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아사’ 탈북민을 좌절시킨 말…“중국 가서 서류 떼어 오라”

입력 2019.08.15 (07:01) 수정 2019.08.15 (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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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사(餓死). 사전적인 의미는 '굶어 죽음'을 뜻하는 명사입니다. 지난 며칠 동안 포털 사이트 검색어를 오르내린 이유는 그만큼 한국 사회와는 거리가 먼 단어였기 때문일 겁니다.

2019년 서울 도심에서 어떻게 40대 여성과 5살 아이가 굶어 죽었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이 사건을 취재하는 동안 "왜 밖으로 나가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을까"라는 의문이 계속 뇌리를 맴돌았습니다.

■ "타살·자살 흔적 없어...아사 '가능성'"

탈북민 어머니와 아들 사망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경찰은 '아사'에 대해 여러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탈북민 41살 한 모 씨의 자택에는 외부침입 흔적이 없었고, 타살이나 자살로 볼 만한 단서도 없었습니다.

발견 당시 숨진 한 씨는 거실 겸 주방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습니다. 작은 방에서 발견된 한 씨의 아들 6살 김 모 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집에서 고춧가루 말고는 음식물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경찰이 아사 가능성도 들여다보고 있는 이유입니다. 또, 김 군이 아팠다는 주변 증언이 있어 병원 진료 기록 등도 확인하고 있습니다.

숨진 한 씨가 살았던 서울 관악구의 임대아파트. 이 곳은 재개발 아파트가 의무조성하는 임대주택으로, 정부의 '사회보장정보시스템'이 운영하는 위기가구 모니터링 대상에서 제외돼있다.숨진 한 씨가 살았던 서울 관악구의 임대아파트. 이 곳은 재개발 아파트가 의무조성하는 임대주택으로, 정부의 '사회보장정보시스템'이 운영하는 위기가구 모니터링 대상에서 제외돼있다.

한 씨는 중국 동포인 남편과 이혼한 뒤, 혼자 김 군을 키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의 사정을 알 만한 가족도 없는 상황입니다. 경찰은 전 남편 김 모 씨가 출국한 사실을 확인했지만, 범죄 혐의점이 없다 보니 강제로 소환해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어렵습니다.

한 씨의 행적을 취재하던 중 김용화 탈북난민인권연합 회장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김 회장은 한 씨가 탈북해 국내로 들어오는 과정을 도왔습니다.

김 회장은 "한 씨가 지난해 10월 중국에서 남편과 이혼한 뒤, 아들을 데리고 국내로 다시 들어왔다"고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이야기를 털어놨습니다.

"한국에 다시 돌아온 한 씨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했어요. 그래서 제가 주민센터에 가서 문의해보라고 했죠. 그런데, 주민센터에서는 그 중국 동포인 남편과 이혼했다는 서류가 필요하다는 거에요. 아니, 돈도 없는 사람한테 중국가서 서류를 떼오라니, 말이나 됩니까? 가면 중국 당국이 바로 떼준답니까?"

전 남편이 중국 국적이어서 국내에서는 이혼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발급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한 씨는 더이상 도움을 받기 어렵게 된 겁니다.

김 회장은 "한 씨는 힘든 와중에도 이렇게 전화도 하고, 살아보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면서도, 그 이후로는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고 전했습니다.

■ "재개발 임대주택..위기관리 관찰에서 빠져"

한 씨 모자는 수개월간 임대료와 전기요금, 수도요금 등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상징후가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 정부는 위기가구에 대한 발굴 관리를 강화했습니다. 이른바 '세모녀법'을 통해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에게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에 따라 3개월 이상 임대료나 공과금이 밀리면 '행복e음(사회보장정보시스템)'에 자동으로 등록됩니다.

이 시스템에 따라 두 달에 한 번씩 5백만 명 정도가 대상자에 오르고, 이 가운데 의도적인 체납자 등을 제외하고 추린 5만 명 가량이 '위기 가구'로 선정돼 지자체에 통보됩니다.

탈북민 한 씨의 아파트 우편함에 남아 있는 수도요금 고지서.탈북민 한 씨의 아파트 우편함에 남아 있는 수도요금 고지서.

그런데 한 씨는 18개월 정도 임대료 등을 납부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에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한 씨가 사는 곳이 재개발 아파트가 의무조성하는 임대주택이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시스템은 공공임대주택이나 영구임대주택 거주자만 모니터링 대상자입니다.

수도요금 미납도 이 아파트가 개별 가구 직접 징수 방식이 아닌, '단지 과금' 형태로 징수했기 때문에 시스템이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일정한 직업이 없던 한 씨는 이혼 이후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자격을 갖출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외부와 교류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몰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매달 10만 원씩 지급되는 '아동수당(만 5세 미만 아동에게 지급)'과 '양육수당(유치원 등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키우는 가정에 지급)'은 받았지만, 김 군이 만 5살을 넘긴 올해 3월부터는 아동수당마저 끊겼습니다.


■ 탈북자들의 한숨..."어제의 한 씨가 오늘의 내가 될 수도"

현행법상 탈북민들은 정착 후 5년간 보호를 받지만, 그 이후로도 필요할 경우 '하나센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북하나재단이 관리하는 전문상담사는 전국 25개 센터에 83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현재 탈북민이 3만 명이 넘는 점을 볼 때 수요보다 공급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한 씨에게 도움이 닿진 않았습니다.

이번 일은 한 씨가 비단 탈북민이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였을 때 당하는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탈북민들은 특히 그런 사각지대에 놓이기 쉽습니다.

이 때문에 한 씨의 죽음을 바라보는 탈북민들 사이에선 "어제의 한 씨가 오늘의 내가 될 수도 있다"라는 탄식섞인 말이 회자되고 있다고 김 회장은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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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15 07:01:32
    • 수정2019-08-15 07:15:27
    취재후·사건후
아사(餓死). 사전적인 의미는 '굶어 죽음'을 뜻하는 명사입니다. 지난 며칠 동안 포털 사이트 검색어를 오르내린 이유는 그만큼 한국 사회와는 거리가 먼 단어였기 때문일 겁니다.

2019년 서울 도심에서 어떻게 40대 여성과 5살 아이가 굶어 죽었는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이 사건을 취재하는 동안 "왜 밖으로 나가 도움을 요청하지 못했을까"라는 의문이 계속 뇌리를 맴돌았습니다.

■ "타살·자살 흔적 없어...아사 '가능성'"

탈북민 어머니와 아들 사망 사건을 수사하고 있는 경찰은 '아사'에 대해 여러 가지 가능성 가운데 하나로 보고 있습니다. 탈북민 41살 한 모 씨의 자택에는 외부침입 흔적이 없었고, 타살이나 자살로 볼 만한 단서도 없었습니다.

발견 당시 숨진 한 씨는 거실 겸 주방에 반듯하게 누워 있었습니다. 작은 방에서 발견된 한 씨의 아들 6살 김 모 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집에서 고춧가루 말고는 음식물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경찰이 아사 가능성도 들여다보고 있는 이유입니다. 또, 김 군이 아팠다는 주변 증언이 있어 병원 진료 기록 등도 확인하고 있습니다.

숨진 한 씨가 살았던 서울 관악구의 임대아파트. 이 곳은 재개발 아파트가 의무조성하는 임대주택으로, 정부의 '사회보장정보시스템'이 운영하는 위기가구 모니터링 대상에서 제외돼있다.
한 씨는 중국 동포인 남편과 이혼한 뒤, 혼자 김 군을 키웠습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의 사정을 알 만한 가족도 없는 상황입니다. 경찰은 전 남편 김 모 씨가 출국한 사실을 확인했지만, 범죄 혐의점이 없다 보니 강제로 소환해 이야기를 들어보기도 어렵습니다.

한 씨의 행적을 취재하던 중 김용화 탈북난민인권연합 회장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김 회장은 한 씨가 탈북해 국내로 들어오는 과정을 도왔습니다.

김 회장은 "한 씨가 지난해 10월 중국에서 남편과 이혼한 뒤, 아들을 데리고 국내로 다시 들어왔다"고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안타까운 이야기를 털어놨습니다.

"한국에 다시 돌아온 한 씨가 경제적인 어려움을 호소했어요. 그래서 제가 주민센터에 가서 문의해보라고 했죠. 그런데, 주민센터에서는 그 중국 동포인 남편과 이혼했다는 서류가 필요하다는 거에요. 아니, 돈도 없는 사람한테 중국가서 서류를 떼오라니, 말이나 됩니까? 가면 중국 당국이 바로 떼준답니까?"

전 남편이 중국 국적이어서 국내에서는 이혼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발급 받지 못했기 때문에, 한 씨는 더이상 도움을 받기 어렵게 된 겁니다.

김 회장은 "한 씨는 힘든 와중에도 이렇게 전화도 하고, 살아보려고 애를 썼던 것 같다"면서도, 그 이후로는 한동안 연락이 없었다고 전했습니다.

■ "재개발 임대주택..위기관리 관찰에서 빠져"

한 씨 모자는 수개월간 임대료와 전기요금, 수도요금 등을 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이상징후가 포착되지 않았습니다.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 이후 정부는 위기가구에 대한 발굴 관리를 강화했습니다. 이른바 '세모녀법'을 통해 복지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에게 먼저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에 따라 3개월 이상 임대료나 공과금이 밀리면 '행복e음(사회보장정보시스템)'에 자동으로 등록됩니다.

이 시스템에 따라 두 달에 한 번씩 5백만 명 정도가 대상자에 오르고, 이 가운데 의도적인 체납자 등을 제외하고 추린 5만 명 가량이 '위기 가구'로 선정돼 지자체에 통보됩니다.

탈북민 한 씨의 아파트 우편함에 남아 있는 수도요금 고지서.
그런데 한 씨는 18개월 정도 임대료 등을 납부하지 못했는데도 여기에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한 씨가 사는 곳이 재개발 아파트가 의무조성하는 임대주택이었기 때문입니다. 현재 시스템은 공공임대주택이나 영구임대주택 거주자만 모니터링 대상자입니다.

수도요금 미납도 이 아파트가 개별 가구 직접 징수 방식이 아닌, '단지 과금' 형태로 징수했기 때문에 시스템이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일정한 직업이 없던 한 씨는 이혼 이후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자격을 갖출 수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외부와 교류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몰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매달 10만 원씩 지급되는 '아동수당(만 5세 미만 아동에게 지급)'과 '양육수당(유치원 등에 보내지 않고 집에서 키우는 가정에 지급)'은 받았지만, 김 군이 만 5살을 넘긴 올해 3월부터는 아동수당마저 끊겼습니다.


■ 탈북자들의 한숨..."어제의 한 씨가 오늘의 내가 될 수도"

현행법상 탈북민들은 정착 후 5년간 보호를 받지만, 그 이후로도 필요할 경우 '하나센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남북하나재단이 관리하는 전문상담사는 전국 25개 센터에 83명밖에 되지 않습니다. 현재 탈북민이 3만 명이 넘는 점을 볼 때 수요보다 공급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한 씨에게 도움이 닿진 않았습니다.

이번 일은 한 씨가 비단 탈북민이기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보긴 어렵습니다. 하지만, 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였을 때 당하는 어려움이 어떤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탈북민들은 특히 그런 사각지대에 놓이기 쉽습니다.

이 때문에 한 씨의 죽음을 바라보는 탈북민들 사이에선 "어제의 한 씨가 오늘의 내가 될 수도 있다"라는 탄식섞인 말이 회자되고 있다고 김 회장은 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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