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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은 왜 박재동 ‘성폭력’ 징계를 “위법하다” 했나?
입력 2019.08.20 (11:01) 취재K
법원은 왜 박재동 ‘성폭력’ 징계를 “위법하다” 했나?
'미투' 운동이 활발하던 지난해, 성추행·성희롱 의혹으로 재직 중이던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에서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받은 박재동 화백. 그의 이름이 최근 1년여 만에 다시 언론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박 화백이 "정직 3개월 징계를 취소해달라"며 한예종을 상대로 낸 행정소송에서 지난달 26일 승소했기 때문입니다. 징계 처분이 내려진 지 1년하고도 한 달 만입니다. 패소한 한예종이 정해진 기간 안에 항소하지 않아, 판결은 지난 15일 확정됐습니다.

한예종 측은 KBS 기자와의 통화에서 "(교수로 있던 박 화백이) 이미 정년퇴직을 했기 때문에 추가 행정절차는 없지만, 정직 기간 3개월 동안 받지 못한 급여 등 이번 판결에 따라 학교가 부담해야 할 비용이 있다면 박 화백에게 지급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박 화백의 승소 소식은 다수 매체에 짧게 보도됐을 뿐, 구체적인 판결의 사유는 여태껏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KBS가 판결문을 입수해 내용을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 법원 "박재동 징계, '타당성' 현저히 잃었다"

법원의 이번 판결은 박 화백이 문제가 된 성희롱·성추행을 하지 않았다거나, 박 화백의 언행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가 이 일로 받은 징계가 너무 무겁다는 뜻이죠.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박 화백에 대한 징계가 "비례의 원칙에 위배돼 그 징계재량권을 일탈, 남용한 것으로서 위법하다"라고 밝혔습니다. '정직 3개월'이라는 중징계는 사회통념상 "현저하게 타당성을 잃어" 징계권자에게 맡겨진 재량권을 남용한 것이고, 이 경우 견책이나 감봉같은 경징계만 가능하다는 판단입니다. 왜 이런 결론이 나왔을까요?

우선 한예종 진상조사위원회가 결정한 박 화백의 징계 사유를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크게 세 가지인데요.

첫 번째 징계 사유는 박 화백이 2017년 수업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성희롱'에 해당하는 발언을 세 차례 했다는 겁니다. 한 수강생이 학교에 뒤늦게 신고를 하거나 학생들이 학내에 자보를 붙여 알려진 내용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여성은 부드러운 선만 그리는 걸 좋아하고, 남성은 좀 더 구조에 집중한다'는 취지로 남녀를 구분해서 이야기한 점 ▲남녀 커플이 있으면 '남자는 거목으로, 여자는 그 위에 앉은 매미로 그릴 수 있다'라고 발언한 점 ▲수업시간에 학생이 튼 걸그룹 뮤직비디오의 배경에 과일이 떠다니는 걸 보고 "여자는 과일에 비교할 수 있다. 상큼하고 먹음직스럽다. 씨를 얻을 수 있다"라고 발언했다는 점입니다. 한예종 진상조사위는 이 세 발언이 모두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두 번째 징계 사유는 모 웹툰 작가가 2011년 박 화백에게 당했다고 폭로한 성추행 피해였습니다. 전체 징계사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한 방송사가 지난해 2월 '미투' 운동 보도의 일환으로 일부 기사화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관련 기사: [단독] 만화계도 '미투'…"시사만화 거장 박재동 화백이 성추행") 의혹 중 피해자가 공개적으로 밝힌 내용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례를 부탁하러 갔는데) 반갑다면서 치마 아래로 손을 넣어 다리 사이로 허벅지를 쓰다듬은 점 ▲그동안 교제했던 남성 두 명과 모두 성행위를 해봤냐고 묻고, "내가 주례해주면 너는 어떻게 해줄 건데" "나랑 호텔에서 춤 한번 춰줄 수 있겠냐"라고 말한 점 ▲턱 아래쪽을 쓰다듬더니 "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맛있게 생겼다고 생각했어"라고 말했다는 점입니다.

세 번째 징계 사유는 학교 진상조사 내용을 외부에 '유출'했다는 점이었습니다. 학교 진상조사위원회 조사를 받은 뒤, "억울함이 소명됐다"는 식으로 기자와 일방적 주장의 인터뷰를 했다는 내용입니다.

한예종 교원 징계위가 이를 받아들임에 따라 박 화백은 지난해 6월, 정직 3개월의 징계 처분을 받았습니다.


◆ '징계 시효 도과' 못 걸러낸 한예종

그런데 이 중 두 번째, 세 번째 징계 사유는 넉 달 만인 지난해 10월 고꾸라지고 맙니다. 박 화백이 징계에 불복하면서 열린 교원소청심사위원회가, 징계 사유 세 개 중 두 개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판결문에 그 이유가 자세히 옮겨져 있습니다.

소청심사위는 우선 박 화백이 웹툰 작가를 성추행했다는 의혹에 대해선 이미 징계 시효가 지나서 정당한 징계 사유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한예종 교직원에게 적용되는 국가공무원법 83조는 "징계의결 등의 요구는 징계 등의 사유가 발생한 날부터 3년(제78조의2 제1항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5년)이 지나면 하지 못한다"라고 규정합니다. 피해는 2011년에 있었는데 이를 근거로 2018년에 징계를 내렸으니 잘못됐다는 겁니다.

법이 정한 징계 시효가 과연 적정한지와 별개로(국회에는 이 징계 시효를 연장하는 법안이 발의돼 있습니다), 한예종 측이 관련 법규를 제대로 살피지 않거나 알고도 이를 무시한 채 섣불리 중징계를 내렸다는 지적은 피할 수 없게 됐습니다. 사실 박 화백뿐만이 아닙니다. 성희롱 발언이 문제가 돼 지난해 한예종에서 정직 1개월 처분을 받은 황지우 전 교수(시인) 역시, 징계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소청심사위에서 징계가 취소됐습니다. 성폭력 문제에 엄중히 대처할 필요를 고려했다 할지라도, 현 제도하에선 번복될 가능성이 높은 허술한 조치로 징계 제도의 무게감을 스스로 떨어트린 건 아닌지 아쉬운 대목입니다. 게다가 박 화백 측에 줘야하는 소송 비용 6천 5백만 원을 포함해, 한예종은 이번 소송을 위해서만 최소 1억 원 안팎을 지출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편 소청심사위는 박 화백이 진상조사 내용을 외부에 유출했다는 세 번째 징계 사유에 대해서는, 언론중재법상 반론보도청구권을 행사한 걸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징계 사유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소청심사위는 그럼에도 한예종 진상조사위가 밝힌 첫 번째 징계사유, 즉 수업시간에 박 화백이 성희롱 발언을 했다는 점만으로도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내리는 데 문제가 없다, 과중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박 화백의 처분 취소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최종적으로 인정되는 징계 사유만으로는 "정직 3개월은 과중하다"고 본 법원과 판단이 엇갈린 지점입니다.

◆ '성추행 의혹'에 공개 사과했지만…재판에선 "허위사실" 주장

가장 큰 징계 사유가 소청심사위를 거쳐 사라져 버린 상황에서, "비례의 원칙"을 강조하는 법원이 박 화백의 손을 들어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 모릅니다. 다만 고심한 흔적은 보입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대법원 판례(94다52294 판결 등)를 들어 "징계 시효가 지난 비위 행위도 징계 양정에 있어선 참작할 수 있다"라고 밝혔습니다. 시효가 지난 행위를 직접 징계 사유로 삼지는 못하더라도, 징계의 경중을 정하는 데 있어선 참고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에 따라 2011년 웹툰 작가 성추행 문제도 "이 사건 징계양정시 가중적 요소로 고려될 수는 있다"라고 재판부는 설명했습니다.

문제는 재판부가 2011년의 성추행이 실제 있었던 일인지가 불명확하다고 판단했다는 점입니다. 웹툰 작가의 성추행 폭로가 그저 거짓말에 불과했다는 얘기는 물론 아닙니다. "실제 위 징계사유가 인정되는지에 대해 별도 객관적인 근거로써 입증된 바가 없어 이를 징계양정에 있어 참작하기 위해서는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라고 재판부는 밝혔습니다. 한예종 진상조사위는 피해자의 진술을 근거로 성추행 피해를 사실상 인정했지만, 재판부는 더 엄격한 잣대가 필요하다고 본 것으로 풀이됩니다.

여기엔 박 화백의 완강한 입장도 일부 영향을 준 걸로 보입니다. 판결문을 보면, 박 화백 측은 징계처분 취소 재판 과정에서 "성추행을 한 사실이 없다" "(성추행 주장은) 원고(박재동)에 대한 무고이자 허위사실적시의 명예훼손"이라고까지 주장했습니다. 지난해 2월 관련 보도가 나온 지 이틀 만에 피해자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한 것과는 분명히 배치되는 입장입니다.

한국만화가협회는 2018년 3월 박재동 화백을 제명했다.한국만화가협회는 2018년 3월 박재동 화백을 제명했다.

◆ 법원 "대화의 '맥락' 보면 성희롱 아니다"

재판부는 소청심사위를 거쳐 유일하게 살아남은 징계 사유, 즉 수업 시간에 있었던 세 차례의 발언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을 '성희롱'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우선 박 화백이 2017년도 1학기 '인체드로잉I'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여자는 외부의 선을 중요시하고 남자는 근육과 뼈대에 관심이 많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사실은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이 발언이 법적으로 성희롱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남녀의 드로잉 방식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내용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재판부는 이 발언에 "남녀 간 차이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이 드러나 있다고 볼 여지도 있다"면서도 "당시 위 발언을 듣고 있던 모든 여학생들로 하여금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발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재판부는 "나아가 이 발언이 고정된 성 역할을 강요하는 등의 성차별적인 발언이라고도 보이지 않는다"고도 덧붙였습니다.

"남자는 고목(古木) 나무 내지 거목(巨木) 나무로, 여자는 그 위에 붙어 있는 매미로 표현할 수 있다"라는 취지의 발언 역시 성희롱으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이 발언은 "키나 몸집이 큰 남자를 나무와 같이, 키나 몸집이 작은 여자를 나무에 붙은 매미와 같이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한 것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재판부는 이같은 판단의 이유로 박 화백이 인체드로잉Ⅱ 수업시간에 "캐리커처의 표현 방법"을 설명하면서, '과장'과 '왜곡' 기법에 대한 예시를 들고자 이런 말을 했다는 '맥락'을 감안해야 한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한예종 진상조사위의 조사보고서에는 전혀 나와 있지 않았던 내용입니다.

재판부는 "특정 언어에 의한 성희롱은 문제의 말이 사용된 앞뒤의 문맥, 당사자들의 관계, 그 표현이 행해진 상황" 등을 고려해 평가해야 한다며, "이 부분 징계사유는 원고(박 화백)가 캐리커처에서의 '과장' 내지 '왜곡'의 표현법에 대해 설명하는 중이었다는 사정을 일체 고려하지 않고, 특정 내용만 발췌해 문제 삼은 걸로 보일 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앞서 소청심사위도 이 두 개의 발언이 다소 부적절하기는 해도 성희롱으로 볼 수는 없다고 판단한 점을 지적하며, 그럼에도 기존 한예종 판단과 마찬가지로 이를 징계 사유로 인정한 건 적법하지 않다고 덧붙였습니다.


◆ '여성 미모경쟁'='과일 생존전략'?…법원 "성희롱 맞다"

재판부가 정당한 징계 사유로 인정한 문제의 언행은 결국 단 하나뿐입니다. 2017학년도 2학기 '만화, 애니메이션워크샵Ⅱ' 수업시간 중 학생들과 음악 감상을 하는 자리에서, 한 학생이 가져온 걸그룹 '레드벨벳'의 '빨간 맛'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박 화백이 여성을 과일에 비유해 말한 것을 성희롱으로 판단한 겁니다.

재판부는 당시 박 화백이 "과일은 싱싱하고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워야 동물들이 먹고 그 씨를 멀리 퍼뜨릴 수 있다. 그것이 과일의 진화론적인 전략이다. 여성도 이와 비슷하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인정했습니다.

이어 "이는 여성을 음식의 신선도 내지 맛과 연관시키고 자칫 여성을 번식을 위한 도구 내지 객체로 보고 있다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갓 성인이 되어 성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하기 쉬운 여학생들로서는 그로 인해 충분히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꼈을 여지가 상당하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박 화백 측은 "학생들의 인문학적 소양을 키워주고자 마련한 음악 감상시간에 해당 뮤직비디오를 가져온 학생을 이해하고자 격려하는 취지에서, 단지 과일의 생존전략과 여성의 미모 경쟁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비유적 발언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원고(박재동)가 주장하는 것처럼 인문학적 지식이나 관점이 이 발언에 반영돼 있다고 볼 수도, 수업 내용의 효과적 전달을 위해 불가피한 발언이었다고 볼 수도 없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여전한 제도의 공백과 엄밀하지 못한 징계 처분의 대가. 여론의 열기가 식은 가운데 좀더 온전해진 어느 강의실의 기억과, 미안함을 말해놓고 다시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어느 화백의 복잡한 얼굴까지. 이 사건 판결문은 이처럼 '원고 승소'라는 한 마디로는 요약할 수 없는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 법원은 왜 박재동 ‘성폭력’ 징계를 “위법하다” 했나?
    • 입력 2019.08.20 (11:01)
    취재K
법원은 왜 박재동 ‘성폭력’ 징계를 “위법하다” 했나?
'미투' 운동이 활발하던 지난해, 성추행·성희롱 의혹으로 재직 중이던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에서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받은 박재동 화백. 그의 이름이 최근 1년여 만에 다시 언론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박 화백이 "정직 3개월 징계를 취소해달라"며 한예종을 상대로 낸 행정소송에서 지난달 26일 승소했기 때문입니다. 징계 처분이 내려진 지 1년하고도 한 달 만입니다. 패소한 한예종이 정해진 기간 안에 항소하지 않아, 판결은 지난 15일 확정됐습니다.

한예종 측은 KBS 기자와의 통화에서 "(교수로 있던 박 화백이) 이미 정년퇴직을 했기 때문에 추가 행정절차는 없지만, 정직 기간 3개월 동안 받지 못한 급여 등 이번 판결에 따라 학교가 부담해야 할 비용이 있다면 박 화백에게 지급할 예정"이라고 밝혔습니다.

박 화백의 승소 소식은 다수 매체에 짧게 보도됐을 뿐, 구체적인 판결의 사유는 여태껏 전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KBS가 판결문을 입수해 내용을 자세히 살펴봤습니다.

◆ 법원 "박재동 징계, '타당성' 현저히 잃었다"

법원의 이번 판결은 박 화백이 문제가 된 성희롱·성추행을 하지 않았다거나, 박 화백의 언행에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가 이 일로 받은 징계가 너무 무겁다는 뜻이죠.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박 화백에 대한 징계가 "비례의 원칙에 위배돼 그 징계재량권을 일탈, 남용한 것으로서 위법하다"라고 밝혔습니다. '정직 3개월'이라는 중징계는 사회통념상 "현저하게 타당성을 잃어" 징계권자에게 맡겨진 재량권을 남용한 것이고, 이 경우 견책이나 감봉같은 경징계만 가능하다는 판단입니다. 왜 이런 결론이 나왔을까요?

우선 한예종 진상조사위원회가 결정한 박 화백의 징계 사유를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크게 세 가지인데요.

첫 번째 징계 사유는 박 화백이 2017년 수업시간에 학생들 앞에서 '성희롱'에 해당하는 발언을 세 차례 했다는 겁니다. 한 수강생이 학교에 뒤늦게 신고를 하거나 학생들이 학내에 자보를 붙여 알려진 내용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여성은 부드러운 선만 그리는 걸 좋아하고, 남성은 좀 더 구조에 집중한다'는 취지로 남녀를 구분해서 이야기한 점 ▲남녀 커플이 있으면 '남자는 거목으로, 여자는 그 위에 앉은 매미로 그릴 수 있다'라고 발언한 점 ▲수업시간에 학생이 튼 걸그룹 뮤직비디오의 배경에 과일이 떠다니는 걸 보고 "여자는 과일에 비교할 수 있다. 상큼하고 먹음직스럽다. 씨를 얻을 수 있다"라고 발언했다는 점입니다. 한예종 진상조사위는 이 세 발언이 모두 '성희롱'에 해당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두 번째 징계 사유는 모 웹툰 작가가 2011년 박 화백에게 당했다고 폭로한 성추행 피해였습니다. 전체 징계사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고, 한 방송사가 지난해 2월 '미투' 운동 보도의 일환으로 일부 기사화한 내용이기도 합니다. (▶관련 기사: [단독] 만화계도 '미투'…"시사만화 거장 박재동 화백이 성추행") 의혹 중 피해자가 공개적으로 밝힌 내용만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주례를 부탁하러 갔는데) 반갑다면서 치마 아래로 손을 넣어 다리 사이로 허벅지를 쓰다듬은 점 ▲그동안 교제했던 남성 두 명과 모두 성행위를 해봤냐고 묻고, "내가 주례해주면 너는 어떻게 해줄 건데" "나랑 호텔에서 춤 한번 춰줄 수 있겠냐"라고 말한 점 ▲턱 아래쪽을 쓰다듬더니 "나는 처음 봤을 때부터 네가 맛있게 생겼다고 생각했어"라고 말했다는 점입니다.

세 번째 징계 사유는 학교 진상조사 내용을 외부에 '유출'했다는 점이었습니다. 학교 진상조사위원회 조사를 받은 뒤, "억울함이 소명됐다"는 식으로 기자와 일방적 주장의 인터뷰를 했다는 내용입니다.

한예종 교원 징계위가 이를 받아들임에 따라 박 화백은 지난해 6월, 정직 3개월의 징계 처분을 받았습니다.


◆ '징계 시효 도과' 못 걸러낸 한예종

그런데 이 중 두 번째, 세 번째 징계 사유는 넉 달 만인 지난해 10월 고꾸라지고 맙니다. 박 화백이 징계에 불복하면서 열린 교원소청심사위원회가, 징계 사유 세 개 중 두 개를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판결문에 그 이유가 자세히 옮겨져 있습니다.

소청심사위는 우선 박 화백이 웹툰 작가를 성추행했다는 의혹에 대해선 이미 징계 시효가 지나서 정당한 징계 사유로 인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한예종 교직원에게 적용되는 국가공무원법 83조는 "징계의결 등의 요구는 징계 등의 사유가 발생한 날부터 3년(제78조의2 제1항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5년)이 지나면 하지 못한다"라고 규정합니다. 피해는 2011년에 있었는데 이를 근거로 2018년에 징계를 내렸으니 잘못됐다는 겁니다.

법이 정한 징계 시효가 과연 적정한지와 별개로(국회에는 이 징계 시효를 연장하는 법안이 발의돼 있습니다), 한예종 측이 관련 법규를 제대로 살피지 않거나 알고도 이를 무시한 채 섣불리 중징계를 내렸다는 지적은 피할 수 없게 됐습니다. 사실 박 화백뿐만이 아닙니다. 성희롱 발언이 문제가 돼 지난해 한예종에서 정직 1개월 처분을 받은 황지우 전 교수(시인) 역시, 징계 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소청심사위에서 징계가 취소됐습니다. 성폭력 문제에 엄중히 대처할 필요를 고려했다 할지라도, 현 제도하에선 번복될 가능성이 높은 허술한 조치로 징계 제도의 무게감을 스스로 떨어트린 건 아닌지 아쉬운 대목입니다. 게다가 박 화백 측에 줘야하는 소송 비용 6천 5백만 원을 포함해, 한예종은 이번 소송을 위해서만 최소 1억 원 안팎을 지출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편 소청심사위는 박 화백이 진상조사 내용을 외부에 유출했다는 세 번째 징계 사유에 대해서는, 언론중재법상 반론보도청구권을 행사한 걸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징계 사유로 인정할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소청심사위는 그럼에도 한예종 진상조사위가 밝힌 첫 번째 징계사유, 즉 수업시간에 박 화백이 성희롱 발언을 했다는 점만으로도 정직 3개월의 징계를 내리는 데 문제가 없다, 과중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박 화백의 처분 취소 청구를 기각했습니다. 최종적으로 인정되는 징계 사유만으로는 "정직 3개월은 과중하다"고 본 법원과 판단이 엇갈린 지점입니다.

◆ '성추행 의혹'에 공개 사과했지만…재판에선 "허위사실" 주장

가장 큰 징계 사유가 소청심사위를 거쳐 사라져 버린 상황에서, "비례의 원칙"을 강조하는 법원이 박 화백의 손을 들어준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을지 모릅니다. 다만 고심한 흔적은 보입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대법원 판례(94다52294 판결 등)를 들어 "징계 시효가 지난 비위 행위도 징계 양정에 있어선 참작할 수 있다"라고 밝혔습니다. 시효가 지난 행위를 직접 징계 사유로 삼지는 못하더라도, 징계의 경중을 정하는 데 있어선 참고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에 따라 2011년 웹툰 작가 성추행 문제도 "이 사건 징계양정시 가중적 요소로 고려될 수는 있다"라고 재판부는 설명했습니다.

문제는 재판부가 2011년의 성추행이 실제 있었던 일인지가 불명확하다고 판단했다는 점입니다. 웹툰 작가의 성추행 폭로가 그저 거짓말에 불과했다는 얘기는 물론 아닙니다. "실제 위 징계사유가 인정되는지에 대해 별도 객관적인 근거로써 입증된 바가 없어 이를 징계양정에 있어 참작하기 위해서는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라고 재판부는 밝혔습니다. 한예종 진상조사위는 피해자의 진술을 근거로 성추행 피해를 사실상 인정했지만, 재판부는 더 엄격한 잣대가 필요하다고 본 것으로 풀이됩니다.

여기엔 박 화백의 완강한 입장도 일부 영향을 준 걸로 보입니다. 판결문을 보면, 박 화백 측은 징계처분 취소 재판 과정에서 "성추행을 한 사실이 없다" "(성추행 주장은) 원고(박재동)에 대한 무고이자 허위사실적시의 명예훼손"이라고까지 주장했습니다. 지난해 2월 관련 보도가 나온 지 이틀 만에 피해자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한 것과는 분명히 배치되는 입장입니다.

한국만화가협회는 2018년 3월 박재동 화백을 제명했다.한국만화가협회는 2018년 3월 박재동 화백을 제명했다.

◆ 법원 "대화의 '맥락' 보면 성희롱 아니다"

재판부는 소청심사위를 거쳐 유일하게 살아남은 징계 사유, 즉 수업 시간에 있었던 세 차례의 발언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을 '성희롱'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우선 박 화백이 2017년도 1학기 '인체드로잉I'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여자는 외부의 선을 중요시하고 남자는 근육과 뼈대에 관심이 많다"는 취지의 발언을 한 사실은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이 발언이 법적으로 성희롱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남녀의 드로잉 방식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내용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재판부는 이 발언에 "남녀 간 차이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이 드러나 있다고 볼 여지도 있다"면서도 "당시 위 발언을 듣고 있던 모든 여학생들로 하여금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발언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재판부는 "나아가 이 발언이 고정된 성 역할을 강요하는 등의 성차별적인 발언이라고도 보이지 않는다"고도 덧붙였습니다.

"남자는 고목(古木) 나무 내지 거목(巨木) 나무로, 여자는 그 위에 붙어 있는 매미로 표현할 수 있다"라는 취지의 발언 역시 성희롱으로 인정되지 않았습니다. 이 발언은 "키나 몸집이 큰 남자를 나무와 같이, 키나 몸집이 작은 여자를 나무에 붙은 매미와 같이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한 것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재판부는 이같은 판단의 이유로 박 화백이 인체드로잉Ⅱ 수업시간에 "캐리커처의 표현 방법"을 설명하면서, '과장'과 '왜곡' 기법에 대한 예시를 들고자 이런 말을 했다는 '맥락'을 감안해야 한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한예종 진상조사위의 조사보고서에는 전혀 나와 있지 않았던 내용입니다.

재판부는 "특정 언어에 의한 성희롱은 문제의 말이 사용된 앞뒤의 문맥, 당사자들의 관계, 그 표현이 행해진 상황" 등을 고려해 평가해야 한다며, "이 부분 징계사유는 원고(박 화백)가 캐리커처에서의 '과장' 내지 '왜곡'의 표현법에 대해 설명하는 중이었다는 사정을 일체 고려하지 않고, 특정 내용만 발췌해 문제 삼은 걸로 보일 뿐"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면서 앞서 소청심사위도 이 두 개의 발언이 다소 부적절하기는 해도 성희롱으로 볼 수는 없다고 판단한 점을 지적하며, 그럼에도 기존 한예종 판단과 마찬가지로 이를 징계 사유로 인정한 건 적법하지 않다고 덧붙였습니다.


◆ '여성 미모경쟁'='과일 생존전략'?…법원 "성희롱 맞다"

재판부가 정당한 징계 사유로 인정한 문제의 언행은 결국 단 하나뿐입니다. 2017학년도 2학기 '만화, 애니메이션워크샵Ⅱ' 수업시간 중 학생들과 음악 감상을 하는 자리에서, 한 학생이 가져온 걸그룹 '레드벨벳'의 '빨간 맛'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박 화백이 여성을 과일에 비유해 말한 것을 성희롱으로 판단한 겁니다.

재판부는 당시 박 화백이 "과일은 싱싱하고 먹음직스럽고 탐스러워야 동물들이 먹고 그 씨를 멀리 퍼뜨릴 수 있다. 그것이 과일의 진화론적인 전략이다. 여성도 이와 비슷하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고 인정했습니다.

이어 "이는 여성을 음식의 신선도 내지 맛과 연관시키고 자칫 여성을 번식을 위한 도구 내지 객체로 보고 있다는 인상을 줄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갓 성인이 되어 성에 대한 감수성이 예민하기 쉬운 여학생들로서는 그로 인해 충분히 성적 굴욕감이나 혐오감을 느꼈을 여지가 상당하다"라고 설명했습니다.

박 화백 측은 "학생들의 인문학적 소양을 키워주고자 마련한 음악 감상시간에 해당 뮤직비디오를 가져온 학생을 이해하고자 격려하는 취지에서, 단지 과일의 생존전략과 여성의 미모 경쟁의 유사성을 지적하는 비유적 발언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재판부는 "원고(박재동)가 주장하는 것처럼 인문학적 지식이나 관점이 이 발언에 반영돼 있다고 볼 수도, 수업 내용의 효과적 전달을 위해 불가피한 발언이었다고 볼 수도 없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여전한 제도의 공백과 엄밀하지 못한 징계 처분의 대가. 여론의 열기가 식은 가운데 좀더 온전해진 어느 강의실의 기억과, 미안함을 말해놓고 다시 억울하다고 주장하는 어느 화백의 복잡한 얼굴까지. 이 사건 판결문은 이처럼 '원고 승소'라는 한 마디로는 요약할 수 없는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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