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추석에 실수를?”…감옥 갇힌 공무원

입력 2019.09.13 (08:02) 수정 2019.09.13 (19:08)

읽어주기 기능은 크롬기반의
브라우저에서만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고유 명절인 추석. 조선 시대에도 추석은 왕이 직접 제사를 챙기는 주요 행사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당시 추석 전후 바삐 움직였던 조선왕조 모습을 찾아봤다.

추석 때 조선 시대 왕실은 바빴다. 임금뿐 아니라 상왕과 세자까지 총출동해 제사를 챙겼다. 상왕은 왕위를 넘기고 물러난 임금을 말한다.

상왕이 추석제(秋夕祭)를 제릉(齊陵)에 행하였다.
- 태종 2년 8월 13일

세자(世子)에게 명하여 인소전(仁昭殿)에 추석(秋夕) 별제(別祭)를 행하도록 하였다.
- 태종 7년 8월 15일

임금이 문소전(文昭殿)에 나아가 추석 제사(秋夕祭祀)를 행하였다.
- 태종 9년 8월 15일


제릉은 조선 태조 정비 신의왕후의 무덤이다. 문소전(인소전)은 조선 태조의 비 신의왕후 한 씨를 모신 사당이다. 임금 삼부자가 나설 정도로 추석은 조선왕조가 중요하게 여긴 국가 명절이었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문소전(文昭殿)에 나아가 추석제(秋夕祭)를 행하는데, 시복(時服) 차림으로 행례하였다.
- 태종 15년 8월 10일


제사를 지낼 때 복장은 시복 차림이었다. 시복은 임금이 정사를 볼 때나 신하가 공무를 행할 때 통상 입는 의복을 가리킨다. 그만큼 경건한 마음으로 추석에 임했다는 얘기다.

조선시대 추석은 풍정과 참배가 주요 행사였다. 풍정은 신하들이 임금이나 왕후에게 음식을 풍성하게 차려서 올리는 일을 말한다. 명절을 맞아 신하와 임금이 한자리에 모여 연회를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매년 조선왕실이 풍정을 즐기는 건 아니었다. 나라에 기근이 심해 백성의 굶주림이 예상되면, 일부 임금은 풍정을 금하라고 명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2년 8월 5일조선왕조실록 중종 2년 8월 5일

추석에는 풍정(豐呈) 올리는 것을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 중종 2년 8월 5일


이에 가만히 있을 신하들이 아니다. 오랫동안 풍정을 하지 않아 겸연쩍다며 다시 풍정을 하자고 청하는 신하들에게 임금은 고개를 젓는다.

예조가 아뢰기를,

"진풍정(進豐呈)을 오랫동안 폐지하여 매우 미안합니다. 오는 추석(秋夕)에는 거행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진풍정의 일은 아뢴 뜻으로 자전(慈殿)께 취품했더니 ‘지금은 재변(災變)이 잇달아 일어나고 백성들이 굶주리는 때인데 홀로 잔치를 받기가 미안하다.’ 하시기에 따르지 않는다."

하였다.

- 명종 3년 8월 6일


백성이 굶주리는데 나 혼자 잔치를 벌일 수는 없다는 임금의 말이다. 임금에게 추석은 민심을 헤아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임금이 능(陵)을 참배하는 것도 추석의 중요한 행사였다. 임금의 행차에는 막대한 인력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설사 임금이라도 추석에 마음대로 참배를 결정하진 않았다.

삼공(三公)에게 전교하기를,

"올해는 경기(京畿)가 흉년들어 민중들을 수고롭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전에도 추석 명절에는 능(陵)을 참배했으니 이는 곧 큰 일이다. 선릉(宣陵)은 비록 9월이라 하더라도 참배하러 간 때가 있었던 것은 길이 편리하고 가까와 군마(軍馬)가 가더라도 벼와 곡식을 밟은 것이 없으므로 그런 것이니, 비록 이달이라도 참배하러 갈 수 있다. 한강을 건너는 모든 기구 때문에 곤란하다 하더라도, 내가 즉위한 이후에 단지 한 번 창릉(昌陵) 을 참배했고 다시 참배하지 못했다. 이번에 창릉·경릉(敬陵)도 참배하고 싶은데, 경(卿)들의 뜻에는 어떠한가?"

하매, 삼공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능 참배하는 일은 폐할 수 없습니다. 선릉 및 창릉·경릉은 모두 제일 가깝습니다. 선릉은 비록 한강을 건너는 기구가 있어야 하지만, 지금 유위군(留衛軍)이 많이 있으므로 수리하도록 한다면, 백성의 힘을 사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밭곡식이 다 여물지 못했으니, 그믐 무렵까지 기다렸다가 거둥하심이 어떠리까?"

하니 ‘알았다.’ 전교하였다.

- 중종 20년 9월 6일


중종은 이번 추석에 선릉과 창릉, 경릉을 모두 가보고 싶다며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는다. 선릉은 성종과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이고, 창릉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무덤, 경릉은 덕종과 소혜왕후의 무덤이다. 겨우 신하들의 허락을 얻은 중종은 추석을 앞두고 설레였을까.

추석은 경건한 행사였다. 비록 실수라도 용납되지 않았다.

문소전(文昭殿) 추석(秋夕) 제향에 대축(大祝) 윤은보(尹殷輔)가 제4실(第四室)의 신위판(神位板)을 받들다가 발이 헛놓이는 바람에 땅에 떨어져서 독(櫝)이 깨져 금이 갔다. 왕이 이르기를,

"신(神)이 놀라서 동요되었을 것인데, 고유제(告由祭)를 드리는 예가 있지 않느냐? 예관으로 하여금 고례를 상고하여 행하게 하라."

하고, 윤은보를 의금부(義禁府)에 하옥시켜 국문하게 하였다.

- 연산 3년 8월 15일


제사 때 축문을 읽는 대축(大祝)이 신위판을 떨어뜨려 파손한 사건이다. 신위판은 제사 중 지방을 붙여 놓는 비품이다.

발을 헛디딘 실수였지만 연산군은 화를 냈다. 윤은보는 결국 의금부 감옥에 갇혀 심문을 당한 끝에 곤장을 맞고 유배까지 가게 된다.

비록 실수는 했지만 윤은보는 나름 인재였던 듯싶다. 유배 이듬해 바로 풀려나온 그는 병조판서를 거쳐 훗날 우의정과 영의정을 역임하며 조선왕조의 한 축이 된다.

■ 제보하기
▷ 카카오톡 : 'KBS제보' 검색, 채널 추가
▷ 전화 : 02-781-1234, 4444
▷ 이메일 : kbs1234@kbs.co.kr
▷ 유튜브, 네이버, 카카오에서도 KBS뉴스를 구독해주세요!


  • “감히 추석에 실수를?”…감옥 갇힌 공무원
    • 입력 2019-09-13 08:02:46
    • 수정2019-09-13 19:08:09
    취재K
우리나라 고유 명절인 추석. 조선 시대에도 추석은 왕이 직접 제사를 챙기는 주요 행사였다. 조선왕조실록에서 당시 추석 전후 바삐 움직였던 조선왕조 모습을 찾아봤다.

추석 때 조선 시대 왕실은 바빴다. 임금뿐 아니라 상왕과 세자까지 총출동해 제사를 챙겼다. 상왕은 왕위를 넘기고 물러난 임금을 말한다.

상왕이 추석제(秋夕祭)를 제릉(齊陵)에 행하였다.
- 태종 2년 8월 13일

세자(世子)에게 명하여 인소전(仁昭殿)에 추석(秋夕) 별제(別祭)를 행하도록 하였다.
- 태종 7년 8월 15일

임금이 문소전(文昭殿)에 나아가 추석 제사(秋夕祭祀)를 행하였다.
- 태종 9년 8월 15일


제릉은 조선 태조 정비 신의왕후의 무덤이다. 문소전(인소전)은 조선 태조의 비 신의왕후 한 씨를 모신 사당이다. 임금 삼부자가 나설 정도로 추석은 조선왕조가 중요하게 여긴 국가 명절이었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문소전(文昭殿)에 나아가 추석제(秋夕祭)를 행하는데, 시복(時服) 차림으로 행례하였다.
- 태종 15년 8월 10일


제사를 지낼 때 복장은 시복 차림이었다. 시복은 임금이 정사를 볼 때나 신하가 공무를 행할 때 통상 입는 의복을 가리킨다. 그만큼 경건한 마음으로 추석에 임했다는 얘기다.

조선시대 추석은 풍정과 참배가 주요 행사였다. 풍정은 신하들이 임금이나 왕후에게 음식을 풍성하게 차려서 올리는 일을 말한다. 명절을 맞아 신하와 임금이 한자리에 모여 연회를 즐기는 것이다.

그러나 매년 조선왕실이 풍정을 즐기는 건 아니었다. 나라에 기근이 심해 백성의 굶주림이 예상되면, 일부 임금은 풍정을 금하라고 명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 중종 2년 8월 5일
추석에는 풍정(豐呈) 올리는 것을 중지하라고 명하였다.
- 중종 2년 8월 5일


이에 가만히 있을 신하들이 아니다. 오랫동안 풍정을 하지 않아 겸연쩍다며 다시 풍정을 하자고 청하는 신하들에게 임금은 고개를 젓는다.

예조가 아뢰기를,

"진풍정(進豐呈)을 오랫동안 폐지하여 매우 미안합니다. 오는 추석(秋夕)에는 거행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진풍정의 일은 아뢴 뜻으로 자전(慈殿)께 취품했더니 ‘지금은 재변(災變)이 잇달아 일어나고 백성들이 굶주리는 때인데 홀로 잔치를 받기가 미안하다.’ 하시기에 따르지 않는다."

하였다.

- 명종 3년 8월 6일


백성이 굶주리는데 나 혼자 잔치를 벌일 수는 없다는 임금의 말이다. 임금에게 추석은 민심을 헤아리는 시간이기도 했다.

임금이 능(陵)을 참배하는 것도 추석의 중요한 행사였다. 임금의 행차에는 막대한 인력이 필요하다. 이 때문에 설사 임금이라도 추석에 마음대로 참배를 결정하진 않았다.

삼공(三公)에게 전교하기를,

"올해는 경기(京畿)가 흉년들어 민중들을 수고롭게 할 수 없다. 그러나 이전에도 추석 명절에는 능(陵)을 참배했으니 이는 곧 큰 일이다. 선릉(宣陵)은 비록 9월이라 하더라도 참배하러 간 때가 있었던 것은 길이 편리하고 가까와 군마(軍馬)가 가더라도 벼와 곡식을 밟은 것이 없으므로 그런 것이니, 비록 이달이라도 참배하러 갈 수 있다. 한강을 건너는 모든 기구 때문에 곤란하다 하더라도, 내가 즉위한 이후에 단지 한 번 창릉(昌陵) 을 참배했고 다시 참배하지 못했다. 이번에 창릉·경릉(敬陵)도 참배하고 싶은데, 경(卿)들의 뜻에는 어떠한가?"

하매, 삼공이 의논하여 아뢰기를,

"능 참배하는 일은 폐할 수 없습니다. 선릉 및 창릉·경릉은 모두 제일 가깝습니다. 선릉은 비록 한강을 건너는 기구가 있어야 하지만, 지금 유위군(留衛軍)이 많이 있으므로 수리하도록 한다면, 백성의 힘을 사용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밭곡식이 다 여물지 못했으니, 그믐 무렵까지 기다렸다가 거둥하심이 어떠리까?"

하니 ‘알았다.’ 전교하였다.

- 중종 20년 9월 6일


중종은 이번 추석에 선릉과 창릉, 경릉을 모두 가보고 싶다며 신하들에게 의견을 묻는다. 선릉은 성종과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 윤씨의 무덤이고, 창릉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의 무덤, 경릉은 덕종과 소혜왕후의 무덤이다. 겨우 신하들의 허락을 얻은 중종은 추석을 앞두고 설레였을까.

추석은 경건한 행사였다. 비록 실수라도 용납되지 않았다.

문소전(文昭殿) 추석(秋夕) 제향에 대축(大祝) 윤은보(尹殷輔)가 제4실(第四室)의 신위판(神位板)을 받들다가 발이 헛놓이는 바람에 땅에 떨어져서 독(櫝)이 깨져 금이 갔다. 왕이 이르기를,

"신(神)이 놀라서 동요되었을 것인데, 고유제(告由祭)를 드리는 예가 있지 않느냐? 예관으로 하여금 고례를 상고하여 행하게 하라."

하고, 윤은보를 의금부(義禁府)에 하옥시켜 국문하게 하였다.

- 연산 3년 8월 15일


제사 때 축문을 읽는 대축(大祝)이 신위판을 떨어뜨려 파손한 사건이다. 신위판은 제사 중 지방을 붙여 놓는 비품이다.

발을 헛디딘 실수였지만 연산군은 화를 냈다. 윤은보는 결국 의금부 감옥에 갇혀 심문을 당한 끝에 곤장을 맞고 유배까지 가게 된다.

비록 실수는 했지만 윤은보는 나름 인재였던 듯싶다. 유배 이듬해 바로 풀려나온 그는 병조판서를 거쳐 훗날 우의정과 영의정을 역임하며 조선왕조의 한 축이 된다.

이 기사가 좋으셨다면

오늘의 핫 클릭

실시간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뉴스

이 기사에 대한 의견을 남겨주세요.

수신료 수신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