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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홍콩 사태 격화
[특파원리포트] 홍콩 시위대가 영화 ‘1987’을 다시 보는 까닭은
입력 2019.09.19 (07:00) 특파원 리포트
[특파원리포트] 홍콩 시위대가 영화 ‘1987’을 다시 보는 까닭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과 6월 항쟁을 담은 한국 영화 '1987'을 상영한다는 홍콩 시위대의 포스터

17일 오후, 홍콩 시위대가 일정을 공유하는 SNS에 포스터 한 장이 올라왔다. 낯익은 영화의 한 장면이다. 배우 강동원이 연기한 故 이한열 열사가 하늘을 향해 주먹을 쥐며 "군부독재 몰아내자"를 외치고 있다. 포스터 한쪽에는 '쌈써이포(深水埗) 거리 영화 상영회'라고 적혀 있었다.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과 6월 민주 항쟁을 담은 한국 영화 '1987'이 홍콩 거리 한복판에서 상영된다니 때맞춰 현장으로 향했다.

포스터만으로는 시위 주체도 알 수 없었다. 최근 홍콩에선 누구든지 일정과 시위 제목만 SNS에 게시하면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발적, 소규모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쌈써이포역 앞에 준비된 영화 상영 시설은 조촐했다. 변변한 좌석도 없어 선 채로 어깨너머 스크린을 봐야 했다. 하지만 공지한 시간이 되자 검은 옷을 입은 젊은이들뿐 아니라 갓 퇴근한 차림새의 직장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순식간에 관객은 백 명을 훌쩍 넘겼다. 한 참가자는 지금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에 집회 규모가 적당해야 언제든 경찰을 손쉽게 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영화 속 과거 한국 상황, 현재의 홍콩과 닮아"

영화 상영 집회를 제안했다는 덱지 씨는 마이크를 들고, 영화 '1987' 속 한국의 민주화 상황은 지금 홍콩이 처한 상황과 같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1987'을 보면서 홍콩인이 계속 노력해 가면 한국처럼 홍콩도 민주화에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느껴보자고 사람들에게 제안했다. 마스크도 없이 KBS와의 영상 인터뷰에 응한 그녀에게 신분이 노출되는 게 두렵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녀는 단지 검은 옷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경찰에게 구타를 당하거나 체포되는 상황에서 더는 두려울 것은 없다고 말했다.

영화가 시작되고, 평범한 일상을 살던 인물들이 엄혹한 시대를 마주하다 결국 부조리함에
맞서는 장면들이 이어지자 관객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한국의 5.18 민주화 운동을 담은 영화 '택시운전사'는 봤지만, '1987'은 이날 처음 본다는 리오 씨. 그는 '택시운전사'를 봤을 때 중국의 톈안먼 사태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홍콩의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홍콩 시민들이 쌈써이포역 앞에 모여 한국 영화 ‘1987’을 보고 있다홍콩 시민들이 쌈써이포역 앞에 모여 한국 영화 ‘1987’을 보고 있다

"'권력에 저항(逆權)'이 홍콩의 미래를 가져온다"

지난 6월 홍콩 사태 초반, 한 집회에서 여성 참가자가 통기타를 들고나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당시 그녀는 "영화 '변호인', '택시운전사', '1987' 등을 본 홍콩인들은 이 노래를 알 것"이라고 말했었다.

영화 '1987'은 지난해 홍콩에서 '권력에 저항하는 시민들(逆權公民)'이란 부제를 달고 개봉했다. 그에 앞서 '택시운전사'와 '변호인'도 각각 '권력에 저항하는 운전사(逆權司機)', '권력에 저항하는 변호사(逆權大狀)'라는 이름으로 홍콩인들에게 소개됐었다.

영화 제목을 중국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권력에 맞서는'이란 말이 나란히 붙게 됐다.

송환법 반대로 촉발된 홍콩 사태는 어느새 우산혁명 79일의 기록을 넘어서 100일 넘는 최장기 기록을 세우고 있다. 홍콩 시위대가 '권력에 저항'하는 한국 영화를 찾는 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집권 이후 홍콩에 대한 일국양제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권력에 맞서야 하는' 이유가 더 절박해졌다는 걸 나타내는 게 아닐까.

한국 영화 ‘1987’ ‘택시운전사’ ‘변호인’이 홍콩에서도 상영됐었다.한국 영화 ‘1987’ ‘택시운전사’ ‘변호인’이 홍콩에서도 상영됐었다.
  • [특파원리포트] 홍콩 시위대가 영화 ‘1987’을 다시 보는 까닭은
    • 입력 2019.09.19 (07:00)
    특파원 리포트
[특파원리포트] 홍콩 시위대가 영화 ‘1987’을 다시 보는 까닭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과 6월 항쟁을 담은 한국 영화 '1987'을 상영한다는 홍콩 시위대의 포스터

17일 오후, 홍콩 시위대가 일정을 공유하는 SNS에 포스터 한 장이 올라왔다. 낯익은 영화의 한 장면이다. 배우 강동원이 연기한 故 이한열 열사가 하늘을 향해 주먹을 쥐며 "군부독재 몰아내자"를 외치고 있다. 포스터 한쪽에는 '쌈써이포(深水埗) 거리 영화 상영회'라고 적혀 있었다.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과 6월 민주 항쟁을 담은 한국 영화 '1987'이 홍콩 거리 한복판에서 상영된다니 때맞춰 현장으로 향했다.

포스터만으로는 시위 주체도 알 수 없었다. 최근 홍콩에선 누구든지 일정과 시위 제목만 SNS에 게시하면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자발적, 소규모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쌈써이포역 앞에 준비된 영화 상영 시설은 조촐했다. 변변한 좌석도 없어 선 채로 어깨너머 스크린을 봐야 했다. 하지만 공지한 시간이 되자 검은 옷을 입은 젊은이들뿐 아니라 갓 퇴근한 차림새의 직장인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순식간에 관객은 백 명을 훌쩍 넘겼다. 한 참가자는 지금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 자체가 불법이기 때문에 집회 규모가 적당해야 언제든 경찰을 손쉽게 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영화 속 과거 한국 상황, 현재의 홍콩과 닮아"

영화 상영 집회를 제안했다는 덱지 씨는 마이크를 들고, 영화 '1987' 속 한국의 민주화 상황은 지금 홍콩이 처한 상황과 같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1987'을 보면서 홍콩인이 계속 노력해 가면 한국처럼 홍콩도 민주화에 성공할 수 있다는 걸 느껴보자고 사람들에게 제안했다. 마스크도 없이 KBS와의 영상 인터뷰에 응한 그녀에게 신분이 노출되는 게 두렵지 않으냐고 물었다. 그녀는 단지 검은 옷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도 경찰에게 구타를 당하거나 체포되는 상황에서 더는 두려울 것은 없다고 말했다.

영화가 시작되고, 평범한 일상을 살던 인물들이 엄혹한 시대를 마주하다 결국 부조리함에
맞서는 장면들이 이어지자 관객들은 눈을 떼지 못했다.

한국의 5.18 민주화 운동을 담은 영화 '택시운전사'는 봤지만, '1987'은 이날 처음 본다는 리오 씨. 그는 '택시운전사'를 봤을 때 중국의 톈안먼 사태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홍콩의 상황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홍콩 시민들이 쌈써이포역 앞에 모여 한국 영화 ‘1987’을 보고 있다홍콩 시민들이 쌈써이포역 앞에 모여 한국 영화 ‘1987’을 보고 있다

"'권력에 저항(逆權)'이 홍콩의 미래를 가져온다"

지난 6월 홍콩 사태 초반, 한 집회에서 여성 참가자가 통기타를 들고나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당시 그녀는 "영화 '변호인', '택시운전사', '1987' 등을 본 홍콩인들은 이 노래를 알 것"이라고 말했었다.

영화 '1987'은 지난해 홍콩에서 '권력에 저항하는 시민들(逆權公民)'이란 부제를 달고 개봉했다. 그에 앞서 '택시운전사'와 '변호인'도 각각 '권력에 저항하는 운전사(逆權司機)', '권력에 저항하는 변호사(逆權大狀)'라는 이름으로 홍콩인들에게 소개됐었다.

영화 제목을 중국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의도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으나 '권력에 맞서는'이란 말이 나란히 붙게 됐다.

송환법 반대로 촉발된 홍콩 사태는 어느새 우산혁명 79일의 기록을 넘어서 100일 넘는 최장기 기록을 세우고 있다. 홍콩 시위대가 '권력에 저항'하는 한국 영화를 찾는 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집권 이후 홍콩에 대한 일국양제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권력에 맞서야 하는' 이유가 더 절박해졌다는 걸 나타내는 게 아닐까.

한국 영화 ‘1987’ ‘택시운전사’ ‘변호인’이 홍콩에서도 상영됐었다.한국 영화 ‘1987’ ‘택시운전사’ ‘변호인’이 홍콩에서도 상영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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