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② 어부 안용복, 뭘 남겼나

입력 2019.09.01 (07:02) 수정 2020.01.08 (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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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국 정부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자는 일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임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해 한국 정부가 독도가 역사적으로 그의 고유한 영토임을 증명하기 위해 국제 사회에 제시할 증거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실정입니다"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 169~170페이지)

이영훈 교수의 독도 저술을 읽으면서 조선 시대의 '위대한' 어부 안용복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안용복의 도일

안용복은 한마디로 무모한 사람이었습니다.

안용복의 1차 도일은 1693년 3월에 있었습니다. 전편에서 설명드린 대로 울릉도에 대한 조선의 방침은 섬을 비워두는 공도(空島)정책이었죠. 조선시대 태종과 세종은 몇 차례 섬에 관리를 보내 울릉도 주민을 본토로 쇄환(刷還)했습니다. 이처럼 조선시대 울릉도는 사람은 살지 않고, 어로 활동만 이뤄지던 곳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일본 학자들은 조선 정부가 섬을 '방치'했다고 하지만, 우리 학자들은 주기적으로 섬에 관리를 파견해 거주민을 쇄환하는 식으로 섬을 '관리'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어부 안용복. 그의 두 차례 일본 항의 방문으로 일본은 울릉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일체 하지 못했다.조선시대 어부 안용복. 그의 두 차례 일본 항의 방문으로 일본은 울릉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일체 하지 못했다.

안용복은 울산 어부 40여 명과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다가 일본 어부들과 '충돌'했습니다. 일본 어부들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간 그는 당당하게 대응했습니다. (끌려갔다는 설과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갔다는 설이 나뉨) 조선 영토인 울릉도에 왜 일본 사람들이 오가느냐며 강하게 항의한 것이지요. 이에 놀란 호키 주 태수는 그의 주장을 문서로 작성해 중앙정부 격인 에도 막부에 보냅니다.

막부의 회신은 그해 5월에 도착합니다. 막부는 안용복을 돌려보내라고 지시하면서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는 내용의 서계(書契)를 써줍니다.

이 일을 계기로 조선은 울릉도와 그 근처 섬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됩니다. 1694년 장한상을 보내 울릉도를 수색하게 된 것도 그런 배경 하에서입니다.

이 무렵 조선과 일본은 일본 대마도와 조선 울릉도 등의 영유권과 어업권을 두고 복잡한 논의를 벌입니다. 그 결과 1696년 1월 일본 막부는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고 일본 어민의 도해와 어업 활동을 금지하기로 결정합니다. 울릉도의 운명이 결정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위대한 안용복 업적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안용복은 1696년 5월 2차 도일(渡日)을 감행합니다. 울릉도에서 여전히 조업하는 일본인들을 보고 그는 직접 일본으로 가서 울릉도가 우리 영토임을 주장합니다. (귀국 후 그는 허락 없이 일본으로 갔다는 이유로 조선 정부에 의해 가혹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무모해 보였던 안용복의 업적이 더 커 보이는 이유는 일본이 19세기 말에 울릉도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관심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조선 정부가 사람이 살지 않던 울릉도 개척을 결정한 것은 1880년대 초입니다. 1883년에 처음으로 조선인들이 울릉도에 (공식적으로) 살게 됩니다. 조선의 이런 결정을 촉진한 것은 울릉도에 불법 체류하던 일본인들이었습니다.

일본은 개항과 메이지 유신 이후 대외 진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는 배 위에서 울릉도를 본 일본인들은 이 섬을 새로운 영토로 파악하고, 영토로 개척하는 청원을 여러 차례 일본 정부에 제출합니다.

이에 일본은 1880년 7월 군함을 보내 울릉도를 조사합니다. 그리고 보고서를 통해 "이 섬은 17세기 말부터 죽도라 부르던 것으로, 일본 영토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확인합니다. 이들이 울릉도(일본식 명칭 죽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던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위대한 어부' 어부 안용복의 도일로 일궈낸 일본 막부의 "울릉도 도해 금지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8월 25~26일 실시된 한국군의 독도방어훈련 8월 25~26일 실시된 한국군의 독도방어훈련

"울릉도에만 관심있었다"

이영훈 교수의 대일 종족주의 책에서도 안용복의 도일에 관해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조선 정부는 울릉도에만 관심이 있었지, 우산도에는 하등의 관심도 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교수가 굳이 이 부분만 강조하는 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너희 일본이 말하는 송도(지금의 독도)는 우리의 우산도다"라고 외친 어부 안용복의 말은 그 당시 조선 어부들이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일본도 독도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1696년 막부가 울릉도 도해 금지명령을 내리면서 일본 사서에서도 독도 언급이 거의 사라집니다. 울릉도 도해가 금지되면서 울릉도를 가기 위해 잠시 거쳤거나, 바라보았을 독도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없어진 것입니다.

19세기까지 독도에 대해 양국이 다 같이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 해도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닌 조선에 부속된 것이라는 인식을 보여주는 문서는 제법 있습니다.

1870년 일본 외무성에서 작성된 '죽도, 송도가 조선에 부속하게 된 경위'라는 보고서도 그렇습니다. 자세한 경위는 나와 있지 않지만, 제목에는 분명히 송도(지금이 독도)가 조선 소유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1876년에는 '竹島外一島(죽도외일도)'를 일본 현의 지적(地籍)에 편제할지 에 대한 질의에 내무성은 "두 섬은 일본과 무관하다"고 답합니다. 여기서 竹島(죽도)는 울릉도, 外一島(외일도)는 송도, 즉 우리의 독도를 말합니다.

1877년 태정관 지령도 있습니다. 일본 태정관은 죽도(竹島·울릉도)와 송도(松島·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해서 확인했고 이를 훈령 문서로 작성했습니다.

이 교수의 저술에는 이런 사실들은 나오지 않습니다.

일본 태정관이 竹島(죽도) 즉 우리의 울릉도와 外一島(외일도) 즉 우리의 독도가 일본과 무관하다는 내용을 쓴 지령 문서(오른쪽)와 두 섬을  그린 지도.일본 태정관이 竹島(죽도) 즉 우리의 울릉도와 外一島(외일도) 즉 우리의 독도가 일본과 무관하다는 내용을 쓴 지령 문서(오른쪽)와 두 섬을 그린 지도.

"석도를 독도라 주장하는 한국학자들은 심한 자가당착"

19세 후반까지 독도에 대한 조선의 지식이 빈약했고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이 교수의 지적은 왜곡은 아닙니다만, 반쪽 진실만을 얘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더구나 1900년 10월 이후로는 더이상 사실이 아닙니다.

대한제국이 공포한 칙령 제41호입니다. 여기서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는데 관할 범위도 정합니다. "울릉전도(鬱陵全島)와 죽도, 석도(石島)로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학자들은 여기서 나오는 '석도'를 독도라고 해석합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한국 학자들이 석도를 남도지방 방언을 이유로 독도라고 주장하는 논리는 심한 자가당착이다. 너무 궁색한 논리의 중첩이라 참담하기까지 하다"고 맹비난합니다. 그러면서 칙령 41호에 나오는 '죽도'는 지금의 죽도(울릉도 옆에 있는 섬) 그리고 석도는 지금의 관음도(울릉도 옆에 있는 섬)라고 해석합니다. 일본 학자들의 견해와 일치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전남 고흥군 금산면 오천리 산 28번지 소재 독도전남 고흥군 금산면 오천리 산 28번지 소재 독도

이영훈의 교수의 이런 주장과는 달리 남도 지방 방언을 연구한 향토 사가들은 석도가 독도임을 입증할 많은 자료를 찾았습니다.

석도의 석(石)은 돌을 의미합니다. 남도지방 방언으로는 '돌'을 '독'이라고도 읽습니다. 전남 고흥 앞바다에는 많은 돌섬들이 있는데, '독섬' '석도' '독도' 등 다양한 명칭의 섬들이 있습니다. 현재의 독도를 석도로 불렀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석도를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독도로 바꿔 부르기 시작한 겁니다.) 실제로 전남 고흥군 금산면 오천리 산28번지에는 '독도'라 불리는 바위섬도 있습니다. 도대체 이 교수는 이런 실증적 연구를 무슨 근거로 '심한 자가당착'이라고 맹비난하고 있는 걸까요.


학자들은 대한제국 칙령에 나오는 '울릉전도(鬱陵全島)'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울릉도라 하지 않고 왜 울릉전도(全島)라고 표현했을까요. 울릉전도는 울릉도 주변에 있는 관음도 등 주변섬을 당연히 포함한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해석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칙령에 나오는 '석도'는, 울릉도 바로 옆에 있는 죽도나 관음도가 아닌 87km 떨어진 독도로 보는 게 더 자연스럽습니다. 이런 국내 학자들의 통설에 대해 이영훈 교수는 "궁색한 논리의 중첩으로 참담하다"고 합니다.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① 우산도는 단순한 허상일까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② 어부 안용복, 뭘 남겼나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③ 울도군수 심흥택의 다급한 보고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④ 독도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면 진다는데…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⑤ 이승만, 김대중, 이명박의 독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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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② 어부 안용복, 뭘 남겼나
    • 입력 2019-09-01 07:02:23
    • 수정2020-01-08 17:22:35
    취재K
"오늘날 한국 정부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자는 일본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는 처지임은 모두가 잘 아는 사실입니다. 솔직히 말해 한국 정부가 독도가 역사적으로 그의 고유한 영토임을 증명하기 위해 국제 사회에 제시할 증거는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 실정입니다" (이영훈 외, 반일 종족주의 169~170페이지)

이영훈 교수의 독도 저술을 읽으면서 조선 시대의 '위대한' 어부 안용복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안용복의 도일

안용복은 한마디로 무모한 사람이었습니다.

안용복의 1차 도일은 1693년 3월에 있었습니다. 전편에서 설명드린 대로 울릉도에 대한 조선의 방침은 섬을 비워두는 공도(空島)정책이었죠. 조선시대 태종과 세종은 몇 차례 섬에 관리를 보내 울릉도 주민을 본토로 쇄환(刷還)했습니다. 이처럼 조선시대 울릉도는 사람은 살지 않고, 어로 활동만 이뤄지던 곳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일본 학자들은 조선 정부가 섬을 '방치'했다고 하지만, 우리 학자들은 주기적으로 섬에 관리를 파견해 거주민을 쇄환하는 식으로 섬을 '관리'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어부 안용복. 그의 두 차례 일본 항의 방문으로 일본은 울릉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일체 하지 못했다.
안용복은 울산 어부 40여 명과 울릉도에서 고기를 잡다가 일본 어부들과 '충돌'했습니다. 일본 어부들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간 그는 당당하게 대응했습니다. (끌려갔다는 설과 자발적으로 일본으로 갔다는 설이 나뉨) 조선 영토인 울릉도에 왜 일본 사람들이 오가느냐며 강하게 항의한 것이지요. 이에 놀란 호키 주 태수는 그의 주장을 문서로 작성해 중앙정부 격인 에도 막부에 보냅니다.

막부의 회신은 그해 5월에 도착합니다. 막부는 안용복을 돌려보내라고 지시하면서 "울릉도는 일본의 영토가 아니다"는 내용의 서계(書契)를 써줍니다.

이 일을 계기로 조선은 울릉도와 그 근처 섬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됩니다. 1694년 장한상을 보내 울릉도를 수색하게 된 것도 그런 배경 하에서입니다.

이 무렵 조선과 일본은 일본 대마도와 조선 울릉도 등의 영유권과 어업권을 두고 복잡한 논의를 벌입니다. 그 결과 1696년 1월 일본 막부는 울릉도를 조선의 영토로 인정하고 일본 어민의 도해와 어업 활동을 금지하기로 결정합니다. 울릉도의 운명이 결정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위대한 안용복 업적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안용복은 1696년 5월 2차 도일(渡日)을 감행합니다. 울릉도에서 여전히 조업하는 일본인들을 보고 그는 직접 일본으로 가서 울릉도가 우리 영토임을 주장합니다. (귀국 후 그는 허락 없이 일본으로 갔다는 이유로 조선 정부에 의해 가혹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무모해 보였던 안용복의 업적이 더 커 보이는 이유는 일본이 19세기 말에 울릉도에 대해서도 끊임없는 관심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조선 정부가 사람이 살지 않던 울릉도 개척을 결정한 것은 1880년대 초입니다. 1883년에 처음으로 조선인들이 울릉도에 (공식적으로) 살게 됩니다. 조선의 이런 결정을 촉진한 것은 울릉도에 불법 체류하던 일본인들이었습니다.

일본은 개항과 메이지 유신 이후 대외 진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됐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왕래하는 배 위에서 울릉도를 본 일본인들은 이 섬을 새로운 영토로 파악하고, 영토로 개척하는 청원을 여러 차례 일본 정부에 제출합니다.

이에 일본은 1880년 7월 군함을 보내 울릉도를 조사합니다. 그리고 보고서를 통해 "이 섬은 17세기 말부터 죽도라 부르던 것으로, 일본 영토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확인합니다. 이들이 울릉도(일본식 명칭 죽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할 수 없었던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위대한 어부' 어부 안용복의 도일로 일궈낸 일본 막부의 "울릉도 도해 금지 명령' 때문이었습니다.

8월 25~26일 실시된 한국군의 독도방어훈련
"울릉도에만 관심있었다"

이영훈 교수의 대일 종족주의 책에서도 안용복의 도일에 관해 설명합니다. 그러면서 "조선 정부는 울릉도에만 관심이 있었지, 우산도에는 하등의 관심도 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교수가 굳이 이 부분만 강조하는 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너희 일본이 말하는 송도(지금의 독도)는 우리의 우산도다"라고 외친 어부 안용복의 말은 그 당시 조선 어부들이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 도서로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일본도 독도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1696년 막부가 울릉도 도해 금지명령을 내리면서 일본 사서에서도 독도 언급이 거의 사라집니다. 울릉도 도해가 금지되면서 울릉도를 가기 위해 잠시 거쳤거나, 바라보았을 독도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럽게 없어진 것입니다.

19세기까지 독도에 대해 양국이 다 같이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 해도 독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닌 조선에 부속된 것이라는 인식을 보여주는 문서는 제법 있습니다.

1870년 일본 외무성에서 작성된 '죽도, 송도가 조선에 부속하게 된 경위'라는 보고서도 그렇습니다. 자세한 경위는 나와 있지 않지만, 제목에는 분명히 송도(지금이 독도)가 조선 소유임을 스스로 밝히고 있습니다.

1876년에는 '竹島外一島(죽도외일도)'를 일본 현의 지적(地籍)에 편제할지 에 대한 질의에 내무성은 "두 섬은 일본과 무관하다"고 답합니다. 여기서 竹島(죽도)는 울릉도, 外一島(외일도)는 송도, 즉 우리의 독도를 말합니다.

1877년 태정관 지령도 있습니다. 일본 태정관은 죽도(竹島·울릉도)와 송도(松島·독도)가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해서 확인했고 이를 훈령 문서로 작성했습니다.

이 교수의 저술에는 이런 사실들은 나오지 않습니다.

일본 태정관이 竹島(죽도) 즉 우리의 울릉도와 外一島(외일도) 즉 우리의 독도가 일본과 무관하다는 내용을 쓴 지령 문서(오른쪽)와 두 섬을  그린 지도.
"석도를 독도라 주장하는 한국학자들은 심한 자가당착"

19세 후반까지 독도에 대한 조선의 지식이 빈약했고 관심이 없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이 교수의 지적은 왜곡은 아닙니다만, 반쪽 진실만을 얘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더구나 1900년 10월 이후로는 더이상 사실이 아닙니다.

대한제국이 공포한 칙령 제41호입니다. 여기서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정하는데 관할 범위도 정합니다. "울릉전도(鬱陵全島)와 죽도, 석도(石島)로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 학자들은 여기서 나오는 '석도'를 독도라고 해석합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이렇게 평가합니다. "한국 학자들이 석도를 남도지방 방언을 이유로 독도라고 주장하는 논리는 심한 자가당착이다. 너무 궁색한 논리의 중첩이라 참담하기까지 하다"고 맹비난합니다. 그러면서 칙령 41호에 나오는 '죽도'는 지금의 죽도(울릉도 옆에 있는 섬) 그리고 석도는 지금의 관음도(울릉도 옆에 있는 섬)라고 해석합니다. 일본 학자들의 견해와 일치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전남 고흥군 금산면 오천리 산 28번지 소재 독도
이영훈의 교수의 이런 주장과는 달리 남도 지방 방언을 연구한 향토 사가들은 석도가 독도임을 입증할 많은 자료를 찾았습니다.

석도의 석(石)은 돌을 의미합니다. 남도지방 방언으로는 '돌'을 '독'이라고도 읽습니다. 전남 고흥 앞바다에는 많은 돌섬들이 있는데, '독섬' '석도' '독도' 등 다양한 명칭의 섬들이 있습니다. 현재의 독도를 석도로 불렀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석도를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독도로 바꿔 부르기 시작한 겁니다.) 실제로 전남 고흥군 금산면 오천리 산28번지에는 '독도'라 불리는 바위섬도 있습니다. 도대체 이 교수는 이런 실증적 연구를 무슨 근거로 '심한 자가당착'이라고 맹비난하고 있는 걸까요.


학자들은 대한제국 칙령에 나오는 '울릉전도(鬱陵全島)'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울릉도라 하지 않고 왜 울릉전도(全島)라고 표현했을까요. 울릉전도는 울릉도 주변에 있는 관음도 등 주변섬을 당연히 포함한다고 보는 게 합리적인 해석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칙령에 나오는 '석도'는, 울릉도 바로 옆에 있는 죽도나 관음도가 아닌 87km 떨어진 독도로 보는 게 더 자연스럽습니다. 이런 국내 학자들의 통설에 대해 이영훈 교수는 "궁색한 논리의 중첩으로 참담하다"고 합니다.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① 우산도는 단순한 허상일까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② 어부 안용복, 뭘 남겼나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③ 울도군수 심흥택의 다급한 보고
[이영훈 독도관의 진실]④ 독도를 국제사법재판소로 가져가면 진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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