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래의 최강시사] 故 김대중-이희호 부부싸움 없었던 이유

입력 2019.08.16 (10:21) 수정 2019.08.16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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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희호 장로와 교회에서 한솥밥. DJ 사형수 시절에도 변함없이 교회학교 교사활동
- 이희호 여사 주변서 DJ와의 결혼 극구 반대. DJ는 평생 아내가 아닌 동지로 예우
- 남편이 외신기자들과 인터뷰하면 옆에서 영문 타자로 즉석 보도자료 쓰며 보필
- 감옥 아니면 가택연금…남편 위해 기도해야하는 입장이니 부부싸움할 사이 없었어

■ 프로그램명 : 김경래의 최강시사
■ 코너명 : <최강 인터뷰1>
■ 방송시간 : 8월 16일(금) 7:35~7:50 KBS1R FM 97.3 MHz
■ 진행 : 김경래 (뉴스타파 탐사팀장)
■ 출연 : 황용백 씨 (故 이희호 여사 측근)



▷ 김경래 : 내일모레 토요일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10주기입니다. 벌써 10년이 됐네요. 올해는 또 더 안타까운 일이 있었죠. 이희호 여사가 6월에 돌아가시면서 여러 분들이 지금 김대중 대통령하고 이희호 여사에 대한 기억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두 분하고 가장 가까웠던 분 중에 한 분을 연결해서 좀 이야기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일요일이 서거 10주기라고 안 했나요, 혹시? 토요일이라고 했나요? 잘못 말했네요. 내일모레 일요일입니다. 내일모레가 토요일이면 내일도 제가 방송을 해야 하는데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아까 김대중 전 대통령하고 이희호 여사와 가장 가까웠던 분 중에 한 분을 연결하겠습니다. 서울창천교회의 황용백 장로님 연결되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 황용백 : 안녕하세요.

▷ 김경래 : 장로님 아침 일찍 연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황용백 : 감사합니다.

▷ 김경래 : 김대중 대통령보다 이희호 여사를 먼저 아신 거죠?

▶ 황용백 : 네, 네.

▷ 김경래 : 어떻게 두 분은 인연이 있으셨어요? 처음에.

▶ 황용백 : 이희호 장로님이 창천감리교회의 좋은 신도였고요.

▷ 김경래 : 어릴 때부터 그랬나요?

▶ 황용백 : 그러니까 뭐 젊어서부터 계속.

▷ 김경래 : 젊어서부터?

▶ 황용백 : 네, 그렇게 하고 저는 연세대학교를 다니면서, 시작하면서 바로 연세대학교 앞에 있는 창천감리교회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뵙고 존경하게 됐고요. 그다음에 그 장로님께서 주도하시던 더불어선교회라고 하는 선교회의 멤버로 들어가서 같이 사랑을 받고 신앙생활을 했죠.

▷ 김경래 : 그러면 사실 이희호 여사가 외국에 유학을 떠나지 않았습니까? 그 전에 아신 거죠, 그러면?

▶ 황용백 : 그럼요, 그럼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희호 장로님이 유학 가신 것은 6.25사변 직후니까.

▷ 김경래 : 그래요?

▶ 황용백 : 네, 그렇죠.

▷ 김경래 : 갔다 와서 이제 알게 되신 거네요.

▶ 황용백 : 그렇죠, 그렇죠.

▷ 김경래 : 그렇군요. 이희호 여사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교회에서는.

▶ 황용백 : 훌륭하신 분이었죠.

▷ 김경래 : 그렇죠.

▶ 황용백 : 교회에는 성가대, 찬양하는 성가대 그다음에 교회학교, 선교회가 있었는데 이희호 장로님은 교사로 한동안 봉직하셨죠. 선생님 노릇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수난기, 또 김대중 대통령이 사형수였을 때도 변함없이 교회에 오셔서 가르치시고 그랬죠.

▷ 김경래 : 그런데 이제 이희호 여사랑 이렇게 인연이 있으셨는데 어느 날 이희호 여사가 김대중이라는 사람과 결혼을 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거죠, 교회에?

▶ 황용백 : 네, 네.

▷ 김경래 : 그때 반대가 굉장했다고 그래요. 장로님도 막 반대하셨나요?

▶ 황용백 : 아니에요. 저는 잘 그때는 그것을 이렇게 말씀을 드릴 그런 처지는 아니었는데요. 그때 이희호 장로님이 여성 지도자로서의 앞으로 희망이 있는 분이었다고들 그래요. 그래서 이화대학교에서는 앞으로 이화대학교 총장도 하셔야 하고 또 여권 신장을 위해서 굉장히 힘을 써야 할 분인데 그 당시에는 뭐 김대중 대통령이 국회의원도 아니고 그런, 활동은 하셨지만 그런 환경 가운데 있는데 굳이 김대중 씨와 결혼을 해서 여권 신장이라든지 여성운동에 걸림돌이 되어서 되겠느냐 그래서 이화대학교 총장을 비롯한 많은 여성 지도자들이 아주 극구 반대를 했다고 그래요.

▷ 김경래 : 더군다나 이제 뭐 지금은 그런 게 많이 없어졌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당시 재혼이었지 않습니까, 상처를 해서. 그렇죠?

▶ 황용백 : 맞죠.

▷ 김경래 : 그 부분도 많이 반대의 이유가 됐을 것 같아요, 그 당시에. 그렇죠?

▶ 황용백 : 맞아요. 왜냐하면 그분은 이제 노모도 계셨고 또 지금 홍일, 고인이 되신 김홍일, 김홍업 그때는 어린 나이였고 또 뭐 활동하시는 과정이니까 넉넉하지 못하고 하는 환경에 매여 있는 것이 안타깝다 그래서 아마 신도들 반대도 많았던 것 같아요.

▷ 김경래 : 그랬겠죠. 네가 뭐가 그렇게 부족해서, 아쉬워서.

▶ 황용백 : 그럼요, 그럼요.

▷ 김경래 : 그런 이야기했겠죠, 당연히. 그리고 또 하나가 이제 종교가 달라요, 사실 비슷하기는 하지만. 카톨릭 신자 아닙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은.

▶ 황용백 : 그렇죠.

▷ 김경래 : 그래서 개신교 쪽에서 보면 카톨릭 신자랑 굳이 결혼할 이유가 있겠냐 이런 이야기도 분명히 있었을 것 같아요.

▶ 황용백 : 아니, 뭐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는데 사랑해서 결혼하는 건 문제가 아닌데 이제 결단들을 하시고 결혼하려고 보니까 김대중 씨의 대부는 장면 총리였거든요. 그래서 장면 씨 계보로 있던 정치인들은 전부 다 카톨릭, 그분들은 같고 그다음에 이제 구교는 그렇게 됐고 신교는 안 그랬거든요.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카톨릭 신자가 되시면서 거기 교리에 보면 카톨릭 신자하고 결혼하면 무조건 상대는 카톨릭 교인이 된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하는 그런 제도였던 것 같아요.

▷ 김경래 : 그렇군요.

▶ 황용백 : 네, 그런데 개신교는 그게 아니거든요. 그냥 결혼하고 사랑하면 결혼하고 어느 시점이 되면 같이 종교활동도 하면 좋겠다 이렇게 했지 그런 의무조항이 아니었는데 카톨릭에서는 그것이 철저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문제점이 생겼었죠.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이 결혼하려고 보니까 뭐 부인이 카톨릭으로 올 수는 없는 여건이고 그래서 노기남 그 당시에 대주교께서 로마카톨릭에다가, 아마 본부에다가 허가를 맡으신 것 같아요, 사유를 이야기하고.

▷ 김경래 : 그랬군요.

▶ 황용백 : 그래서 역사에서 처음이라고 그래요, 교황이 윤허한 것이. 그렇게 하고 이제 이희호 장로님하고 결혼을 그렇게 하시게 됐죠.

▷ 김경래 : 그랬군요. 그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장로님께서 김대중 전 대통령하고 이희호 여사 사는 공간, 동교동 집에 오랫동안 거주를 하셨다고요?

▶ 황용백 : 네, 맞습니다.

▷ 김경래 : 어떤 일이 있었던 거죠?

▶ 황용백 : 저는 사실은 김대중 대통령은 그냥 지면을 통해서만 아는 입장이었고 부인 되시는 이희호 장로님하고는 매주 기독교 관계로 해서 교회에서 뵙고 인사하고 사랑을 받고 하는 입장이었는데요. 제가 어떤 환경 변화로 인해서 좀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그때 이희호 장로님께서 저보고 어머님, 또 아이들 이렇게 데리고 어디를 가지 말고 자기 집으로 들어오면 좋겠다 그래서 그 댁이 집이 두 채였어요.

▷ 김경래 : 아, 그래요?

▶ 황용백 : 네, 그래서 178-1호는 본인들이 사시고 그 2호가 비서라든지 뭐 여러 분들이 기숙하는 곳이었는데 그 당시에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망명 중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그 객식구들이 너무 많으니까 그러니까 가급적이면 우리가 이사 와서 좀 한가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저희한테 권면이 계셔서 저희가 이제 거기로 전세로 들어갔죠.

▷ 김경래 : 그랬군요. 그 뒤에 그러면 같이 지내기도 하셨나요?

▶ 황용백 : 그럼요. 제가 이제 들어가서 저는 저대로 활동을 하고 있는데 납치되어서 오시더라고요.

▷ 김경래 : 그랬군요.

▶ 황용백 : 그 납치되어서 오실 때 저희가 이제 뵙게 됐어요.

▷ 김경래 : 그때가 납치 사건이 있었던 게 1973년 아닙니까, 그렇죠?

▶ 황용백 : 네, 네.

▷ 김경래 : 그때가 아마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정치적으로도 그렇고 자연인으로서도 굉장히 힘든 시기였을 거라고 상상이 돼요.

▶ 황용백 : 네, 맞습니다.

▷ 김경래 : 이야기도 많이 나눠보시고 하셨을 텐데 당시에 어느 정도 상황이었어요? 그 두 분은.

▶ 황용백 : 두 분 결혼하셨는데 제가 늘 참 여러 가지로 존경하는 것 중에 하나가 김대중 대통령이 야인 생활을 하시고 정치하시고 대통령이 되시는 그 과정 가운데서 변함없이 부인을 대하는 것이 어떠한 집안에 있는 아내나 아녀자로 대하는 것이 아니고 일생 동안을 같이 활동하는 동지로 대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모든 매사를 같이 협의하고 또 협력하고 하는 입장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그렇게 하시니까 부인께서도 남편을 보필하는 것들이 최선을 다해서 하시는데 영어를 잘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외국 기자들하고 이야기를 그때 연금되어 있을 때도 이렇게 와서 하면 옆에서 스텐실이라고 하는 그 인쇄지에다가 타자를 막 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두 분이 이야기하는 한국말, 그다음에 영어로 하면 통역도 하시면서 그냥. 김대중 씨가 그때는 능숙한 그런 영어 실력은 아니셨던 것 같아요. 그러면 부인이 이제 막 이희호 장로님이 스텐실로다가 막 타이핑을 해요. 그렇게 하고 나서 인터뷰가 끝나면 차를 대접하고 간단한 다과를 대접하는 동안에 자기는 지하실 가서 스텐실로다가 인쇄를, 프린팅을 해서 그거를 갖다가 딱 내놓는 거예요 기자한테. 당신하고 우리 남편하고 이런 대화를 했는데 이것을 기사화했으면 좋겠다 해서 그래서 저는 옆에서 간혹 보고 하고서 저런 부인이 얼마나 대단한가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을 보조, 보필하는 분은 최선을 다했고 또 남편은 자기 부인을 동지로 예우를 하고 아주 보기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 김경래 : 두 분이 싸우지는 않으셨나요?

▶ 황용백 : 싸울 사이가 없었죠.

▷ 김경래 : 그래요?

▶ 황용백 : 네, 뭐 하면 감옥에 가시고 그렇지 않으면 연금 상태로 자진 기도 생활을 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못 하셨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 김경래 : 그 우여곡절 끝에, 오랜 고난의 세월 끝에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때 뭐 이희호 여사라든가 그냥 이렇게 밖으로 보이는 공식적인 반응 말고 자연인으로서 이렇게 어떤 기쁨이라든가 이런 걸 표현을 하셨나요?

▶ 황용백 : 그럼요. 기쁘시죠. 그분이, 그분만큼 산전수전 겪은 양반이 없다고 저는 그 옆에서 보면서 그랬어요. 그 양반이 선거 때만 되면 그냥 색깔론으로 그냥 갖은 수난도 다 당하시고 야당으로서도 어려움을 당하시고. 하여튼 옆에서 보면 안타까울 정도로 고난을 많이 당하셨거든요. 그런데 그분만 당한 것이 아니라 남자 쪽, 그러니까 김대중 대통령 쪽의 형제들도 다 불이익을 당하고 이희호 장로님의 형제들도 다 불이익을 당하고 또 주변에서 협력하는 사람들 당하는 고난은 눈물 흘리지 않으면 못 보는 입장이셨기 때문에 두 분들 당한 고난은 말도 못하죠. 말도 못하죠. 그런 분들이 마지막 선거가 될 때 저희들은 뭐 옆에서 응원하는 사람들이니까 어떤 때는 되는 줄 알았는데 안 되시고 또 이기는 줄 알았는데 지고 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겠어요. 그래서 당혹스러운 건, 제가 가서 인사드렸을 때 당혹스러운 건 우리한테 갑작스럽게 화분을 하나 나를 딱 주시면서 "황 장로 이거 갖다가 집에서 길러 이렇게". 그러니까 얼마나 그랬으면 그렇게 할까 해서 그때 눈물이 확 나고 그랬는데 막상 승리를 딱 하시는 날 자기 아우가 돌아갔어요.

▷ 김경래 : 그래요?

▶ 황용백 : 네, 그런데 그 아우가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지금 이렇게 운명한다는 것을 형님한테 이야기하지 말라고 마지막 순간까지 비밀로 지켜주라 하는 그런 형제지간의 우애가 있었고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그러한 가정이나 가사는 다 떠나신 입장이었으니까 그 기쁨을 민주화 그다음에 남북관계의 어떤 새로운 장을 여는 그런 모습이다 이렇게 해서 너무 좋아하셨죠. 그래서 그분이 디딤돌로 하셨던 아태재단이 남북문제를 해결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그때 통일 문제를 앞세우시고 그래서 처음으로 아마 우리나라 대통령으로서는 북한을 방문할 수 있는 그러한 장족의 역사도 이루어진 것 같아요. 그래서 너무 좋아하셨어요.

▷ 김경래 : 그랬군요. 어쨌든 뭐 10년 전에 김대중 대통령은 서거하셨고 그리고 6월에 이희호 여사도 돌아가셨습니다. 여사님 돌아가시기 전에 만나셨다고, 이틀 전에. 그때 뭐라고.

▶ 황용백 : 가서 뵀었죠.

▷ 김경래 : 뭐라고 좀 이야기가 있으셨습니까?

▶ 황용백 : 그때는 말씀을 안 하셨어요.

▷ 김경래 : 하기는 힘든.

▶ 황용백 : 안 하시고 의식은 있으셔서 그래서 장로님 사랑합니다 이렇게. 이제 좀 힘내세요 그러면 이렇게 꽉꽉 손으로 사인을 주시는 정도로 아는 모습을 하셨고요.

▷ 김경래 : 혹시 장로님이 보시기에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의 삶이 우리 사회에 주는 어떤 메시지가 뭐라고 보십니까? 시간이 길지 않아서 많이 듣지는 못하겠는데요, 짧게 말씀해 주시면.

▶ 황용백 : 저는 그 내외분이 김대중 대통령이 납치되어서 오셔서 나 예수님 만났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신앙으로 완전히 변화되어서 이웃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해하고 그랬습니다.

▷ 김경래 : 알겠습니다. 할 이야기가 많은데 오늘은 여기까지만 듣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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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래의 최강시사] 故 김대중-이희호 부부싸움 없었던 이유
    • 입력 2019-08-16 10:21:06
    • 수정2019-08-16 10:23:26
    최강시사
- 이희호 장로와 교회에서 한솥밥. DJ 사형수 시절에도 변함없이 교회학교 교사활동
- 이희호 여사 주변서 DJ와의 결혼 극구 반대. DJ는 평생 아내가 아닌 동지로 예우
- 남편이 외신기자들과 인터뷰하면 옆에서 영문 타자로 즉석 보도자료 쓰며 보필
- 감옥 아니면 가택연금…남편 위해 기도해야하는 입장이니 부부싸움할 사이 없었어

■ 프로그램명 : 김경래의 최강시사
■ 코너명 : <최강 인터뷰1>
■ 방송시간 : 8월 16일(금) 7:35~7:50 KBS1R FM 97.3 MHz
■ 진행 : 김경래 (뉴스타파 탐사팀장)
■ 출연 : 황용백 씨 (故 이희호 여사 측근)



▷ 김경래 : 내일모레 토요일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10주기입니다. 벌써 10년이 됐네요. 올해는 또 더 안타까운 일이 있었죠. 이희호 여사가 6월에 돌아가시면서 여러 분들이 지금 김대중 대통령하고 이희호 여사에 대한 기억을 나누고 있습니다. 오늘 저희들은 두 분하고 가장 가까웠던 분 중에 한 분을 연결해서 좀 이야기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일요일이 서거 10주기라고 안 했나요, 혹시? 토요일이라고 했나요? 잘못 말했네요. 내일모레 일요일입니다. 내일모레가 토요일이면 내일도 제가 방송을 해야 하는데 큰일 날 뻔했습니다. 아까 김대중 전 대통령하고 이희호 여사와 가장 가까웠던 분 중에 한 분을 연결하겠습니다. 서울창천교회의 황용백 장로님 연결되어 있습니다. 안녕하세요.

▶ 황용백 : 안녕하세요.

▷ 김경래 : 장로님 아침 일찍 연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황용백 : 감사합니다.

▷ 김경래 : 김대중 대통령보다 이희호 여사를 먼저 아신 거죠?

▶ 황용백 : 네, 네.

▷ 김경래 : 어떻게 두 분은 인연이 있으셨어요? 처음에.

▶ 황용백 : 이희호 장로님이 창천감리교회의 좋은 신도였고요.

▷ 김경래 : 어릴 때부터 그랬나요?

▶ 황용백 : 그러니까 뭐 젊어서부터 계속.

▷ 김경래 : 젊어서부터?

▶ 황용백 : 네, 그렇게 하고 저는 연세대학교를 다니면서, 시작하면서 바로 연세대학교 앞에 있는 창천감리교회를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뵙고 존경하게 됐고요. 그다음에 그 장로님께서 주도하시던 더불어선교회라고 하는 선교회의 멤버로 들어가서 같이 사랑을 받고 신앙생활을 했죠.

▷ 김경래 : 그러면 사실 이희호 여사가 외국에 유학을 떠나지 않았습니까? 그 전에 아신 거죠, 그러면?

▶ 황용백 : 그럼요, 그럼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이희호 장로님이 유학 가신 것은 6.25사변 직후니까.

▷ 김경래 : 그래요?

▶ 황용백 : 네, 그렇죠.

▷ 김경래 : 갔다 와서 이제 알게 되신 거네요.

▶ 황용백 : 그렇죠, 그렇죠.

▷ 김경래 : 그렇군요. 이희호 여사는 어떤 분이었습니까? 교회에서는.

▶ 황용백 : 훌륭하신 분이었죠.

▷ 김경래 : 그렇죠.

▶ 황용백 : 교회에는 성가대, 찬양하는 성가대 그다음에 교회학교, 선교회가 있었는데 이희호 장로님은 교사로 한동안 봉직하셨죠. 선생님 노릇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수난기, 또 김대중 대통령이 사형수였을 때도 변함없이 교회에 오셔서 가르치시고 그랬죠.

▷ 김경래 : 그런데 이제 이희호 여사랑 이렇게 인연이 있으셨는데 어느 날 이희호 여사가 김대중이라는 사람과 결혼을 한다 이렇게 이야기를 한 거죠, 교회에?

▶ 황용백 : 네, 네.

▷ 김경래 : 그때 반대가 굉장했다고 그래요. 장로님도 막 반대하셨나요?

▶ 황용백 : 아니에요. 저는 잘 그때는 그것을 이렇게 말씀을 드릴 그런 처지는 아니었는데요. 그때 이희호 장로님이 여성 지도자로서의 앞으로 희망이 있는 분이었다고들 그래요. 그래서 이화대학교에서는 앞으로 이화대학교 총장도 하셔야 하고 또 여권 신장을 위해서 굉장히 힘을 써야 할 분인데 그 당시에는 뭐 김대중 대통령이 국회의원도 아니고 그런, 활동은 하셨지만 그런 환경 가운데 있는데 굳이 김대중 씨와 결혼을 해서 여권 신장이라든지 여성운동에 걸림돌이 되어서 되겠느냐 그래서 이화대학교 총장을 비롯한 많은 여성 지도자들이 아주 극구 반대를 했다고 그래요.

▷ 김경래 : 더군다나 이제 뭐 지금은 그런 게 많이 없어졌지만 김대중 대통령이 당시 재혼이었지 않습니까, 상처를 해서. 그렇죠?

▶ 황용백 : 맞죠.

▷ 김경래 : 그 부분도 많이 반대의 이유가 됐을 것 같아요, 그 당시에. 그렇죠?

▶ 황용백 : 맞아요. 왜냐하면 그분은 이제 노모도 계셨고 또 지금 홍일, 고인이 되신 김홍일, 김홍업 그때는 어린 나이였고 또 뭐 활동하시는 과정이니까 넉넉하지 못하고 하는 환경에 매여 있는 것이 안타깝다 그래서 아마 신도들 반대도 많았던 것 같아요.

▷ 김경래 : 그랬겠죠. 네가 뭐가 그렇게 부족해서, 아쉬워서.

▶ 황용백 : 그럼요, 그럼요.

▷ 김경래 : 그런 이야기했겠죠, 당연히. 그리고 또 하나가 이제 종교가 달라요, 사실 비슷하기는 하지만. 카톨릭 신자 아닙니까? 김대중 전 대통령은.

▶ 황용백 : 그렇죠.

▷ 김경래 : 그래서 개신교 쪽에서 보면 카톨릭 신자랑 굳이 결혼할 이유가 있겠냐 이런 이야기도 분명히 있었을 것 같아요.

▶ 황용백 : 아니, 뭐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는데 사랑해서 결혼하는 건 문제가 아닌데 이제 결단들을 하시고 결혼하려고 보니까 김대중 씨의 대부는 장면 총리였거든요. 그래서 장면 씨 계보로 있던 정치인들은 전부 다 카톨릭, 그분들은 같고 그다음에 이제 구교는 그렇게 됐고 신교는 안 그랬거든요. 그런데 김대중 대통령이 카톨릭 신자가 되시면서 거기 교리에 보면 카톨릭 신자하고 결혼하면 무조건 상대는 카톨릭 교인이 된다는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하는 그런 제도였던 것 같아요.

▷ 김경래 : 그렇군요.

▶ 황용백 : 네, 그런데 개신교는 그게 아니거든요. 그냥 결혼하고 사랑하면 결혼하고 어느 시점이 되면 같이 종교활동도 하면 좋겠다 이렇게 했지 그런 의무조항이 아니었는데 카톨릭에서는 그것이 철저하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문제점이 생겼었죠. 그래서 김대중 대통령이 결혼하려고 보니까 뭐 부인이 카톨릭으로 올 수는 없는 여건이고 그래서 노기남 그 당시에 대주교께서 로마카톨릭에다가, 아마 본부에다가 허가를 맡으신 것 같아요, 사유를 이야기하고.

▷ 김경래 : 그랬군요.

▶ 황용백 : 그래서 역사에서 처음이라고 그래요, 교황이 윤허한 것이. 그렇게 하고 이제 이희호 장로님하고 결혼을 그렇게 하시게 됐죠.

▷ 김경래 : 그랬군요. 그 우여곡절 끝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장로님께서 김대중 전 대통령하고 이희호 여사 사는 공간, 동교동 집에 오랫동안 거주를 하셨다고요?

▶ 황용백 : 네, 맞습니다.

▷ 김경래 : 어떤 일이 있었던 거죠?

▶ 황용백 : 저는 사실은 김대중 대통령은 그냥 지면을 통해서만 아는 입장이었고 부인 되시는 이희호 장로님하고는 매주 기독교 관계로 해서 교회에서 뵙고 인사하고 사랑을 받고 하는 입장이었는데요. 제가 어떤 환경 변화로 인해서 좀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그때 이희호 장로님께서 저보고 어머님, 또 아이들 이렇게 데리고 어디를 가지 말고 자기 집으로 들어오면 좋겠다 그래서 그 댁이 집이 두 채였어요.

▷ 김경래 : 아, 그래요?

▶ 황용백 : 네, 그래서 178-1호는 본인들이 사시고 그 2호가 비서라든지 뭐 여러 분들이 기숙하는 곳이었는데 그 당시에 김대중 대통령이 미국 망명 중에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그 객식구들이 너무 많으니까 그러니까 가급적이면 우리가 이사 와서 좀 한가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저희한테 권면이 계셔서 저희가 이제 거기로 전세로 들어갔죠.

▷ 김경래 : 그랬군요. 그 뒤에 그러면 같이 지내기도 하셨나요?

▶ 황용백 : 그럼요. 제가 이제 들어가서 저는 저대로 활동을 하고 있는데 납치되어서 오시더라고요.

▷ 김경래 : 그랬군요.

▶ 황용백 : 그 납치되어서 오실 때 저희가 이제 뵙게 됐어요.

▷ 김경래 : 그때가 납치 사건이 있었던 게 1973년 아닙니까, 그렇죠?

▶ 황용백 : 네, 네.

▷ 김경래 : 그때가 아마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가 정치적으로도 그렇고 자연인으로서도 굉장히 힘든 시기였을 거라고 상상이 돼요.

▶ 황용백 : 네, 맞습니다.

▷ 김경래 : 이야기도 많이 나눠보시고 하셨을 텐데 당시에 어느 정도 상황이었어요? 그 두 분은.

▶ 황용백 : 두 분 결혼하셨는데 제가 늘 참 여러 가지로 존경하는 것 중에 하나가 김대중 대통령이 야인 생활을 하시고 정치하시고 대통령이 되시는 그 과정 가운데서 변함없이 부인을 대하는 것이 어떠한 집안에 있는 아내나 아녀자로 대하는 것이 아니고 일생 동안을 같이 활동하는 동지로 대하시더라고요. 그러니까 모든 매사를 같이 협의하고 또 협력하고 하는 입장으로 김대중 대통령이 그렇게 하시니까 부인께서도 남편을 보필하는 것들이 최선을 다해서 하시는데 영어를 잘하셨잖아요. 그러니까 외국 기자들하고 이야기를 그때 연금되어 있을 때도 이렇게 와서 하면 옆에서 스텐실이라고 하는 그 인쇄지에다가 타자를 막 치는 거예요. 그러니까 두 분이 이야기하는 한국말, 그다음에 영어로 하면 통역도 하시면서 그냥. 김대중 씨가 그때는 능숙한 그런 영어 실력은 아니셨던 것 같아요. 그러면 부인이 이제 막 이희호 장로님이 스텐실로다가 막 타이핑을 해요. 그렇게 하고 나서 인터뷰가 끝나면 차를 대접하고 간단한 다과를 대접하는 동안에 자기는 지하실 가서 스텐실로다가 인쇄를, 프린팅을 해서 그거를 갖다가 딱 내놓는 거예요 기자한테. 당신하고 우리 남편하고 이런 대화를 했는데 이것을 기사화했으면 좋겠다 해서 그래서 저는 옆에서 간혹 보고 하고서 저런 부인이 얼마나 대단한가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남편을 보조, 보필하는 분은 최선을 다했고 또 남편은 자기 부인을 동지로 예우를 하고 아주 보기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 김경래 : 두 분이 싸우지는 않으셨나요?

▶ 황용백 : 싸울 사이가 없었죠.

▷ 김경래 : 그래요?

▶ 황용백 : 네, 뭐 하면 감옥에 가시고 그렇지 않으면 연금 상태로 자진 기도 생활을 해야 하는 입장이니까 못 하셨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 김경래 : 그 우여곡절 끝에, 오랜 고난의 세월 끝에 대통령이 됐습니다. 그때 뭐 이희호 여사라든가 그냥 이렇게 밖으로 보이는 공식적인 반응 말고 자연인으로서 이렇게 어떤 기쁨이라든가 이런 걸 표현을 하셨나요?

▶ 황용백 : 그럼요. 기쁘시죠. 그분이, 그분만큼 산전수전 겪은 양반이 없다고 저는 그 옆에서 보면서 그랬어요. 그 양반이 선거 때만 되면 그냥 색깔론으로 그냥 갖은 수난도 다 당하시고 야당으로서도 어려움을 당하시고. 하여튼 옆에서 보면 안타까울 정도로 고난을 많이 당하셨거든요. 그런데 그분만 당한 것이 아니라 남자 쪽, 그러니까 김대중 대통령 쪽의 형제들도 다 불이익을 당하고 이희호 장로님의 형제들도 다 불이익을 당하고 또 주변에서 협력하는 사람들 당하는 고난은 눈물 흘리지 않으면 못 보는 입장이셨기 때문에 두 분들 당한 고난은 말도 못하죠. 말도 못하죠. 그런 분들이 마지막 선거가 될 때 저희들은 뭐 옆에서 응원하는 사람들이니까 어떤 때는 되는 줄 알았는데 안 되시고 또 이기는 줄 알았는데 지고 할 때가 얼마나 많이 있겠어요. 그래서 당혹스러운 건, 제가 가서 인사드렸을 때 당혹스러운 건 우리한테 갑작스럽게 화분을 하나 나를 딱 주시면서 "황 장로 이거 갖다가 집에서 길러 이렇게". 그러니까 얼마나 그랬으면 그렇게 할까 해서 그때 눈물이 확 나고 그랬는데 막상 승리를 딱 하시는 날 자기 아우가 돌아갔어요.

▷ 김경래 : 그래요?

▶ 황용백 : 네, 그런데 그 아우가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에 내가 지금 이렇게 운명한다는 것을 형님한테 이야기하지 말라고 마지막 순간까지 비밀로 지켜주라 하는 그런 형제지간의 우애가 있었고 김대중 대통령께서는 그러한 가정이나 가사는 다 떠나신 입장이었으니까 그 기쁨을 민주화 그다음에 남북관계의 어떤 새로운 장을 여는 그런 모습이다 이렇게 해서 너무 좋아하셨죠. 그래서 그분이 디딤돌로 하셨던 아태재단이 남북문제를 해결하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래서 그때 통일 문제를 앞세우시고 그래서 처음으로 아마 우리나라 대통령으로서는 북한을 방문할 수 있는 그러한 장족의 역사도 이루어진 것 같아요. 그래서 너무 좋아하셨어요.

▷ 김경래 : 그랬군요. 어쨌든 뭐 10년 전에 김대중 대통령은 서거하셨고 그리고 6월에 이희호 여사도 돌아가셨습니다. 여사님 돌아가시기 전에 만나셨다고, 이틀 전에. 그때 뭐라고.

▶ 황용백 : 가서 뵀었죠.

▷ 김경래 : 뭐라고 좀 이야기가 있으셨습니까?

▶ 황용백 : 그때는 말씀을 안 하셨어요.

▷ 김경래 : 하기는 힘든.

▶ 황용백 : 안 하시고 의식은 있으셔서 그래서 장로님 사랑합니다 이렇게. 이제 좀 힘내세요 그러면 이렇게 꽉꽉 손으로 사인을 주시는 정도로 아는 모습을 하셨고요.

▷ 김경래 : 혹시 장로님이 보시기에 김대중 대통령과 이희호 여사의 삶이 우리 사회에 주는 어떤 메시지가 뭐라고 보십니까? 시간이 길지 않아서 많이 듣지는 못하겠는데요, 짧게 말씀해 주시면.

▶ 황용백 : 저는 그 내외분이 김대중 대통령이 납치되어서 오셔서 나 예수님 만났다고 그러시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신앙으로 완전히 변화되어서 이웃을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해하고 그랬습니다.

▷ 김경래 : 알겠습니다. 할 이야기가 많은데 오늘은 여기까지만 듣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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