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중국 신문이 기록한 항일 무장투쟁 10년의 기록…그것은 승전의 역사

입력 2019.08.15 (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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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전투 승리 기념 사진, 1920.10. 북로군정서

영원히 복수를 잊지 않을 것이다!

간도참변(間島慘變) 또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고 불리는 일제의 만행이 있다. 항일 무장 독립군 토벌을 이유로 일본군이 만주 한인 망명촌을 습격해 우리 민족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문헌 등을 통해 확인된 학살 피해자가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27일 동안 3,469명이다. 학계는 일본군이 작전을 편 3~4개월 동안 우리 동포 수만 명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위 사진은 1920년 12월 23일 중국 신문 '익세보(益世報)'에 난 우리 독립군의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 기사다. 우리 독립군은 "일본군이 우리 한인을 상대로 잔인무도한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 우리를 말살하려는 결심이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자아 방위를 위해 일본에 선전포고한다. 와신상담하며 위아래 없이 한마음으로 목숨을 걸고, 영원히 복수를 잊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했다.


중국 상하이 푸단대 쑨커즈 교수는 1919년 4월부터 1928년 9월까지 당시 중국 신문에 보도된 우리 독립군 관련 기사를 모두 모아 정리했다. 일제를 상대로 한 대표적인 승전인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제외하고 10년 동안 모두 96건의 기사가 나왔다. 쑨커즈 교수는 해당 기사를 KBS에 단독으로 제공했다. 목숨 걸고 영원히 복수를 잊지 않을 것이라던 독립군의 선언은 거짓이 아니었다.

40번의 전투, 승전! 승전!

독립군과 일본군·경찰 간의 전투를 다룬 기사 중 단연 가장 큰 승리는 함경도 경성(鏡城)·청진항(淸津港) 전투였다. 중국신문 3개 매체가 이 전투 기사를 다뤘다. 아래 사진이 그중 하나인 경보(京報) 1921년 1월 27일 기사다.

독립군 소식을 다룬 경보(京報) 1921년 1월 27일 자 기사독립군 소식을 다룬 경보(京報) 1921년 1월 27일 자 기사

"독립군은 한인이 모두 죽지 않는 이상 독립운동을 그치지 않을 것을 선언했다. 이달 4일 독립군이 경성·청진항에서 일본군인 40여 명을 사살했다. 일본군은 급히 파견부대를 보내 전투가 이어졌다. 일본군 사상자는 600여 명, 독립군 사상자는 50여 명이다. 이 전투로 독립군에 지원하는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발생한 전투도 있었다. 신보(晨報) 1921년 12월 27일 기사다. "시베리아 통신사에 따르면 이달 16일 일본군 43연대와 독립군 간의 전투가 시베리아 선통사(善通寺) 근처에서 있었다. 수 시간 동안 이어진 격렬한 전투였다. 독립군 시신 1구가 발견됐다. 양쪽 다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비밀로 하고 공개하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독립군의 기세에 일본 경찰과 관리들이 혼비백산하는 때도 있었다. 아래 기사는 익세보(益世報) 1922년 3월 14일 기사다.


"이달 7일 밤 12시 평북 의주 옥상면에 독립군이 습격했다. 일본 경찰과 긴 시간 격전이 벌어졌다. 다른 공무로 출동했다가 귀대하던 일본 경찰 5명이 총성을 듣고 독립군 대부대가 온 것으로 알고 도망을 쳤다. 면사무소 당직을 서던 일본인 관리들도 총소리를 듣고 옷 입을 새도 없이 도망쳤다."

익세보(益世報)는 1921년 2월 16일 기사에서 "만주일일신문(滿州日日新聞)에 따르면 현재 한인 독립군이 8,000여 명에 이른다. 훈련은 대부분 러시아 무관이 담당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사기는 높았지만, 병력과 무기 면에서 열세였던 독립군에게 매번 승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익세보(益世報)는 1921년 12월 6일 기사에서 "지난달 28일 독립군 부대장 박경만이 체포, 18살 여자 독립군 김목란이 붙잡혔다"고 보도했다. 또 신보(晨報)도 1921년 2월 26일 기사에서 "홍범도가 일본군과 교전 중 중상을 입었다"면서 "최근 양강도 혜산 경찰서에 독립군 제1부대 대원 25명이 체포됐고, 종평경찰서에서도 제2부대 대원 34명을 체포했다"고 전했다.

신보(晨報)는 같은 날 '앞에서 넘어지면 뒤에서 일어서는 독립군'이라는 기사에서 "일본 당국 발표에 따르면 올 1월 중에 발생한 독립군 사건이 200여 건에 달한다"면서 "폭탄 사건 1건, 사상 사건 19건, 일본인 배척 행동 18건 등 211건"이라고 보도했다.

만주 참의부 독립군 대원(1923년)만주 참의부 독립군 대원(1923년)

국경 넘어 조국으로! 평안도·함경도 전투 가장 많아

쑨커즈 교수가 발굴한 우리 독립군 관련 기사 중 전투 상황을 전한 기사는 모두 40건이다. 전투 지역별로 보면 평안도가 22건으로 가장 많고, 함경도에서 일어난 전투가 10건이었다. 그리고 서울과 경기도에서 2건, 황해도, 양강도, 만주, 연해주에서도 전투가 있었다. 일본 측 사상자는 690여 명, 체포된 이를 빼고 독립군 사상자는 70여 명이다. 열세인 전력에서도 대승을 거둔 셈이다. 그리고 실제 전투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이들 기사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은 여러 가지 한계가 있다. 전투지역이 대부분 북한이고, 기사를 작성한 기자든, 전투를 직접 벌였던 독립군이든 이미 대부분 사망한 시점이기도 하다. 후속 연구는 쑨커즈 교수와 연구 조건이 될 때 우리 역사학계에서도 조사가 가능할 것이다. 다만 이들 기사를 통해 1920년대 우리 독립군이 국경을 넘어 일본 경찰서와 관공서를 타격하는 무장 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했다는 그동안의 연구가 사실임이 입증됐다.

그리고 이들 독립군은 1940년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한 우리 국군의 모체, 광복군의 주축이었다는 점도 역사적으로 입증된다. "위아래 없이 한마음으로 목숨을 걸고, 영원히 복수를 잊지 않을 것이다."라던 선조들의 선언이 새삼스럽게 가슴에 꽂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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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15 07:01:32
    특파원 리포트
청산리 전투 승리 기념 사진, 1920.10. 북로군정서

영원히 복수를 잊지 않을 것이다!

간도참변(間島慘變) 또는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고 불리는 일제의 만행이 있다. 항일 무장 독립군 토벌을 이유로 일본군이 만주 한인 망명촌을 습격해 우리 민족을 학살한 사건이다. 당시 문헌 등을 통해 확인된 학살 피해자가 1920년 10월 9일부터 11월 5일까지 27일 동안 3,469명이다. 학계는 일본군이 작전을 편 3~4개월 동안 우리 동포 수만 명이 죽임을 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위 사진은 1920년 12월 23일 중국 신문 '익세보(益世報)'에 난 우리 독립군의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 기사다. 우리 독립군은 "일본군이 우리 한인을 상대로 잔인무도한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 우리를 말살하려는 결심이라는 것을 안다. 우리는 자아 방위를 위해 일본에 선전포고한다. 와신상담하며 위아래 없이 한마음으로 목숨을 걸고, 영원히 복수를 잊지 않을 것이다"고 선언했다.


중국 상하이 푸단대 쑨커즈 교수는 1919년 4월부터 1928년 9월까지 당시 중국 신문에 보도된 우리 독립군 관련 기사를 모두 모아 정리했다. 일제를 상대로 한 대표적인 승전인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제외하고 10년 동안 모두 96건의 기사가 나왔다. 쑨커즈 교수는 해당 기사를 KBS에 단독으로 제공했다. 목숨 걸고 영원히 복수를 잊지 않을 것이라던 독립군의 선언은 거짓이 아니었다.

40번의 전투, 승전! 승전!

독립군과 일본군·경찰 간의 전투를 다룬 기사 중 단연 가장 큰 승리는 함경도 경성(鏡城)·청진항(淸津港) 전투였다. 중국신문 3개 매체가 이 전투 기사를 다뤘다. 아래 사진이 그중 하나인 경보(京報) 1921년 1월 27일 기사다.

독립군 소식을 다룬 경보(京報) 1921년 1월 27일 자 기사
"독립군은 한인이 모두 죽지 않는 이상 독립운동을 그치지 않을 것을 선언했다. 이달 4일 독립군이 경성·청진항에서 일본군인 40여 명을 사살했다. 일본군은 급히 파견부대를 보내 전투가 이어졌다. 일본군 사상자는 600여 명, 독립군 사상자는 50여 명이다. 이 전투로 독립군에 지원하는 사람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발생한 전투도 있었다. 신보(晨報) 1921년 12월 27일 기사다. "시베리아 통신사에 따르면 이달 16일 일본군 43연대와 독립군 간의 전투가 시베리아 선통사(善通寺) 근처에서 있었다. 수 시간 동안 이어진 격렬한 전투였다. 독립군 시신 1구가 발견됐다. 양쪽 다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비밀로 하고 공개하지 않았다."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독립군의 기세에 일본 경찰과 관리들이 혼비백산하는 때도 있었다. 아래 기사는 익세보(益世報) 1922년 3월 14일 기사다.


"이달 7일 밤 12시 평북 의주 옥상면에 독립군이 습격했다. 일본 경찰과 긴 시간 격전이 벌어졌다. 다른 공무로 출동했다가 귀대하던 일본 경찰 5명이 총성을 듣고 독립군 대부대가 온 것으로 알고 도망을 쳤다. 면사무소 당직을 서던 일본인 관리들도 총소리를 듣고 옷 입을 새도 없이 도망쳤다."

익세보(益世報)는 1921년 2월 16일 기사에서 "만주일일신문(滿州日日新聞)에 따르면 현재 한인 독립군이 8,000여 명에 이른다. 훈련은 대부분 러시아 무관이 담당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사기는 높았지만, 병력과 무기 면에서 열세였던 독립군에게 매번 승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익세보(益世報)는 1921년 12월 6일 기사에서 "지난달 28일 독립군 부대장 박경만이 체포, 18살 여자 독립군 김목란이 붙잡혔다"고 보도했다. 또 신보(晨報)도 1921년 2월 26일 기사에서 "홍범도가 일본군과 교전 중 중상을 입었다"면서 "최근 양강도 혜산 경찰서에 독립군 제1부대 대원 25명이 체포됐고, 종평경찰서에서도 제2부대 대원 34명을 체포했다"고 전했다.

신보(晨報)는 같은 날 '앞에서 넘어지면 뒤에서 일어서는 독립군'이라는 기사에서 "일본 당국 발표에 따르면 올 1월 중에 발생한 독립군 사건이 200여 건에 달한다"면서 "폭탄 사건 1건, 사상 사건 19건, 일본인 배척 행동 18건 등 211건"이라고 보도했다.

만주 참의부 독립군 대원(1923년)
국경 넘어 조국으로! 평안도·함경도 전투 가장 많아

쑨커즈 교수가 발굴한 우리 독립군 관련 기사 중 전투 상황을 전한 기사는 모두 40건이다. 전투 지역별로 보면 평안도가 22건으로 가장 많고, 함경도에서 일어난 전투가 10건이었다. 그리고 서울과 경기도에서 2건, 황해도, 양강도, 만주, 연해주에서도 전투가 있었다. 일본 측 사상자는 690여 명, 체포된 이를 빼고 독립군 사상자는 70여 명이다. 열세인 전력에서도 대승을 거둔 셈이다. 그리고 실제 전투는 이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이들 기사의 진위를 확인하는 것은 여러 가지 한계가 있다. 전투지역이 대부분 북한이고, 기사를 작성한 기자든, 전투를 직접 벌였던 독립군이든 이미 대부분 사망한 시점이기도 하다. 후속 연구는 쑨커즈 교수와 연구 조건이 될 때 우리 역사학계에서도 조사가 가능할 것이다. 다만 이들 기사를 통해 1920년대 우리 독립군이 국경을 넘어 일본 경찰서와 관공서를 타격하는 무장 투쟁을 활발하게 전개했다는 그동안의 연구가 사실임이 입증됐다.

그리고 이들 독립군은 1940년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한 우리 국군의 모체, 광복군의 주축이었다는 점도 역사적으로 입증된다. "위아래 없이 한마음으로 목숨을 걸고, 영원히 복수를 잊지 않을 것이다."라던 선조들의 선언이 새삼스럽게 가슴에 꽂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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