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뼈주사로 연명”…서울대 학생식당에선 무슨 일이?

입력 2019.09.19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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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시간을 조금 앞둔 오전 11시 30분. 학생들로 북적여야 할 서울대 학생식당은 한적했습니다. 평소 세 가지 종류의 식단을 제공하던 학생식당에선 한 가지 메뉴만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의 빈자리를 대체 인력으로 급하게 채운 영향이었습니다.

오늘(19일) 학생식당과 카페 등에서 일하는 서울대학교 '생활협동조합' 소속 노동자들이 일손을 내려놓고,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이번 파업은 1989년 이후 30년만입니다. 새 학기를 맞은 학생들로 북적이는 캠퍼스에서 노동자들은 왜 파업에 나섰을까요?

서울대 생활협동조합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면서 한산한 학생식당 모습서울대 생활협동조합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면서 한산한 학생식당 모습

"온갖 관절이 아파 진통제 주사를 달고 살아요"

집회 예정시간을 조금 넘겨 대학 본부 앞에 도착한 노동자들은 구호 외치는 법부터 배웠습니다. 사회자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구호도 잘 외치는 다른 집회 현장과는 달랐습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손팻말을 든 노동자들은 다소 어색해 했지만, 목소리는 단호했습니다. 열악한 노동 환경을 고쳐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마이크를 잡은 8년 차 식당 노동자는 "이곳(생협)에 들어올 때는 꿈도 있었고, 자격증도 따보겠다고 생각했다"면서 "지금은 몸도 아프고, 손가락 마디마디 안 아픈 데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한 남성 조리원은 "한 번에 200인분씩 음식을 준비하다 보니 어깨 근육이 파열됐다"고 털어놨습니다. 노조원들은 "웃으면서 출근하고, 골병들어 퇴사한다" "고된 노동 반복되고, 뼈주사로 연명한다"는 손팻말을 들고 공감을 표했습니다.

서울대 생활협동조합 노동자들이 식당 바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과 좁은 휴게실 (사진제공 : 민주노총 전국대학노동조합 서울대지부)서울대 생활협동조합 노동자들이 식당 바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과 좁은 휴게실 (사진제공 : 민주노총 전국대학노동조합 서울대지부)

실제로 노동자들의 휴게시설이나 근무환경은 열악합니다. 고열에 노출되는 조리 업무 특성상 배식이 끝난 후 꼭 샤워를 해야 하는데, 주방에 간이 커튼을 달고 씻는다고 합니다. 여성 노동자가 남성 샤워실에서 씻는 경우도 있습니다.

식당에 설치된 샤워커튼 (사진제공 : 민주노총 전국대학노동조합 서울대지부)식당에 설치된 샤워커튼 (사진제공 : 민주노총 전국대학노동조합 서울대지부)

폭염이 이어지는 여름에 에어컨도 없는 10㎡(3평)짜리 휴게실에 8명이 누워서 쉽니다. 새벽부터 밥을 하느라 밀려오는 피로를 그냥 식당 바닥에 누워 쪽잠을 자며 해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생협 카페에서 일하는 또 다른 노동자는 "남들은 분위기 있는 데서 근무해서 힘이 안 들거라고 생각한다"면서 "하지만 쉬는 시간도 거의 없고 점심도 30분씩 잘라서 먹고 숨 돌릴 틈도 없이 일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탈의실도 계단 밑에 있어서 여름이면 곰팡이 냄새도 나고 숨쉬기 힘들 정도로 환경 안 좋다"고 설명했습니다.

노동자들이 이렇게 열악한 곳에서 일하고 받는 수당은 법정 최저임금 수준입니다. 노조가 공개한 자료를 보면 현재 생협 노동자들의 1호봉 기본급은 171만 5천 원입니다. 물론 세전입니다. 올해 한 달 근로시간을 주휴 시간을 포함한 209시간으로 가정해 2018년도 최저임금 월 환산액은 157만 3770원입니다. 이들은 주말근무를 하고 특근수당 등을 받아야 세후로 따졌을 때 겨우 최저임금이 넘어간다고 주장합니다.

노조는 비슷한 조건에서 일하는 노동자랑 비교해도 임금이 낮다고 말합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음식점 및 주점업에 종사하는 상용근로자 1인당 평균임금이 233만 원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에 비해, 노동 강도는 매우 높은 상황인데 인원 충원조차 어렵다고 노조는 주장했습니다.

생협 측이 경영난을 이유로 이 같은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서면서 결국 노사 협상은 결렬됐고, 노동자들은 오늘 하루 파업에 나섰습니다.


"노동자 쥐어짜서 학생들에게 싼 밥을 주는 건 옳지 않아"

서울대학교 학생들도 곧바로 성명을 내고 연대의 뜻을 밝혔습니다. 총학생회는 이번 파업이 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으로 인한 것이며 생협 측의 상황 해결을 촉구한다는 내용의 안내문을 공식 페이지에 게시했습니다.

서울대 학생단체인 '비정규직 없는 서울대 만들기 공동행동(비서공)'도 파업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들은 "생협 노동자들이 열악한 처우를 개선해달라고 호소해왔으나 누구도 파업 전까지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며 "같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이런 노동 실태가 유지되고 있었던 것에 대해 부끄러움과 참담함을 느낀다"고 밝혔습니다.

오늘 파업 현장에 나온 윤민정 비서공 대표는 "여기 계시는 노동자를 쥐어짜서 학생들에게 싼 밥을 제공하는 건 옳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학교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노조 측도 학생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총학생회와 협의를 거쳐 주변에 식당이 거의 없는 농대 식당은 정상적으로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하루 파업에 나섰던 노동자들은 내일 다시 업무에 복귀합니다. 그러면서도 사측이 양보안을 내놓지 않으면, 다음 주 초반에 다시 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예고했습니다.

지난달 9일 서울대에선 열악한 휴게실에서 쉬던 60대 청소노동자가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노동부가 실태조사에 나섰고, 학교 측은 '청소 노동자' 휴게실 개선 방안을 내놨습니다. 여기서 전기시설, 식당 근로자 등 또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대책은 빠졌습니다.

서울대 학생들과 시민사회 단체는 '서울대 비정규직 노동자'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15,000여 명의 서명을 대학 본부에 전달했습니다. 이에 대해 서울대 측은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답변을 내놨습니다. 이 말이 형식적인 답변인지 진정성 있는 답변인지는 앞으로 서울대가 내놓을 대책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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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뼈주사로 연명”…서울대 학생식당에선 무슨 일이?
    • 입력 2019-09-19 15:15:58
    취재K
점심시간을 조금 앞둔 오전 11시 30분. 학생들로 북적여야 할 서울대 학생식당은 한적했습니다. 평소 세 가지 종류의 식단을 제공하던 학생식당에선 한 가지 메뉴만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의 빈자리를 대체 인력으로 급하게 채운 영향이었습니다.

오늘(19일) 학생식당과 카페 등에서 일하는 서울대학교 '생활협동조합' 소속 노동자들이 일손을 내려놓고, 파업에 돌입했습니다. 이번 파업은 1989년 이후 30년만입니다. 새 학기를 맞은 학생들로 북적이는 캠퍼스에서 노동자들은 왜 파업에 나섰을까요?

서울대 생활협동조합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면서 한산한 학생식당 모습
"온갖 관절이 아파 진통제 주사를 달고 살아요"

집회 예정시간을 조금 넘겨 대학 본부 앞에 도착한 노동자들은 구호 외치는 법부터 배웠습니다. 사회자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구호도 잘 외치는 다른 집회 현장과는 달랐습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손팻말을 든 노동자들은 다소 어색해 했지만, 목소리는 단호했습니다. 열악한 노동 환경을 고쳐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마이크를 잡은 8년 차 식당 노동자는 "이곳(생협)에 들어올 때는 꿈도 있었고, 자격증도 따보겠다고 생각했다"면서 "지금은 몸도 아프고, 손가락 마디마디 안 아픈 데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한 남성 조리원은 "한 번에 200인분씩 음식을 준비하다 보니 어깨 근육이 파열됐다"고 털어놨습니다. 노조원들은 "웃으면서 출근하고, 골병들어 퇴사한다" "고된 노동 반복되고, 뼈주사로 연명한다"는 손팻말을 들고 공감을 표했습니다.

서울대 생활협동조합 노동자들이 식당 바닥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과 좁은 휴게실 (사진제공 : 민주노총 전국대학노동조합 서울대지부)
실제로 노동자들의 휴게시설이나 근무환경은 열악합니다. 고열에 노출되는 조리 업무 특성상 배식이 끝난 후 꼭 샤워를 해야 하는데, 주방에 간이 커튼을 달고 씻는다고 합니다. 여성 노동자가 남성 샤워실에서 씻는 경우도 있습니다.

식당에 설치된 샤워커튼 (사진제공 : 민주노총 전국대학노동조합 서울대지부)
폭염이 이어지는 여름에 에어컨도 없는 10㎡(3평)짜리 휴게실에 8명이 누워서 쉽니다. 새벽부터 밥을 하느라 밀려오는 피로를 그냥 식당 바닥에 누워 쪽잠을 자며 해결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생협 카페에서 일하는 또 다른 노동자는 "남들은 분위기 있는 데서 근무해서 힘이 안 들거라고 생각한다"면서 "하지만 쉬는 시간도 거의 없고 점심도 30분씩 잘라서 먹고 숨 돌릴 틈도 없이 일을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탈의실도 계단 밑에 있어서 여름이면 곰팡이 냄새도 나고 숨쉬기 힘들 정도로 환경 안 좋다"고 설명했습니다.

노동자들이 이렇게 열악한 곳에서 일하고 받는 수당은 법정 최저임금 수준입니다. 노조가 공개한 자료를 보면 현재 생협 노동자들의 1호봉 기본급은 171만 5천 원입니다. 물론 세전입니다. 올해 한 달 근로시간을 주휴 시간을 포함한 209시간으로 가정해 2018년도 최저임금 월 환산액은 157만 3770원입니다. 이들은 주말근무를 하고 특근수당 등을 받아야 세후로 따졌을 때 겨우 최저임금이 넘어간다고 주장합니다.

노조는 비슷한 조건에서 일하는 노동자랑 비교해도 임금이 낮다고 말합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음식점 및 주점업에 종사하는 상용근로자 1인당 평균임금이 233만 원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에 비해, 노동 강도는 매우 높은 상황인데 인원 충원조차 어렵다고 노조는 주장했습니다.

생협 측이 경영난을 이유로 이 같은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맞서면서 결국 노사 협상은 결렬됐고, 노동자들은 오늘 하루 파업에 나섰습니다.


"노동자 쥐어짜서 학생들에게 싼 밥을 주는 건 옳지 않아"

서울대학교 학생들도 곧바로 성명을 내고 연대의 뜻을 밝혔습니다. 총학생회는 이번 파업이 최저임금 수준의 저임금으로 인한 것이며 생협 측의 상황 해결을 촉구한다는 내용의 안내문을 공식 페이지에 게시했습니다.

서울대 학생단체인 '비정규직 없는 서울대 만들기 공동행동(비서공)'도 파업을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들은 "생협 노동자들이 열악한 처우를 개선해달라고 호소해왔으나 누구도 파업 전까지는 귀 기울이지 않았다"며 "같은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이런 노동 실태가 유지되고 있었던 것에 대해 부끄러움과 참담함을 느낀다"고 밝혔습니다.

오늘 파업 현장에 나온 윤민정 비서공 대표는 "여기 계시는 노동자를 쥐어짜서 학생들에게 싼 밥을 제공하는 건 옳지 않다"고 지적하면서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학교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노조 측도 학생들의 불편을 최소화하기 위해 총학생회와 협의를 거쳐 주변에 식당이 거의 없는 농대 식당은 정상적으로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오늘 하루 파업에 나섰던 노동자들은 내일 다시 업무에 복귀합니다. 그러면서도 사측이 양보안을 내놓지 않으면, 다음 주 초반에 다시 파업에 돌입하겠다고 예고했습니다.

지난달 9일 서울대에선 열악한 휴게실에서 쉬던 60대 청소노동자가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노동부가 실태조사에 나섰고, 학교 측은 '청소 노동자' 휴게실 개선 방안을 내놨습니다. 여기서 전기시설, 식당 근로자 등 또 다른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대책은 빠졌습니다.

서울대 학생들과 시민사회 단체는 '서울대 비정규직 노동자'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15,000여 명의 서명을 대학 본부에 전달했습니다. 이에 대해 서울대 측은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답변을 내놨습니다. 이 말이 형식적인 답변인지 진정성 있는 답변인지는 앞으로 서울대가 내놓을 대책으로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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