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사고때마다 사라지는 이주노동자들…“그래도 대한민국이 고마워요”

입력 2019.08.27 (07:00) 수정 2019.08.27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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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 때마다 사라지는 이주 노동자들

지난달 22일, 삼척에서 승합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났습니다. 쪽파 파종 작업을 하러 가던 중 4명이 숨지고 9명이 중경상을 입는 큰 사고였습니다. 그런데 외국인 노동자 3명이 사고 직후 자취를 감췄습니다.

지난 14일엔 속초에서 엘리베이터가 추락했습니다. 공사현장 15층 높이에서 엘리베이터가 떨어져 3명이 숨진 와중에 사고현장에 있던 외국인 노동자 2명도 역시 병원에서 사라졌습니다.

처참한 사고 현장을 뒤로하고 다친 몸을 숨겨야만 했던 그들의 사연을 듣고 싶었습니다. 이주단체, 종교단체 등을 통해 이들의 행방을 찾았지만 아직까지 찾지 못했습니다. 대신 외국인노동자, 즉 이주노동자들의 입을 통해 그들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들어봤습니다.


■ "나였어도 몸을 숨겼을 거예요."

캄보디아, 베트남, 필리핀, 네팔 등에서 한국을 찾은 이주 노동자들. 정식 비자를 통해 들어온 경우도 있지만, 브로커에게 사기를 당해 불법 체류 신분으로 남게 된 사람, 그리고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와 남아야만 했던 사람까지, 사연도 구구합니다.

이 가운데, 십여 년 전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 A씨는 사고 때마다 이주노동자들이 사라지는 이유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에서 일하는) 나만 조금 힘들면, 네팔 우리 집에 있는 5명이 행복하게 살잖아요. 그 생각 때문에 그렇게 도망가는 (신분 노출을 숨기는) 거예요. 나도 똑같아요. 나도 도망가야 해요."

A씨는 네팔에 두 아들과 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를 두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브로커에게 천만 원을 주고 취업비자를 받기로 했는데, 사기를 당했다고 합니다. 이후 '불법체류 노동자' 신세로 세탁소와 가구공장을 전전하고 있습니다.

네팔에 두고 온 아이들을 십 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A씨는 그럼에도 한국에서 비슷한 사고를 겪었다면, 자신도 도망가야 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에선 아파도 버텼다가 몇 달 뒤 다시 일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할 수 있지만, 네팔에 가서는 그럴 수 없다는 겁니다.

취재진은 22년 전 산업연수생으로 처음 한국 땅을 밟은 B씨도 만났습니다. B씨도 사고 현장의 그들이 무엇보다 '불법체류자'라는 자신들의 상황 때문에 두려웠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도망친 이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된 B씨는 남편과 아이 모두 불법 체류자입니다. B 씨의 아이는 부모가 불법체류자라도 학교는 다니도록 하는 교육 당국의 방침으로 현재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20년 넘도록 오랜 불법체류자 생활에 지친 B씨는 지금 한국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이만은 서류상 '없는 사람'으로 살지 않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만약에 제가 잡힌다면 이젠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하지만, 이 땅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만은 합법적으로 살 수 있었으면 해요"

통보의무 면제제도 KBS 방송 캡처통보의무 면제제도 KBS 방송 캡처

■ 『불법체류자 통보 의무 면제 제도』…. 인권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

현행 법령상 '불법체류' 외국인은 피해 구제가 우선적으로 필요할 경우, 담당 공무원이 출입국 당국 등에 통보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통보의무 면제제도'를 시행 중입니다. 범죄피해나 인권침해를 당한 외국인의 권익 보호를 위한 제도입니다.

앞선 두 사고에서도 다친 이주 노동자가 사고 직후 잠적하지 않고 공공보건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아도 출입국 당국에 통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통보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얼마든지 통보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제도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이주 노동자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이 때문에, '통보의무 면제제도'엔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여전히 도망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맹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범죄를 목격한 불법체류자가 경찰서에 범죄를 신고하면, 담당 공무원은 불법 체류 중인 이주노동자의 존재는 출입국 당국에 통보하게 돼 있습니다.

■ “대한민국 덕분에 애들 잘 컸어요. 대한민국 고마워요.”

“대한민국 덕분에 엄마, 아빠도 건강하고 애들도 잘 컸어요. 대한민국이 고마워요.”

월급 체납, 사기, 인종차별, 욕설... 대부분의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경험했을 일들입니다. 그래서 "한국이 밉지는 않냐"고 물었는데, 돌아온 A 씨의 답은 의외였습니다. 여전히 고맙다고 말합니다.

2019년 대한민국에 체류 중인 240만 명가량의 외국인 가운데, 불법체류자는 36만 명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불법체류자가 끊임없이 양산되는 구조적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이렇게 여전히 '대한민국이 고맙다'고 말하는 이주 노동자들이 다쳤을 때, 최소한 마음 놓고 치료는 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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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8-27 07:00:20
    • 수정2019-08-27 07:00:54
    취재후·사건후
■ 사고 때마다 사라지는 이주 노동자들

지난달 22일, 삼척에서 승합차가 전복되는 사고가 났습니다. 쪽파 파종 작업을 하러 가던 중 4명이 숨지고 9명이 중경상을 입는 큰 사고였습니다. 그런데 외국인 노동자 3명이 사고 직후 자취를 감췄습니다.

지난 14일엔 속초에서 엘리베이터가 추락했습니다. 공사현장 15층 높이에서 엘리베이터가 떨어져 3명이 숨진 와중에 사고현장에 있던 외국인 노동자 2명도 역시 병원에서 사라졌습니다.

처참한 사고 현장을 뒤로하고 다친 몸을 숨겨야만 했던 그들의 사연을 듣고 싶었습니다. 이주단체, 종교단체 등을 통해 이들의 행방을 찾았지만 아직까지 찾지 못했습니다. 대신 외국인노동자, 즉 이주노동자들의 입을 통해 그들이 사라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들어봤습니다.


■ "나였어도 몸을 숨겼을 거예요."

캄보디아, 베트남, 필리핀, 네팔 등에서 한국을 찾은 이주 노동자들. 정식 비자를 통해 들어온 경우도 있지만, 브로커에게 사기를 당해 불법 체류 신분으로 남게 된 사람, 그리고 산업연수생으로 들어와 남아야만 했던 사람까지, 사연도 구구합니다.

이 가운데, 십여 년 전 네팔에서 온 이주노동자 A씨는 사고 때마다 이주노동자들이 사라지는 이유를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망설임 없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한국에서 일하는) 나만 조금 힘들면, 네팔 우리 집에 있는 5명이 행복하게 살잖아요. 그 생각 때문에 그렇게 도망가는 (신분 노출을 숨기는) 거예요. 나도 똑같아요. 나도 도망가야 해요."

A씨는 네팔에 두 아들과 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를 두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브로커에게 천만 원을 주고 취업비자를 받기로 했는데, 사기를 당했다고 합니다. 이후 '불법체류 노동자' 신세로 세탁소와 가구공장을 전전하고 있습니다.

네팔에 두고 온 아이들을 십 년 동안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A씨는 그럼에도 한국에서 비슷한 사고를 겪었다면, 자신도 도망가야 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한국에선 아파도 버텼다가 몇 달 뒤 다시 일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할 수 있지만, 네팔에 가서는 그럴 수 없다는 겁니다.

취재진은 22년 전 산업연수생으로 처음 한국 땅을 밟은 B씨도 만났습니다. B씨도 사고 현장의 그들이 무엇보다 '불법체류자'라는 자신들의 상황 때문에 두려웠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도망친 이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한다고 했습니다.

이제는 한 아이의 엄마가 된 B씨는 남편과 아이 모두 불법 체류자입니다. B 씨의 아이는 부모가 불법체류자라도 학교는 다니도록 하는 교육 당국의 방침으로 현재 학교에 다니고 있습니다.

20년 넘도록 오랜 불법체류자 생활에 지친 B씨는 지금 한국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는 아이만은 서류상 '없는 사람'으로 살지 않길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만약에 제가 잡힌다면 이젠 한국을 떠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하지만, 이 땅에서 태어난 우리 아이만은 합법적으로 살 수 있었으면 해요"

통보의무 면제제도 KBS 방송 캡처
■ 『불법체류자 통보 의무 면제 제도』…. 인권보호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

현행 법령상 '불법체류' 외국인은 피해 구제가 우선적으로 필요할 경우, 담당 공무원이 출입국 당국 등에 통보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통보의무 면제제도'를 시행 중입니다. 범죄피해나 인권침해를 당한 외국인의 권익 보호를 위한 제도입니다.

앞선 두 사고에서도 다친 이주 노동자가 사고 직후 잠적하지 않고 공공보건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아도 출입국 당국에 통보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현실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통보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얼마든지 통보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제도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이주 노동자들이 여전히 많습니다.

이 때문에, '통보의무 면제제도'엔 미등록 이주노동자가 여전히 도망칠 수밖에 없게 만드는 맹점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가령, 범죄를 목격한 불법체류자가 경찰서에 범죄를 신고하면, 담당 공무원은 불법 체류 중인 이주노동자의 존재는 출입국 당국에 통보하게 돼 있습니다.

■ “대한민국 덕분에 애들 잘 컸어요. 대한민국 고마워요.”

“대한민국 덕분에 엄마, 아빠도 건강하고 애들도 잘 컸어요. 대한민국이 고마워요.”

월급 체납, 사기, 인종차별, 욕설... 대부분의 이주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경험했을 일들입니다. 그래서 "한국이 밉지는 않냐"고 물었는데, 돌아온 A 씨의 답은 의외였습니다. 여전히 고맙다고 말합니다.

2019년 대한민국에 체류 중인 240만 명가량의 외국인 가운데, 불법체류자는 36만 명 이상으로 추정됩니다. 불법체류자가 끊임없이 양산되는 구조적인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이렇게 여전히 '대한민국이 고맙다'고 말하는 이주 노동자들이 다쳤을 때, 최소한 마음 놓고 치료는 받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였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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