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님 생각을 강요하지 마십시오”…‘사법농단’ 재판 판사 증인의 분노

입력 2019.09.10 (15:29) 수정 2019.09.10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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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는 전혀 그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니, 저한테 생각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증인석에 앉은 판사에게선 내내 억울함과 일종의 분노가 읽혔습니다. 오늘(10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박성준 서울고등법원 판사(31기·전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심의관)의 이야기입니다.

증인의 목소리가 유독 높아진 건, 그가 2015년 2월 작성한 "국정원 선거개입 (원세훈) 사건 항소심 선고 보고" 문건을 두고 검사가 질문하기 시작할 때부터였습니다.

앞서 서울고등법원은 2015년 2월 9일,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으로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습니다. 이에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기조실장은 행정처 사법지원심의관이던 박성준 판사에게 "1, 2심 판결문을 분석해 상고심에서 예상되는 핵심 쟁점과 그에 대한 의견 등을 정리해 보고하라"는 취지로 지시했습니다.

이에 박성준 판사는 바로 다음 날인 2월 10일, "국정원 선거 개입 (원세훈) 사건 항소심 선고 보고" 문건을 임종헌 기조실장에게 보고했습니다. 이 문건은 이후 법원행정처장과 양승태 대법원장에게까지 보고됐고, 한편으로는 대법원 수석·선임재판연구관을 통해 이 '원세훈 사건'의 상고심 사건 검토를 담당하는 신현일 대법원 재판연구관에게까지 전달된 걸로 조사됐습니다. '사법농단'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은 당시 상고법원 신설을 추진하던 법원행정처가 "'원세훈 사건' 상고심을 최대한 신속히 진행하고, 결론에 재고의 여지가 있으면 조속히 선고해 청와대의 불만 및 오해를 최소화할 목적으로" 이런 쟁점 보고서를 대법원 재판연구관실에 전달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검찰이 이 문건에서 직접적으로 문제 삼은 내용을 모아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 이 사건에서 국정원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확정되면 국가기관이 선거에 개입하였다는 비난(원세훈에 대한 비난) 뿐만 아니라, 선거 자체가 불공정한 사유가 개입하였다는 폭발력을 가질 수 있음
대법원의 구성이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갖게 된다는 논란도 불러일으킬 수 있음
▣ 이 사건 파일의 증거능력 인정 여부가 절대적인 핵심 쟁점일 듯
지논 파일과 시큐리티 파일로 인정되는 사실관계는 너무나도 구체적임
● 그러한 구체적인 사실관계 (항소심에 적시된 사실관계)를 단순히 '전제법리'만으로 선거운동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기는 쉽지 않아 보임


검찰은 특정 사건에 대한 법원행정처 심의관의 '사견'이 담긴 문건이, 해당 사건을 '직접' 담당하는 대법원 재판연구관에게 전달된 것은 위법하다는 입장입니다. 이 문건의 내용이 재판연구관에게 영향을 끼쳐 예단을 형성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법관의 재판상 독립을 침해했다는 겁니다. 검사는 증인으로 나온 문건 작성 당사자에게 이 문제를 추궁했습니다.

- 검사: 이 보고서가 넘어가면, 사법행정 사무를 담당하는 행정처 지휘부까지 보고된 보고서가 넘어가면, 재판연구관에게 사건에 대해 예단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그런 문제점이 없습니까?

그러자 박성준 판사는 곧장 강한 어조로 반박했습니다.

- 증인: 아, 저는 전혀 그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거는 한마디로 말해서 그냥 제 사견이나 쟁점이...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한쪽 방향을 설명한 게 아니고요.

박 판사는 그러면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대법원 특별조사단의 보고서에도 "사실 전혀 동의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앞서 대법원 특별조사단은 지난해 5월 낸 조사보고서에서, 박성준 판사가 쓴 문건에 대해 "(대법원) 보고연구관이 사법행정담당자가 작성한 문건을 검토보고서 작성에 참조한다는 것은 사법행정 담당자가 가지고 있던 사건에 관한 지식 내지 시각이 소송 외적인 통로를 통해 유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실제 영향을 미쳤는지 여부를 떠나 부적절함"이라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박 판사는 특히 다른 '사법 농단' 의혹 문건이 넘어갔다면 예단을 심어줬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 보고서가 "어딜 봐서" 그렇냐는 비교 화법을 쓰기도 했습니다.

- 증인: 특조단 보고서가 그런 식으로 나와서 전 사실 전혀 동의할 수 없지만, 이게 무슨 예를 들어서 제가 뭐 다른 분들의 보고서를 언급해서 굉장히 죄송하지만. 기각이 아니라 각하가 되어야 한다, 또는 이렇게 하면 헌재에 불리할 수 있다. 이런 보고서가 만약 재판연구관에게 넘어갔으면 그건 사전 예단이라 할 수 있겠지만 제 보고서는 어딜 봐서. 이거 증거능력 날려야한다... 뭐. 그렇게 보고 싶은 분은 그렇게 볼 수 있지만. 재판연구관이 그렇게 볼 거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아서 예단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호한 증인. 공소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검사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물었습니다.

- 검사: 하나만 보충하면, 이 보고서는 지금 신현일 재판연구관 입장에서도 보고서 받아봤을 때 대법원장까지 보고된 보고서라는 거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거고, 그렇다 한다면 보고서에 이 사건의 '심각성'이라든지, '대법원이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이런 내용이 포함돼 있으면, 그 내용 자체만 하더라도 검토하는 연구관에게 영향을 일부는 미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판사 증인은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담당 재판연구관은 사건의 심각성과 파급력을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 증인: 그건 당연히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검사는 다소 당황한 듯 보였지만, 곧바로 추궁을 이어갔습니다. 이윽고 증인에게선 "강요하지 말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 검사: 당연히 알아야 되는 거긴 하지만
- 증인: [말 끊으며, 검사와 말 동시에 해서 잘 안들림] 그리고 없다고
- 검사: [말 끊으며] 하지만 지휘부에 보고된 보고서라는 것은 차이가 있는 것 아닌가요?
- 증인: [말 끊으며] 아니
- 검사: [말 끊으며] 증인이 업무를 함에 있어서도?
- 증인: 아니, 저한테 생각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 검사: 생각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여쭤보는 겁니다.
- 증인: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너무나 당연한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판사 증인의 억울함 표출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박성준 판사는 변호인의 반대 신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검찰에서 또는 지금 현재의 소위 말하는 법원행정처 무용론자는 판사가 왜 이런 일 해야하냐고 말한다"면서 "그러나 저는 판사가 아니라 사법행정 담당자로서 근무한 것"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사법 농단' 사건 이후 재발 방지 방안으로 법원행정처 비(非)법관화가 거론되는 데 우회적으로 회의적인 의견을 표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박 판사는 이어 "사법행정의 효율성과 재판의 독립은 언제든 충돌할 위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재판독립을 훨씬 우위에 두고 있는 게 법원의 기본이고, 저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작성한 '사법 농단' 의혹 문건들이 재판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정말 잘못된 것"이라면서, 자신도 법원행정처에 근무했지만 "법관 신분을 가진 사람으로서 재판 독립이 가장 최고의 목표였다"라고 자신의 입장을 길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또 변호인의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제가 한 말씀만 드리겠다"면서 검찰의 공소사실을 "아전인수격의 해석"이라고 하는가 하면,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할 수 없는 공소사실입니다"라고 작심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판사 증인들이 '사법 농단' 사건 재판에 나와 이처럼 억울함과 분노를 표출하는 일은 계속 있어 왔습니다. 지난 6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홍승면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이 대표적입니다.

[연관 기사] [판사와 두 개의 양심]⑤ 증인이 재판장 노릇?…검사 말 끊고 꾸짖은 판사

그는 당시 박성준 판사의 '원세훈 사건' 문건에 대한 질문을 받고도 "제가 연구관을 5년 했는데, 이 문장 가지고 예단을 가질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또 '원세훈 사건'의 심각성과 폭발력을 언급한 박성준 판사의 사견은 "초등학생도 다 아는 내용"이라며, 검찰이 그 의미를 의도적으로 부풀리고 있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미 검찰 수사 과정에서 '사법 농단'이라는 부정적 단어로 규정돼 버린 이 사건에 대해, 사건에 연루된 판사 상당수는 과하다, 검찰의 '언론플레이'다, 억울하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그래서 법정 증인석이라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나마 그런 입장을 밝히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해당 판사들이 불법 여부를 떠나 이 사건의 의미를 얼마나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을지를 생각해보고 있자면, 그들의 항변 같은 증언이 아쉽고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앞서 이 사건을 조사한 판사들은 아래와 같이 기록했습니다.

"사법부의 권위는 좋은 재판을 통해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얻는 데에 근거하는 것임. 이번 사태는 주권자인 국민이 법관에게 공정한 재판을 할 것을 기대하며 사법부에게 부여한 '재판의 독립', '법관의 독립'이라는 헌법적 장치를 사법부 자신이 부인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스스로 그 존재의 근거를 붕괴시킨 것이라고 할 것임.

국민의 신뢰를 다시 얻기 위한 출발은 잘못에 대한 깊은 반성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함. 이번 사태로 드러난 의혹을 남김없이 국민에게 밝히고 가혹한 질책과 비판이 있더라도 낮은 자세로 받아들이며 깊은 반성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국민이 소망하는 법원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외에는 사법부가 국민의 용서와 신뢰를 얻기는 어려울 것임.

이러한 점에서 이 보고서는 무엇보다 과거의 잘못을 되돌아보는 기록이어야 하고, 앞으로 이러한 사태가 다시 재발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법부 구성원 모두가 공감하고 공유하는 기록이어야 함. 앞으로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적어도 법관 모두가 이러한 참회에 동참하여야 하고, 미래를 위한 지혜를 모아야 하는 것임." (2018.5.25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 조사보고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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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검사님 생각을 강요하지 마십시오”…‘사법농단’ 재판 판사 증인의 분노
    • 입력 2019-09-10 15:29:50
    • 수정2019-09-10 15:54:07
    취재K
"아, 저는 전혀 그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아니, 저한테 생각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증인석에 앉은 판사에게선 내내 억울함과 일종의 분노가 읽혔습니다. 오늘(10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건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박성준 서울고등법원 판사(31기·전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심의관)의 이야기입니다.

증인의 목소리가 유독 높아진 건, 그가 2015년 2월 작성한 "국정원 선거개입 (원세훈) 사건 항소심 선고 보고" 문건을 두고 검사가 질문하기 시작할 때부터였습니다.

앞서 서울고등법원은 2015년 2월 9일, '국정원 대선개입' 사건으로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습니다. 이에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기조실장은 행정처 사법지원심의관이던 박성준 판사에게 "1, 2심 판결문을 분석해 상고심에서 예상되는 핵심 쟁점과 그에 대한 의견 등을 정리해 보고하라"는 취지로 지시했습니다.

이에 박성준 판사는 바로 다음 날인 2월 10일, "국정원 선거 개입 (원세훈) 사건 항소심 선고 보고" 문건을 임종헌 기조실장에게 보고했습니다. 이 문건은 이후 법원행정처장과 양승태 대법원장에게까지 보고됐고, 한편으로는 대법원 수석·선임재판연구관을 통해 이 '원세훈 사건'의 상고심 사건 검토를 담당하는 신현일 대법원 재판연구관에게까지 전달된 걸로 조사됐습니다. '사법농단' 사건을 수사하던 검찰은 당시 상고법원 신설을 추진하던 법원행정처가 "'원세훈 사건' 상고심을 최대한 신속히 진행하고, 결론에 재고의 여지가 있으면 조속히 선고해 청와대의 불만 및 오해를 최소화할 목적으로" 이런 쟁점 보고서를 대법원 재판연구관실에 전달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검찰이 이 문건에서 직접적으로 문제 삼은 내용을 모아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 이 사건에서 국정원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가 확정되면 국가기관이 선거에 개입하였다는 비난(원세훈에 대한 비난) 뿐만 아니라, 선거 자체가 불공정한 사유가 개입하였다는 폭발력을 가질 수 있음
대법원의 구성이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갖게 된다는 논란도 불러일으킬 수 있음
▣ 이 사건 파일의 증거능력 인정 여부가 절대적인 핵심 쟁점일 듯
지논 파일과 시큐리티 파일로 인정되는 사실관계는 너무나도 구체적임
● 그러한 구체적인 사실관계 (항소심에 적시된 사실관계)를 단순히 '전제법리'만으로 선거운동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하기는 쉽지 않아 보임


검찰은 특정 사건에 대한 법원행정처 심의관의 '사견'이 담긴 문건이, 해당 사건을 '직접' 담당하는 대법원 재판연구관에게 전달된 것은 위법하다는 입장입니다. 이 문건의 내용이 재판연구관에게 영향을 끼쳐 예단을 형성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결국 법관의 재판상 독립을 침해했다는 겁니다. 검사는 증인으로 나온 문건 작성 당사자에게 이 문제를 추궁했습니다.

- 검사: 이 보고서가 넘어가면, 사법행정 사무를 담당하는 행정처 지휘부까지 보고된 보고서가 넘어가면, 재판연구관에게 사건에 대해 예단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그런 문제점이 없습니까?

그러자 박성준 판사는 곧장 강한 어조로 반박했습니다.

- 증인: 아, 저는 전혀 그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거는 한마디로 말해서 그냥 제 사견이나 쟁점이...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 한쪽 방향을 설명한 게 아니고요.

박 판사는 그러면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대법원 특별조사단의 보고서에도 "사실 전혀 동의할 수 없다"라고 말했습니다.

앞서 대법원 특별조사단은 지난해 5월 낸 조사보고서에서, 박성준 판사가 쓴 문건에 대해 "(대법원) 보고연구관이 사법행정담당자가 작성한 문건을 검토보고서 작성에 참조한다는 것은 사법행정 담당자가 가지고 있던 사건에 관한 지식 내지 시각이 소송 외적인 통로를 통해 유입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실제 영향을 미쳤는지 여부를 떠나 부적절함"이라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박 판사는 특히 다른 '사법 농단' 의혹 문건이 넘어갔다면 예단을 심어줬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 보고서가 "어딜 봐서" 그렇냐는 비교 화법을 쓰기도 했습니다.

- 증인: 특조단 보고서가 그런 식으로 나와서 전 사실 전혀 동의할 수 없지만, 이게 무슨 예를 들어서 제가 뭐 다른 분들의 보고서를 언급해서 굉장히 죄송하지만. 기각이 아니라 각하가 되어야 한다, 또는 이렇게 하면 헌재에 불리할 수 있다. 이런 보고서가 만약 재판연구관에게 넘어갔으면 그건 사전 예단이라 할 수 있겠지만 제 보고서는 어딜 봐서. 이거 증거능력 날려야한다... 뭐. 그렇게 보고 싶은 분은 그렇게 볼 수 있지만. 재판연구관이 그렇게 볼 거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아서 예단이라고 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단호한 증인. 공소사실을 입증해야 하는 검사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물었습니다.

- 검사: 하나만 보충하면, 이 보고서는 지금 신현일 재판연구관 입장에서도 보고서 받아봤을 때 대법원장까지 보고된 보고서라는 거 충분히 알 수 있었을 거고, 그렇다 한다면 보고서에 이 사건의 '심각성'이라든지, '대법원이 정치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이런 내용이 포함돼 있으면, 그 내용 자체만 하더라도 검토하는 연구관에게 영향을 일부는 미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러나 판사 증인은 어처구니없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담당 재판연구관은 사건의 심각성과 파급력을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 증인: 그건 당연히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검사는 다소 당황한 듯 보였지만, 곧바로 추궁을 이어갔습니다. 이윽고 증인에게선 "강요하지 말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 검사: 당연히 알아야 되는 거긴 하지만
- 증인: [말 끊으며, 검사와 말 동시에 해서 잘 안들림] 그리고 없다고
- 검사: [말 끊으며] 하지만 지휘부에 보고된 보고서라는 것은 차이가 있는 것 아닌가요?
- 증인: [말 끊으며] 아니
- 검사: [말 끊으며] 증인이 업무를 함에 있어서도?
- 증인: 아니, 저한테 생각을 강요하지 마십시오.
- 검사: 생각을 강요하는 게 아니라 여쭤보는 겁니다.
- 증인: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너무나 당연한 내용이라 생각합니다.

판사 증인의 억울함 표출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박성준 판사는 변호인의 반대 신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검찰에서 또는 지금 현재의 소위 말하는 법원행정처 무용론자는 판사가 왜 이런 일 해야하냐고 말한다"면서 "그러나 저는 판사가 아니라 사법행정 담당자로서 근무한 것"이라고 선을 그었습니다. '사법 농단' 사건 이후 재발 방지 방안으로 법원행정처 비(非)법관화가 거론되는 데 우회적으로 회의적인 의견을 표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박 판사는 이어 "사법행정의 효율성과 재판의 독립은 언제든 충돌할 위기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재판독립을 훨씬 우위에 두고 있는 게 법원의 기본이고, 저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작성한 '사법 농단' 의혹 문건들이 재판에 영향을 미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정말 잘못된 것"이라면서, 자신도 법원행정처에 근무했지만 "법관 신분을 가진 사람으로서 재판 독립이 가장 최고의 목표였다"라고 자신의 입장을 길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또 변호인의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제가 한 말씀만 드리겠다"면서 검찰의 공소사실을 "아전인수격의 해석"이라고 하는가 하면, "정말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할 수 없는 공소사실입니다"라고 작심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판사 증인들이 '사법 농단' 사건 재판에 나와 이처럼 억울함과 분노를 표출하는 일은 계속 있어 왔습니다. 지난 6월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재판에 증인으로 나온 홍승면 전 대법원 수석재판연구관이 대표적입니다.

[연관 기사] [판사와 두 개의 양심]⑤ 증인이 재판장 노릇?…검사 말 끊고 꾸짖은 판사

그는 당시 박성준 판사의 '원세훈 사건' 문건에 대한 질문을 받고도 "제가 연구관을 5년 했는데, 이 문장 가지고 예단을 가질 사람은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잘라 말했습니다. 또 '원세훈 사건'의 심각성과 폭발력을 언급한 박성준 판사의 사견은 "초등학생도 다 아는 내용"이라며, 검찰이 그 의미를 의도적으로 부풀리고 있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미 검찰 수사 과정에서 '사법 농단'이라는 부정적 단어로 규정돼 버린 이 사건에 대해, 사건에 연루된 판사 상당수는 과하다, 검찰의 '언론플레이'다, 억울하다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그래서 법정 증인석이라는 공식적인 자리에서나마 그런 입장을 밝히고 싶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해당 판사들이 불법 여부를 떠나 이 사건의 의미를 얼마나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을지를 생각해보고 있자면, 그들의 항변 같은 증언이 아쉽고 안타깝게 느껴집니다. 앞서 이 사건을 조사한 판사들은 아래와 같이 기록했습니다.

"사법부의 권위는 좋은 재판을 통해 국민으로부터 신뢰를 얻는 데에 근거하는 것임. 이번 사태는 주권자인 국민이 법관에게 공정한 재판을 할 것을 기대하며 사법부에게 부여한 '재판의 독립', '법관의 독립'이라는 헌법적 장치를 사법부 자신이 부인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스스로 그 존재의 근거를 붕괴시킨 것이라고 할 것임.

국민의 신뢰를 다시 얻기 위한 출발은 잘못에 대한 깊은 반성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함. 이번 사태로 드러난 의혹을 남김없이 국민에게 밝히고 가혹한 질책과 비판이 있더라도 낮은 자세로 받아들이며 깊은 반성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국민이 소망하는 법원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 외에는 사법부가 국민의 용서와 신뢰를 얻기는 어려울 것임.

이러한 점에서 이 보고서는 무엇보다 과거의 잘못을 되돌아보는 기록이어야 하고, 앞으로 이러한 사태가 다시 재발되지 않기 위해서는 사법부 구성원 모두가 공감하고 공유하는 기록이어야 함. 앞으로 이러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적어도 법관 모두가 이러한 참회에 동참하여야 하고, 미래를 위한 지혜를 모아야 하는 것임." (2018.5.25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 조사보고서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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