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 상대 ‘택배 알선’ 주의보…하룻밤 새 수백만 원 뜯긴다

입력 2019.09.14 (20:30) 수정 2019.09.15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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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소개해 준다더니 오히려 위약금 물어내라네요. 너무 억울합니다."

65살 김 모 할아버지는 15년간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했습니다. 무거운 전선을 나르고 전기 시설을 설치하고...몸은 고됐지만 일할 수 있어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이 들고 기력이 떨어지자 몇 달 전부터 일감이 뚝 끊겼습니다.

그래도 처음 한 달은 견딜 만했습니다. 점점 통장 잔고가 바닥났고, 세 식구 생계가 막막해졌습니다.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인 집세 내기도 버거웠고, 무엇보다 난치병을 앓고 있는 아들 걱정에 밤잠을 설쳤습니다. 백방으로 일자리를 수소문해 봤지만 고령 노인을 써 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한 인터넷 광고를 보고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월수입 4-5백만 원. 나이 제한 없음.'

나이 관계 없이 고수입의 택배 일을 알선해 준다는 광고였습니다. 당장 전화를 걸었습니다. 나이를 이야기했더니 일단 면접을 보자고 했습니다. 다음날 만난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초보 경우, 하루에 5kg 미만짜리 70~150개 정도 배달하면 됩니다. 오후 5-6시면 끝낼 수 있고, 현장에서 바로 퇴근 가능합니다."

밤 늦게까지 하면 자신의 체력으로 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였습니다.


"처음에는 회사 차를 대여해 주는 줄 알았어요. 나중에 보니까 내가 차를 사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지입이 되는 거죠."

택배 일을 하려면 개인 트럭이 필요한데, 당장 할아버지에겐 차를 장만할 돈이 없었습니다. 직원은 차는 물론 대출도 알아봐줄테니 서류에 서명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장의 서류를 내밀었고,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수십 차례 사인을 했다고 합니다. 잠깐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도 들었지만, 일이 없어질 거란 두려움에 멈출 수 없었습니다. 다른 직원 동행 하에 근처 구청에 가 관련 개인 서류를 떼다 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1천 5백만 원짜리 차량 할부 구입 계약이 이뤄졌고, 그날 저녁 중고 트럭이 집으로 배달됐습니다.


다음날, 할아버지는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택배 회사 현장 소장을 만났습니다. 소장은 대뜸,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보자마자 체력이 견딜 수 있겠냐. 그렇게 물어보더라고요. 힘들 것 같다는 암시를 준 거죠."

그러면서, 양파, 감자, 고구마 같은 농산물이 5kg 미만짜리는 거의 없다, 이런 걸 하루에 200개에서 250개 배달해야 한다. 하루에 4~5층짜리 계단을 90회 내지 100회 이상 오르내려야 되는데. 빈 몸으로라도 그렇게 오르고 내릴 수 있냐고 했습니다. 게다가 그날 밤 11시 59분까지 물량 처리를 못하면 거기서 나오는 피해를 모두 책임져야 한다고도요.

고민 끝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겠다고 결론지은 할아버지는 알선업체에 연락해 처음 설명과 다르니 트럭을 도로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위약금 4백여만 원을 물어내라는 거였습니다.

"차량 가액의 30%를 변상을 해야 된다는 거죠. 나중에 알고 보니까 계약서에 그 조항이 있긴 있더라고요. 내가 자세히 못 읽어 봐서요. 계약서도 안 받아왔었어요."

아무리 항의해 봐도 막무가내였습니다. 본인이 서명한 것이니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만 반복했습니다. 금융감독원과 경찰 등에 호소해 봤지만 역시 뾰족한 수가 없다니 속이 타 들어갈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슷한 피해 사례가 한 둘이 아닙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과 인터넷 카페 등에는 비슷한 피해를 호소하는 글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취재를 하다 만난 관련 업계 관계자는 이렇게 털어놨습니다. 고수입을 올릴 수 있는 일자리를 소개해 준다며 허위·과장 광고를 낸 뒤, 이를 보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차량이 필요하다고 계약하게 해 차량 판매 수수료를 챙기는 게 영업 수법이란 겁니다. 택배 업체 직원이라도 만나게 해 주는 경우는 양반, 차일피일 미루며 연결조차 안 해 주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다 보니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들 몫입니다.


취재가 시작되자 금융감독원은 현행법상 문제 삼기 어렵다고 답했습니다. 중고차 판매 관련 금융 기관의 과다 대출 여부를 들여다볼 책임이 있지 않냐 물었더니, 중고 트럭에 대한 기준은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앞으로 대출 관련 문제 등이 없는지 점검해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경찰, 공정거래위원회, 국토부 등 관련 기관의 공조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현행법상 문제될 게 없다고 뒷짐 지고 있을 게 아니라, 어려운 서민들이 피해 보지 않도록 사각지대를 메워 나가는 것이 감독 기관들의 존재 이유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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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인 상대 ‘택배 알선’ 주의보…하룻밤 새 수백만 원 뜯긴다
    • 입력 2019-09-14 20:30:11
    • 수정2019-09-15 09:18:46
    취재K
"일자리 소개해 준다더니 오히려 위약금 물어내라네요. 너무 억울합니다."

65살 김 모 할아버지는 15년간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으로 일했습니다. 무거운 전선을 나르고 전기 시설을 설치하고...몸은 고됐지만 일할 수 있어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나이 들고 기력이 떨어지자 몇 달 전부터 일감이 뚝 끊겼습니다.

그래도 처음 한 달은 견딜 만했습니다. 점점 통장 잔고가 바닥났고, 세 식구 생계가 막막해졌습니다.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30만 원인 집세 내기도 버거웠고, 무엇보다 난치병을 앓고 있는 아들 걱정에 밤잠을 설쳤습니다. 백방으로 일자리를 수소문해 봤지만 고령 노인을 써 주는 곳은 없었습니다. 그러다 한 인터넷 광고를 보고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월수입 4-5백만 원. 나이 제한 없음.'

나이 관계 없이 고수입의 택배 일을 알선해 준다는 광고였습니다. 당장 전화를 걸었습니다. 나이를 이야기했더니 일단 면접을 보자고 했습니다. 다음날 만난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초보 경우, 하루에 5kg 미만짜리 70~150개 정도 배달하면 됩니다. 오후 5-6시면 끝낼 수 있고, 현장에서 바로 퇴근 가능합니다."

밤 늦게까지 하면 자신의 체력으로 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였습니다.


"처음에는 회사 차를 대여해 주는 줄 알았어요. 나중에 보니까 내가 차를 사게 한 거예요. 그러니까 지입이 되는 거죠."

택배 일을 하려면 개인 트럭이 필요한데, 당장 할아버지에겐 차를 장만할 돈이 없었습니다. 직원은 차는 물론 대출도 알아봐줄테니 서류에 서명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여러 장의 서류를 내밀었고,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수십 차례 사인을 했다고 합니다. 잠깐 '이러면 안 되는데' 생각도 들었지만, 일이 없어질 거란 두려움에 멈출 수 없었습니다. 다른 직원 동행 하에 근처 구청에 가 관련 개인 서류를 떼다 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렇게 1천 5백만 원짜리 차량 할부 구입 계약이 이뤄졌고, 그날 저녁 중고 트럭이 집으로 배달됐습니다.


다음날, 할아버지는 일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택배 회사 현장 소장을 만났습니다. 소장은 대뜸,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보자마자 체력이 견딜 수 있겠냐. 그렇게 물어보더라고요. 힘들 것 같다는 암시를 준 거죠."

그러면서, 양파, 감자, 고구마 같은 농산물이 5kg 미만짜리는 거의 없다, 이런 걸 하루에 200개에서 250개 배달해야 한다. 하루에 4~5층짜리 계단을 90회 내지 100회 이상 오르내려야 되는데. 빈 몸으로라도 그렇게 오르고 내릴 수 있냐고 했습니다. 게다가 그날 밤 11시 59분까지 물량 처리를 못하면 거기서 나오는 피해를 모두 책임져야 한다고도요.

고민 끝에 도저히 감당할 수 없겠다고 결론지은 할아버지는 알선업체에 연락해 처음 설명과 다르니 트럭을 도로 가져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위약금 4백여만 원을 물어내라는 거였습니다.

"차량 가액의 30%를 변상을 해야 된다는 거죠. 나중에 알고 보니까 계약서에 그 조항이 있긴 있더라고요. 내가 자세히 못 읽어 봐서요. 계약서도 안 받아왔었어요."

아무리 항의해 봐도 막무가내였습니다. 본인이 서명한 것이니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될 게 없다는 입장만 반복했습니다. 금융감독원과 경찰 등에 호소해 봤지만 역시 뾰족한 수가 없다니 속이 타 들어갈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비슷한 피해 사례가 한 둘이 아닙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과 인터넷 카페 등에는 비슷한 피해를 호소하는 글들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취재를 하다 만난 관련 업계 관계자는 이렇게 털어놨습니다. 고수입을 올릴 수 있는 일자리를 소개해 준다며 허위·과장 광고를 낸 뒤, 이를 보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차량이 필요하다고 계약하게 해 차량 판매 수수료를 챙기는 게 영업 수법이란 겁니다. 택배 업체 직원이라도 만나게 해 주는 경우는 양반, 차일피일 미루며 연결조차 안 해 주는 경우가 태반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교묘하게 법망을 빠져나가다 보니 피해는 고스란히 서민들 몫입니다.


취재가 시작되자 금융감독원은 현행법상 문제 삼기 어렵다고 답했습니다. 중고차 판매 관련 금융 기관의 과다 대출 여부를 들여다볼 책임이 있지 않냐 물었더니, 중고 트럭에 대한 기준은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앞으로 대출 관련 문제 등이 없는지 점검해 나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경찰, 공정거래위원회, 국토부 등 관련 기관의 공조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현행법상 문제될 게 없다고 뒷짐 지고 있을 게 아니라, 어려운 서민들이 피해 보지 않도록 사각지대를 메워 나가는 것이 감독 기관들의 존재 이유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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