고맙고 그렇습니다.

▷ 오태훈 : 바로 1년 전이었습니다. 저희 시사본부에서 광복절에 할머니와 인터뷰를 했고 또 이제 더 이상 할머니 육성을 들을 수 없는 상황이 됐네요. 1년 사이에 정말 여러 가지 감회가 드는데 참...

▶ 김성완 : 많은 분들이 계속 돌아가고 계시는 거죠. 그게 너무 안타깝고 오늘 이용수 할머니하고 김경애 할머님이 나왔다고 말씀하시는데 지금 스무 분밖에 생존자가 남아 계시지 않잖아요. 그리고 대부분 병환 중이시거나 아니면 치매에 걸리신 분들도 계셔서 더 이상 증언을 하려고 해도 증언할 수 없는 상황이거든요. 그런 부분이 안타깝습니다.

▷ 오태훈 : 앞서서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대표 같은 경우에는 “이분들이 살아계실 때가 일본이 사죄하고 속죄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다, 빨리해야 된다.”고 계속해서 말씀하시는데.

▶ 김성완 : 김학순 할머님은 마지막까지 마지막으로 남기신 말씀을 제가 또 오늘 보고 왔거든요. 끝까지 일왕이라는 표현을 쓰셨어요. 일왕이라고 얘기하시고 “일왕한테 내가 끝까지 사죄를 받았으면 좋겠다.” 이런 말씀하셨는데 결국 그 뜻은 이루지 못한 상황이죠.


▷ 오태훈 : 하지만 그 할머님의 용기가 지금의 상황까지 오지 않았나, 그런 결정적인 계기고 씨앗이 되지 않았나 싶은데 김학순 할머니는 어떤 분이셨어요?

▶ 김성완 : 너무 기구한 인생이어서 제가 다 말씀 드리기는 그런데요. 축약해서 말씀 드리면 1924년 중국, 우리가 길림이라고 부르는 지린에서 태어나셨어요. 그러니까 100일도 되기 전에 아버지가 사망을 했고요. 어머니가 자녀들이 있으니까 남편이 숨진 상태였기 때문에 평양으로 다시 되돌아옵니다. 그리고 굉장히 어려운 생활을 하게 되는데요. 재혼을 했지만 김학순 할머니하고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고 하고요. 그래서 17세에 중국으로 베이징으로 건너가려고 갑니다. 가서 베이징에 도착하자마자 일본군에게 잡혀서 군부대로 끌려가게 되는데요. 베이징 부근의 군위안소에 배치가 돼서 두 군데 정도 배치가 됐던 것으로 기억을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위치가 정확하게 어디인지를 나중에 증언을 하면서도 많이 헷갈렸던 측면이 있는데요. 여기서 굉장히 큰 고통을 겪으셨고요. 군인들이 토벌을 나간 틈을 타서 조선인의 도움으로 위안소를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인연으로 그 도움을 줬던 조선인과 결혼을 하셨어요. 그래서 그 사이에서 자녀들을 낳고 상하이에서 살다가 해방을 맞게 되는 거죠. 그래서 1946년 인천을 통해 귀국했는데 딸은 콜레라로 잃고 남편은 한국전쟁 중에 사망을 하고요. 아들이 1명 남아 있었는데 하나 남은 아들마저 죽으니까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혼자 굉장히 외롭게 사시다가 한 번은 치료 사업을 나가셨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 자리에서 원폭 피해자를 만나셨어요, 할머니를. 그래서 당시 원폭 피해를 당했을 때 억울했던 사연이나 이런 것들을 들으면서 나도 이걸 뭔가 누군가에게 얘기해야겠다, 다시는 이런 설움이나 고통을 겪어서는 안 되겠다. 용기를 얻어서 증언을 하게 됐던 거죠.

▷ 오태훈 : 그야말로 그때 당시 말씀을 들어보면 신문이나 뉴스에서 거짓말을 하는 것을 보고 정말 참을 수 없다, 그래서 내가 밝혀야겠다고 해서 세상에 공개 기자회견을 열었는데 이 위안부 문제를 처음 세상에 알린 사람이 또 한국인이 아니라 일본의 기자였다면서요?

▶ 김성완 : 참 아이러니한 사실인데요. 아사히신문의 우에무라 다카시라고 하는 기자였습니다. 그러니까 앞서 제가 1991년 8월 14일 그날 첫 증언이 있었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아사히신문이 보도한 건 8월 11일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사카판 사회면에 이 기사가 실렸는데요. 이것도 사실은 아사히신문 본판에 실으려고 했는데 오사카판으로 밀렸다고 해요. 이때 김학순 할머니 증언이 공개가 되면서 파장이 엄청나게 커지는데요. 그러니까 당시 정대협이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을 먼저 입수를 했다고 그래요. 그런데 그 과정에서 우에무라 기자가 그 내용을 알게 됐고 그러면서 일본 언론에 처음으로 보도를 한 거죠. 그러니까 사실 아사히 신문은 1982년부터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특히 그 중심에 우에무라 기자가 있었는데요. 그러니까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만 보도한 게 아니고 일본군이 위안소를 운영한 사료까지 발굴을 해서 보도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1992년 1월에 보도한 것을 보면 방위연구소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던 자료를 찾아냈는데, 한 교수가 찾아낸 자료를 제보를 한 거예요. 일본군이 전시 중에 위안소의 설치와 위안부 모집을 감독하고 통제하고 현지 부대에 위안소를 설치하도록 명령한 사실이 거기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폭로하기도 했던 거죠. 얼마 전에 일본 나고야시가 소녀상 전시를 취소해서 큰 파장이 일지 않았습니까? 그때 아사히신문이 1면 머리기사로 비판 기사를 실었어요.

▷ 오태훈 : 아사히신문이.

▶ 김성완 : 네, 그러니까 이런 어떤 과거의 전통이라든가 논조가 그대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우에무라 기자는 그것을 보도하고 난 다음에 일본 극우세력으로부터 엄청나게 협박에 많이 시달렸어요. 그러니까 대학 교수로 사실은 가려고 내정이 되어 있었지만 폭발 테러 협박이나 이런 것들 또 이메일이나 이런 것들이 쏟아지는 바람에 대학 쪽에서 임용을 취소하는 일도 있었고요. 딸을 죽이겠다는 협박도 몇십 년 지난 지금까지도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 오태훈 : 일본의 우익이라는 사람들 왜 이렇게 위안부 문제에 집착하는 거예요?

▶ 김성완 :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이라고 하시죠?

▷ 오태훈 : 후소샤.

▶ 김성완 : 후소샤, 일본 역사 왜곡을 주도하는 단체죠. 단체에서 1996년부터 교과서에서 위안부 기술을 삭제하라, 이런 캠페인을 벌였거든요. 그때 어떤 논리를 내세웠느냐 하면 “종군 위안부를 거론하는 것은 일본인으로서의 자각과 기개를 짓밟고 일본이라는 국가를 정신적으로 해체하기 위해 국제적인 반일세력이 연대해 전개하는 거대한 일본 파멸의 음모다.”

▷ 오태훈 : 음모라고요?

▶ 김성완 : 네, 이렇게 규정을 했어요. 그러니까 일본 우익은 일본은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전범국의 책임이라고 하는 생각은 안 하고 원폭 피해국이라는 사실만 강조하고 그러면서 전쟁의 피해자라는 인식을 공유하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이런 인식과 배치되는 거죠.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뼈 아픈 과오에 해당하기 때문에 자꾸 이것을 바꾸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거죠. 그런데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우리도 사실 역사를 잘 모르시는 분들이 많아요, 솔직히 말씀 드리면.

▷ 오태훈 : 그러니까 해방 이후에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이게 쉬쉬하고 감춰진 내용이었잖아요.

▶ 김성완 : 그리고 굉장히 파편화된 지식을 많이 접하고 있기 때문에 달리 말하면 귀가 솔깃해지고 진짜인가, 이렇게 생각하는데요. 일본군이 왜 위안소를 설치할 수밖에 없었느냐? 1937년 2차 중일전쟁이 터지고요. 또 난징대학살이 있지 않았습니까? 한 30만 명이 숨졌다고 얘기되는 그런 사건인데, 일본군이 만주국 국경을 넘어서 중국 내륙으로 진격을 하게 되죠, 그때.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일본 군인들이 수많은 여성을 강 간하고 살해하는 일이 벌어집니다. 당시 난징에 있던 독일인 나베라고 하는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도시 곳곳에 강 간 당한 후에 끔찍하게 살해된 여자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고 합니다.

▷ 오태훈 : 일본 군인들이 저지른 만행 때문에.

▶ 김성완 : 네, 그러니까 이것을 일본군들은 어떻게 해석을 했느냐 하면 병사들의 폭력적 광기가 나오고 있다, 엄청난 스트레스를 뭔가 받고 그것을 어디에 분출할 수 있는 그런 틈새가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서 그 광기를 분출시키는 방법을 고민하다가 일종의 치안 유지 장치로 만든 게 위안부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일본 육군성이 1938년 3월 4일에 휘하 부대에 내린 문서를 보면 위안부 모집해서 군이 통제하고 헌병이나 경찰이 긴밀히 연계해서 사회 문제상 유감이 없도록 배려하라,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에도 문제될 것을 알고 위안소를 설치했다는 얘기고요. 1940년 9월 19일 육군성이 휘하 부대에 보낸 문서에는 군기, 그러니까 군 기강, 군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서 성적 위안소에서 받는 병사들의 정신적 영향이 크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내용이 그대로 문서에 나와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자꾸 증거가 쏟아져 나오기 시작하니까 1993년이죠. 일본 정부, 고노담화를 발표하게 되는 거죠.

▷ 오태훈 : 93년에 그렇죠.

▶ 김성완 : 그러니까 고노 요헤이 당시 내각 관방장관이 담화를 발표하는데요. 그 담화 내용을 보면 재재작년부터 위안부 강제 동원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를 조사했다. 조사한 결과, 위안부 강제 동원 사실이 있었다. 그리고 위안분들은 참혹한 현실에서 고통받았다고 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건 움직일 수 없는 증거라고 볼 수가 없는 거죠. 그걸 자꾸 지우려고 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는 겁니다.

▷ 오태훈 : 반박할 수 없는 증거가 있고 또 거기에 대해서 일본인 스스로 사과를 한 경험도 있다고 하는데, 지금 상황이 달라져서 다시 또 말을 바꾸고 있고 일본의 경제 도발까지도 나오고 있는 상황입니다만 그쪽은 그렇다고 치고. 지금 국내에서 이런 일본인들과 비슷한 논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 김성완 : 요즘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이 큰 논란이잖아요. 그런데 전에 말씀하셨던 것에 제가 참고로 왜 일본의 태도가 이렇게 바뀌었을까 궁금하신 분들이 있어서 말씀 드리면 고노담화가 발표될 때 일본이 자민당의 장기 집권이 이루어지잖아요. 그때 처음으로 자민당의 과반이 깨집니다. 그래서 야당들이 일종의 연정 같은 것을 구성해요. 그랬을 때 만들어진 내각이 바로 일본 정부가 당시에 고노담화를 발표했던 시점하고 일치합니다. 그러니까 일종의 자민당하고 또 다른 연립정권이 만들어졌던 시기였다. 그리고 야권의 힘이 강했을 때였다.

▷ 오태훈 : 그러니까 정치적인 어떤 상황 때문에 그게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로는. 허나 지금은 그렇지 않고?

▶ 김성완 : 지금 그것을 다 부인하고 있는 상황인 거죠. 얘기 이어서 말씀 드리면 ‘반일종족주의’라는 책이 화제가 돼서 제가 사실은 저는 방송을 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어떤 책인지 알아야 방송을 할 수 있으니까 사러 갔더니 서점에 한 100권씩 쌓여 있고 하더라고요, 베스트셀러라고 올라왔다고 하던데요. 위안부 문제를 어떻게 기술했는지를 살펴봤어요. 그랬더니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15세기 이래 조선시대부터 일제 폐망 후까지 위안부는 늘 있어 왔다. 아니, 지금도 있다.” 이른바 기생, 양공주라는 말을 거침없이 사용하면서 공창제하고 매춘 문제하고 연결합니다. 그러니까 위안부는 그냥 성매매를 했던 여성들이었다,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논리가 우리나라 극우진영한테 먹히고 있다는 사실이고요. 심지어 보수 정치권에서도 그럴싸한 논리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건데요. 좀 논란이 됐던 얘기지만 자유한국당 중진인 심재철 의원은 뭐라고 얘기했느냐 하면 이 책을 읽고 “몰랐던 부분을 일깨워 주셔서 너무 감사 드립니다.” 이렇게 표현했고요. 정종섭 의원은 2명 다 중진이죠. “100만 권이 팔려 전 국민이 눈을 뜨고 한일문제가 좀 더 미래 지향적으로 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문제만 나와 있는 게 아니고요. 일본이 착취를 했다고 하는 논리는 착취가 아니었다, 이렇게 얘기하고요. 일본군 강제징용을 통해서 피해자들 있잖아요. 그것도 일본 기업은 전부 다 돈을 줬다,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니까 왜 돈을 줬다고 하는 논리가 나오느냐 하면 징용 피해자들이 기숙사 같은 데서 생활했는데 조선인이 사감을 했다는 거예요. 그 조선인 사감이 다 돈을 떼어 먹은 것이다, 이런 논리를 동원합니다. 제가 굳이 말씀 드리지 않아도 이런 논리는 일본의 극우 주장하고 거의 똑같은 거죠.

▷ 오태훈 : 알겠습니다. 청취자 4660님께서 “영화 김복동 보려고 상영 시간 알아보는데 새벽이나 한밤중밖에 없습니다. 안타깝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시간대로 배정돼서 많은 분들이 함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의견도 보내주셨습니다. 시사평론가 김성완 씨 함께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김성완 :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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