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후] 울산부터 조국까지…검·경 덮친 피의사실 공표 금지령(?)

입력 2019.09.02 (11:15) 수정 2019.09.02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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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남부지방경찰청의 보도자료에서 최근 변화가 느껴졌다. 사건 보도자료가 일주일에 한 건 정도는 나왔었는데, 지난주에는 한 건도 없었다.

보도 자료에 담긴 내용도 줄어들었다. 지난달 22일 나온 '오산 백골 시신 암매장 피의자 검거' 보도자료는 분량이 A4용지 2장에 불과했다. 사건의 뼈대만 간략히 적은 셈이다.

경찰 관계자에게 이유를 물어봤다. "웬만해선 보도자료를 내지 말자는 게 본청(경찰청)의 분위기"라고 했다. 일종의 함구령이 내려진 것이다.

함구령은 검찰에서도 등장했다.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수사와 관련해 압수수색을 한 지난달 27일, 수사가 조용히 진행되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을 대검찰청에서 일선 검찰청에 하달했다.

검·경은 왜 갑자기 입을 닫으려는 걸까.


울산에서 시작된 피의사실공표 논란
경찰의 함구령은 울산에서 시작됐다. 울산 경찰은 지난 1월 약사 면허증 위조 사건을 담은 보도자료를 냈다.

흔한 보도자료였지만, 검찰이 제동을 걸었다. 검찰은 약사 면허를 위조한 사람이 공인이 아닌데 피의사실을 알렸다는 이유 등으로 경찰관 2명을 피의사실공표죄로 입건해 수사하고 있다.

울산지검은 이 사건을 대검찰청 수사심의위원회에 보내 계속 수사하라는 의견까지 받았다. 더 나아가 피의사실공표죄를 연구한 책자도 냈다.

경찰의 보도자료 배포를 검찰이 자발적으로 나서 피의사실공표죄로 수사하는 건 사실상 전례가 없는 일이다. 경찰로서는 하던 일을 했는데 갑자기 죄인이 된 상황이다.

울산의 검·경 갈등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이유야 어쨌든 이 일로 수사기관의 피의사실공표가 도마 위에 올랐다.


경찰 수사하던 검찰도 논란 빠져
검찰은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수사와 관련해 피의사실공표 논란에 빠졌다. 검찰이 압수수색을 한 지난달 27일 한 언론에 검찰이 압수수색에서 입수했다는 자료 내용이 보도됐다. 이 자료를 언론이 어떻게 입수했는지 논란이 일었다.

검찰이 흘린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자, 청와대까지 나섰다. 강기정 정무수석은 지난달 30일 윤석열 총장이라면 이를 수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훈 변호사는 수사를 맡은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들을 공무상비밀누설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검찰은 자신들이 흘린 것이 아니라, 검찰이 압수수색을 마치고 돌아간 뒤 언론이 현장을 취재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앞서 '자녀 채용 부정 청탁' 혐의로 기소된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은 자신의 피의사실을 검찰이 언론에 흘렸다며, 수사를 맡았던 서울남부지검장 등을 경찰에 고소하기도 했다.


역사는 깊지만, 관행에 묻혀 사문화
피의사실공표죄는 1953년 형법 제정 당시부터 있었다.

형법 제126조(피의사실공표)
검찰, 경찰 기타 범죄수사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감독하거나 보조하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함에 당하여 지득한 피의사실을 공판청구 전에 공표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이 조항은 쉽게 말해 사건이 재판에 넘어가기 전에는 범죄와 관련된 내용을 외부에 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형법상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하는 원칙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재판은 공개가 원칙이기 때문에 재판에서 피의사실을 말하는 건 죄가 되지 않는다.

수사 과정에서 나오는 검·경의 보도자료나 브리핑에는 피의사실이 비교적 자세히 들어가 있다. 이 조항만 놓고 보면 모두 법 위반이다. 언론 취재에 응해 피의사실을 확인해주는 것도 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피의사실공표가 이뤄졌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기자들이 밤에 일선 경찰서 당직 형사팀에 가면 접수된 사건 목록이 적힌 '사건 대장'을 볼 수 있었다. 검찰도 수시로 수사 상황을 언론에 알렸다.

이런 관행은 2009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등 일부 수사에서 꾸준히 문제가 됐다. 이에 법무부는 2010년, 경찰은 2014년 수사 공보에 관한 내부 훈령을 만들어서 시행 중이다.

공익이나 오보 대응 등 정당한 필요성이 있을 때만 피의사실을 알릴 수 있다는 내용이다. 피의사실공표죄 관련 조항에는 예외 없이 피의사실공표는 무조건 안 되는 걸로 돼 있는데, 수사기관 자체적으로 기준을 만들어서 국민의 알 권리 등을 보장하고 있다.


경찰보단 검찰에서 더 문제
피의사실공표 논란은 관련 법 조항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경찰보다는 사회적 관심이 큰 사건이나 사회 고위층 관련 대형 사건을 많이 한 검찰에서 더 논란이 많았다.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도 이런 점을 지적했다. 과거사위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2003년과 2013년 각각 수사를 받은 송두율 교수와 이석기 전 의원 사건, 1991년 강기훈 유서 대필사건, 2008년 MBC PD수첩의 광우병 보도 관련 수사에서 피의사실공표가 두드러졌다고 밝혔다.

검찰 과거사위는 "검찰은 수사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공소 제기 전 피의사실공표를 통해 피의자를 압박하고, 유죄의 심증을 부추기는 여론전을 벌이는 등 관행적으로 법을 위반하고 있다"며 "반대로 수사에 부담이 되는 경우 형법 규정에 기대 언론의 취재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사건 보도, 앞으로 어떻게 될까
피의사실공표 논란에서는 언론도 자유롭지는 않다. 큰 사건이 터지면 취재 경쟁이 붙어서, 새로운 사실을 하나라도 더 알아내 '단독'을 붙여 보도했던 게 언론의 오랜 관행이다. 그 단독 하나하나가 다 피의사실인데도 말이다.

물론 '국민의 알 권리 보장'이나 '수사기관 감시'라는 측면에서 사건 보도가 어느 정도 필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알 권리라는 게 모호한 개념이라, 언론의 취재 편의를 위해 알 권리를 내세우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날로 거세지고 있다.

검·경은 모두 피의사실공표 관련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공감하고 있다. 피의사실을 공표해도 되는 예외를 정해 법률에 열거해놓고, 예외가 아닌 데도 공표하는 경우 실제로 처벌하는 방식 등이 거론된다. 국민의 알 권리와 인권 보호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점을 찾는 게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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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취재후] 울산부터 조국까지…검·경 덮친 피의사실 공표 금지령(?)
    • 입력 2019-09-02 11:15:30
    • 수정2019-09-02 11:15:41
    취재후·사건후
경기남부지방경찰청의 보도자료에서 최근 변화가 느껴졌다. 사건 보도자료가 일주일에 한 건 정도는 나왔었는데, 지난주에는 한 건도 없었다.

보도 자료에 담긴 내용도 줄어들었다. 지난달 22일 나온 '오산 백골 시신 암매장 피의자 검거' 보도자료는 분량이 A4용지 2장에 불과했다. 사건의 뼈대만 간략히 적은 셈이다.

경찰 관계자에게 이유를 물어봤다. "웬만해선 보도자료를 내지 말자는 게 본청(경찰청)의 분위기"라고 했다. 일종의 함구령이 내려진 것이다.

함구령은 검찰에서도 등장했다.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수사와 관련해 압수수색을 한 지난달 27일, 수사가 조용히 진행되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을 대검찰청에서 일선 검찰청에 하달했다.

검·경은 왜 갑자기 입을 닫으려는 걸까.


울산에서 시작된 피의사실공표 논란
경찰의 함구령은 울산에서 시작됐다. 울산 경찰은 지난 1월 약사 면허증 위조 사건을 담은 보도자료를 냈다.

흔한 보도자료였지만, 검찰이 제동을 걸었다. 검찰은 약사 면허를 위조한 사람이 공인이 아닌데 피의사실을 알렸다는 이유 등으로 경찰관 2명을 피의사실공표죄로 입건해 수사하고 있다.

울산지검은 이 사건을 대검찰청 수사심의위원회에 보내 계속 수사하라는 의견까지 받았다. 더 나아가 피의사실공표죄를 연구한 책자도 냈다.

경찰의 보도자료 배포를 검찰이 자발적으로 나서 피의사실공표죄로 수사하는 건 사실상 전례가 없는 일이다. 경찰로서는 하던 일을 했는데 갑자기 죄인이 된 상황이다.

울산의 검·경 갈등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이유야 어쨌든 이 일로 수사기관의 피의사실공표가 도마 위에 올랐다.


경찰 수사하던 검찰도 논란 빠져
검찰은 조국 법무부장관 후보자 수사와 관련해 피의사실공표 논란에 빠졌다. 검찰이 압수수색을 한 지난달 27일 한 언론에 검찰이 압수수색에서 입수했다는 자료 내용이 보도됐다. 이 자료를 언론이 어떻게 입수했는지 논란이 일었다.

검찰이 흘린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자, 청와대까지 나섰다. 강기정 정무수석은 지난달 30일 윤석열 총장이라면 이를 수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훈 변호사는 수사를 맡은 서울중앙지검 관계자들을 공무상비밀누설 혐의로 경찰에 고발했다.

검찰은 자신들이 흘린 것이 아니라, 검찰이 압수수색을 마치고 돌아간 뒤 언론이 현장을 취재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앞서 '자녀 채용 부정 청탁' 혐의로 기소된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은 자신의 피의사실을 검찰이 언론에 흘렸다며, 수사를 맡았던 서울남부지검장 등을 경찰에 고소하기도 했다.


역사는 깊지만, 관행에 묻혀 사문화
피의사실공표죄는 1953년 형법 제정 당시부터 있었다.

형법 제126조(피의사실공표)
검찰, 경찰 기타 범죄수사에 관한 직무를 행하는 자 또는 이를 감독하거나 보조하는 자가 그 직무를 행함에 당하여 지득한 피의사실을 공판청구 전에 공표한 때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한다.

이 조항은 쉽게 말해 사건이 재판에 넘어가기 전에는 범죄와 관련된 내용을 외부에 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형법상 재판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무죄로 추정하는 원칙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재판은 공개가 원칙이기 때문에 재판에서 피의사실을 말하는 건 죄가 되지 않는다.

수사 과정에서 나오는 검·경의 보도자료나 브리핑에는 피의사실이 비교적 자세히 들어가 있다. 이 조항만 놓고 보면 모두 법 위반이다. 언론 취재에 응해 피의사실을 확인해주는 것도 법을 어기는 것이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피의사실공표가 이뤄졌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기자들이 밤에 일선 경찰서 당직 형사팀에 가면 접수된 사건 목록이 적힌 '사건 대장'을 볼 수 있었다. 검찰도 수시로 수사 상황을 언론에 알렸다.

이런 관행은 2009년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수사 등 일부 수사에서 꾸준히 문제가 됐다. 이에 법무부는 2010년, 경찰은 2014년 수사 공보에 관한 내부 훈령을 만들어서 시행 중이다.

공익이나 오보 대응 등 정당한 필요성이 있을 때만 피의사실을 알릴 수 있다는 내용이다. 피의사실공표죄 관련 조항에는 예외 없이 피의사실공표는 무조건 안 되는 걸로 돼 있는데, 수사기관 자체적으로 기준을 만들어서 국민의 알 권리 등을 보장하고 있다.


경찰보단 검찰에서 더 문제
피의사실공표 논란은 관련 법 조항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다. 경찰보다는 사회적 관심이 큰 사건이나 사회 고위층 관련 대형 사건을 많이 한 검찰에서 더 논란이 많았다.

법무부 검찰 과거사위원회도 이런 점을 지적했다. 과거사위는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2003년과 2013년 각각 수사를 받은 송두율 교수와 이석기 전 의원 사건, 1991년 강기훈 유서 대필사건, 2008년 MBC PD수첩의 광우병 보도 관련 수사에서 피의사실공표가 두드러졌다고 밝혔다.

검찰 과거사위는 "검찰은 수사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면 공소 제기 전 피의사실공표를 통해 피의자를 압박하고, 유죄의 심증을 부추기는 여론전을 벌이는 등 관행적으로 법을 위반하고 있다"며 "반대로 수사에 부담이 되는 경우 형법 규정에 기대 언론의 취재를 회피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사건 보도, 앞으로 어떻게 될까
피의사실공표 논란에서는 언론도 자유롭지는 않다. 큰 사건이 터지면 취재 경쟁이 붙어서, 새로운 사실을 하나라도 더 알아내 '단독'을 붙여 보도했던 게 언론의 오랜 관행이다. 그 단독 하나하나가 다 피의사실인데도 말이다.

물론 '국민의 알 권리 보장'이나 '수사기관 감시'라는 측면에서 사건 보도가 어느 정도 필요하기는 하다. 그러나 알 권리라는 게 모호한 개념이라, 언론의 취재 편의를 위해 알 권리를 내세우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날로 거세지고 있다.

검·경은 모두 피의사실공표 관련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공감하고 있다. 피의사실을 공표해도 되는 예외를 정해 법률에 열거해놓고, 예외가 아닌 데도 공표하는 경우 실제로 처벌하는 방식 등이 거론된다. 국민의 알 권리와 인권 보호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점을 찾는 게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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