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 당했는데 술자리를 왜 계속하나?”…故 장자연 성추행 인정 안 된 이유

입력 2019.08.26 (17:00) 수정 2019.08.26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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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년 동안 세간을 다시 떠들썩하게 한 故 장자연 씨와 관련된 성폭력 사건에 대한 첫 사법부의 판단이 나왔습니다. 전직 조선일보 기자이자 현재는 출판사 대표인 조 모 씨가 장 씨를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가 된 건데요. 결론은 무죄였습니다. 그런데 판결문을 뜯어보니 어딘가 개운하진 않습니다.

조 씨는 2008년 8월 5일 장 씨의 소속사 대표였던 김종승 씨의 생일 파티에 참석해 장 씨를 무릎에 앉혀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장 씨가 이른바 '장자연 문건'을 남기고 사망했던 2009년 3월, 장 씨의 동료였던 배우 윤지오 씨가 술자리에서 장 씨를 성추행 한 사람이 있다는 진술을 하면서 조 씨는 처음 경찰 수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검찰은 조 씨를 무혐의 처분했고, 9년이 지난 지난해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수사 권고로 재수사를 벌여 조 씨를 기소했습니다.

그리 복잡한 사건은 아니지만 피해자가 사망한 데다 워낙 세간의 관심을 받아온 사건이라 재판은 매우 더디게 진행됐습니다. 재판부도 한 차례 변경됐고, 주요 증인들도 출석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22일, 조 씨가 재판에 넘겨진 지 14개월 만에 1심 판단이 나왔습니다. 재판부는 조 씨에 무죄를 선고하면서 '윤지오 씨 진술의 신빙성'을 문제 삼았습니다. 윤 씨가 가해자를 지목하는 과정에서 진술 번복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2009년 경찰 수사 초반, 윤 씨는 전혀 다른 사람을 가해자로 지목했다가 5회차 조사부터 조 씨를 가해자로 지목해 그 이후에는 일관되게 조 씨를 가해자라고 증언해 왔습니다.

[연관기사] 법정서 벌어진 '장자연 성추행' 진실 게임…술자리에선 무슨 일이

하지만 이 기사에서는 재판부가 조 씨를 무죄로 결정한 이유에 대해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KBS가 입수한 조 씨의 1심 판결문을 뜯어 보겠습니다.

■ "해당 술자리, 피고인에게는 '어려운 자리'"


재판부는 조 씨를 무죄로 판단하면서 당시 술자리 참석자들의 지위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먼저 술자리에 참석했던 다른 두 사람의 나이가 조 씨보다 15살 이상 많고, 사회적 지위도 더 높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해당 술자리는 조 씨에겐 '어려운 자리'였고, 그렇기 때문에 장 씨를 추행하기는 어려웠을 거라는 설명입니다. 조 씨 변호인 측의 주장이 그대로 반영된 판결입니다.

■ "추행이 있었다면 소속사 대표가 강하게 항의했을 것"이라고요?


판결문에 눈길이 가는 대목은 또 있습니다. 바로 재판부가 해당 술자리 상황에 대해 이른바 '뇌피셜'을 가동한 부분입니다. 재판부는 '조 씨가 장 씨를 진짜 성추행했다면 소속사 대표인 김 씨가 강하게 항의했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정말 성추행이 있었다면 분위기가 매우 안 좋아졌을 것이고, 술자리도 더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죠.

검찰이 강하게 반발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입니다. 여성 단체들도 작심하고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해당 술자리가 소속사 대표의 '생일 파티'였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접대와 네트워크를 위해 마련했던 자리였다는 겁니다. 소속사 대표 김 씨는 자신의 연예계 사업에 투자를 받기 위해 금융계 인사들과 가깝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인사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해서 강하게 항의하며 술자리를 중단하는 일은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고, 또 '그랬어야 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더욱 적절하지 않다는 설명입니다.

게다가 김 씨가 장 씨에게 접대를 '강요'한 사실은 이미 법원과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로도 입증된 바 있습니다. 2009년 수사 당시 김 씨의 강요 혐의는 검찰 단계에서 무혐의 처분됐지만, 이후 유족과 벌어진 민사 소송에서 법원은 '술접대 강요'가 있었다고 인정했습니다. 지난 5월 검찰 과거사위원회도 장자연 사건을 재조사한 결과 접대 강요와 협박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습니다.

이 판결문에 쓰인 대로 김 씨가 장 씨를 '다른 사람에게 술도 따르지 못하게' 할 정도로 엄격하게 관리했다면, 김 씨는 장 씨에게 왜 접대를 강요했으며, 왜 폭행과 협박을 했던 걸까요? 장 씨는 왜 술접대를 강요받아 괴롭다는 문건을 남긴 것일까요?

■ 가라오케 룸이 '공개된 장소'?


재판부는 직원들이 왔다 갔다 하는 공개된 자리에서 어떻게 성추행이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하고 있습니다. 밀폐된 가라오케 룸이 '공개된 자리'라는 것은 선뜻 납득이 되지는 않습니다만, 설령 '공개된 자리'라고 하더라도 '성추행이 불가능하다'는 점 역시 납득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입니다. 재판부가 장 씨와 술자리 참석자들과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드는 대목입니다.

'윤지오의 거짓말'보다 중요한 것

선고 당일이던 지난 22일, 법정은 몰려든 취재진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조 씨도 몰려든 취재진을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장자연 씨가 접대를 강요받았다고 토로하며 숨진 지 10년 만에 내려진 법원의 판단인데다, 성폭력 혐의로는 처음이자 사실상 마지막으로 재판에 넘겨진 사례이기 때문일 겁니다.

조 씨에 대한 1심 판결이 나온 뒤 또다시 '윤지오의 거짓말'에 집중하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윤 씨가 각종 거짓말 논란으로 민형사상 소송에 휘말린 상태에서, 윤 씨 진술의 신빙성이 없다는 재판부의 판단에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검찰은 10년 전 수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진술까지 신빙성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항변했지만, 재판부가 윤 씨의 진술 번복에 의문을 가진 것도 이해는 됩니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습니다. 장자연 사건은 '윤지오 거짓말 논란'에만 초점이 맞춰져서는 안 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여성 단체는 성명을 내고 "고 장자연씨 사건의 본질은 여성에 대한 성 착취와 권력층의 진실 조작 및 은폐"라고 밝혔습니다.

검찰은 조 씨의 판결문을 검토한 뒤 항소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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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추행 당했는데 술자리를 왜 계속하나?”…故 장자연 성추행 인정 안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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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정2019-08-26 22:23:25
    취재K
지난 1년 동안 세간을 다시 떠들썩하게 한 故 장자연 씨와 관련된 성폭력 사건에 대한 첫 사법부의 판단이 나왔습니다. 전직 조선일보 기자이자 현재는 출판사 대표인 조 모 씨가 장 씨를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가 된 건데요. 결론은 무죄였습니다. 그런데 판결문을 뜯어보니 어딘가 개운하진 않습니다.

조 씨는 2008년 8월 5일 장 씨의 소속사 대표였던 김종승 씨의 생일 파티에 참석해 장 씨를 무릎에 앉혀 성추행한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장 씨가 이른바 '장자연 문건'을 남기고 사망했던 2009년 3월, 장 씨의 동료였던 배우 윤지오 씨가 술자리에서 장 씨를 성추행 한 사람이 있다는 진술을 하면서 조 씨는 처음 경찰 수사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검찰은 조 씨를 무혐의 처분했고, 9년이 지난 지난해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수사 권고로 재수사를 벌여 조 씨를 기소했습니다.

그리 복잡한 사건은 아니지만 피해자가 사망한 데다 워낙 세간의 관심을 받아온 사건이라 재판은 매우 더디게 진행됐습니다. 재판부도 한 차례 변경됐고, 주요 증인들도 출석을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지난 22일, 조 씨가 재판에 넘겨진 지 14개월 만에 1심 판단이 나왔습니다. 재판부는 조 씨에 무죄를 선고하면서 '윤지오 씨 진술의 신빙성'을 문제 삼았습니다. 윤 씨가 가해자를 지목하는 과정에서 진술 번복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2009년 경찰 수사 초반, 윤 씨는 전혀 다른 사람을 가해자로 지목했다가 5회차 조사부터 조 씨를 가해자로 지목해 그 이후에는 일관되게 조 씨를 가해자라고 증언해 왔습니다.

[연관기사] 법정서 벌어진 '장자연 성추행' 진실 게임…술자리에선 무슨 일이

하지만 이 기사에서는 재판부가 조 씨를 무죄로 결정한 이유에 대해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KBS가 입수한 조 씨의 1심 판결문을 뜯어 보겠습니다.

■ "해당 술자리, 피고인에게는 '어려운 자리'"


재판부는 조 씨를 무죄로 판단하면서 당시 술자리 참석자들의 지위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먼저 술자리에 참석했던 다른 두 사람의 나이가 조 씨보다 15살 이상 많고, 사회적 지위도 더 높았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해당 술자리는 조 씨에겐 '어려운 자리'였고, 그렇기 때문에 장 씨를 추행하기는 어려웠을 거라는 설명입니다. 조 씨 변호인 측의 주장이 그대로 반영된 판결입니다.

■ "추행이 있었다면 소속사 대표가 강하게 항의했을 것"이라고요?


판결문에 눈길이 가는 대목은 또 있습니다. 바로 재판부가 해당 술자리 상황에 대해 이른바 '뇌피셜'을 가동한 부분입니다. 재판부는 '조 씨가 장 씨를 진짜 성추행했다면 소속사 대표인 김 씨가 강하게 항의했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정말 성추행이 있었다면 분위기가 매우 안 좋아졌을 것이고, 술자리도 더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죠.

검찰이 강하게 반발하는 것도 바로 이 대목입니다. 여성 단체들도 작심하고 비판을 쏟아냈습니다. 해당 술자리가 소속사 대표의 '생일 파티'였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접대와 네트워크를 위해 마련했던 자리였다는 겁니다. 소속사 대표 김 씨는 자신의 연예계 사업에 투자를 받기 위해 금융계 인사들과 가깝게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인사들과 함께 한 술자리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해서 강하게 항의하며 술자리를 중단하는 일은 애초에 가능하지도 않고, 또 '그랬어야 했다'라고 말하는 것은 더욱 적절하지 않다는 설명입니다.

게다가 김 씨가 장 씨에게 접대를 '강요'한 사실은 이미 법원과 검찰 과거사위원회의 조사 결과로도 입증된 바 있습니다. 2009년 수사 당시 김 씨의 강요 혐의는 검찰 단계에서 무혐의 처분됐지만, 이후 유족과 벌어진 민사 소송에서 법원은 '술접대 강요'가 있었다고 인정했습니다. 지난 5월 검찰 과거사위원회도 장자연 사건을 재조사한 결과 접대 강요와 협박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습니다.

이 판결문에 쓰인 대로 김 씨가 장 씨를 '다른 사람에게 술도 따르지 못하게' 할 정도로 엄격하게 관리했다면, 김 씨는 장 씨에게 왜 접대를 강요했으며, 왜 폭행과 협박을 했던 걸까요? 장 씨는 왜 술접대를 강요받아 괴롭다는 문건을 남긴 것일까요?

■ 가라오케 룸이 '공개된 장소'?


재판부는 직원들이 왔다 갔다 하는 공개된 자리에서 어떻게 성추행이 가능한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하고 있습니다. 밀폐된 가라오케 룸이 '공개된 자리'라는 것은 선뜻 납득이 되지는 않습니다만, 설령 '공개된 자리'라고 하더라도 '성추행이 불가능하다'는 점 역시 납득이 어려운 건 마찬가지입니다. 재판부가 장 씨와 술자리 참석자들과의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문이 드는 대목입니다.

'윤지오의 거짓말'보다 중요한 것

선고 당일이던 지난 22일, 법정은 몰려든 취재진으로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조 씨도 몰려든 취재진을 보고 놀라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장자연 씨가 접대를 강요받았다고 토로하며 숨진 지 10년 만에 내려진 법원의 판단인데다, 성폭력 혐의로는 처음이자 사실상 마지막으로 재판에 넘겨진 사례이기 때문일 겁니다.

조 씨에 대한 1심 판결이 나온 뒤 또다시 '윤지오의 거짓말'에 집중하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윤 씨가 각종 거짓말 논란으로 민형사상 소송에 휘말린 상태에서, 윤 씨 진술의 신빙성이 없다는 재판부의 판단에 '그럼 그렇지' 하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검찰은 10년 전 수사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진술까지 신빙성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항변했지만, 재판부가 윤 씨의 진술 번복에 의문을 가진 것도 이해는 됩니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습니다. 장자연 사건은 '윤지오 거짓말 논란'에만 초점이 맞춰져서는 안 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여성 단체는 성명을 내고 "고 장자연씨 사건의 본질은 여성에 대한 성 착취와 권력층의 진실 조작 및 은폐"라고 밝혔습니다.

검찰은 조 씨의 판결문을 검토한 뒤 항소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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