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년만에 돌아온 故남궁선 이등중사…전우들이 남긴 마지막 기록

입력 2019.08.21 (17:57) 수정 2019.08.22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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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남궁선 이등중사 (사진제공: 국방부)

정전 18일 앞두고 전사…남궁선 이등중사의 기록

1952년 4월 30일. 어린 딸과 아들을 둔 23살의 젊은 아버지 남궁선 씨는 전쟁터로 떠났습니다. 아들이 고작 세 살 때였습니다. 남궁선 이등중사는 2사단 32연대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해, 최전방으로 보내졌습니다. 입대 후 한 번도 휴가를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입대 날이 가족을 본 마지막 날이었을 것입니다.

1953년 7월 9일. 남궁선 이등중사는 정전협정 체결을 불과 18일 앞두고 화살머리고지에서 전사했습니다. 전사자 유해 기록지에 남은 그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남궁 이등중사는 소총수로 철원 상석지구 전투에 참전했는데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습 속에 105mm 포탄을 맞고 현장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남궁 이등중사의 마지막 모습은 전투의 참혹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듯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기록지에는 "현지에서 형체조차 없이 전사하였으므로 (유해를) 수집하지 못하였음"이라고 적혀있습니다. 포화 속에 남궁 이등중사를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전우들은 이런 내용을 보고서(아래 사진)에 상세히 남겨두었습니다. 남궁선 이등중사가 숨진 위치도 함께 그려놓았습니다. 나중을 위해서 말입니다.



故남궁선 이등중사의 전사자 미수집보고서 (사진제공: 국방부) ** 이 보고서에는 故남궁선 이등중사가 1925년(단기 4258년) 태어난 것으로 적혀있으나, 이후 유가족측에서 호적 등을 근거로 병적기록을 신청해 1930년생으로 출생년도가 정정됐습니다.故남궁선 이등중사의 전사자 미수집보고서 (사진제공: 국방부) ** 이 보고서에는 故남궁선 이등중사가 1925년(단기 4258년) 태어난 것으로 적혀있으나, 이후 유가족측에서 호적 등을 근거로 병적기록을 신청해 1930년생으로 출생년도가 정정됐습니다.

66년 뒤, 화살머리고지

그리고 66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전쟁이 잠시 중단되면서 만들어진 비무장지대(DMZ),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던 곳에서 올해 4월부터 본격적인 유해발굴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당초 남북이 함께 화살머리고지를 시작으로 공동발굴을 하기로 했지만, 북측의 답이 없어 남측만 먼저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고지 내 전투현장에서 국군으로 추정되는 '완전 유해'가 수습됐습니다. 완전 유해는 두개골부터 팔, 가슴, 다리뼈까지 해부학적 연속성이 유지된 유해를 말합니다.


먼저 4월 12일, 지표에서 우측 팔 부분이 먼저 수습됐고 이후 땅을 1m 이상 더 파 내려가는 과정에서 병사들이 적의 포탄을 피하려고 만들어놓은 대피호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대피호 속에서 나머지 유골들이 나왔습니다. 유해는 포탄 파편으로 인한 다발성 골절 상태였습니다. 하나, 하나 신중히 발굴한 끝에, 팔뼈가 처음 발견되고 한 달이 넘은 5월 30일에야 완전 유해로 최종 수습됐습니다.

보통 유해 주변에서 유품이 함께 나오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깨진 철모뿐. 유독 함께 발견된 유품이 적었다고 합니다. 병사의 신원이 담긴 '인식표'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11년 전 DNA 등록한 아들…"꿈인지 생시인지"

그렇게 이름 모를 유해로 남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잊지 않고 기다린 아들 덕에 이 유해는 이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11년 전인 2008년. 고인의 아들 남궁왕우 씨는 국군수도병원에서 유가족 시료 채취에 응했습니다. 나중에 찾을지 모를 아버지 유해와의 DNA 대조를 위해서였습니다. 국방부는 이번에 수습한 유해에서 DNA를 채취해, 기존에 갖고 있던 유가족들의 DNA와 맞춰본 끝에 남궁왕우 씨의 아버지인 故남궁선 이등중사의 유해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故남궁선 이등중사의 아들 왕우 씨는 이제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 국방부로부터 유해 확인 소식을 듣고, "아버지를 찾았다는 생각에 꿈인지 생시인지 떨려서 말을 하기 힘들다"며 벅찬 마음을 전해왔습니다.

올해 83세인, 고인의 여동생 남궁분 씨는 故남궁선 이등중사를 "살아 생전 고생만 하다가 군에 가서 허망하게 죽은 오빠"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남궁분 씨 역시 이번 소식에 기뻐하면서, "지금이라도 오빠를 찾게 돼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름 찾길 기다리는 유해들

지난 4월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화살머리고지 일대에서 발굴된 유해는 모두 144구로 추정됩니다. 이 가운데 신원을 확인한 유해는 故남궁선 이등중사의 유해 1구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신원 확인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지금도 유해 발굴 작업을 하고 있어서 발굴 유해는 더 늘어날 겁니다. 화살머리고지에서의 유해발굴은 10월 31일까지 이어집니다.

국방부는 故남궁선 이등중사의 경우 유족의 DNA가 미리 확보돼 있어서 빨리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만큼 DNA가 결정적이라는 겁니다. 가족 중에 6·25전쟁에 참전했다 돌아오지 못한 분이 있다면, 보건소나 군 병원, 또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을 찾아 DNA 시료 채취를 할 수 있습니다. 8촌까지 가능하다고 합니다.

더 많은 전사자들이 故남궁선 이등중사처럼 가족 품에 안길 수 있기를, 화살머리고지에서는 지금도 장병 수백 명이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유해를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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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6년만에 돌아온 故남궁선 이등중사…전우들이 남긴 마지막 기록
    • 입력 2019-08-21 17:57:22
    • 수정2019-08-22 11:33:12
    취재K
故 남궁선 이등중사 (사진제공: 국방부)

정전 18일 앞두고 전사…남궁선 이등중사의 기록

1952년 4월 30일. 어린 딸과 아들을 둔 23살의 젊은 아버지 남궁선 씨는 전쟁터로 떠났습니다. 아들이 고작 세 살 때였습니다. 남궁선 이등중사는 2사단 32연대 소속으로 6·25전쟁에 참전해, 최전방으로 보내졌습니다. 입대 후 한 번도 휴가를 나오지 못했기 때문에 입대 날이 가족을 본 마지막 날이었을 것입니다.

1953년 7월 9일. 남궁선 이등중사는 정전협정 체결을 불과 18일 앞두고 화살머리고지에서 전사했습니다. 전사자 유해 기록지에 남은 그의 마지막은 이렇습니다. 남궁 이등중사는 소총수로 철원 상석지구 전투에 참전했는데 중공군의 대대적인 공습 속에 105mm 포탄을 맞고 현장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남궁 이등중사의 마지막 모습은 전투의 참혹함을 고스란히 보여주듯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였다고 합니다. 기록지에는 "현지에서 형체조차 없이 전사하였으므로 (유해를) 수집하지 못하였음"이라고 적혀있습니다. 포화 속에 남궁 이등중사를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전우들은 이런 내용을 보고서(아래 사진)에 상세히 남겨두었습니다. 남궁선 이등중사가 숨진 위치도 함께 그려놓았습니다. 나중을 위해서 말입니다.



故남궁선 이등중사의 전사자 미수집보고서 (사진제공: 국방부) ** 이 보고서에는 故남궁선 이등중사가 1925년(단기 4258년) 태어난 것으로 적혀있으나, 이후 유가족측에서 호적 등을 근거로 병적기록을 신청해 1930년생으로 출생년도가 정정됐습니다.
66년 뒤, 화살머리고지

그리고 66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전쟁이 잠시 중단되면서 만들어진 비무장지대(DMZ), 사람들의 발길이 끊겼던 곳에서 올해 4월부터 본격적인 유해발굴 작업이 시작됐습니다. 당초 남북이 함께 화살머리고지를 시작으로 공동발굴을 하기로 했지만, 북측의 답이 없어 남측만 먼저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고지 내 전투현장에서 국군으로 추정되는 '완전 유해'가 수습됐습니다. 완전 유해는 두개골부터 팔, 가슴, 다리뼈까지 해부학적 연속성이 유지된 유해를 말합니다.


먼저 4월 12일, 지표에서 우측 팔 부분이 먼저 수습됐고 이후 땅을 1m 이상 더 파 내려가는 과정에서 병사들이 적의 포탄을 피하려고 만들어놓은 대피호가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 대피호 속에서 나머지 유골들이 나왔습니다. 유해는 포탄 파편으로 인한 다발성 골절 상태였습니다. 하나, 하나 신중히 발굴한 끝에, 팔뼈가 처음 발견되고 한 달이 넘은 5월 30일에야 완전 유해로 최종 수습됐습니다.

보통 유해 주변에서 유품이 함께 나오기 마련인데, 이번에는 깨진 철모뿐. 유독 함께 발견된 유품이 적었다고 합니다. 병사의 신원이 담긴 '인식표'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11년 전 DNA 등록한 아들…"꿈인지 생시인지"

그렇게 이름 모를 유해로 남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잊지 않고 기다린 아들 덕에 이 유해는 이름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11년 전인 2008년. 고인의 아들 남궁왕우 씨는 국군수도병원에서 유가족 시료 채취에 응했습니다. 나중에 찾을지 모를 아버지 유해와의 DNA 대조를 위해서였습니다. 국방부는 이번에 수습한 유해에서 DNA를 채취해, 기존에 갖고 있던 유가족들의 DNA와 맞춰본 끝에 남궁왕우 씨의 아버지인 故남궁선 이등중사의 유해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故남궁선 이등중사의 아들 왕우 씨는 이제 일흔을 바라보는 나이. 국방부로부터 유해 확인 소식을 듣고, "아버지를 찾았다는 생각에 꿈인지 생시인지 떨려서 말을 하기 힘들다"며 벅찬 마음을 전해왔습니다.

올해 83세인, 고인의 여동생 남궁분 씨는 故남궁선 이등중사를 "살아 생전 고생만 하다가 군에 가서 허망하게 죽은 오빠"로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남궁분 씨 역시 이번 소식에 기뻐하면서, "지금이라도 오빠를 찾게 돼 너무 감사하다"고 말했습니다.

이름 찾길 기다리는 유해들

지난 4월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화살머리고지 일대에서 발굴된 유해는 모두 144구로 추정됩니다. 이 가운데 신원을 확인한 유해는 故남궁선 이등중사의 유해 1구입니다. 나머지는 아직 신원 확인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지금도 유해 발굴 작업을 하고 있어서 발굴 유해는 더 늘어날 겁니다. 화살머리고지에서의 유해발굴은 10월 31일까지 이어집니다.

국방부는 故남궁선 이등중사의 경우 유족의 DNA가 미리 확보돼 있어서 빨리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그만큼 DNA가 결정적이라는 겁니다. 가족 중에 6·25전쟁에 참전했다 돌아오지 못한 분이 있다면, 보건소나 군 병원, 또는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을 찾아 DNA 시료 채취를 할 수 있습니다. 8촌까지 가능하다고 합니다.

더 많은 전사자들이 故남궁선 이등중사처럼 가족 품에 안길 수 있기를, 화살머리고지에서는 지금도 장병 수백 명이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유해를 찾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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