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사K]① 20년간 ‘가마우지’ 노릇…‘소재 강국’ 어디로?

입력 2019.09.12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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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출을 많이 해서 이익을 내도 핵심 소재·부품의 의존도가 높아 실익은 일본이 챙긴다"

이른바 '가마우지 경제론'입니다. 가마우지가 잡은 물고기를 삼키지 못하게 목 아랫부분을 묶어놓고 하는 낚시법으로 한국경제를 빗대 조롱한 겁니다.


1980년대 말 일본 경제 평론가 고무로 나오키가 <한국의 붕괴>라는 책에서 처음 사용했는데 1999년 오마에 겐이치라는 일본 기업인이 이 가마우지 경제론을 언론에 기고하면서 다시 알려졌습니다.

2000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이 발언을 접하고 특별대책을 주문합니다. 산업자원부 장관부터 국장, 과장, 서기관까지 이어지는 총동원령이 내려졌고 2001년 부품소재통합연구단이 출범하는 계기가 됩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대일 무역적자를 줄이고 기술 의존에서 탈피해 독립을 이룰 것, 부품소재 강소기업 300개와 대형 전문기업을 육성해 소재 부품 분야의 글로벌 공급 기지화를 달성할 것 등을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많이 들어본 말 같지 않으신가요? 18년 전 옛일임에도 낯설지가 않습니다. 바로 올여름 일본의 수출규제 여파로 정부가 내놓은 대응방안에도 대동소이한 대책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2001년 펼쳐졌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지시로 본격적인 부품·소재 육성책이 시작된 겁니다. 물론 사정은 여의치 않았습니다. 한국 경제를 가마우지라 조롱한 일본 기업인들에게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자존심을 굽혀가며 투자를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국가적으로 부품 소재 산업 육성에 적극적이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2001년부터 시작해 2009년 2013년 2016년까지 정부는 1차에서 4차까지 부품소재 기본계획을 내놓습니다. 2016년 내놓은 마지막 기본계획에는 2025년까지 첨단 신소재 100대 기술을 개발하겠다는 청사진까지 밝혔습니다.

하지만 2019년 7월, 원천 소재를 앞세운 일본의 수출규제 공격 한 방에 우리 경제는 그야말로 휘청이고 있습니다. 왜?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2013년까지 유지됐던 부품소재 기본계획은 왜 소재부품 기본계획으로 이름이 바뀌었을까요? 일본의 경제 공격으로 노출된 대한민국 소재 산업의 민낯. KBS 탐사보도부는 지난 20년의 소재 개발을 둘러싼 명암을 추적했습니다.

■가마우지 경제의 시작... '대일 무역 적자' 심화

한국이 아무리 수출을 많이 해도 실익은 일본이 챙긴다는 이른바 '가마우지 경제론'. 실제로 우리나라가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한 1965년부터 지난해까지 대일 무역적자 누적액이 6천46억 달러, 우리 돈으로 708조 원에 달합니다. 내용을 살펴봤더니 1994년 처음 천만 달러를 넘어선 대일 무역적자액은 2004년 2천만 달러, 불과 4년 뒤인 2008년에는 3천만 달러를 넘어서며 가파른 증가세를 보입니다.


무역 적자액이 가파르게 증가했던 시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의 수출 경쟁력이 크게 강화된 시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대일 무역 적자액이 2천만 달러를 넘어선 지난 2004년,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디스플레이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달성합니다. 하지만 이 디스플레이를 만들 때 들어가는 소재의 국내 조달률은 지난해 기준으로 30%, 장비는 70%에 불과합니다. 핵심 소재라고 할 만한 디스플레이 필름과 점착 소재 등 핵심 소재는 아직 자체 조달을 논하지 못할 정도로 적은 수준입니다. 결국, 이렇게 소재 부품을 사다가 완제품을 만들어 파는 구조는 일본에 물고기를 잡아 바치는 가마우지 신세와 다르지 않습니다.

부품·소재에서 벌어진 적자가 대일 무역 적자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통계로도 잘 나타납니다. 지난 2015년 142억 달러였던 대 일본 소재 부품 무역 적자는 2016년 146억 달러, 2017년 160억 달러, 2018년 160억 달러를 기록했고 전체 대일 무역적자액 283억 달러의 57%나 됐습니다.

■일본 기업 유치하겠다던 '부품·소재 전용공단'...절반이 '텅텅'

대일 무역 적자는 지난 2008년 처음으로 300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이듬해 1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일본 아소 다로 총리와 정상회담 자리에서 "구미 등 몇 곳을 부품소재 산업 공단으로 지정하였으며 일본기업들이 원활하게 한국에 진출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 할 것입니다"고 공언합니다. 이렇게 해서 전북 익산과 부산, 경남 창원 등 전국 4곳에 외국인 전용 부품소재 공단이 들어섭니다. 당시 조성 원가만 1,500억 원이 들어간 사업이었습니다.


2009년 지식경제부는 전북 익산의 부품소재 공단에 외국 기업 15곳을 유치했다며 대대적인 홍보에 나섭니다. 이로부터 10년이 흐른 지금, 상황은 어떨까요.

취재진은 전북 익산 부품소재공단을 찾아가 봤습니다. 전체 부지 33만 제곱미터 가운데 사용하고 있는 부지는 절반가량. 자동차 부품과 알루미늄 재활용 업체 등 3곳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업체 관계자는 "부품소재 공단이라고 하면 기업을 키우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임대료를 저렴하게 해주는 것 말고는 특화된 지원이 거의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경북 구미의 부품소재 공단의 사정은 조금 더 나았는데요. 공단 대부분은 부품 업체로 차 있었지만 원천기술이라고 할 만한 재료, 즉 소재 업체는 단 한 곳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부품소재 공단의 현주소를 확인하기 위해 지식경제부와 관리 기관인 한국산업단지공단에 문의해봤지만 정리된 자료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정부의 관심에서 멀어졌다는 방증이기도 할 겁니다. 2009년 조성 당시 지식경제부는 전국 부품·소재 공단에 외국 기업 62곳을 유치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현재 이 공단들에 입주해 있는 기업은 14곳에 불과합니다.

■부품·소재 특별법 19년...문제의식은 대동소이

대일 적자를 해소하고자 김대중 정부가 부품소재 특별법을 만든 때가 2001년. 올해로 19년 째입니다. 2016년까지 부품소재 기본계획 1~4차가 발표됐는데요. 기본 계획마다 등장하는 문제의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2001년 1차 기본계획에서는 우리 부품·소재 산업의 문제점으로 '핵심 기술 수준 부족, 수요기업의 사용기피' 등이 지적됐습니다. 10년이 지난 2009년 2차 기본계획에서는 '핵심기술 지원 부족, 수요 기업과의 연계 부족'이라며 단어만 바뀌어 또 등장합니다. 2013년 3차 기본계획에서도 첨단소재 경쟁력은 여전한 문제점으로 지적됩니다.


그동안 부품 산업 육성에 치중했던 정책 중심이 한때 소재 산업으로 옮겨간 적도 있습니다. 2013년 제3차 기본계획부터인데 대일 무역 역조의 근본원인으로 소재 경쟁력이 지목된 겁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소재는 여전히 찬밥 신세였습니다. 소재 산업에 대한 국가 연구개발비는 전체의 3.92%에 불과했고 소재에 집중하겠다는 청사진에 비해 예산은 민망할 수준이었습니다.


2016년 마지막으로 나온 기본계획에서도 핵심 소재의 기술 경쟁력은 다시 문제점으로 지적됐고 일본의 수출규제로 인한 올해 정부 대책에도 낮은 기술자립도는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특히 국제 특허를 분석해 연구개발에 나서겠다는 전략은 2009년 2차 계획과 비슷합니다. 연구개발 가상 시뮬레이션을 구축하겠다는 안 역시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해외 기업 M&A 추진, 중소기업 지원 펀드 조성, 실증 테스트베드 마련 등의 대책도 매번 반복됐습니다.


이번에 정부가 내놓은 대응 방안에는 20개 품목은 1년 안에, 80개 품목은 5년 안에 공급 안정화를 하겠다는 계획이 담겼습니다. 또다시 정부가 단기 대책에 치중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따갑습니다. 현대경제연구원 주원 경제연구실장은 "30년을 보고 열심히 투자해도 성과가 날까 말까 한 게 사실 이 분야예요. 그런데 1년 내, 5년 내? 이거는 그렇게 하면 정말 좋겠는데 그 현실 가능성은 아무도 높다고 판단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라고 우려를 표했습니다.

20년 동안 반복돼온 문제점, 문제점이 같으니 대책이 다를 리 없습니다. 2019년 정부가 내놓은 대책에는 지난 20년 동안 기본계획에 들어갔던 내용이 모두 담겼습니다.

■소재 개발 "인내 필요"...정권따라 오락가락

같은 진단과 대책의 반복. 전문가들은 그 원인 중 하나로 '정책의 연속성 결여'를 꼽았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장관이 바뀌면 예산 구조조정 과정에서 기존의 사업들이 축소되거나 때로는 사라지면서 안 그래도 장기간의 노력이 필요한 소재 산업이 커 나갈 틈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KBS 탐사보도부는 지난 2007년 시작된 '핵심소재원천기술개발사업(이하 핵심소재 원천기술 사업)'의 사업 진행 과정을 추적했습니다. 총 3단계에 걸쳐서 최장 10년 동안 핵심소재의 원천기술을 개발하는 데 지원하겠다는 취지로 시작됐습니다. 1단계 과제는 연구소와 대학 중심으로 원천 기술을 개발하는 데 집중하고, 2단계와 3단계에서는 기업이 참여하도록 해 소재 개발과 사업화까지 동시에 잡아내겠다는 복안이었습니다. 당시 산업자원부는 '국내 최초 소재 분야 핵심원천기술 개발 장기 프로그램'이라며 이 사업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07년부터 2010년까지 4년 동안 이 사업으로 지원을 받은 세부과제는 모두 187개, 예산 천8백억여 원이 투입됐습니다.

그러나 1단계 사업의 첫 성과가 나오기 시작한 2011년부터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1단계 사업에서 성공 판정을 받은 과제의 70%가 2단계 지원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듬해인 2012년에는 1단계 성공과제 모두가 2단계로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중단된 과제 81개에 지원된 예산만 1,100억 원이 넘는 규모였습니다.


감사원은 2012년 이 사업에 대한 감사를 벌였습니다. 감사 결과 보고서를 보니, 기존 '핵심소재' 사업 예산의 40%가 신규 사업으로 넘어가면서 사실상 사업이 중단된 것으로 기재돼 있었습니다. 참여정부에서 시작된 사업이 이명박 정부로 넘어가면서 예산 문제로 중단된 것이고, 그 배경엔 새 정부가 시작한 새 사업이 있었던 셈입니다. 5년 넘게 진행되던 사업이 하루아침에 중단됐지만, '타당성 검토' 조차 없었던 게 감사 결과 드러났습니다. 당시 사업 담당 부처였던 지식경제부 관계자에게 이 내용을 아는지 물었지만, 잘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사업이 바뀌었을 뿐 전략적 소재를 선택적으로 지원하는 부분은 언제든 전술적으로 바뀔 수 있다"면서 "소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다"고 말했습니다.

■소재 산업 발전 필요조건="정권 리스크 없애야"


'핵심소재 원천기술 사업'은 정권이 다시 바뀐 이후에야 다시 재개됐습니다. 지난 2013년부터 5년 동안 모두 110건의 신규, 계속 과제에 지원이 이어졌지만, 해마다 새롭게 지원된 과제 건수를 보니 들쑥날쑥했습니다. 흥미로운 건, 대통령이 '1단계 성공과제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 필요성'을 언급한 해에는 지원 과제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안정성'이나 '연속성'은 떨어진다는 간접증거로 보입니다.

정만기 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장관이나 정권이 바뀔 때에는 특히 더 예산 구조조정을 하면서 장기적으로 개발해야 하는 R&D가 중간에 삭제되기도 하고 금액이 줄기도 했다"며 "과거에 투입된 예산들이 낭비되는 현상도 상당히 흔히 있는 일 중의 하나였다"고 설명했습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소재 개발은 기본적으로 기술개발에만 10년이 걸리고, 상용화에도 최소 5년은 걸린다"면서 "정부 부처 내에서의 뚜렷한 주체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일본의 수출 규제에서 비롯된 지금의 부품 소재 산업 강조 분위기를 우려했습니다. 냄비처럼 들끓었다가 몇 년 뒤 상황이 바뀌면서 다시 사그라질 것 아니냐는 겁니다. 지금 정부가 내놓는 정책들이 다시 재편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지적하는 전문가도 적지 않았습니다. 소재 분야는 연구개발에서 상용화로 넘어가는 단계를 '죽음의 계곡'으로 일컬을 만큼 인내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른바 '정권 리스크'를 없애지 않는다면, 10년 뒤 우리는 다시 지금과 같은 진단과 대책을 내놓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KBS 탐사보도부 박현 기자(why@kbs.co.kr)
김효신 기자(shiny33@kbs.co.kr)
최준혁 기자(chun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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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9-12 09:00:56
    탐사K
"수출을 많이 해서 이익을 내도 핵심 소재·부품의 의존도가 높아 실익은 일본이 챙긴다"

이른바 '가마우지 경제론'입니다. 가마우지가 잡은 물고기를 삼키지 못하게 목 아랫부분을 묶어놓고 하는 낚시법으로 한국경제를 빗대 조롱한 겁니다.


1980년대 말 일본 경제 평론가 고무로 나오키가 <한국의 붕괴>라는 책에서 처음 사용했는데 1999년 오마에 겐이치라는 일본 기업인이 이 가마우지 경제론을 언론에 기고하면서 다시 알려졌습니다.

2000년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이 발언을 접하고 특별대책을 주문합니다. 산업자원부 장관부터 국장, 과장, 서기관까지 이어지는 총동원령이 내려졌고 2001년 부품소재통합연구단이 출범하는 계기가 됩니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은 대일 무역적자를 줄이고 기술 의존에서 탈피해 독립을 이룰 것, 부품소재 강소기업 300개와 대형 전문기업을 육성해 소재 부품 분야의 글로벌 공급 기지화를 달성할 것 등을 주문했습니다.

그런데 많이 들어본 말 같지 않으신가요? 18년 전 옛일임에도 낯설지가 않습니다. 바로 올여름 일본의 수출규제 여파로 정부가 내놓은 대응방안에도 대동소이한 대책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 2001년 펼쳐졌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지시로 본격적인 부품·소재 육성책이 시작된 겁니다. 물론 사정은 여의치 않았습니다. 한국 경제를 가마우지라 조롱한 일본 기업인들에게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자존심을 굽혀가며 투자를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그만큼 국가적으로 부품 소재 산업 육성에 적극적이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2001년부터 시작해 2009년 2013년 2016년까지 정부는 1차에서 4차까지 부품소재 기본계획을 내놓습니다. 2016년 내놓은 마지막 기본계획에는 2025년까지 첨단 신소재 100대 기술을 개발하겠다는 청사진까지 밝혔습니다.

하지만 2019년 7월, 원천 소재를 앞세운 일본의 수출규제 공격 한 방에 우리 경제는 그야말로 휘청이고 있습니다. 왜?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2013년까지 유지됐던 부품소재 기본계획은 왜 소재부품 기본계획으로 이름이 바뀌었을까요? 일본의 경제 공격으로 노출된 대한민국 소재 산업의 민낯. KBS 탐사보도부는 지난 20년의 소재 개발을 둘러싼 명암을 추적했습니다.

■가마우지 경제의 시작... '대일 무역 적자' 심화

한국이 아무리 수출을 많이 해도 실익은 일본이 챙긴다는 이른바 '가마우지 경제론'. 실제로 우리나라가 일본과 국교를 정상화한 1965년부터 지난해까지 대일 무역적자 누적액이 6천46억 달러, 우리 돈으로 708조 원에 달합니다. 내용을 살펴봤더니 1994년 처음 천만 달러를 넘어선 대일 무역적자액은 2004년 2천만 달러, 불과 4년 뒤인 2008년에는 3천만 달러를 넘어서며 가파른 증가세를 보입니다.


무역 적자액이 가파르게 증가했던 시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나라의 수출 경쟁력이 크게 강화된 시기와 맞닿아 있습니다. 대일 무역 적자액이 2천만 달러를 넘어선 지난 2004년, 우리나라는 처음으로 디스플레이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달성합니다. 하지만 이 디스플레이를 만들 때 들어가는 소재의 국내 조달률은 지난해 기준으로 30%, 장비는 70%에 불과합니다. 핵심 소재라고 할 만한 디스플레이 필름과 점착 소재 등 핵심 소재는 아직 자체 조달을 논하지 못할 정도로 적은 수준입니다. 결국, 이렇게 소재 부품을 사다가 완제품을 만들어 파는 구조는 일본에 물고기를 잡아 바치는 가마우지 신세와 다르지 않습니다.

부품·소재에서 벌어진 적자가 대일 무역 적자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은 통계로도 잘 나타납니다. 지난 2015년 142억 달러였던 대 일본 소재 부품 무역 적자는 2016년 146억 달러, 2017년 160억 달러, 2018년 160억 달러를 기록했고 전체 대일 무역적자액 283억 달러의 57%나 됐습니다.

■일본 기업 유치하겠다던 '부품·소재 전용공단'...절반이 '텅텅'

대일 무역 적자는 지난 2008년 처음으로 300억 달러를 돌파했습니다. 이듬해 1월 이명박 당시 대통령은 일본 아소 다로 총리와 정상회담 자리에서 "구미 등 몇 곳을 부품소재 산업 공단으로 지정하였으며 일본기업들이 원활하게 한국에 진출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 할 것입니다"고 공언합니다. 이렇게 해서 전북 익산과 부산, 경남 창원 등 전국 4곳에 외국인 전용 부품소재 공단이 들어섭니다. 당시 조성 원가만 1,500억 원이 들어간 사업이었습니다.


2009년 지식경제부는 전북 익산의 부품소재 공단에 외국 기업 15곳을 유치했다며 대대적인 홍보에 나섭니다. 이로부터 10년이 흐른 지금, 상황은 어떨까요.

취재진은 전북 익산 부품소재공단을 찾아가 봤습니다. 전체 부지 33만 제곱미터 가운데 사용하고 있는 부지는 절반가량. 자동차 부품과 알루미늄 재활용 업체 등 3곳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업체 관계자는 "부품소재 공단이라고 하면 기업을 키우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임대료를 저렴하게 해주는 것 말고는 특화된 지원이 거의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경북 구미의 부품소재 공단의 사정은 조금 더 나았는데요. 공단 대부분은 부품 업체로 차 있었지만 원천기술이라고 할 만한 재료, 즉 소재 업체는 단 한 곳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부품소재 공단의 현주소를 확인하기 위해 지식경제부와 관리 기관인 한국산업단지공단에 문의해봤지만 정리된 자료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만큼 정부의 관심에서 멀어졌다는 방증이기도 할 겁니다. 2009년 조성 당시 지식경제부는 전국 부품·소재 공단에 외국 기업 62곳을 유치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현재 이 공단들에 입주해 있는 기업은 14곳에 불과합니다.

■부품·소재 특별법 19년...문제의식은 대동소이

대일 적자를 해소하고자 김대중 정부가 부품소재 특별법을 만든 때가 2001년. 올해로 19년 째입니다. 2016년까지 부품소재 기본계획 1~4차가 발표됐는데요. 기본 계획마다 등장하는 문제의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습니다. 2001년 1차 기본계획에서는 우리 부품·소재 산업의 문제점으로 '핵심 기술 수준 부족, 수요기업의 사용기피' 등이 지적됐습니다. 10년이 지난 2009년 2차 기본계획에서는 '핵심기술 지원 부족, 수요 기업과의 연계 부족'이라며 단어만 바뀌어 또 등장합니다. 2013년 3차 기본계획에서도 첨단소재 경쟁력은 여전한 문제점으로 지적됩니다.


그동안 부품 산업 육성에 치중했던 정책 중심이 한때 소재 산업으로 옮겨간 적도 있습니다. 2013년 제3차 기본계획부터인데 대일 무역 역조의 근본원인으로 소재 경쟁력이 지목된 겁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소재는 여전히 찬밥 신세였습니다. 소재 산업에 대한 국가 연구개발비는 전체의 3.92%에 불과했고 소재에 집중하겠다는 청사진에 비해 예산은 민망할 수준이었습니다.


2016년 마지막으로 나온 기본계획에서도 핵심 소재의 기술 경쟁력은 다시 문제점으로 지적됐고 일본의 수출규제로 인한 올해 정부 대책에도 낮은 기술자립도는 어김없이 등장합니다. 특히 국제 특허를 분석해 연구개발에 나서겠다는 전략은 2009년 2차 계획과 비슷합니다. 연구개발 가상 시뮬레이션을 구축하겠다는 안 역시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해외 기업 M&A 추진, 중소기업 지원 펀드 조성, 실증 테스트베드 마련 등의 대책도 매번 반복됐습니다.


이번에 정부가 내놓은 대응 방안에는 20개 품목은 1년 안에, 80개 품목은 5년 안에 공급 안정화를 하겠다는 계획이 담겼습니다. 또다시 정부가 단기 대책에 치중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이 따갑습니다. 현대경제연구원 주원 경제연구실장은 "30년을 보고 열심히 투자해도 성과가 날까 말까 한 게 사실 이 분야예요. 그런데 1년 내, 5년 내? 이거는 그렇게 하면 정말 좋겠는데 그 현실 가능성은 아무도 높다고 판단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라고 우려를 표했습니다.

20년 동안 반복돼온 문제점, 문제점이 같으니 대책이 다를 리 없습니다. 2019년 정부가 내놓은 대책에는 지난 20년 동안 기본계획에 들어갔던 내용이 모두 담겼습니다.

■소재 개발 "인내 필요"...정권따라 오락가락

같은 진단과 대책의 반복. 전문가들은 그 원인 중 하나로 '정책의 연속성 결여'를 꼽았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장관이 바뀌면 예산 구조조정 과정에서 기존의 사업들이 축소되거나 때로는 사라지면서 안 그래도 장기간의 노력이 필요한 소재 산업이 커 나갈 틈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KBS 탐사보도부는 지난 2007년 시작된 '핵심소재원천기술개발사업(이하 핵심소재 원천기술 사업)'의 사업 진행 과정을 추적했습니다. 총 3단계에 걸쳐서 최장 10년 동안 핵심소재의 원천기술을 개발하는 데 지원하겠다는 취지로 시작됐습니다. 1단계 과제는 연구소와 대학 중심으로 원천 기술을 개발하는 데 집중하고, 2단계와 3단계에서는 기업이 참여하도록 해 소재 개발과 사업화까지 동시에 잡아내겠다는 복안이었습니다. 당시 산업자원부는 '국내 최초 소재 분야 핵심원천기술 개발 장기 프로그램'이라며 이 사업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습니다. 지난 2007년부터 2010년까지 4년 동안 이 사업으로 지원을 받은 세부과제는 모두 187개, 예산 천8백억여 원이 투입됐습니다.

그러나 1단계 사업의 첫 성과가 나오기 시작한 2011년부터 문제가 불거졌습니다. 1단계 사업에서 성공 판정을 받은 과제의 70%가 2단계 지원을 받지 못한 것입니다. 이듬해인 2012년에는 1단계 성공과제 모두가 2단계로 넘어가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중단된 과제 81개에 지원된 예산만 1,100억 원이 넘는 규모였습니다.


감사원은 2012년 이 사업에 대한 감사를 벌였습니다. 감사 결과 보고서를 보니, 기존 '핵심소재' 사업 예산의 40%가 신규 사업으로 넘어가면서 사실상 사업이 중단된 것으로 기재돼 있었습니다. 참여정부에서 시작된 사업이 이명박 정부로 넘어가면서 예산 문제로 중단된 것이고, 그 배경엔 새 정부가 시작한 새 사업이 있었던 셈입니다. 5년 넘게 진행되던 사업이 하루아침에 중단됐지만, '타당성 검토' 조차 없었던 게 감사 결과 드러났습니다. 당시 사업 담당 부처였던 지식경제부 관계자에게 이 내용을 아는지 물었지만, 잘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다만, "사업이 바뀌었을 뿐 전략적 소재를 선택적으로 지원하는 부분은 언제든 전술적으로 바뀔 수 있다"면서 "소재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다"고 말했습니다.

■소재 산업 발전 필요조건="정권 리스크 없애야"


'핵심소재 원천기술 사업'은 정권이 다시 바뀐 이후에야 다시 재개됐습니다. 지난 2013년부터 5년 동안 모두 110건의 신규, 계속 과제에 지원이 이어졌지만, 해마다 새롭게 지원된 과제 건수를 보니 들쑥날쑥했습니다. 흥미로운 건, 대통령이 '1단계 성공과제에 대한 지속적인 지원 필요성'을 언급한 해에는 지원 과제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다는 점입니다. 그만큼 '안정성'이나 '연속성'은 떨어진다는 간접증거로 보입니다.

정만기 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장관이나 정권이 바뀔 때에는 특히 더 예산 구조조정을 하면서 장기적으로 개발해야 하는 R&D가 중간에 삭제되기도 하고 금액이 줄기도 했다"며 "과거에 투입된 예산들이 낭비되는 현상도 상당히 흔히 있는 일 중의 하나였다"고 설명했습니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소재 개발은 기본적으로 기술개발에만 10년이 걸리고, 상용화에도 최소 5년은 걸린다"면서 "정부 부처 내에서의 뚜렷한 주체성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일본의 수출 규제에서 비롯된 지금의 부품 소재 산업 강조 분위기를 우려했습니다. 냄비처럼 들끓었다가 몇 년 뒤 상황이 바뀌면서 다시 사그라질 것 아니냐는 겁니다. 지금 정부가 내놓는 정책들이 다시 재편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지적하는 전문가도 적지 않았습니다. 소재 분야는 연구개발에서 상용화로 넘어가는 단계를 '죽음의 계곡'으로 일컬을 만큼 인내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른바 '정권 리스크'를 없애지 않는다면, 10년 뒤 우리는 다시 지금과 같은 진단과 대책을 내놓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KBS 탐사보도부 박현 기자(why@kbs.co.kr)
김효신 기자(shiny33@kbs.co.kr)
최준혁 기자(chun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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