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리포트] 말 못할 더위, 말 못탈 도쿄…‘새벽 올림픽’ 되나

입력 2019.09.16 (14:33) 수정 2019.09.16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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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 선수(오른쪽)가 탄 말이 ‘한 발 도움닫기’로 장애물을 넘은 반면, 일본 선수(왼쪽)의 말은 ‘두 발 도움닫기’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NHK)

"두 번째 장애물을 넘기 직전에 갑자기 말(馬)이 이상 증세를 보였어요.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 이 정도까지일 줄은…"

지난달 일본 도쿄에선 종합마술 사전대회가 열렸습니다. 세계 랭킹 15위이자 일본 1위인 오이와 요시아키(大岩義明) 선수. 올림픽 4회 연속 출전을 노리는 베테랑이지만, 그는 '8자' 모양으로 꺾어지는 장애물 2개를 직선 방향으로 공략하지 못했습니다. 기록 단축에 치명적인 실수였죠. 승마는 유일하게 동물과 함께하는 올림픽 종목. 30도가 넘는 무더위에 마구간에 에어컨까지 설치했지만, 소용이 없었던 겁니다. 관계자들 입에선 "사람은 그렇다 치고 말은 어쩌느냐"는 탄식이 나왔습니다.

죽을 맛이기는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철인'조차 손을 들 정도였죠. 지난달 15일 도쿄 오다이바 마린파크에서 열린 트라이애슬론(철인 3종) 사전 경기. 수영(1.5㎞)과 사이클(40㎞), 러닝 구간(10㎞)을 소화해야 하지만, 32도가 넘는 폭염에 급하게 러닝 코스를 5㎞로 단축했습니다. 그런데도 프랑스 여성 선수는 열사병 증세를 보여 병원 치료까지 받았습니다. 대회 관계자는 "오전 7시 30분인 출발 시각을 더 앞당기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미 남녀 마라톤은 오전 6시, 경보(남자 50km)는 그 보다 앞선 5시 30분으로 스타트 시간을 확정한 상황. 유례없는 '새벽 올림픽'입니다.

13일 도쿄 우미노모리 수상 경기장에서 제설기에서 나온 인공눈에 대회 관계자들이 신기해하고 있다. (KBS 뉴스 캡처)13일 도쿄 우미노모리 수상 경기장에서 제설기에서 나온 인공눈에 대회 관계자들이 신기해하고 있다. (KBS 뉴스 캡처)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가 연일 쏟아내는 무더위 대책 눈물겹습니다. 지난 13일 도쿄 '우미노모리' 수상 경기장. 카누 사전 경기를 앞두고 별안간 하늘에서 눈발이 휘날렸습니다. 스키장에서 볼 법안 제설기로 약 5분간, 눈 1톤을 뿌린 겁니다. 바람 탓에 눈발이 엉뚱한 방향으로 날리거나, 관중석을 오가던 일본 기자는 미끄러져 '꽈당' 넘어지기까지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실험 결과도 '실패'. 눈을 날리기 전후 기온 변화는 없었습니다. 현장을 취재한 외신 기자들은 실소를 금치 못한 반면, 대회 관계자들은 무척 심각한 표정이었습니다.

[연관기사] ‘인공눈’ 마저 무용지물…시름만 쌓이는 도쿄올림픽

일본 하키 국가대표 선수들이 입을 유니폼. 특수 섬유를 이용해 선수들이 흘린 땀을 빠르게 기화시키는 방식으로 체온 상승을 억제하는 효과를 낸다. (사진 출처 : NHK) 일본 하키 국가대표 선수들이 입을 유니폼. 특수 섬유를 이용해 선수들이 흘린 땀을 빠르게 기화시키는 방식으로 체온 상승을 억제하는 효과를 낸다. (사진 출처 : NHK)

이뿐만이 아닙니다. 조직위의 무더위 대책은 한마디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자"입니다. 보습력이 강한 야외 인공 잔디 위에서 치러지는 하키의 경우 체온 상승을 최대한 억제하는 신소재 유니폼을 선보였습니다. 어제(15일) 도쿄에서 열린 '마라톤 그랜드 챔피언십'(MGC)에선 골인 지점에 일사병 증상을 보이는 선수들을 위해 얼음이 들어간 '냉탕'을 설치했습니다. 심지어 도쿄도는 마라톤 코스 도로에 있는 가로수 이파리를 크게 키워서 직사광선을 좀 덜어보겠다는 기상천외한 방법까지 내놓기도 했습니다.

관중들을 위해선 '라스트 마일'(Last Mile)이란 이름의 프로젝트가 가동 중입니다. '라스트 마일'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정류장에서 내린 후, 혹은 차를 주차하고 목적지까지 걸어가는 '마지막 구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구간에는 수증기를 분사하는 '미스트 타워'를 설치하고, 음료수병과 양산을 가진 경우만 경기장에 입장이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또 관중이 열사병에 걸리지 않도록 경기장 반입 짐 검사는 냉풍기가 설치된 텐트 안에서 진행한다는 대책 등이 망라돼 있습니다.


"이 시기는 맑고 온화한 날씨로 선수들이 최고의 몸 상태, 극대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상적인 기후이다."

2020년 도쿄올림픽 유치위원회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제출한 자료에 담긴 내용입니다. IOC가 하계 올림픽 개최 도시를 모집하면서 대회 기간을 '7월 15일부터 8월 31일'까지로 요구한 데 대한 답변이었죠. 그런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요.

1964년 제18회 도쿄올림픽은 10월 10일부터 24일, 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열렸습니다. 가을은 미국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 유럽 축구 등이 한창입니다. IOC는 TV 중계권료와 시청률 하락을 피하려는 '비즈니스 전략'을 내세웠고, 이에 일본은 여름 한복판의 맹위를 '이상적인 기후'로 미화하며 결국 개최권을 얻어냈습니다.


내년 도쿄올림픽은 7월 24일부터 8월 9일입니다. 민간 기상업체 '웨더뉴스'가 지난해 이 기간 도쿄와 과거 올림픽 대회 개최 도시의 평균 기온·습도를 비교한 자료가 있습니다. 도쿄는 평균 기온 27.8도로, 베이징(2008년 올림픽) 27.7도를 제친 1위였습니다. 평균 습도 역시 도쿄 79.8%로, 베이징 75.5%보다 높았습니다. 역시 '금메달'입니다.

도쿄올림픽 기간은 '이상적인 기후'가 아닌 '이상한 기후' 아래 치러질 것으로 보입니다. 불 보듯 뻔한 찜통더위뿐만 아니라 장마와 태풍, 교통 체증, 그리고 무엇보다 후쿠시마 방사능 안전 우려까지 더해질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참가자들에겐 '지구촌 축제'가 아닌 '고통과 인내의 계절'로 기억될 가능성이 작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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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09-16 14:33:08
    • 수정2019-09-16 17:04:03
    특파원 리포트
▲ 외국 선수(오른쪽)가 탄 말이 ‘한 발 도움닫기’로 장애물을 넘은 반면, 일본 선수(왼쪽)의 말은 ‘두 발 도움닫기’를 하고 있다. (사진 출처 : NHK)

"두 번째 장애물을 넘기 직전에 갑자기 말(馬)이 이상 증세를 보였어요.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 이 정도까지일 줄은…"

지난달 일본 도쿄에선 종합마술 사전대회가 열렸습니다. 세계 랭킹 15위이자 일본 1위인 오이와 요시아키(大岩義明) 선수. 올림픽 4회 연속 출전을 노리는 베테랑이지만, 그는 '8자' 모양으로 꺾어지는 장애물 2개를 직선 방향으로 공략하지 못했습니다. 기록 단축에 치명적인 실수였죠. 승마는 유일하게 동물과 함께하는 올림픽 종목. 30도가 넘는 무더위에 마구간에 에어컨까지 설치했지만, 소용이 없었던 겁니다. 관계자들 입에선 "사람은 그렇다 치고 말은 어쩌느냐"는 탄식이 나왔습니다.

죽을 맛이기는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철인'조차 손을 들 정도였죠. 지난달 15일 도쿄 오다이바 마린파크에서 열린 트라이애슬론(철인 3종) 사전 경기. 수영(1.5㎞)과 사이클(40㎞), 러닝 구간(10㎞)을 소화해야 하지만, 32도가 넘는 폭염에 급하게 러닝 코스를 5㎞로 단축했습니다. 그런데도 프랑스 여성 선수는 열사병 증세를 보여 병원 치료까지 받았습니다. 대회 관계자는 "오전 7시 30분인 출발 시각을 더 앞당기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미 남녀 마라톤은 오전 6시, 경보(남자 50km)는 그 보다 앞선 5시 30분으로 스타트 시간을 확정한 상황. 유례없는 '새벽 올림픽'입니다.

13일 도쿄 우미노모리 수상 경기장에서 제설기에서 나온 인공눈에 대회 관계자들이 신기해하고 있다. (KBS 뉴스 캡처)
도쿄올림픽조직위원회가 연일 쏟아내는 무더위 대책 눈물겹습니다. 지난 13일 도쿄 '우미노모리' 수상 경기장. 카누 사전 경기를 앞두고 별안간 하늘에서 눈발이 휘날렸습니다. 스키장에서 볼 법안 제설기로 약 5분간, 눈 1톤을 뿌린 겁니다. 바람 탓에 눈발이 엉뚱한 방향으로 날리거나, 관중석을 오가던 일본 기자는 미끄러져 '꽈당' 넘어지기까지 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실험 결과도 '실패'. 눈을 날리기 전후 기온 변화는 없었습니다. 현장을 취재한 외신 기자들은 실소를 금치 못한 반면, 대회 관계자들은 무척 심각한 표정이었습니다.

[연관기사] ‘인공눈’ 마저 무용지물…시름만 쌓이는 도쿄올림픽

일본 하키 국가대표 선수들이 입을 유니폼. 특수 섬유를 이용해 선수들이 흘린 땀을 빠르게 기화시키는 방식으로 체온 상승을 억제하는 효과를 낸다. (사진 출처 : NHK)
이뿐만이 아닙니다. 조직위의 무더위 대책은 한마디로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자"입니다. 보습력이 강한 야외 인공 잔디 위에서 치러지는 하키의 경우 체온 상승을 최대한 억제하는 신소재 유니폼을 선보였습니다. 어제(15일) 도쿄에서 열린 '마라톤 그랜드 챔피언십'(MGC)에선 골인 지점에 일사병 증상을 보이는 선수들을 위해 얼음이 들어간 '냉탕'을 설치했습니다. 심지어 도쿄도는 마라톤 코스 도로에 있는 가로수 이파리를 크게 키워서 직사광선을 좀 덜어보겠다는 기상천외한 방법까지 내놓기도 했습니다.

관중들을 위해선 '라스트 마일'(Last Mile)이란 이름의 프로젝트가 가동 중입니다. '라스트 마일'은 대중교통을 이용해 정류장에서 내린 후, 혹은 차를 주차하고 목적지까지 걸어가는 '마지막 구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구간에는 수증기를 분사하는 '미스트 타워'를 설치하고, 음료수병과 양산을 가진 경우만 경기장에 입장이 가능하도록 하겠다는 겁니다. 또 관중이 열사병에 걸리지 않도록 경기장 반입 짐 검사는 냉풍기가 설치된 텐트 안에서 진행한다는 대책 등이 망라돼 있습니다.


"이 시기는 맑고 온화한 날씨로 선수들이 최고의 몸 상태, 극대치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이상적인 기후이다."

2020년 도쿄올림픽 유치위원회가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제출한 자료에 담긴 내용입니다. IOC가 하계 올림픽 개최 도시를 모집하면서 대회 기간을 '7월 15일부터 8월 31일'까지로 요구한 데 대한 답변이었죠. 그런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요.

1964년 제18회 도쿄올림픽은 10월 10일부터 24일, 88년 제24회 서울올림픽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열렸습니다. 가을은 미국 메이저리그 포스트시즌, 유럽 축구 등이 한창입니다. IOC는 TV 중계권료와 시청률 하락을 피하려는 '비즈니스 전략'을 내세웠고, 이에 일본은 여름 한복판의 맹위를 '이상적인 기후'로 미화하며 결국 개최권을 얻어냈습니다.


내년 도쿄올림픽은 7월 24일부터 8월 9일입니다. 민간 기상업체 '웨더뉴스'가 지난해 이 기간 도쿄와 과거 올림픽 대회 개최 도시의 평균 기온·습도를 비교한 자료가 있습니다. 도쿄는 평균 기온 27.8도로, 베이징(2008년 올림픽) 27.7도를 제친 1위였습니다. 평균 습도 역시 도쿄 79.8%로, 베이징 75.5%보다 높았습니다. 역시 '금메달'입니다.

도쿄올림픽 기간은 '이상적인 기후'가 아닌 '이상한 기후' 아래 치러질 것으로 보입니다. 불 보듯 뻔한 찜통더위뿐만 아니라 장마와 태풍, 교통 체증, 그리고 무엇보다 후쿠시마 방사능 안전 우려까지 더해질 수 있습니다. 이쯤 되면 참가자들에겐 '지구촌 축제'가 아닌 '고통과 인내의 계절'로 기억될 가능성이 작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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